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국립현대무용단 송주원 '20▲△'
[공연리뷰] 국립현대무용단 송주원 '20▲△'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3.04.01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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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더프리뷰=서울] 하영신 무용평론가 = 지난 224일에서 26일 사흘간 다섯 차례에 걸쳐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된 작품 20▲△〉은 국립현대무용단(단장 겸 예술감독 남정호)이 진행한 <<무용×기술 융합프로젝트>>의 일환으로 VR기술(제작감독 전봉찬)과 춤예술(안무가 송주원)의 협업 작업물이다. 지난해 9월 세종S씨어터에서 있었던 초연에 이은 재연이었는데, 기술과 예술의 관계에 관하여 쉽사리 해()를 확정할 수 없는 다각도의 현재진행형 질문들을 남겼다.

 

​국립현대무용단 ‘20▲△’ ⓒAiden Hwang​
​국립현대무용단 ‘20▲△’ ⓒAiden Hwang​

[더프리뷰=서울] 하영신 무용평론가 = '이십삼각삼각이라고 발음하는 <20▲△>은 라이브 공연, VR체험, 그리고 다시 라이브 공연의 3단구조로 연속하는 60여 분간의 공연물이다. VR영상과 춤, 가상현실/현실세계, 디지털/아날로그, 01의 추상기호/몸성. 존재론적으로 상충하는 두 매체가 한 작품 안에서 각기 그 존재감을 현격히 발생시키니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춤작품의 본연이라 믿어왔던 현전성과 현장성이 신흥(新興)VR의 이질적 방식으로 병치된다. 더구나 VR는 사람의 지각장(知覺場, field of perception) 너머의 불가능성들을 강렬한 강도의 가능태로 불러들이니 그 초()체험은 관객마다 혹은 한 관객의 내면에서조차 극과극의 감응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두 세계가 접면한 작품을 두고 작가를 어떻게 지정해야 할지부터 망설여진다. 국립현대무용단이 총괄한 작업이고, 프로그램에 기재된 박지선 크리에이티브 프로듀서의 언급에 따르면 “VR로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이 중요한 지점이고 안무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면서 '고립고독이라는 키워드를 찾았다고 하니 그 협업의 총합을 춤작품, 안무가 송주원이 제시한 고립과 고독으로 환원하여 생각해보도록 한다. 첨단형의 작품을 이토록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나도 되는 것인가 의구심을 떨칠 수는 없지만.

신종 기술x예술, 당신의 감응력은 몇 점입니까?

20▲△〉에 도전했던 두 번의 경험을 말하기 전에 우선, 평소 기술/예술(예술의 경지에 이른 기술과 기술에 기반하는 예술의 종합물)에 관한 필자의 무능력부터 고백해야겠다. 필자는 비교적 신생한 영상으로부터 진화한 장르들에 취약하다. 특히나 공연예술에 난입하는 영상매체에는 비호의적이기까지 하다. 중력에 일절 구애받지 않고 자체로 발광(發光)하며 심지어 시공간도 마음대로 접고 펼치는 영상에 나란하자면 몸성은 예외적인 어떤 순간들을 제외하고는 대체로 미약하니 그렇다.

비단 춤과의 관련이 아니더라도 미디어아트나 최근의 영화들이 출력하는 이미지와 사운드는 내겐 너무 자극적이다. 압박하고 둘러싸는 고도의 과학적 설계에 나는 금방 녹초가 된다. 감각자료들은 전횡(專橫)하지만 나에게로 옮아올 내역은 없다. 일찌감치 세계적 예술가로 인정받은 백남준의 작품들로부터 이미 그러하다. 여전히 해를 구하지 못한 질문으로 남아있는 <다다익선 The more the better>(1988)이 절대적으로 그러한데, 13대의 텔레비전 수상기로 건축한 그 거대한 탑 앞에서 나는 매번 망연자실 무기력해진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설마 보고 들으라는 건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면밀한 시청을 시도해봤을까?

‘Less is more’ - 매체성에 천착하는 모더니즘의 한계를 밀어내는 의식적 행보인지, 물질문명의 능동적 수용인지 혹은 그에 관한 통렬한 비판인지, 수용의 여러 가능성들이 있겠지만 어쨌든 그 작품은 나에게 스케일의 위력을 행사할 뿐 소통 불가한 대상물이다. 나는 상당 부분을 미처 파악할 수 없는 외부대상과 세계 앞에서 고독, 두려움, 좌절을 느끼는 편이다. 예술에의 참여는 세계와 나 사이의 컴컴한 간극, 그 고립감을 메워주는 일이다. 이 작품에 임하는 송주원의 의욕이 그랬다 했듯이.

<다다익선>은 그런 면에서 나에겐 예술적이지 못하다. 그 자체를 명백히 알 수 있거나 그를 경유하여 어떤 세계로 침잠 가능하지 못하였으므로. 온전한 소통, 그 사랑의 순간이 빚어지지 않았으므로. ‘Less is more’ 정도가 유효한 것이다, 나에겐. 나의 경험치에선 간명한 것이야말로 풍요로움을 가져다주었다. 간명한 것들의 출현은 그 혹은 그것이 나에게 온전히 왔음이고, 그렇게 충족적으로 만나졌을 때에야 나는 충분히 감각하고 사유할 수 있었다.

이것이 동시대 무용예술 작품들을 애호하는 이유다. 컨템퍼러리댄스는 모든 것의 혼재를 허용하는 것 같아도 작품세계 내 요소들은 단자(單子, monad)적으로 있다. 가상성과 환영성을 거두고 춤은 몸, 미술은 색()과 형(), 음악은 소리, 소도구는 물체 그 자체로 공속(公束)한다. 그 작용들로써 생명의 운동, 세계의 운동을 적시(摘示)하는, 그들과 나의 살아있음을 새삼 체현케 해주는, 그 사랑의 순간에 빠지게 해주는. 내가 붙들고 지내온 무용예술 작품들은 이제껏은 그랬었다.

그런데 오늘의 문제적 작품 <20▲△>은 작품 복판에 가상과 환영의 휘황한 세계를 품었다. 조형된 세계(극장의 블랙박스) 안에 거하던 춤들은, 뛰쳐나가봐야 거리, 자연, 실질적 세계의 품 안에 실체적 몸으로 있던 춤들은 몸에의 결착을 풀고 현실 밖을 유영한다. VR, virtual reality, 현실에 필적하는. 현실보다 오히려 더 생생히 현전되어 감각의 왜곡을 유혹하는 가상의 세계. 공연예술의 핵심어였던 현전성과 현장성을 어떻게 재고해내야 하는 건지 나는 좀 난감해졌다.

​국립현대무용단 ‘20▲△’ 워크북
​국립현대무용단 ‘20▲△’ 워크북

기술과 동반하는 예술을 위한 작심

이 선도적이고 모험적인 기획으로부터 새로움의 긍정적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것은 신출하는 예술에 대한 심리적 저항감을 끝끝내 처분하지 못한 필자의 편향성 때문이다. 그러나 어쨌든 편견 없이 작품과 만나보려고 애는 썼다. 작년 초연에 예비 없이 참여하였다가 작품을 충분히 탐색조차 못하고(이 누락에 관하여는 본격적으로 작품을 설명하는 이후의 단락에서 말하겠다) 평소 다져진 선입견의 암약(暗躍)만 확인하고 돌아왔던 터. 두 번째 관람을 자청하기 전 미약하나마 나름의 준비를 시늉해보았다.

불충분한 관객이었으므로 판단을 보류하고 초연 때의 간행물 예술x기술: 이슈와 담론들을 주의 깊게 읽었다. 낯선 어휘들, ‘웨어러블(wearable) 공간’ ‘원격촉각’ ‘공현전(共現前)’ 등등은 못내 둥근 네모형용모순의 성립 불가능성으로 남았지만 어쨌든 이 신조어들이 새로운 가능성들을 지시하고 있다고 하니 그 사태들을 맞이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최대한 개방해보겠다 마음먹어 보는 수밖에.

관객 분류도 인상적이었다. ‘예술x기술형 작품의 관객은 상호작용성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인터랙터, 소극적인 관객의 관객혹은 공간 끝까지 가보는 자, 만들어놓은 인터랙션 모두를 작동시키면서 훼방을 놓는 롤 브레이커(role breaker) 등등으로 구분 가능한 모양이다. 초연에 나는 소극적인 관객의 관객쯤 이었던 게다. 송주원은 고독한 개인들 들이 고립되지 않을 수 있도록 시공간의 연결을 만들고 싶다고 그랬지만, 그녀가 데리고 간 세계에서 나는 더욱이 외로워졌고 심지어 두려웠었다. 그래서 간간이 고개를 젖혀 코 끝, 헤드기어와 내 몸 사이 간신한 틈을 통해 작품 바깥의 세계와 그곳의 사람들을 확인하곤 했었다.

문자 그대로 관객의 관객이었던 나는 두 번째 기회에서는 적어도 공간 끝까지 가보는 자가 되어보기로 작심했다. 보다 긍정적으로 인터랙터가 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내 감수성의 능력치가 너무 과민하거나 허약하다. 그런데 나만 유난한 걸까? 공황장애, 교감신경계 이상증후, 항상성을 안정적으로 유지하지 못해 겪어지는 와해의 공포를 호소하는 이들이 일상의 도처에 있었는데.

열면 열리는 세계 <20▲△>에서 길 잃기 : 인공 낙원

프로그램, 워크북, 그리고 공연 후 관객과의 대화에서 보충된 작가의 설명에 의하면 제목은 다음의 축약이다. 20개의 정삼각형들이 변을 맞대면 만들어지는 20면체, ()형에 근접하는 이 다면체는 세상, 고독한 개인들이 소통할 수 있는 집합적 세계, 아마도 작가가 구축하고 싶었던 연대 가능한 세계를 상징한다. 송주원은 이 작품을 고립이 강요된 팬데믹 시절로부터 착안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춤들이 영상에 실려 전송될 수밖에 없었던 그 시기, 그 강제된 계기보다 일찍이 2010년대 중반부터 댄스필름 감독으로서 작업해왔던 그녀는 보다 더 절박하게 연결 가능한 확장형의 세계를 간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프레임 없는 360도의 세상”, VR의 삽입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가장 이질적인 것의 이식은 현실의 많은 경계를 파쇄했다. 기술과 예술, 과거와 현재, 거기와 여기, 관객과 연행자, 예술과 유희

국립현대무용단 ‘20▲△’ ⓒAiden Hwang
국립현대무용단 ‘20▲△’ ⓒAiden Hwang

입장 전에 관객은 소지품을 맡기고 부직포 양말을 덧신어야 한다. 스무 명의 단출한 관객은 이 공연의 플레이어다. 그것도 공연의 일부분에서 참여를 독려 받는 소극적 참가자가 아니라 선택의 역량을 지닌 주요한 주체다. 아직은 자신의 역할을 예측하지 못한 관객들은 객석 없는 무대를 어색하게 서성이며 작품을 기다린다(재연에서는 2층 좌석에 스무 명의 관객을 더 수용했다. 360도 회전 가능한 의자에 앉았던 이들은 2부의 VR체험을 마치면 1층으로 내려와 3부 무대에 합세하게 된다). 머리 위에는 삼각형의 편성을 예상(군데군데 끊기어 있으므로)할 수 있는 형광등 도안이 켜져 있다. SF 감성, 매트릭스(matrix)적 환경 등이 환기된다.

포그와 음향이 깔리며 작품이 개시되면 무용수들이 하나 둘씩 들어서 관객 무리에 섞인다. 도합 여덟 명의 무용수들은 매우 무표정한 얼굴로 관객 주변을 돌다 분출적 동작을 행한다. 달음질, 경련, 뒹굴기 등에 이어지는 느닷없고 길고 강렬한 정지,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목적 불분명한 행보. 자신으로부터도 인과하지 않고 누구와의 작용도 아닌, 춤의 단면이기는커녕 개연성 있는 행위조차도 아닌, 다만 여기저기서 산발할 뿐인 동작들은 고립된 익명적 개별자, 이 세계를 점령한 고독을 표지할 따름이었다.

​국립현대무용단 ‘20▲△’ ⓒAiden Hwang​
​국립현대무용단 ‘20▲△’ ⓒAiden Hwang​

2부는 안전요원 제복을 착장한 일군의 커넥터들의 입장으로 시작된다. 한 명이 두 명의 관객을 담당하는데, VR 헤드기어를 장착해주고 관람 중 불편감이 느껴지면 손을 들라고 일러준다. 관객의 물리적·심리적 안전을 관리해주는 조력자이지만 동시에 감시하는 시선이기도 하다. 상당수의 갑작스런 개입과 그들의 이중적 존재, 작품의 연속성을 해치는 단절감. 세계의 구조, 삶에의 인상을 닮았다. 불편하고 불쾌(쾌의 상반으로서)하지만 친숙한 이질감.

​국립현대무용단 ‘20▲△’ ⓒAiden Hwang​
​국립현대무용단 ‘20▲△’ ⓒAiden Hwang​

VR 내 세계도 이중적 구조를 지닌다. 기암절벽과 해안, 양치식물과 고목이 무성한 숲속, 분화 흔적을 지닌 화산 등 문명의 바깥, 태고(太古)를 환기하는 자연이 전반부의 세계다. 민소매의 짧고 흰 튜닉을 입은 여성 무용수 한 명이 그 세계를 돌아다닌다. 그녀는 때때로 자기몰입적 춤을 추는데 1부의 춤들에 변별하여 한결 자필적이다. 관객도 얼마간 자의적일 수 있다. 그녀를 주시할 수도, 마치 현실세계인 양 자신을 기점으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는 이미지 세계 어디에든 임의로 시점을 둘 수 있다.

국립현대무용단 ‘20▲△’ ⓒ이현우
국립현대무용단 ‘20▲△’ ⓒ이현우

정면(正面)하는 프로시니엄 무대와는 확연히 다른 관계 맺기다. 문명의 설계와 작가의 의도, 타자들의 작위(作爲)로부터 한결 자발적일 수 있다. 그렇다고 결코 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다. 증강현실(增强現實, augmented reality, AR), 현실 이미지에 덧대어진 가상 이미지들. 강화된 인공. 부작위(不作爲)를 가장한 그 중첩된 작위들은 나의 감관에 훨씬 가깝고 조밀하게 맺힌다. 그 사태는 실감과 멀다. 고백했다시피 과민한 나는 하늘, , 수평 어디에 시선을 두어도 멀미를 느꼈다. 손을 들어 알려야 할까 포기를 망설일 즈음, 소녀는 외딴 집을 찾아낸다. 집 안이라면 안락할 수 있을까. 대문을 열고 그녀는 루이스 캐롤의 앨리스처럼 다른 차원을 안내한다.

​국립현대무용단 ‘20▲△’ ⓒ이현우
​국립현대무용단 ‘20▲△’ ⓒ이현우

열면 열리는 세계 20▲△〉에서 길 잃기 : 타인의 방

이제부턴 본격적으로 현재적 고독에 대한 탐사다. 두 번째 차원에 입장하면 낡고 허름해 보이지만 친숙함을 주는 주택의 3차원 그래픽스가 천천히 회전을 하고 있다. 어찌하다보면 탐색 중간에 튕겨져 나와 다시 만나게 되는 이 이미지는 가상세계의 언어를 명령한다. 리로딩(re-loading), 다시 접근해야 합니다. 렌더링(rendering), 당신의 고독도 수집하고 있어요.

어떤 계기로 계단을 오르게 되는지는 모르지만 계단을 지난다. 울퉁불퉁하고 이끼 낀 오래된 계단의 미감은 실사(實寫) 이상으로 생생한데 그 익숙함에 대한 나의 경험은 생경하다. 나는 그 계단들을 발 디딤의 감각 없이 일상적 속도의 몇 배속으로 지나친다. 유령이 된 느낌, 조밀해지는 세계의 왜상(歪像)과 희박해지는 존립감, 불안과 고독의 원인들.

계단, 수돗가를 지나면 오래된 살림살이가 놓여 있는 단칸방이다. 좁지만 그것의 공간감은 짙다. 천장을 보면 높아지고 바닥을 보면 깊어진다. 팽창하는 세계를 따라 부풀어오르는 불안함과 죄책감(의도치 않은 침입과 관음), 조심스레 방 안을 기웃거리다보면 어딘가가 점멸한다. 파르르 떠는 형광등이나 턱없이 맑은 소리를 울려내는 풍경 같은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면 다른 방으로 빨려들어간다.

국립현대무용단 ‘20▲△’ ⓒ김세현
국립현대무용단 ‘20▲△’ ⓒ김세현

주저하였으므로 그리고 그 세계의 작동 방식을 인지하지 못한 채였으므로 초연에 경험된 장소들은 몇 장면이 못 된다. 재연에서는 기왕 마음먹은 바대로 가능한 많은 방들을 출입하려, 가능한 많은 이들을 보려 움직여 다녀본다. VR 세계의 설계자 전봉찬의 답변에 의하면 이 세계 내에는 여덟 명과 열 개의 방이 있다고 한다. 한 관객에게 주어진 물리적 시간은 20여 분(전반부를 포함하여), 누구도 열 개의 방을 모조리 경험할 수는 없다고 그랬다. 무수한 경우의 수를 품은 작품, 누군가는 이를 생성 가능성이라 판독하겠지만 어찌해도 미지가 남는 작품세계라, 나는 좀 곤란하다. 너무 광활하고 너무 복잡하여 대부분의 일들과 사람들이 서로 이해되지 못한 채 흘러가버리는 이 화해 없는 세상에 소통 불가능의 구조 하나를 더 얹는다, 예술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각각의 방에서는 고독한 자들이 각자 자신의 고독을 실행하고 있다. 텔레비전을 켜고 힙한 춤을 추어보는 누군가, 웅크려 앉아 있는 누군가, 책걸상을 오르내려보거나 벽을 밀어보거나 하는 누군가들고립의 상황인식을 지우고 싶을 때 외로움을 밀쳐내버리고 싶을 때 우리 모두가 해보는 짐짓 과잉의 춤. 고독한 타인들을 방문하였으나, 나는 심지어 거기에 없는 자였고, 그러므로 그들은 계속 고독한 채로 남겨졌고, 그 고독의 주거지를 헤매어 다닐수록 나의 고독 역시 심화될 뿐이었다.

국립현대무용단 ‘20▲△’ ⓒ김세현
국립현대무용단 ‘20▲△’ ⓒ김세현

일시 정지. 다시 커넥터들의 도움을 받아 현실세계에 복귀하면 1부로부터의 연속이다. 어찌 그 지독한 고독을 해소할 수 있었는지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여덟 명은 달라졌다. 그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착석한(초연 때는 불규칙하게 놓인 의자, 재연 때는 구역된 방석에) 관객 사이를 누비며 춤으로 황량했던 시공간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재연에서는 본격적인 군무의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이제 표정을 지닌 그들은 관객과 눈을 맞춘다. 한 명씩 손을 잡아 이끌어 무대 복판에 뉘인다. 휴식, 죽음, 어쨌든 고독은 사라지고 황폐했던 심신은 비로소 온유해진다. 작품은 다행히 그렇게 끝을 맺는다.

국립현대무용단 ‘20▲△’ ⓒAiden Hwang
국립현대무용단 ‘20▲△’ ⓒAiden Hwang
국립현대무용단 ‘20▲△’ ⓒAiden Hwang
국립현대무용단 ‘20▲△’ ⓒAiden Hwang

각설. 들이 들이 되어버리는 연유에 관하여

팔순의 아버지가 묻는다. “앞으론 대학교수라는 직업이 없어진다지?” 시중을 달구고 있는 챗GPT(ChatGPT) 기사를 읽으신 게다. “인류가 제거될지도 몰라요.” 신랄해지진 말자 해도 초대형 인공지능이 마침내 일상에 모습을 드러낸 초유의 사건에 신경이 곤두서는 걸 어쩔 수 없다. 대화형(chat), 글과 그림과 동영상 무엇이든지를 생성해낼 수 있는(generative) 능력을 사전에 미리 학습한(pre-trained) 이 최신형 인공지능(AI)이 지녔다는 능력의 실체는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막대한 양의 정보를 처리하는 연산 기술이다. 거대언어모델(LLM: large language model)로 애당초 3천억 단어와 5조 개의 문서를 입력 받고 태어난 이 AI는 게다가 1초에 312조 번의 연산을 실행해내는 하드웨어 능력에 기반한 딥러닝(deep learning) 방식으로 가공할만한 양의 무엇이든지를 산출해낼 수 있다고 한다.

딥러닝’, 인간의 뇌신경회로 작동방식을 차용했으니 인공지능들은 인간에게 친연적일 것일까? 뇌과학이 완성 단계이던가? 인간은 과학적으로 분석 가능한 대상인가? 인간의, 인간 사이의 불확실성들은 막대한 확률의 수치로 보강 가능한가? 인류에게 AI는 정말 필요한 존재일까. 출시 몇 개월 만에 미국 명문대학의 로스쿨이며 MBA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였다 등등 요란벅적한 성과를 발표하고 있는 이 거대지능. 개발자들은 이미 자신들이 탄생시킨 챗GPT가 내어놓는 결과들이 어떤 연산과정을 거쳤는지를 추론해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어린아이들에게 당분간은 이것은 꽃, 저것은 강아지, 간단한 식별을 가르칠 수는 있지만 그가 나름의 사유방식을 구축하고 그 자신의 경험치를 통해 판단하기 시작하면 그 견해의 과정과 내역을 완벽히 알 수 없고 그러므로 온전한 이해와 동감이 불가능한 타인이 되는 것과 유사하게. 이제 유사 이래 가장 막강하고 가장 이질적인 타자 챗GPT가 인간세계에 우뚝 섰다. 합일할 수 없는 타인들끼리 살아내야 하는 것이 비극의 원천 아니던가. 그 비극을 인간을 가뿐히 초월하는 그리하여 제어 불가능한 무엇이 해결할 수 있다고?

납득할 수 없고 해결할 수 없는 인간의 컴컴한 구석을 말할 때 인류는 원죄라는 단어를 사용해왔다.챗GPT의 원죄라면 그것의 소속에 기인한다. 그것의 탄생을 지원한 자본, 그것을 조직해낸 정보의 원천이 한 국가 소관이다. 리터러시의 문제가 더욱더 노골적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다른 의견과 입장이 얽혀있다는 것이 세상사의 어려움, 제아무리 챗GPT라도 정답을 구해낼 수는 없다. 확률적으로 그럴싸한것들을 찾아낼 뿐인 챗GPT는 자신이 연산한 유사진실을 세상에 내어놓음과 동시에 자신의 정보원천에 포함시킬 것이다. 원래도 구하기 힘들었던 진실은 그 포화도가 점점 더 희박해질 것이고 인류는 소위 가짜뉴스의 횡행과 그로 인한 반목을 영원히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비인간적인 챗GPT에게 가장 결여된 것은 윤리다. 이 막강해진 기술체는 과연 스스로 그 자신의 내부에 양심혹은 선용(善用)’이라는 기제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챗GPT는 벌써 떠들썩하게 활약을 개시했는데 인간은 모두의 공생을 위해 한계를 선 긋지 않았다. 소설이며 영화며 미래를 그린 수많은 작품들이 기술과 불화하는 인류의 위험을 경고해왔음에도. ‘신상에 경도되어 얼리 어댑터의 삶을 경쟁하는 인류의 미래는 유토피아일까, 디스토피아일까.

국립현대무용단 ‘20▲△’ ⓒAiden Hwang
국립현대무용단 ‘20▲△’ ⓒAiden Hwang

인간에게 긍정적인 창조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윤리와 사유 능력으로부터 발휘되는 것이리라. 아이로니컬하게도 윤리의식을 장착하지 않은 이 거대 연산기술에게 가장 먼저 타격을 입은 업체는 미국의 온라인 판타지 및 SF 잡지사인 클락스월드(Clarkesworld). 2006년에 창간하여 투고의 방식으로 관련 장르 작가들을 탄생시켜온 이 잡지사의 편집장 닐 클라크(Neil Clarke)는 올 2월을 기점으로 더 이상 투고를 받지 않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원인은 AI 기술에 의한 투고량의 폭증.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원전(原典)과 복제, 저작권, 창작윤리 등 안 그래도 첨예했던 예술의 공방은 더욱더 복잡다단 합의 불가능한 상태에 교착할 것이고, 디지털 시대로 말미암아 제기되기 시작한 잊힐 수 있는 권리는 확보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인간적이기를 선언하는 예술이 아방가르드의 위상을 차지할 날이 오겠지만, 그때의 우리에겐 막대한 자본과 기술정보권력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어떤 힘이 남아있을까?

각설하고. 소통 불발된 너무 많은 것들이 그냥 스쳐 지나가고 그렇게 너무 많은 것들이 나의 앞에도 뒤에도 남겨지는 것. 그 광포(狂暴)한 세계의 운동 앞에서 어찌해볼 도리 없이 막막해지는 것. 그게 나에겐 고립감, 고독이다. 기술과 손잡는 예술에게, 혹은 기술에 적응하라고 속삭이는 예술기관에게 묻고 싶다. 기술이 정말 우리를 구원할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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