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용 다시보기-3] 모던 승무 '가사호접', 남성 신무용의 서막을 열다
[신무용 다시보기-3] 모던 승무 '가사호접', 남성 신무용의 서막을 열다
  • 황희정 무용사학자
  • 승인 2023.05.21 07: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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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 1935년 '승무의 인상' (사진출처=동아일보 1935년 1월 23일)
그림 1. 1935년 '승무의 인상' (사진출처=동아일보 1935년 1월 23일)

[더프리뷰=서울] 황희정 무용사학자 = <가사호접>은 1935년 1월 26-27일에 열린 제2회 조택원 무용발표회에서 <승무의 인상>이라는 제목으로 초연되었다. 조택원(1907-1976)이 한국의 전통 승무를 보고 자신의 해석을 넣어 만든 의미가 담겨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의 춤을 근대적으로 개척해보려는 첫 시도로 만들게 되었는데, 이후 시인 정지용의 제안으로 <가사호접>이라 개칭, 1938년 파리 공연부터는 이 제목을 사용하였다. 조택원은 새 제목을 꽤나 맘에 들어했다. 1973년 출간한 자서전의 제목도 『가사호접』이니 말이다. 시적 운치와 함축이 담긴 사자성어는 작품의 품격을 높여주었다. 가사(袈裟)는 승려가 장삼 위에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쳐 입는 법의이다. 호접(胡蝶)은 나비이다. 춤을 출 때 가사가 나부끼는 모습이 나비와 같음을 비유한 것이리라. 조지훈의 1939년 시 <승무>에서 승무의 하얀 고깔 모습을 나비와 접목한 “나빌레라”(나비 같구나)보다도 한발 앞선 표현이다. 나비는 외양을 비유할 뿐 아니라 승려의 번뇌와 종교적 소망을 동시에 함축한 자기 정화·재생을 담고 있다.

<가사호접>은 남성 신무용의 서막을 연 초기작으로 후세대 무용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 작품이다. 현재의 기준에서 보아도 진보적이고 세련되었다. 맨발(그림 1)에 양악을 사용한 것은 현재에도 감히 시도하기 어려운 파격이다. 이 작품은 전통 승무를 개작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근대의 무대 춤으로 창조한 것이다. 여기에는 조택원의 시대의식과 예술적 사명감이 녹아 있어 근대 지식인으로서 그의 무용관을 엿볼 수 있다.

모던 승무 <가사호접>

조택원의 <가사호접>은 고뇌하는 파계승을 그린다는 점에서 전통 승무와 공통점을 갖지만, 그것을 풀어가는 방식은 상당히 근대적이다. 전통 승무가 추상적인 동작으로 구성되는 것에 비해 <가사호접>은 짧지만 구체적인 스토리를 가진 극무용이다. 속세를 동경한 승려가 심산유곡을 버리고 새벽녘에 사바세계로 내려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속세에 발을 딛는 그의 얼굴엔 동경과 호기심이 가득하다. 마침내 속세에 다다르자 그만 가사를 집어던지고 속세의 즐거움에 정신을 놓는다. 음악은 경쾌하게 바뀌고 승려는 기쁨에 취해 환희와 광란의 춤을 추며 논다. 놀다 놀다 지쳐 쓰러진다. 말초적 즐거움은 한순간의 쾌락일 뿐 마음은 공허해진다. 옛 시절 종교적 충만함으로 가득하던 때가 그립다. 다시 가사를 집어 들고 산으로 가려고 해보지만 이미 파계한 몸. 되돌릴 수는 없다. 이리도 저리도 가지 못하는 승려는 신경질적으로 가사와 장삼을 팽개치고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는 내용이다.

스토리는 마임을 쓰지 않고 내면의 감정을 동작으로 풀어낸 현대무용의 기법을 따르고 있다. 6분 가량의 길이에 무용수의 희로애락이 변화무쌍하게 바뀌므로 연기력을 상당히 요하는 작품이다. 미국 자연사박물관에서 이 공연을 본 한 평론가는 “가장 드라마틱한 철학적 표현과 영혼의 번민…. 신비스러운 판토마임의 춤”이라 평하면서, 철학적 번뇌를 극적으로 표현한 것에 주목하였다.

전통 승무와 <가사호접>이 가장 차별되는 점은 무엇보다 움직임 방식과 무대 사용이다. <가사호접>에서 가장 많은 동작은 돌기이다. 양팔을 펴고 장삼 소매를 펄럭이며 빙글빙글 돌기를 반복한다. 서양 춤처럼 여러 바퀴를 연속으로 도는 동작은 전통춤에는 보이지 않는 신무용적 특징이다. 돌면서 혹은 잰걸음으로 무대를 휘저으며 빠르게 이동하며 무대 곳곳을 누비는 데에서 남성스러운 힘이 느껴진다.

<가사호접>에서는 승무의 북놀음이 없다. 먹색 장삼 안에 북채를 쥐지 않고 손목으로만 장삼을 다루는데, 소매의 길이가 전통 승무보다는 확연히 짧아 역동적인 다양한 움직임이 가능하다. 북놀음이 없으므로 작품은 철저히 춤 중심이다. 폭넓은 무대 사용과 속도감 있는 동작으로 별다른 소도구 없이도 무대를 꽉 채운다. 극이 전개되는 춤이므로 고깔 안의 얼굴 또한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다. 전통 승무가 고깔 안에 얼굴을 묻고 자신의 내적 세계에 몰두한다면, <가사호접>은 무용수의 표정이 작품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사바세계에 다다랐을 때는 급기야 고깔과 장삼을 벗고 얼굴을 완전히 드러내며 감정을 밖으로 발산한다. 안으로 수그리기보다는 가슴을 열고 호흡을 흉부에 둔다. 시선은 다소 위를 향하며 팔다리를 길게 뻗어 몸을 확장시키는 기법은 서양무용으로 몸을 훈련한 신무용가들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조택원 춤의 뿌리가 표현주의 현대무용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조택원이 염원한 ‘전통의 현대화’는 이렇듯 모던 승무인 <가사호접>에 집약되어 있다.

희극 춤에서 진지한 예술이 된 승무

고래로 승무는 승려의 복식을 차려입은 중이 본분을 벗어난 행위를 하는 것을 풍자한 춤이다. 1848년 이유준(李有駿, 1801-1867)이 의주 관아 진변헌(鎭邊軒)에서 관람한 승무는 4인 기녀가 추었다. 2명은 승려의 장삼과 고깔, 가사를 착용하고 백팔염주와 석장(승려용 지팡이)을 짚은 모습이었고, 2명은 어린 기생이 어른 기녀 차림으로 승려를 유혹하여 파계시킨 후 서로 어울려서 맞춤을 추던 희극 춤이었다. 1872년 정현석(鄭顯奭, 1817-1899)의 『교방가요(敎坊歌謠)』의 승무 역시 승려와 상좌, 기녀 2인, 별감이 등장하는 갈등 구조의 희극 춤이었다. 근대 기생들의 무대에서도 이러한 성격은 이어졌다. 조선의 춤을 무대화한 한성준의 제1회 무용발표회(1936)에서는 승려가 장삼을 벗는 연출로 인해 불교 모욕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그림 2. 무대에 선 조택원(사진출처: 『춤의 선구자 조택원』 p.123)
그림 2. 무대에 선 조택원
(사진출처=『춤의 선구자 조택원』 p.123)

조택원은 김백옥이라는 기생에게서 승무를 배웠으나 그의 예술적 갈증을 채우지는 못했다. 그는 광대나 기생들이 추는 승무를 보며 ‘잡스럽다’는 느낌을 가졌다. ‘잡스럽다’는 것은 가볍고 상스럽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승려의 번뇌라는 설정을 상실한 채 때로 웃으며 추는 그들의 승무는 예술이라기보다는 그저 유희로 비춰졌다. 조택원은 이것이 예술이 되려면 나의 생각, 나의 해석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 그가 원한 것은 작가관이 투영된 현대무용처럼 고급 예술로서의 승무였던 것이다. 범례로 도리스 험프리, 마사 그레이엄, 마리 비그만 등의 현대무용 1세대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이 창작한 춤은 지독히 진지하고 심각했다. 이는 그들의 새로운 움직임이 발레와 같은 무의미한 테크닉의 나열이 아닌 진지한 예술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조택원 역시 초기 표현주의 현대무용가들처럼 승무를 진지한 예술로 만들고자 했다. 종래 승무가 불교에서 감득되는 종교적 기상이나 심오한 철학적 정신이 부각되지 못하고 미소 짓고 재주 부리기만 열중하는 내면 결핍에 대한 예술적 반발이었다.

무용, 특히 조선의 춤을 순수 무용예술로 격상시키고자 했던 조택원의 시대의식과 사명감은 <가사호접>을 탄생시켰다. 이 작품은 그런 점에서 같은 시대 신무용가 최승희의 안무관과 대비된다. 지식인으로 같은 스승에게 사사하고 조선의 정서와 춤사위를 담으려 한 점에서 조택원은 최승희와 동질적이지만, 최승희는 조선의 춤사위를 가볍고 경쾌하게 풀었으며 여성미를 강조하였다. 반면 조택원은 지독히 진지했던 1세대 현대무용가들의 세계관에 조금 더 가깝다. 승무에 담긴 불교적 의미를 복원하여 주요 성격으로 위치시켰다. 이러한 승무의 성격은 이후 전통 승무가 점차 심오한 종교적 내용으로 귀착되는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최초로 작곡 음악을 쓴 한국 창작품

<가사호접>은 한국 최초로 특정 작품의 창작에 따라 작곡한 음악을 쓴 작품이다. 그동안은 무용을 할 때 으레 음악을 놓고 작품을 짜기 마련이었다. 즉, ‘음악에 맞춰 추는 춤’이었다. 하지만 <가사호접>은 작품을 상정해 놓고 이에 맞는 작곡을 하여 ‘춤에 의한 음악’을 만들었다. 춤에 따른 곡 작업은 작품에 꼭 들어맞는 음악을 씀으로써 둘을 일체화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높인다.

<가사호접>은 또한 안무가 음악보다 주도적인 위치를 점유함으로써 무용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획득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서양에서는 19세기 고전발레부터 음악에 종속되지 않으려는 시도들이 있어왔다. 마리우스 프티파는 차이코프스키 같은 작곡가와 긴밀한 작업을 통해 안무가 가장 중요한 것이 되도록 하였고, 음악이 발레의 이야기 전개에 크게 기여하도록 하였다. 이사도라 덩컨은 감상용 음악을 무용에 사용함으로써 무용음악의 한계를 없애고 무용의 위상을 끌어올렸다. 마리 비그만은 반주 없이 정적 속에서 공연하며 무용의 자족성을 주장하였다. 서구의 이런 작업으로 무용은 독립된 예술 장르로 인정받게 되었다. 따라서 <가사호접>을 위해 음악을 작곡했다는 것은 무용을 독자적인 순수 예술로 취급한 한국 최초의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조택원은 김준영과 함께 두 달 동안 곡 작업에 매달렸다고 한다. 김준영은 대중음악 작곡가로 한국 전통음악의 어법을 근대 서양음악의 어법으로 재정리하여 주목을 끈 작곡가이다. <가사호접>의 음악 역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레가토(둘 이상의 음을 이어서 부드럽게 하는 연주) 주법으로 연주하여 양악으로 민요를 노래하는 듯한 선율이다. 음악은 애조 띤 굿거리로 시작하여 경쾌한 타령으로 갔다가 다시 굿거리로 돌아와 끝맺는 수미상관의 형식을 지니고 있다. 이는 전통 복장에 신무용 움직임을 하는 <가사호접>과 절묘하게 어울리며, 작품이 무용뿐 아니라 음악에서도 ‘전통의 현대화’를 실천하는 데 일조하였다.

현재의 <가사호접>

<가사호접>은 조택원이 생전에 가장 애착을 가진 작품이었다. 첫 전수자는 송범이었다. 송범은 먹장삼이 아닌 흰 장삼을 입었다. 소매는 전통 승무처럼 길어졌는데,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긴 장삼을 다루어 맨손임에도 소매가 거추장스럽지 않다. 장삼의 색깔이나 소매길이는 전통적 상징이 내포된 것이 아니므로 전수자의 미적 시각에 따라 바꾼 듯하다. 조택원이 타계하기 2-3년 전에는 부인인 김문숙에게 전승하였다. 김문숙 역시 긴 소매의 흰 장삼을 입었고, 거기에 북채를 추가하였다. 장삼을 손목의 힘뿐 아니라 북채로도 뿌리면 더 멀리 소매가 날려 무대에서 몸을 더욱 확장하는 효과가 있다. 이후 다른 전승자들 역시 북채로 소매를 뿌리며 연행하는 경향이다.

1993년에는 <가사호접>이 사단법인 한국무용협회 명작무로 지정되었다. 김문숙을 주축으로 한 서울춤아카데미가 같은 해에 결성되어 그 맥을 계승 발전시켜왔으나, 김문숙마저 올해 별세하였다. 현재는 이를 전수한 한국무용 전공자들에 의해 연행되고 있는데, 이들의 <가사호접>은 몇몇 지점에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우선, 대학에서 체계적인 한국무용 수업을 익힌 세대이니만큼 신무용적 색채보다는 한국 전통 호흡을 넣은 ‘한국무용’의 모습에 가까워지고 있다. 보다 차분하고 정갈한 분위기이다.

한편, 현재의 <가사호접>에서 속세의 유혹에 빠진 파계승의 환희에 찬 표정이 약화된 것은 아쉬운 점이다. <가사호접>은 사바세계에 한발 한발 내딛는 도입부에서 호기심 가득한 동경의 표정이, 속세에 물들었을 때는 광인 같은 즐거운 표정이, 산으로 되돌아가지 못하는 마지막에는 고뇌하는 표정이 일품인 극무용이다. 조택원은 첫 공연에서 열렬한 연기력으로 호평받았다. 송범 역시 경쾌한 타령으로 바뀌는 장면에서 속세에 빠진 파계승으로 실감 나는 연기를 하였다. 현재는 이러한 부분이 전반적으로 약화되었다. 시종일관 심각하기보다는 안광이 번뜩였던 조택원식 파계승의 연기를 다시 보고 싶은 바람이다.

올해로 <가사호접>이 창작된 지 88년이 흘렀다. 신무용 1세대 작품으로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거치며 전승되고 있다. 근대 무용 유산인 신무용은 점차 고전의 길을 걷고 있다. <가사호접> 역시 영원히 우리의 마음속에 모던한 고전으로 남길 기대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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