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며 - THE YEAR 1905
[공연리뷰] 시대의 아픔에 공감하며 - THE YEAR 1905
  • 김준형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3.03.04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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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교향악단 제787회 정기연주회, 2023년 2월 23일 롯데콘서트홀

[더프리뷰=서울] 김준형 음악칼럼니스트 = 거장의 시대는 지난 시절의 유물이라고 하지만, 아직도 옛 거장에 견줄 위대한 마에스트로의 연주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음악애호가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이번 KBS교향악단 정기연주회의 포디엄에 오른 엘리아후 인발이야말로 일평생을 음악에 헌신한 거장 중의 거장이라고 하겠다. 그의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발자취는 레코딩을 통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비교적 젊은 시절 브루크너 원전판으로 전곡 녹음(TELDEC)에 도전하고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과 함께했던 말러 교향곡 전곡(DENON), 그리고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작업한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전곡(DENON)은 위대한 금자탑이다. 말년에 도쿄 메트로폴리탄 오케스트라와 함께 엑스톤(EXTON)에 남기고 있는 말러, 브루크너,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한 장 한 장은 음향적 탁월함과 함께 오디오파일의 각별한 사랑을 받는 놀라운 음반이다.

그는 유럽뿐 아니라 일본 주요 교향악단의 지휘를 오랫동안 맡아왔지만, 유럽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뿐 아니라 한국의 대표 오케스트라들도 여러 차례 지휘했기에 우리에게 무척 친숙한 지휘자이기도 하다. KBS교향악단과는 이번에 처음 호흡을 맞췄다. 이날의 메인 프로그램은 이미 2014년 서울시향을 지휘하여 역사적인 명연을 남긴 바 있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제11번 ‘1905년’>이었다. 흥분을 감출 수 없었던 그날의 기억이 필자의 뇌리에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KBS교향악단 제787회 정기연주회 (사진제공= KBS 교향악단)
KBS교향악단 제787회 정기연주회 (사진제공= KBS 교향악단)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1번>은 1905년 1월 9일, 제정 러시아 시대 ‘피의 일요일’이라 불리는 학살 사건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악장마다 부제가 붙어 있다.

“러시아 역사에는 반복되는 일이 많다는 것을 느낀다. 물론 같은 사건이 정확하게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대다수 사건들은 반복된다. 나는 이러한 반복을 <교향곡 11번>으로 그려보고 싶었다. 이 교향곡을 작곡한 것은 1957년으로, 제목은 '1905년'이지만 오늘날까지도 반복되는 주제를 다뤄보고 싶었다. 수많은 악행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지배자에 대한 신뢰마저 잃게 된 국민들에 대한 곡이다.”라고 쇼스타코비치가 술회한 것을 솔로몬 볼코프의 <증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 작품이 담고 있는 것은 비단 1905년의 그 사건만이 아니라 보편적 인류애를 향한 호소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평화를 기원하는 모두의 염원이 하나로 모아진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이 작품에 담긴 그의 메시지를 돌아봐야 할 때이다.

“이 작품의 주제는 폭정 속 자유를 위한 투쟁과 민중에 대한 존중, 그리고 진실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이어지고 있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현실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발이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번 연주회의 작품 선정은 무척 시의적절하다. KBS교향악단으로서도 이미 상임지휘자였던 키타엔코, 레비와 함께 훌륭한 연주를 한 충분한 경험을 갖고 있기에 성공적인 연주회가 될 필요충분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인발은 오케스트라를 향해 쉴새없이 내리꽂는 예리하고 정확한 지시로 이 장대한 작품이 담고 있는 피끓는 울부짖음을 너무나 거대한 스케일로, 너무나 정교한 묘사로, 완벽한 드라마로 재현했다. 네 악장으로 구성되었으나 휴지 없이 한달음에 내달려야 하는 작품으로 그만큼 완급과 정서의 고저를 치밀하게 설계하고 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제2악장 ‘1월 9일’에서 학살 장면의 파괴적인 격렬함, 그리고 이 장면을 전후로 한 고요하면서도 팽팽한 긴장감을 연출하는 역동적인 리드에서 역시 거장의 관록을 과시했다. 하지만 제1악장 ‘궁전 광장’에서 오케스트라 특히 현악 섹션에 불어넣은 밀도 높은 표현, 그리고 금관 섹션으로부터 예리하면서 시적인 표현을 유도한 부분도 초반의 어수선함을 정돈하면서 관객에게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을 유도했다. 제3악장 ‘영원한 기억’은 글자 그대로 진혼과 추모의 뜻이 담긴 장면으로 주로 현악 섹션이 주도한다. 낮은 성부의 움직임을 이끌어낸 인발의 리드도 탁월했지만 KBS교향악단의 기능적 우수함이 돋보였다. 격렬한 용틀임과 같은 관악 섹션의 포효로 시작하여 맹렬하게 전진하는 군중의 격앙된 분위기로 몰고 가다 이내 숙연한 분위기로 급변하는 마지막 악장 ‘경종’의 흐름도 앞서 언급한 치밀한 연출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연주 진행 중 파손된 팀파니가 이날 연주의 격렬함을 대변한다.

연주 중 파손된 팀파니 (사진제공= KBS 교향악단)

이날 KBS교향악단은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바이올리니스트 닝 펑을 초청하여 전반부에 프로코피예프 <협주곡 제1번>을 연주하였다. 닝 펑은 우리 무대에 자주 모습을 드러내는 정상급 연주자로 현란하고 파워 넘치는 테크니션으로서의 이미지가 강했던 종전의 모습과 사뭇 다르게 작품이 담고 있는 서정성을 담담하고 고요한 음성으로 들려주어 흥미로웠다. 물론 섬세한 왼손 핑거링과 호방하고 거침없는 오른손 보잉의 완벽한 조화를 통해 녹슬지 않은 기술적 완성도를 보여주기도 했으나 마치 ‘메자보체’로 노래하듯 때로는 미끄러지듯 들려준 제1악장의 달콤함은 완서를 오가며 대조의 미학을 보여준 인발의 노련한 서포트와 어우러지며 별빛으로 반짝이는 고요한 밤의 정서로 마무리됐다. 실로 천상의 음악이었다. 빠른 제2악장에서 보여준 빛나는 기교와 마지막 악장에서 새가 지저귀는 듯한 신비한 음색으로 연출한 동양적인 분위기가 절묘했다. 역시 정상급 바이올리니스트였다. 3악장의 무드가 그대로 이어진 바흐 <무반주 소나타> 아다지오 악장의 고졸한 맛이 일품이었다.

탄탄한 기량의 KBS교향악단이 거장과 명인을 초빙하여 주옥과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음악애호가의 심금을 울린 훌륭한 음악회의 전범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KBS교향악단은 오는 4월 거장 마렉 야노프스키를 초청하여 '마스터즈 시리즈'를 개최한다. 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을 이끌고 내한하여 들려준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운명’>과 <제6번 ‘전원’>은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와 볼프강 자발리쉬의 내한 연주와 함께 필자에게는 인생 연주로 남아있다. 이런 연주들을 통해 베토벤 교향곡의 참 의미와 거장의 예술이란 무엇인지를 실감했다. 그의 지휘로 KBS교향악단의 연주를 듣는다고 생각하니 무척 감격스럽다. 벌써 가슴이 뛴다.

KBS교향악단 제787회 정기연주회 (사진제공=KBS 교향악단)

 

KBS교향악단 제787회 정기연주회 포스터 (사진제공= KBS 교향악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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