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을 쓰다-7] 춤, 가벼운 일상과 가볍잖은 춤말
[춤을 쓰다-7] 춤, 가벼운 일상과 가볍잖은 춤말
  • 윤지현
  • 승인 2023.03.16 07: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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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프리뷰=서울] 윤지현 무용연구자 = 일상에 춤이 있다. 몸소 춤추지 않더라도 TV의 각종 프로그램과 광고에서 흔하게 춤을 접한다. 거리를 지나며 읽는 간판도 춤이 얼마나 일상 가까이 있는지 알려준다. ‘무용학원’ ‘재즈학원’ ‘무용연구소’ ‘춤보존회’ ‘춤전수관’ ‘댄스교습소’ ‘댄스 아카데미’ ‘무도장’ 등은 춤을 교육하고 연행하는 공간임을 알리는 이름들이다. 이들은 우리 가까이 존재하는 다양한 춤 장르와 그 이미지들과 연행 맥락을 떠올리게 한다.

‘춤’ ‘무용(舞踊)’ ‘무도(舞蹈)’ ‘댄스(dance)’ 등은 춤을 뜻하는 말들이다. 춤이 여러 말로 존재한다. 이는 일상에서 흔하게 접하는 춤처럼 새삼스러울 것 없다. 여러 춤말의 공존은 우리 곁에 다양한 춤과 춤문화 현상이 공존한다는 뜻이기에 그러하다. 

하지만 이들 춤말의 사용례는 같지 않다. ‘춤’이 오래전부터 이 땅에서 전해진 말이라면, 나머지는 그리 오래지 않은, 근대화 과정에서 낯선 춤 현상과 함께 전해진 말들이다. 우리 말은 고유어인 ‘춤’이 있는데도 다른 춤말을 받아들였다. 그 연유와 사회문화적 맥락이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또 춤말의 다른 사용례와 위계를 암묵적으로 수용해온 우리의 태도를 돌아보는 것도 흥미로울 듯하다. 

일상 속 춤의 가벼움과 춤말의 가볍잖은 맥락을 성찰해봄으로써 우리 시대의 춤을 더 깊게 이해할 수 있다. 말뜻은 같으나 다른 함의로 사용되는 춤과 무용, 무도와 댄스의 이야기를 하려 한다. 

춤말 (c)unsplash

춤, 무용, 댄스, 무도

우선 춤, 무용, 댄스, 무도. 이 말들이 사용된 배경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춤’과 ‘무용’을 주로 사용한다. 종종 ‘댄스’를 사용하고, 가끔은 ‘무도’라는 말도 사용한다. ‘춤’은 우리의 고유어로 과거부터 있었던 말이다. 일상의 춤으로부터 전통춤과 일부 극장공연인 춤 현상까지 아우르며 가장 넓게 사용되는 말이다.

‘무용’은 일본의 근대기에서 만들어진 말로 일제강점기를 거쳐 우리말에 유입되었다. 주로 근대적인 공연예술로 연행되는 춤에 사용된다. 일본에도 춤을 의미하는 고유어가 있었다. 마이(まい)와 오도리(おどり)이다. 마이는 느리고 정적인 춤으로 지배계급의 의례와 연희 속 춤이라면, 오도리는 빠르고 뛰는 동작이 많은 서민적인 춤이었다. 무용은 마이(舞)와 오도리(踊)가 합쳐진 말이다. '무용'은 일본의 근대 문학가이자 극작가였던 쓰보우치 쇼요(坪内逍遥, 1859-1935)가 1904년 발표한 <신악극론(新樂劇論)>에서 서구의 새로운 춤 형식을 소개하며 처음 사용했다. 당시 독일의 근대적 공연예술 형식인 새로운 무용, 곧 노이에 탄츠(Neue Tanz)가 일본에 신무용(新舞踊)으로 소개되었고, 이 용어는 일본을 거쳐 조선에도 유입되었다. 공연예술로서의 춤이 무용으로 불리게 된 이유이다.

중국의 ‘무도’는 한자어권에서 춤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한자 무(舞)는 소꼬리 형상의 장식을 들고 행하는 주술적 춤의 의미가 있고, 도(蹈)는 발로 밟거나 구른다는 의미가 있다. 무도는 이들 두 뜻이 합쳐진 용어로 손과 발로 행하는 춤을 의미한다. 한편 무도와 유사한 의미로 구성된 일본어 부토(ぶとう, 舞踏)가 있다. 부토의 답() 또한 밟는다는 뜻의 글자이다. 그러나 이 용어는 1960년대 일본에 출현하여 세계화한 전위적인 춤 장르에 국한하여 사용된다. 부토는 명상적이고 철학적인 포스트모던 춤으로 흔히 죽음의 춤으로 알려진다.

한국에서 중국어인 '무도'는 일본어인 무용에 비해 덜 사용된다. 무도는 춤 일반을 가리키기보다는 사교춤을 특정하여 사용되고 있다. ‘무도’는 춤 일반이 아닌 사교춤을 칭하는 것으로 협소하게 사용되고 있다. 우리가 지리적으로 가까운 중국어의 ‘무도’가 아니라 일본어인 ‘무용’을 주류어로 사용하는 이유는 근대적 공연예술로서의 춤 형식이 유입된 근대기 한반도를 지배했던 일본의 문화적 영향이다.

‘댄스’의 사용은 20세기 중후반부터 미국화와 세계화의 영향을 받은 한국 현대사의 결과이다. ‘댄스’는 여느 외래어처럼 일상적으로 사용된다. 대중적인 문화산업 영역의 춤과 그 현상을 아우르는 용어로 수용되었다.

이처럼 춤말 중에서 주류어가 존재하거나 사용례의 범위가 넓거나 좁은 것은 한국 근현대사의 흔적이다. 지난 세기 그리고 더 오래전부터 이어진 시간 동안 한반도가 처했던 정치적, 지리적 상황과 고군분투해온 한민족의 역사적, 문화적 경험이 ‘춤’과 ‘무용’ 등 춤말의 사용례에 담겨 있다.

춤을 즐기는 일상 (c)unsplash
(c)unsplash

일상의 ‘춤’과 전문적 ‘무용’

우리는 오랫동안 ‘춤’과 ‘무용’의 사용례에 감지되는 위계를 인정해왔다. 필자는 무용강사이다. 대학의 무용과 소속 학생에게 무용이론을 가르친다. 하는 일에 대해 ‘춤 선생’으로 소개하려 한 적이 있다. 이내 정확한 소개가 아니어서 '무용강사'로 정정했다. 춤 선생은 무용강사와 어휘상의 의미는 같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두 말은 다르게 해석된다. ‘무용강사’는 공적이고 전문적인 영역에서 춤 실기나 이론을 가르치는 직업으로 이해되는 반면 ‘춤선생’이라고 하면 대체로 공인되지 않았거나 전문성이 약한 현장에서 춤을, 주로 춤 실기를 가르치는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는 우리말인 ‘춤’이 처한 상황과 ‘춤’과 ‘무용’ 두 말 사이의 불균형을 보여주는 예이다.

‘무용사전’을 ‘춤사전’이라 했을 때는 어떤가? 둘은 의미가 같다. 하지만 ‘춤사전’은 은근한 이물감이 있다. ‘무용강사’를 ‘춤선생’이라거나, ‘무용과’를 ‘춤과’라 할 때 ‘춤’은 비슷한 이물감을 남긴다. 마찬가지로 ‘춤바람’을 ‘무용바람’이라거나 ‘춤판’을 ‘무용판’이라 할 때도 ‘무용’의 사용은 어색하게 느껴진다. ‘무용’은 전문적, 학술적인 맥락과 어울리고, 춤은 일상의 현상이나 때론 부정적인 맥락에 붙여진다.

무엇이 ‘춤’과 ‘무용’의 사용례에 보이는 차이를 만들었는지, 그리고 지금도 작동시키는지. 우리말 ‘춤’과 한자어이자 일본어인 ‘무용’에 작동하는 위계와 맥락은 두 가지다. 하나는 오랫동안 중국문화의 변방에 처했던 한반도의 역사적, 문화적 경험과 연결된다. 우리 고유어보다는 한자어에 전문성이 더해진다. 다른 하나는 중국어의 ‘무도’가 아닌 일본어의 ‘무용’이 주류어로 유통된 것은 앞서 언급했듯 일제강점기 경험과 연결된다. 일본을 통해 소개된 근대문물과 개념에 일본식 이름이 붙여지듯 근대적 공연예술로서 무대화된 춤에 일본식 이름인 ‘무용’이 붙여졌다.

‘춤’의 상층을 차지해온 ‘무용’

국내에서 근대적 공연예술로서 무용 장르가 주목받은 계기는 1926년 조선에 처음으로 서구의 현대무용을 소개했던 일본의 무용가 이시히 바쿠(石井漠)의 공연이었다. 독일 표현주의 무용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신무용은 당시 조선사회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 공연 직후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이 바쿠의 제자가 되었던 최승희나 조택원 등을 낳았고, 이들의 국내외 활동은 근대적 공연예술로서의 무용과 예술가로서 무용가의 존재감을 조선에 각인시켰다.

물론 그 이전에도 ‘보여주는 춤’으로서 조선춤의 무대가 없지는 않았다. 1920년대 서양식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조선춤들도 공연되었다. 1902년 협률사와 1908년 원각사의 설립 이후 서양식 극장이 여럿 세워졌었고, 창극, 잡희와 함께 조선춤도 극장의 무대에 오르던 시기였다. 그러나 조선에 자생하던 우리 고유의 문화예술 다수는 서구와 일본을 거쳐온 것들에 못 미치고 뒤처진 양 치부되었다. ‘무용’이 서구와 일본의 근대이자 선진문화였다면 ‘춤’은 조선의 묵은 문화와 짝이 되거나 천시하던 기방 예인의 장기였다. 당시 무용가를 꿈꾸던 많은 이들의 심장을 뛰게 했던 것은 근대적 공연예술이었던 무용이지 조선의 춤이 아니었다.

일제 강점기 명고수이자 무용가였던 한성준(1874-1941)은 한국무용사에서 ‘전통춤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가 무대화했던 <승무>와 <태평무> 등은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27호와 제92호로 전승되고 있다. 한성준은 당대 국창으로 이름이 높았던 김창환, 송만갑 등의 고수를 도맡았고, 판소리 음반이나 창극 유성기 음반 녹음에 반주자로 활동했다. 그는 밀려드는 외세와 사회변화로 조선의 춤이 사라져감을 안타까워했다. 이에 조선의 장단과 춤사위를 모아 조선춤 100여 종목을 무대화했다. 한성준은 조선춤을 훈련하고 공연하기 위해 1934년에는 조선무용연구소를, 1937년에는 조선음악무용연구회를 설립해 운영했다. 이들 단체명도 ‘춤’이 아닌 ‘무용’을 쓰고 있다. 1930년대 한성준이 설립한 단체명에서도 예술이자 전문성을 함의한 활동은 '춤'이 아니라 '무용'이었음을 알 수 있다. 

(c)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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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을 위한 인정투쟁

해방과 한국전쟁의 혼돈기를 지나 ‘춤’과 ‘무용’의 사용례에서 보이는 위계에 도전했던 문화예술 현장의 의식적 실천이 있었다. 1970년대 문화예술계의 민족주의 담론과 사회문화적 실천은 춤 현장에도 영향을 주었다. ‘한국적 발레’나 ‘현대무용의 한국화’ 노력들은 전통문화를 회복하려 했던 당시의 노력들이다. 또한 1990년대 중반 이후 탈식민주의 담론과 문화연구 학풍이 번져가는 가운데 언어와 일상 문화 속 권력관계를 톺아보며, ‘무용’이 주류어가 된 현상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는 ‘무용’보다는 ‘춤’을 사용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무용계’를 ‘춤계’로, ‘무용가’를 ‘춤꾼’으로, ‘무용공연의 무대’를 ‘춤판’으로 굳이 부른 일들이 그것이다. 이런 식의 ‘춤’ 사용은, 초기엔 어색했지만 지금은 ‘춤’과 ‘무용’의 위계가 그 전 같지는 않음을 느낀다. 두 말의 구분이 상당히 완화된 듯하다. ‘전통춤’과 ‘전통무용’을, ‘사교춤’과 ‘사교무용’을 함께 사용함이 그리 어색하지 않다.

하여 무용강사를 굳이 춤선생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심경은 나름 복잡했다.

첫째는 ‘무용’이란 단어를 피하고 싶었다. 일본어식 조어라는 ‘무용’이란 단어의 사용에 은연중 거부감이 있었다. 물론 오늘의 일상에서 일제 식민지 지배의 역사나 상처받았던 민족문화를 의식하며 살지는 않는다. K컬처와 K콘텐츠의 우수성을 세계적으로 증명해버린 2020년대를 살면서 민족주의적 강박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해방 70년, 반세기가 훌쩍 지난 시간만큼 희미해진 일이다. 그러나 누적된 시간층 아래 묻힌 우리 공동체의 아픈 역사는 실재했다. ‘춤’의 상층을 차지해버린 ‘무용’은 이를 떠올리도록 자극한다. 1980년대 청년기를 거치며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해온 교육과 사회적 분위기의 세례를 받아온 세대로서 이는 당연한 뒤끝이다.

둘째는 대학의 무용교육에 과도하게 부여된 권위를 피하고 싶었다. 고등교육 속 ‘무용’이 극도로 협소화해버린 ‘춤’의 범위를 벗어나고픈 의도였다. 우리 사회의 ‘춤’은 일상에 지천으로 널려있으나 ‘무용’은 공연장의 전문무용수가 행하는 작품들로 그 범위를 좁혀버린다. 협소해진 ‘무용’의 범위는 무용예술의 확장은 물론 대중문화 속 춤 현상의 분류와 명명에도 장애가 된다.

1964년 국내 최초로 개설된 이화여자대학교의 무용과는 발레와 현대무용, 한국무용을 교과과정의 전공으로 인정했다. 이후 1990년대까지 40여 대학에 무용과가 개설되는데 대부분 대학에서 이들 세 장르만을 교과과정의 전공으로 채택했다. 고등교육과정에 포함된 세 장르는 국내에서 예술로 불리는 춤의 범위를 한정했다. 대중문화 콘텐츠 속의 다양한 춤과 일반인들이 즐기는 에어로빅, 댄스스포츠, 재즈댄스, 줌바 등은 고등교육과정이 정한 ‘무용’의 범위 밖에 있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 비보잉과 힙합 장르에서 학교 밖에서 성장한 예술가들이 세계적 인정을 받고 산업적 경제적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대중예술 영역의 춤들이 성장하는 반면 대학 무용과의 상황은 나빠졌다. 수시로 입시지원 미달 소식이 들리거나 폐과하는 대학이 생기는 상황이다. ‘실용무용’의 이름으로 다양한 장르의 춤이 대학 등 고등교육의 교육과정에 흡수되고 있다.

‘무용’의 협소함과 춤말의 난맥상

실용무용으로 분류된 장르 중 일부는 일상에서 종종 ‘댄스’로 불린다. 흔히 ‘무용학원’과 ‘댄스학원’이 구분되는 방식이나 이 둘의 포괄적 지점에 ‘재즈댄스학원’이 있다는 사실과 재즈학원이 교육하는 장르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무용학원은 한국무용과 현대무용, 발레 등의 장르에 특화된다. 댄스학원은 실용무용으로 불리는 대중춤 장르에 특화된 시설이다. 재즈댄스학원은 두 범주의 춤을 공히 다루는 시설로 이해된다. ‘무용’과 ‘댄스’, 다시 ‘재즈댄스’ 등의 외래어와 춤의 범주가 동어를 반복하며 생성되는 양태는 우리 말에 들어온 ‘무용’ 의미의 협소함에서 기인한다.

한국의 예술교육 과정을 통해 배출된 무용가들이 세계의 주요 공연예술 콩쿠르를 휩쓸고, 힙합과 어반댄스 등 대중문화의 장은 일찍이 독보적인 우수성을 알려 왔다. K컬처와 K콘텐츠의 문화적 원천으로서의 고유문화가 재조명받고 있다. 아직도 탈식민지적 각성과 실천에 쉽게 고무되는 세대에게 이는 격세지감이랄 수밖에 없다. 고유문화의 우수성을 굳이 언어화하지 않아도 이미 인정받아버린 청년들에게 ‘춤’과 ‘무용’의 문제는 철 지난 노래처럼 보인다. 또 세계의 문화예술이 실시간으로, 안팎 없이 뒤섞이는 동시대 맥락에서 ‘춤’과 ‘무용’의 구분과 그 의미를 따지는 시도도 그러하다. 그래서 ‘춤’과 ‘무용’의 사용례에 투사되던 한국 근현대사의 경험과 권력관계를 떠올리는 일의 소용을 다시 묻게 된다.

춤이 속한 맥락이자 조건인 사회문화의 변화는 지속적이다. 그 변화를 따라 춤의 개념과 범위 또한 변화할 터이고, 지속적으로 불안정할 것이다. '춤’과 ‘무용'의 위계에 대한 이야기는 뻔한 내용일 수 있다. 그럼에도 오늘의 춤 현장을 조금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해준다. 그래서 여러 춤말의 사용례에서 드러나는 또는 드러나지 않는 위계와 맥락을 쫓는 노력이 아직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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