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을 쓰다-5] 브레이킹 불모지에 무궁화꽃이 피었습니까?
[춤을 쓰다-5] 브레이킹 불모지에 무궁화꽃이 피었습니까?
  • 김주희 무용이론가
  • 승인 2023.02.16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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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프리뷰=서울] 김주희 무용이론가 = 서양에서 추던 춤이 한국 사회에 소개된 지는 100년의 역사를 훌쩍 넘어선다. 1890년 경 주미 공사였던 이영하가 보스턴 왈츠(Boston Waltz)를 처음으로 춘 한국인으로 기록된다. 물 건너온 이국의 춤은 언제나 호기심의 대상이었으며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이 낯선 춤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는 1937년 『삼천리』에 실린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라는 유명한 탄원서를 통해 가늠해 볼 수 있다. 서양 춤을 잘 추는 것은 모던걸과 모던보이들 사이에서 상당히 중요한 지점이었다. 1930년 11월 19일 『조선일보』 석간에 실린 기사를 보면 찰스톤을 멋있게 추는 상대를 눈여겨보며 잘 추는 상대를 찾는다고 되어있다.

"1930년의 겨울 마지막 달이 갓가워 와도, 촬스톤이 대류행이다. 어느 남자가 어느 녀자를 가리켜 말하되, ‘그 여자가 촬스톤을 곳 잘 추든걸’, 어느 여자 어느 남자를 가리켜 그이는 촬스톤을 아조 멋있게 추드군요’...‘얼골의 선택 육톄미의 선택보다도 모던낄, 모던뽀이들은 이 촬스톤 선수를 찾는다.

1950년대 부산의 댄스홀©국제신문(2014년 5월 14일)(사진제공= 국가기록원 제공)
1950년대 부산의 댄스홀
©국제신문(2014년 5월 14일)(사진제공=국가기록원)

이 강렬했던 춤바람은 한국전쟁 중에도 꺼지지 않았다. 피란 상황에서도 부산 중앙동과 광복동의 댄스홀들이 성업했으며 미군부대 주변에 생긴 유흥장들도 문전성시를 이뤘다. 전쟁 이후에도 서양의 대중음악과 춤은 빠르게 흡수되어 유행처럼 번져 나갔다. 맘보춤(Mambo dance)을 시작으로 로큰롤(Rock and Roll), 트위스트(Twist), 디스코(Disco)로 이어지기까지 서양 춤은 유행에 민감했던 한국 젊은 세대들의 관심 밖에 있었던 적이 없다. 브레이킹(Breaking)도 예외는 아니었다. 브레이킹은 1980년대 AFKN이나 미군들을 통해 소개되었으며 미군 용산기지 주변에서 외국인들을 상대로 영업했던 클럽을 통해 번져 나갔다. 그 중 이태원 문나이트 클럽은 춤 좀 춘다는 춤꾼들의 집합소였다. 토끼 춤이라고 불린 셔플 댄스(Shuffle dance)부터 각기 춤으로 불렸던 팝핀(Popping), 힙합(Hip Hop), 브레이킹 등 다양한 춤들이 섞여 있었다. 20세기 초 한국 모던걸과 모던보이가 그랬던 것 처럼 문나이트 춤꾼들도 서로의 매력을 춤으로 과시하는 것이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었다.

한국 브레이킹이 시작된 이태원

한국 브레이킹 불씨가 이 문나이트에서 시작됐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댄스 배틀 때문이다. 브레이킹만 전문적으로 춘 것은 아니지만 브레이킹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배틀 문화가 있었고 상대방이 다음 씬을 이어가지 못하면 패하는 배틀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댄스 배틀의 원류는 미국의 낙후되었던 도시 환경에 기인한다. 1970년대 뉴욕시가 급격하게 도시 산업화를 진행시키자, 교통과 복지 혜택에서 소외되었던 사우스 브롱크스(South Bronx) 지역은 가난한 유색인종들이 모여 사는 슬럼가로 전락하고 말았다. 빈곤과 범죄, 차별은 심각한 수준으로 늘어나고 백인 주류사회에 대한 분노는 높아져만 갔다. 십대들은 보호받지 못한 채 갱단에 들어가 싸움, 마약, 방화, 절도, 살인과 같은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이들은 골목이나 공터 등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정하고 디제잉(djing), 비보잉(b-boying), (rap), 그래피티(graffiti)를 통해 자신들의 문화를 경쟁하듯 만들어 갔다. 자신들의 개성과 영역을 과시하기 위해 알력 행사를 자주 벌였고 댄스 배틀도 그 중 하나였다. 서로 간의 신경전이 점차 과격해지면 집단폭력으로 확대되거나 총기 사망사고로까지 이어지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브레이킹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계기는 DJ 쿨 헉(Kool Herc)이 새로운 방식으로 디제잉을 하면서부터이다. 레코드(음반)를 교체하는 시간에 음악이 끊기지 않게 두 개의 턴테이블을 준비해 놓고 음악 구간을 연결시키는 순간 손가락으로 레코드를 움직여 반복적인 소리가 나게 하는 새로운 디제잉 형식을 선보이자 큰 인기를 끌었다. 춤꾼들은 이 반복적인 소리 구간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했고 휴식시간(break time)에 추는 춤이라는 의미의 브레이크 댄스(Break dance)’로 불리게 되었다. 이때 춤을 추던 춤꾼들을 브레이크 보이(Break Boy)로 부르다가 비보이(B-Boy)가 되었다. 1980년대가 되자 이들의 문화를 MTV 같은 미디어가 주목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되었고 우리나라에도 미국 대중문화를 선망하는 분위기 속에서 빠르게 유입 되었다.

헤드 프리즈 동작을 하는 비보이 (사진출처=픽셀)
헤드 프리즈 동작을 하는 비보이 (사진출처=픽셀)

댄스 배틀의 성지,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1989년 여름의 주말, 이른 아침만 되면 중학생 중명 군은 한껏 멋을 낸 후 돈암동에 살고 있는 친한 형 집으로 향한다. 점심으로 라면을 끓여먹고 형 집에 있는 카세트, 장판, 빨간 양파망을 하나씩 챙겨 4호선 혜화역으로 내려가면 또래 친구 몇 명이 기다리고 있다.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하나 둘씩 모여 혼잡한 혜화역 구석으로 가 비디오에서 봤던 춤을 춰본다. 눈살 찌푸린 역무원도 구경하나 싶더니 구경꾼들이 늘어나자 호루라기를 불어 주변을 정리한다. 쫓기듯 대학로 도로 위로 올라와 적당한 자리를 물색해 본다. 자리가 잡히면 장판을 펼쳐 놓고 카세트에 음악에 맞춰 그 동안 연습해 온 춤을 저 마다 뽐낸다. 중명 씨는 더 빠른 회전을 위해 가져온 양파망을 손에 끼고 슬슬 준비한다. 한 손을 바닥에 짚고 몸을 수평으로 만들어 빙글빙글 도는 핸드 글라이드(Hand Glide)를 하자 구경꾼들은 크게 환호했고 분위기는 한층 고조됐다. 이렇게 고난도 동작을 선보이면 이에 뒤질세라 다른 누군가가 올라와 다른 테크닉을 선보이며 자웅을 겨루는 댄스 배틀을 이어 나간다.

이 이야기는 현재 수원에서 곱창집을 운영하고 있는 48세 중명 씨의 이야기이다. 그가 대학로에서 춤을 출 수 있었던 것은 서울시가 1985년부터 토요일 오후 6시부터 10, 일요일 12시부터 오후 10시까지 대학로(서울대학교병원과 마로니에 공원을 가르는 도로 구간)에 차량 운행을 통제하는 차 없는 거리’ 정책을 시행하였기 때문이다. 차가 없는 대학로는 시민들의 놀이터가 되어 삼삼오오 모여 막걸리를 마시거나 작은 공연을 열기도 하였다. 중명 씨는 그 시절 대학로를 다양한 볼거리가 있었던 축제로 추억한다. 차 없는 거리는 198910월 중단되었고 함께 춤춰왔던 형들이 입대하자 입시 준비를 해야 했던 중명 씨도 대학로 댄스 배틀 현장을 찾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대학로에서 더 이상 춤은 출 수 없었지만 춤에 관심이 많았던 춤꾼들은 근처 마로니에 공원으로 위치를 옮겨 댄스 배틀을 이어나갔다.

브레이킹이 이태원 문나이트에서 시작되었다면, 이 마로니에 공원에서의 댄스 배틀은 한국 브레이킹만이 갖고 있는 정체성이 구축된 메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로니에 공원에서 댄스 배틀이 가장 성행했던 전성기는 90년대 말 부터 2000년대 초반으로 그 장소가 갖는 상징성이 매우 컸다고 당시 활동했던 비보이들은 입 모아 말한다. 갬블러 크루의 박지훈 대표는 이 때 소위 전설적인 팀들이 나타나요. 아직도 활동하는 팀으로는 리버스 크루나 익스프레션 크루가 있는데 춤추는 걸 보려면 마로니에 배틀에 가야 돼요.” 

상대를 도발시킨 후 화려한 움직임 기교와 동작 간의 매끄러운 연결, 독창적이며 개성 있는 스타일로 기선제압을 하는 것이 배틀의 핵심이다. 그리고 현장에서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 얼마나 민첩하게 잘 대응하는지를 겨루면서 상대의 신체에는 접촉하지 않는 규칙을 갖고 있다. 마로니에 공원 댄스 배틀에 오랫동안 참여하면서 춤 실력을 인정받았던 리버스 크루의 조태원은 원래 실력자들이 모여 있으니까, 거기서 빠지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거기에서 무조건 배틀로 춤을 보여줘야 되고 인정받아야 유명해질 수 있었죠.” 그리고 정현희 브레이킹 아키비스트도 비보이들 사이에서는 마로니에 공원을 경험한 것에 따라 성골, 진골로 나눠져요. 못해봤으면 뭔가 항상 무시당하는 거 있잖아요.”라고 말한다.

마로니에 공원 브레이킹 공연 (사진제공=문화체육관광부)
마로니에 공원 브레이킹 공연 (사진제공=문화체육관광부)

마로니에 공원은 서로의 팀을 보완할 수 있는 중요한 정보가 교류되는 장소였으며 새롭게 합류하거나 팀을 결성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는 한국 비보이들의 성지였던 셈이다. 무용학자이자 듀크대학 교수인 토마스 F. 드프란츠(Thomas F. Defrantz)는 회전, 균형 잡기, 뒤집기, 뒤틀기, 멈추기 같은 동작을 보다 위협적으로 보일 수 있게 구성하는 배경에 대해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의식이 담겨 있다고 분석한다. 거꾸로 서거나 머리로 중심을 잡아 회전하는 동작, 몸의 회전 방향을 역으로 뒤틀고 몸통을 반대로 넘겨 뒤집는 동작 속에는 백인 엘리트 계층이 갖고 있는 권력에 대한 분노와 전복 의지가 담겨있었던 것이다.

한국 브레이킹의 경우 이러한 미국의 문화적 이해가 바탕이 되어 있다기 보다는 서양의 최신 트렌드를 선입견 없이 받아들이고 따라하며 발전되었다. 특히 한국적 브레이킹의 독특한 특성은 여러 브레이킹 단체들이 국제대회에 입상하면서 구축되었다. 마로니에 공원 댄스 배틀에 참여했던 갬블러 크루의 경우도 2003년부터 국제대회에 참가하기 시작하면서 연달아 우승을 거머쥐고 한국의 브레이킹을 세계에 알렸다. 배틀 대회를 중심으로 준비하다 보니 크고 화려한 테크닉을 앞세운 브레이킹이 한국의 특징이다. 양 팔로 몸을 띄워 두 다리로 크게 원을 그리며 도는 플레어(Flare), 바닥에 가슴이나 어깨, 등을 중심으로 대고 빙글빙글 도는 윈드밀(Windmill), 머리로 중심축을 만들어 빠르게 도는 헤드 스핀(Head Spin) 같은 파워무브 중심의 구성력을 바탕으로 발전해 왔다. 그리고 2000년대부터 초반부터 사설학원이 생겨나 학습하고 2010년대부터 대학 및 고등학교 같은 교육과정에 브레이킹이 편입되는 것도 한국적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브레이킹, 파리 올림픽 종목에 대한 다양한 의견

브레이킹이 2024년 파리 올림픽의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자 관련자들은 양분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올림픽 참가를 통해 새로운 브레이킹 스타를 양성하고 안정적인 생계 조성, 원활한 후진 양성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라고 보는 의견과, 스포츠로 정형화되어 브레이킹이 갖고 있는 고유의 문화성과 예술성이 희석된다는 의견이다. 또한 브레이킹 전문 단체들이 구심점이 되어 체계적인 행정적 기반을 구축하지 못한 채 올림픽에 참가하게 된 것에 대한 안타까움도 말한다. 현재 브레이킹 종목의 경우 대한민국댄스스포츠연맹이 올림픽과 관련된 행정적 업무와 국가대표 선발 및 심사, 심판 및 코치 선출 및 구성, 대회 개최 등을 맡아 진행하고 있다.

공중에서 쓰로우백 동작을 하는 김예리(c) @gniewkoglogowski (사진 제공= 김예리 인스타그램)
공중에서 쓰로우백 동작을 하는 김예리(c) @gniewkoglogowski (사진=김예리 인스타그램)

브레이킹 관계자들은 국제대회에 맞는 행정적 기반을 미리 갖추지 못했던 것에 대해 자성하고 있다. 브레이킹에 대한 사회적인 인식 변화를 체감하면서 브레이킹의 올림픽 참여로 남성 뿐 아니라 여성들의 관심도 높아졌다는 사실에 반색하고 있다. 국가대표로 활약하고 있는 김예리는 브레이킹이 올림픽에 들어가고 제가 이렇게 활동하니까 여자애들도 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실제로도 제가 아는 지인이 운영하는 학원에 여자 수강생들이 새로 왔는데 왜 왔냐고 물어보니까 브레이킹이 올림픽에 들어가서 배우고 싶어서 왔대요. 그래서 이게 분명히 홍보효과가 있구나 싶어요.”라고 전한다.

진천선수촌 앞 국가대표 김예리                   (사진제공=김예리 인스타그램)
진천선수촌 앞 국가대표 김예리 (사진=김예리 인스타그램)

한국은 식민지 상황과 전쟁을 겪는 과정 속에서도 서양에서 들어오는 춤을 여과 없이 흡수하였다. 언제나 물 건너온 춤에 대한 관심과 인기는 시들지 않았고 한국적 문화와 함께 발전하고 수용되어 왔다. 이제는 한국적인 브레이킹 문화를 갖고 있다 해도 무리가 아닐 정도로 성장해 나갔다. 올림픽이라는 큰 국제무대를 앞두고 브레이킹이 어떠한 행보를 이어 나갈지 우리 모두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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