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새로운 쇼팽 연주자와 함께한 파리 여행
[공연리뷰] 새로운 쇼팽 연주자와 함께한 파리 여행
  • 김정화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3.03.24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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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쇼팽국제콩쿠르 우승자 브루스 리우 리사이틀

 

브루스 리우(Bruce Liu) (사진제공=(재)부산문화회관)
피아니스트 브루스 리우 (사진제공=부산문화회관)

[더프리뷰=부산] 김정화 음악칼럼니스트 = 연중 4회로 기획된 '2023 부산문화회관 월드 콩쿠르 우승자 시리즈'는 시작하자마자 입장권 패키지 매진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부산문화회관의 좋은 기획과 코비드-19로 눌려 있던 사람들이 가진 좋은 음악에 대한 갈망이 함께 어우러져 이룬 일일 것이다.

지난 3월 10일, 피아니스트 브루스 리우(Bruce Liu, 1997-)가 시리즈의 첫 번째 문을 열었다. 6년 만에 열린 제18회 쇼팽국제콩쿠르에서 이례적으로 스타인웨이나 야마하가 아닌 이탈리아산 파찌올리(Fazioli)를 연주하며 우승했다. 특히 이 대회는 3위, 5위 수상자인 마르틴 가르시아 가르시아(Martin Garcia Garcia), 레오노라 아르멜리니(Leonora Armellini)도 파찌올리를 연주해 피아노 제작에 다른 회사들도 건재하고 있음을 입증하였다.

브루스 리우의 선곡은 라모(Jean-Philippe Rameau, 1683-1764)의 클라브생 모음곡 중 <상냥한 호소(Les Tendres Plaintes)> <외눈박이 거인(Les Cyclopes)> <미뉴에트 I & II(Menuets I & II)> <야만인들(Les Sauvages)> <암탉(La Poule)> <가보트와 6개의 변주(Gavotte et six doubles)>와 쇼팽(Frédéric Chopin, 1810-1849)의 <모차르트 <돈 조반니> 중 아리아 ‘그대 손을 내게 주오’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2> <피아노 소나타 2번 내림나단조, Op.35 ‘장송행진곡’> <새로운 3개의 연습곡, Op.Posth>, 그리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의 <돈 주앙의 회상, S.418>이었다.

개인적으로 쇼팽콩쿠르 우승자가 한국투어 첫 리사이틀 프로그램을 모두 쇼팽의 작품들로만 구성하지 않고 라모로부터 시작한 것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프로그램을 보면서 연주자가 가진 기획 의도를 짐작했다. 바로크 시대 프랑스 음악에 커다란 공적을 남긴 근대 화성학의 기본 틀을 완성한 라모로 시작해서, 쇼팽콩쿠르 우승자답게 쇼팽을 거치고, 쇼팽과 함께 파리 하늘에 뜬 ‘두 개의 태양’이었던 라이벌 리스트로 마감하는 프로그램이었다. 프로그램을 근대 화성학의 근본에서 시작한 것은 음악사에 기록된 위대한 스승에 대한 제대로 된 오마주라 할 수 있다.

첫 곡인 라모의 <상냥한 호소>가 시작되면서 다가오던 사랑스러운 아련함의 첫 프레이징이 끝나기도 전에 튀어나온 사탕 껍질 까는 소리와 재채기 소리에 흔들렸을까? 두 번째 곡 첫마디부터는 아슬아슬하다가 왼손이 꼬여버렸다. 미뉴에트 마지막에 가서 안정감을 찾는 듯했으나, 메모리 슬립으로 마지막 곡마저 집중이 되질 않았다. 기술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조마조마하며 들었다. 그래도 리우는 바로크 음악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트릴이나 다양한 꾸밈음(agrément)이 가진 화려하고 반짝이는 특성을 잘 드러냈다.

라모의 음악에는 서양 음악사를 떠받치는 화성의 역할 관계에 대한 이론뿐만 아니라 음악적 풍부함과 조성음악에 대한 애정이 넘친다. 특히 이날 첫 곡으로 연주한 <상냥한 호소>는 드뷔시가 "섬세하고 매혹적이며 다정하다“라고 평했을 정도다. 그러나 리우의 음악에서는 이런 것을 찾을 수가 없었다. 라모의 음악에는 특유의 귀족적 우아함과 현대사회에서 찾기 어려운 다정함도 들어 있다.

그의 연주는 마치 아침에 너무 일찍 일어나 몸이 덜 풀린 상태의 육상선수가 달리는 듯했다. 안타깝게도 피아노의 상태마저 최적은 아니었다. 그냥 오랜 연습이 몸에 배어 있는 연주자가 몸이 덜 풀린 상태로 연주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월드 클래스답게 화려한 테크닉은 탁월했다.

쇼팽콩쿠르 우승자의 쇼팽 음악

쇼팽이 가진 음악적 영감의 원천은 사람의 목소리다. 그것도 특히 이탈리아 오페라에 나오는 아름다운 목소리이다. 당연히 쇼팽의 모든 피아노 음악은 그 특유의 호흡과 루바토가 중요하다. 이날 리우의 연주는 프레이징 사이의 타이밍 연결이 어색했고 세련미를 느낄 수 없었다. 게다가 소나타의 2악장에서는 느린 부분이 지루하게 느껴질 만큼 반복되기도 했고, 쇼팽 음악의 상징이라 말하는, 우리가 늘 기대하는 '시적 표현'이란 것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모차르트 <돈 조반니> 중 아리아 ‘그대 손을 내게 주오’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2>은 쇼팽을 유럽에서 주류(mainstream) 반열에 오르게 만든 중요한 계기가 된 역사적인 작품이다. 특히 슈만은 이 곡을 듣고 쇼팽을 천재라 불렀다 한다. 이날 리우는 이 곡에서 피아니스트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4번째 변주곡의 양손 점핑을 깔끔하게 처리했다. 그렇지만 쇼팽 음악 본연이 가지고 있는 가슴 울리는 우수(憂愁)는 어디서 느껴야 하는지 답답했다.

<소나타 2번, Op.35> 3악장 ‘장송행진곡’은 쇼팽의 장례식에서 울려 퍼지기도 했다. 그런데 느린 부분에서 나오는 쇼팽 음악이 가진 기억(réminiscence) 속에 있는 처연함을 찾고자 했던 청중들은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쇼팽 작품 전반에는 박자 변화나 화성 전환에서 느낄 수 있는 격정, 열정, 섬세함, 슬픔, 절망, 위로, 사랑 등의 변덕스럽지만 자연스러운 감정이 들어 있어야 한다. ‘쇼팽 루바토’는 어정쩡하기까지 했다. 뒤이어 나온 <새로운 3개의 연습곡> 또한 임팩트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마지막 곡인 리스트의 <돈 주앙의 회상>이다. 동시대 파리에서 쇼팽과 라이벌이었던 연주자의 기교에 방점이 찍힌 이 곡을 제대로 들려주어 자신이 콩쿠르 우승자임을 과시했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이날의 쇼팽콩쿠르 우승자 리우의 첫 독주회 프로그램 중 가장 나았던 것 같다.

부산문화회관 중극장 (사진제공=(재)부산문화회관)
부산문화회관 중극장 (사진제공=부산문화회관)

여운(餘韻)

관객들의 기립박수에 대한 앙코르는 지역에서 보기 드물게 긴 시간 동안 이어졌다. 국내 투어 중 공연 별로 7곡이나 5곡을 연주했던 터라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예상대로 바흐의 <프랑스 모음곡 5번 ‘알라망드’>, 쇼팽의 <3개의 에코세즈-1번>, 사티의 <그노시엔 1번>, 다시 쇼팽의 <12개의 연습곡 작품번호 10의 5번>까지 네 곡을 담백하고 시원하게 들려주었다. 잠시 후 다섯 번째 앙코르로 쇼팽 <왈츠 가단조>를 연주하며 자신이 쇼팽콩쿠르의 새로운 우승자임을 확인시켰고, 그 자리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청중들에게 행복과 희망을 가볍게 선사해 주었다.

여섯번째 앙코르로 베토벤의 <바가텔 가단조 '엘리제를 위하여'>의 첫 소절이 나오자마자 객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이들도 아는 주선율이 나오다 갑자기 펼친 화음(broken chord) 이후 곡의 분위기가 바뀌자 환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재즈 피아니스트이자 래그타임 작곡가로 유명한 우슬란(Ethan Uslan)의 편곡 작품을 연주한 것이었다. 이 곡은 1920년대 미국의 갱스터(Gangster) 스타일을 연상시켰다. 그는 여전히 자리를 뜨지 못하는 관객들에게 마지막으로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를 화려하게 들려주고는 열광하는 청중들에게 두 손을 모아 베개에 머리를 뉘는 모습을 보이며 공연장을 떠났다.

 

브루스 리우(Bruce Liu) (사진제공=(재)부산문화회관)
피아니스트 브루스 리우 (사진제공=부산문화회관)

주마가편(走馬加鞭)

아무리 세계적인 연주자라도 모든 작곡가를 다 소화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쇼팽콩쿠르의 우승 트로피는 쇼팽을 가장 쇼팽답게 연주하는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쇼팽 음악은 말 그대로 피아니스트의 ‘고전(古典)’이다. 이때 고전이라는 것은 오랫동안 세기를 넘어 많은 사람에게 널리 들리고 전범(典範)이 될 만한 예술작품을 말한다. 이런 고전을 자신이 가진 많은 취미 중의 하나로 여기면 제대로 된 연주를 청중에게 들려줄 수 없다.

필자가 실황으로 보고들은 제18회와 제17회 쇼팽콩쿠르 입상자들이 보여준 음악적 표현의 차이는 극명했다. 지난 대회 우승자인 조성진과 비교할 때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이었다. 또 지난 대회 상위 입상자인 샤를 리샤르-아믈랭(Charles Richard-Hamelin)이나 에릭 루(Eric Lu)와 비교해도 마찬가지였다. 겉으로 보이는 그의 차분한 애티튜드와 검은 의상에서 드러나는 절제되고 세련미 넘치는 음악을 기대했지만, 그의 연주에선 테크니션의 화려함만 두드려졌다.

모든 예술이 다 그렇겠지만 음악의 예술적 영역은 끊임없는 탐구와 깊은 성찰이 근본이다. 연주자는 "우리들의 공통점은 우리가 서로 다른 데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 출발은 고전을 만든 작곡가의 의도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 현재라는 시대를 반영한 자신만의 창의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연주자가 하는 연주는 그 곡을 만든 작곡가의 의도가 청중의 머릿속에 그려질 때 좋은 연주가 된다. 그것을 더 쉽게 그리고 더 아름답게 청중에게 들려주는 것이 전문 연주자의 몫이다. 브루스 리우가 쇼팽콩쿠르 우승 직후의 인터뷰를 포함해 몇 차례 밝힌 것처럼 그의 피아노 연주가 "카트레이싱(kart racing)이나 수영, 체스 등 열 다섯 개 취미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지 않기를 바란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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