[기고] 김문숙의 춤인생: 신무용과 전통춤을 넘나든 20세기 중후반의 춤서사
[기고] 김문숙의 춤인생: 신무용과 전통춤을 넘나든 20세기 중후반의 춤서사
  • 황희정
  • 승인 2023.02.13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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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숙 선생과 조택원 선생(사진=
김문숙 선생과 조택원 선생(사진=대한민국 예술원)

[더프리뷰=서울] 황희정 무용사학자 = 한국무용계의 원로 김문숙 선생이 2023년 1월 27일 별세했다. 향년 94세. 김문숙은 1928년 서울 효자동에서 2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과 피난생활, 현대의 눈부신 경제발전기라는 격동의 세월을 거치며 말년까지 무용계에 투신한 신무용 2세대이다.

신무용의 거목(巨木) 조택원의 부인으로 유명하지만, 그의 무용인생은 조택원 이전부터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오히려 결혼 후에는 “남의 영역을 침범하면 안 된다. 각자의 영역을 보호해줘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스스로 활동을 조심하였다. 같이 활동했던 신무용 세대들이 무용단장, 대학교수로 자리잡는 동안 김문숙은 그들에게 박수를 보내며, 평생 자신의 영역을 넓히지 않았다. 그런 탓에 국가 차원의 해외파견 문화사절단, 국립무용단 창립 멤버로 많은 활약을 했음에도 그에 대한 관심은 동시대 다른 무용가들에 비해 미미한 편이다. 하지만 그 겸손함 속에서 그의 춤에 대한 진정성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교육무용연구소 1기생 입소

김문숙은 소학교부터 배화여고까지는 학예회 등에서 무용활동을 간헐적으로 하였다. 본인은 어렸을 때 공부에 관심이 없었고 잘 하지도 못 했다고 했지만, 대학 장학생까지 했으니 당시로선 상당한 인텔리 축에 들었을 것이다. 1946년 중앙여자전문대(중앙대학교의 전신) 국문과에 입학하고, 대학 2학년 신입생 환영회 때 <초립동>을 추어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한 바 있다. 이후 교육과로 전과하였다.

'선녀무' (사진=대한민국 예술원)
'선녀무' (사진=대한민국 예술원)

당시 최승희와 조택원이 견인한 신무용은 새로운 예술사상에 경도된 지식인들을 무용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지식인들의 유입으로 무용은 외국무용을 중심으로 신체적 기술뿐 아니라 아카데믹한 성격도 강조되었다. 어느 날 대학연극 활동을 하고 있던 김문숙이 무대에서 춤추는 장면을 보았던 함귀봉은 그를 자신의 무용연구소로 초대하였다. 김문숙을 발탁한 함귀봉교육무용연구소(조선무용교육연구소의 전신)는 대학 학력 이상의 교육생을 선발하여 실기와 이론을 모두 갖춘 무용인을 길러내는 데 매진하였다. 함귀봉무용연구소는 실기뿐 아니라 신흥무용기본, 창작법, 해부학, 조명론, 미학 등 이론과목도 개설하였으니 대학 무용학과 상당의 커리큘럼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장고무' (사진=대한민국 예술원)
'장고무' (사진=대한민국 예술원)

김문숙은 지도강사였던 함귀봉(소장, 현대무용) 문철민(무용평론가) 조택원 김보남 장추화에게서 3년 가량 여러 종류의 무용수업을 받았다. 현대무용·발레 등 외국무용을 배우는 한편 예술, 창작, 무용에 대한 개념과 지식을 쌓았다. 당시 신무용가들은 외국무용에서부터 무용인생을 시작하였고 김문숙 역시 그러하였다. 함귀봉무용연구소에서 김문숙은 무용의 깊이를 깨닫고 춤에 대한 욕심을 키우기 시작했다.

모던댄스뿐만 아니라 박성옥·김천흥 한영숙에게 전통춤 사사

함귀봉무용연구소에서 배우던 시기에 미래의 남편 조택원도 만나게 되었다. 김문숙은 그의 몸 선과 인물, 동작에서 격이 다른 무용가임을 느꼈다. “저 사람은 화장실도 안 가는 남자인가 보다.”라고 회고할 정도로 그의 이미지는 세련되고 멋있었다. 하지만 김문숙이 진심으로 반한 것은 조택원의 외모가 아닌 무용지식이었다. 그는 이제 무용을 시작한 말랑말랑한 소녀의 영혼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그를 통해 이시이 바쿠에 감화되었고, 이렇게 훌륭한 무용가의 스승을 찾아가고 싶었다. 급기야는 이시이 바쿠를 만나려 밀항까지 감행했을 정도이다. 김문숙은 1947년 함귀봉무용발표회에서 <미뉴엣>이라는 작품으로 무용수로 데뷔하였다. 조택원과는 십 수 년이 흐른 뒤 세 번째 마주친 후에 연인으로 발전하여 1962년 결혼하였다.

부산 피난 시절 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도 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고, 무용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김문숙은 한국무용가 박성옥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최승희 반주자로 알려졌는데, 그에게 북을 배우며 장단을 익혔다. 북 기본은 이후 주만영에게 <구고무>를 배우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발레와 현대무용으로 무용을 시작하여 외국무용의 길을 가고 있던 김문숙은 박성옥에게 한국무용을 배우면서 한국 전통춤의 필요성을 깨닫고 춤의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이후 박금슬에게도 사사하며 한국무용의 깊이를 더하게 되었다. 승무, 살풀이춤, 산조, 검무 등을 사사하였다. 김천흥에게서 궁중무와 전통춤 기본을, 한영숙에게서는 살풀이춤을 배웠다. 김문숙은 공연목록 선정에 있어 항상 어린 김문숙을 먼저 배려하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았던 한영숙의 인품을 존경하였다.

'살풀이춤' (사진=대한민국 예술원)
'살풀이춤' (사진=대한민국 예술원)

서사가 있는 김문숙의 전통무용, 신무용 작품들

서울로 돌아와 각고의 노력 끝에 1954년 충무로에 김문숙무용연구소를 개소하였다. 대한민국 전체가 어려운 시기였으나 1960년대 군사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우리 문화를 외국에 알리려 해외에 사절단을 전략적으로 파견하면서 김문숙은 무용수로서 화려한 시기를 보냈다. 한국민속예술단이란 단체명으로 올림픽을 비롯한 각종 해외행사에 초청받아 많은 공연을 다닐 수 있었다. 해외에 나가려면 사전허가가 필요할 정도로 엄격했던 시절이었지만, 조선춤, 혹은 조선풍의 춤을 하던 신무용인들은 오히려 풍족한 후원 아래 해외에서 마음껏 공연한 셈이다. 김문숙이 전통의 필요성을 깨달아 한국무용으로 전향한 선견지명이 적중했다 할 수 있겠다. 그러면서 그녀의 한국무용은 점차 완숙미를 더해갔다.

김문숙은 최승희, 조택원 계열의 신무용과 전통무용을 두루 섭렵하였는데 공통점으로는 모두 서사가 들어가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현재 전통무용과 신무용이 대부분 소품 형식의 추상적인 동작전개로 채워지는 것에 반해, 김문숙의 레퍼토리들은 서사가 들어간 근대무용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몇몇 작품을 꼽아보자면 <귀의>(1960)는 단순한 승무에 극을 부여한 춤이다. 파계승이 속세에서 번뇌하다 백팔번뇌를 깨닫고 다시 불가로 귀의하는 내용이다. 이 춤은 김문숙만의 원근법 안무가 특징이다. 키 큰 출연진을 앞에 두고 작은 출연진은 뒤에 세웠다. 작은 사람을 앞줄에 세우고 큰 사람을 뒤에 세우는 일반적인 배열을 뒤집은 것이다. 타 예술방법론을 안무방법론에 적용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시도였다. <귀의>에서 극을 낮추고 북놀음을 강조한 작품이 <구고무>(1962)이다. 일고무를 양쪽에 4개씩 11자로 세우고 뒷북 1개를 더했다. 북으로 안무를 구성하였지만, 내용은 <귀의>와 같으며 북 치는 부분을 강조한 춤이다.

'구고무' 공연 모습 (사진=대한민국 예술원)
'구고무' 공연 모습 (사진=대한민국 예술원)

<모란등기>(1958)는 김문숙무용연구소 첫 발표회 때 중국 소설 <모란등기>에서 모티브를 얻어 각색한 무용극이다. 귀신에 홀려 연애를 한 청년이 만류하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여인을 찾아 다시 폐가에 들어가고 결국은 죽음을 맞는 내용이다. 산조춤 <수평선>(1958)에도 극적 설정이 있다. 한 여인이 수평선 저 멀리 있는 무언가를 동경한다. 그곳에 닿는 여정에서 겪는 갈등과 희망찬 마음 등 희로애락을 표현했다. <대궐>(1958)은 김천흥에게 궁중무 <춘앵전>과 박성옥에게 <화관무>를 배운 뒤 궁녀의 서사를 넣어 만들었다. 일생을 궁에 갇혀 살아야 하는 궁녀의 운명과 한을 담았다. 음악은 궁중음악으로 장중하고 동작 또한 무겁고 느리다.

창작춤뿐 아니라 전통춤에도 자신만의 극적 내용을 부여했다. 김문숙의 <살풀이춤>은 한영숙에게 사사한 뒤 중간 부분을 각색하였다. 수건을 뒤로 뿌리는 장면을 헤어진 애인으로 설정하였다. 바로 수건을 집으려 엎드리지 않고 지그재그로 움직이며 망설이며 엎드리고 어르며 수건을 집어드는 것이 다른 점이다. 이는 자신의 마음을 넣으라는 조택원의 조언을 전통춤에도 이식한 예이다.

근현대 춤유산은 다음 세대에게로

김문숙은 조택원의 말년에 <가사호접>을 사사하였다. 김문숙의 <가사호접>은 시원시원한 뿌림새와 대비되는 나긋나긋한 손목 놀림이 인상적이다. 1976년 조택원 사후 1993년에 서울춤아카데미를 창립하여 그의 작품 보존에 힘썼다. 저작권이 살아있는 창작품임에도, 남편이 생전에 다른 제자들에게 나누어준 작품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보급에 헌신하였다.

김문숙의 '가사호접' (사진=대한민국 예술원)
김문숙의 '가사호접' (사진=대한민국 예술원)

그의 마지막 개인공연 역시 조택원의 춤을 포함하면서 20세기 무용사의 맥락을 다시금 확인했다. 2015년 ‘조택원 김문숙의 춤’이라는 제목으로, 미수(米壽)를 맞은 김문숙이 남편과 자신의 춤을 후대에 전하려는 취지로 국립극장 무대에서 다음 세대의 춤꾼들과 함께 이뤄졌던 것이다. 그동안 기록과 사진으로만 전해지던 조택원의 <춘향조곡>, 김문숙의 대표적 무용극 <모란등기>뿐 아니라, 조택원의 <만종> <가사호접>과 김문숙의 <대궐> <수평선> <살풀이>도 무대에 올랐다. 참으로 귀한 공연이었으며, 조택원·김문숙 두 무용가의 작품들은 근현대 춤 문화유산의 보고가 아닐 수 없다. 신무용의 한 세대를 대표했던 무용가 김문숙은 분명한 자취를 남겼으며, 그것은 한국창작무용 곳곳에 스며들어 면면히 흐르고 있다.

2015년 '조택원, 김문숙의 춤' 공연포스터 (사진=대한민국 예술원)
2015년 '조택원, 김문숙의 춤' 공연포스터 (사진=대한민국 예술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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