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오페라 초심자를 배려한 현명한 재구성 - 성동문화재단 '라 보엠’
[공연리뷰] 오페라 초심자를 배려한 현명한 재구성 - 성동문화재단 '라 보엠’
  • 이용숙 공연평론가
  • 승인 2023.04.17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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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프리뷰=서울] 이용숙 공연평론가 = 성동문화재단은 지난해 3월 <라 트라비아타>, 10월 <카르멘>에 이어 올해 3월 31일과 4월 1일 양일에 걸쳐 푸치니의 <라 보엠>을 소월아트홀 무대에 올렸다. 이 세 오페라 프로덕션은 오페라나 클래식음악에 익숙하지 않은 초심자 관객들도 지루함 없이 집중해서 볼 수 있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진입장벽이 높은 오페라 장르에 초심자 관객이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우리 공연계에서는 오랜 세월 여러 방식의 시도가 이루어져 왔다. 몇몇 방식은 때로 성공을 거두기도 했지만 여전히 오페라는 어렵다는 선입견이 존재하는 게 사실이다. 오페라에 큰 애정을 지닌 윤광식 성동문화재단 대표이사는 이런 심리적 장벽을 허물기 위해, 이제까지 다양한 규모와 방식으로 오페라를 연출해온 연출가 이의주, 소프라노 박정원 한양대 명예교수 등과 뜻을 모았다. 그리고 애호가가 아니어도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오페라 프로덕션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지난 해 3월에 재개관한 520석 규모의 소월아트홀은 공연장 관람석을 새로 교체하고 음향과 조명장치 등을 개선해, 오페라 전용극장은 아니지만 오페라도 공연할 수 있는 기본 여건을 갖췄다. 4월 1일 <라 보엠> 공연 때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 중에는 성동구 지역주민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해 지역 공연장 재개관의 의미를 살렸다.

'라 보엠' 1막-처음 만난 로돌포(테너 최원진)와 미미(소프라노 박수진) (사진제공=성동문화재단)

익숙한 오페라의 새로운 재현 방식

위의 오페라 작품들은 국내에서도 해마다 수많은 공연장 무대에 오르는 인기작들이지만, 성동문화재단에서는 작품마다 제작 포인트를 독특하게 설정해 관객의 관심을 끌었다. 재개관 후 공연한 <라 트라비아타>의 경우에는 오페라에 조역으로 등장하는 의사 그랑빌의 시각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방식을 택했고, <카르멘>의 경우에는 안무 요소를 강조해 ‘무용극’이라는 장르 명칭을 사용했다. 이번 <라 보엠>에도 도입부부터 무용수들이 등장해 남녀 주인공 미미와 로돌포, 무제타와 마르첼로 두 커플의 사랑과 이별을 상징적인 춤으로 보여준다.

'라 보엠' 2막-가수들과 무용수들이 함께 연기한 카페 모뮈스 장면 (사진제공=성동문화재단)

<라 보엠>은 19세기 파리에서 삶과 예술을 지탱하려고 분투한 가난하고 젊은 예술가들의 초상을 그렸다. 남성 배역들은 예술가이지만 여성 배역들은 생존을 위해 갖가지 노동을 하고, 그 중에는 경우에 따라 성매매도 포함된다. 가난 때문에 사랑이 쉽게 시작되지만 바로 그 가난이 사랑의 지속을 방해하고, 결국 죽음의 결별에 이른다. 유회웅의 안무에는 그에 따른 슬픔과 회한이 배어 있었다.

연출가 이의주는 공연 드라마투르기를 맡은 작가이자 프로듀서 조은빈과 함께 <라 보엠>의 장면들을 재구성했다. 두 시간 가까운 전막 공연을 80분 길이로 줄인 이번 프로덕션은 1막부터 4막까지의 주요 아리아와 중창을 살렸고 합창을 생략했다. 회전무대가 아닌 고정무대의 조건에 맞게 1막과 2막 무대 배경을 좌우에 설치해 관객은 두 무대를 동시에 바라보게 된다. 그러나 테이블과 의자들, 소파가 있는 왼쪽의 1막 무대와 카페 모뮈스의 테이블들이 놓인 오른쪽 2막 무대의 공존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무대디자이너 최진규).

2막 초반에 거리로 쏟아져 나와 크리스마스이브를 즐기는 군중의 합창은 등장하지 않지만, 테이블에서 대화를 나누는 주인공들과 무제타의 등장만으로도 마치 2막 전체를 본 듯한 풍성한 감흥을 얻을 수 있다. 왼쪽 무대에 설치된 이동로는 3막의 옥외 장면을 더욱 자연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무대 위에 설치된 구조물은 파리의 굴뚝들을 떠올리게 하는 비교적 단순한 구조였지만, 장면마다 변화하는 조명에 의해 다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일이 가능했다(조명디자이너 김민재). 무대에 놓인 일상적인 성격의 가구들은 이 프로덕션을 다른 지역 공연장에서 공연할 경우 현지에서도 조달이 가능할 것으로 보여 재공연의 유연성을 담보했다.

'라 보엠' 2막-푸치니 역의 무용수(한승수) 무제타(소프라노 김형순)와 마르첼로(바리톤 최병혁) (사진제공=성동문화재단)

소월아트홀은 오케스트라 피트가 없는 다목적 공연장이고 극장 규모가 제한적이어서 일반적인 푸치니 오페라의 오케스트라 편성은 불가능했다. 진주시립교향악단 상임지휘자 정인혁이 지휘한 앙상블은 음악코치 김경희의 피아노 반주에 바이올린, 첼로, 퍼커션 각 1인이 전부였다. 그러나 중간에 커트된 부분이 많은 장면과 장면 사이의 연결이 음악적으로 대단히 세심하게 이루어진 덕분에 기대를 뛰어넘는 오케스트라 효과를 불러왔고, 각 연주자들의 연주도 뛰어났다.

‘작은 오페라’의 지루함 없는 설득력

많은 장면이 생략되면서 시인 로돌포와 화가 마르첼로의 친구들인 음악가 쇼나르, 철학자 콜리네 역은 성악가가 아닌 무용수로 바뀌었다. 이들은 노래하는 대신 개성 있는 몸짓으로 자신들의 역할을 표현하며 장면 간의 효과적인 연결을 도왔다. 2막에서 무제타와 함께 카페 모뮈스에 등장하는 부유한 노인 알친도로 역할을 이번 프로덕션의 의상디자인을 담당한 무용수이자 안무가 한승수가 맡은 것도 이채로웠다. 한승수는 초반부터 푸치니의 모습으로 무대에 등장해 자신이 음악적으로 창조한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를 지켜보았고, 알친도로 역도 푸치니의 외모를 빌려 연기했다.

'라 보엠' 3막-헤어지는 미미와 로돌포, 무제타와 마르첼로 (사진제공=성동문화재단)

제작비 규모를 감안하면 전반적으로 놀랄 만한 공연 수준이었는데, 화룡점정은 탁월한 성악진이었다. <라 보엠>의 인물 설정에 꼭 어울리는 젊은 성악가들이 마음을 울리는 아리아와 중창을 선사했다.

4월 1일 공연에서 여주인공 미미 역을 노래한 소프라노 박수진은 인상적인 미성으로 첫 아리아 ‘내 이름은 미미’를 소박하게 선보였고, 3막의 ‘사랑의 부름에 이끌려 떠나온 그곳으로’와 4막 로돌포와의 재회 장면에서 1막보다 훨씬 드라마틱한 감정선을 엮어내며 관객을 설득했다. 로돌포를 노래한 테너 최원진은 첫 아리아 ‘그대의 찬 손’에서 약간의 난관이 있었지만, 전체적인 음악적 해석력이 뛰어났고 아름답고 섬세한 가창으로 감동을 주었다. 무제타 역의 소프라노 김형순은 밝고 투명한 음색과 분방하고 자신감 넘치는 연기로 무제타의 전형을 창조했다. 어떤 배역을 맡아도 아쉬움이 없을 만큼 철저히 그 인물로 변신하는 바리톤 최병혁은 이번 마르첼로 역도 유연하고 치밀한 가창으로 소화해 극의 긴장감과 재미를 높였다.

가수들의 도플갱어처럼 미미와 무제타 배역을 맡은 무용수 김은정과 김아림은 노래로 표현하기 어려운 서정미를 춤으로 대신 펼쳐보였고, 쇼나르 역과 콜리네 역도 가수들 대신 무용수 고민건과 이선태가 연기했다.

'라 보엠'-작은 편성으로 큰 효과를 낸 지휘자와 연주자들 (사진제공=성동문화재단)

구마다 지역마다 적절한 규모의 훌륭한 공연장들이 있다. 성동문화재단의 <라 보엠>을 비롯한 오페라 공연들은 ‘이 많은 공연장들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탁월한 답변이었다. 집중도 높은 공연 감상 후 긍정적인 소감을 전한 구민들의 반응이 그 증거가 되었다. 형식 융합과 다채로운 장치로 지루함 없이 초심자를 설득한 ‘작은 오페라’의 좋은 예였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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