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용 다시보기-9] 다시 올 수 없는 젊음, 생의 운명을 대하는 무용가의 마음 - '신로심불로'
[신무용 다시보기-9] 다시 올 수 없는 젊음, 생의 운명을 대하는 무용가의 마음 - '신로심불로'
  • 이정민 무용이론가
  • 승인 2023.07.02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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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프리뷰=서울] 이정민 무용이론가 = 춤은 가혹한 운명을 타고났다. 관객을 사로잡았던 그 찰나의 순간은 순식간에 공간에서 사라지고, 자신의 혼을 불사른 춤은 춤을 지닌 몸과 함께 소멸된다.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말과 글, 또는 이미지로만 살아남아야 하니, 과거에도 지금에도 우리가 알아채지 못한 무수히 많은 춤들이 세상에 태어났고 죽음을 맞았다. 수 십 년 뒤, 숨겨졌던 천재의 작품으로 등극하는 영광을 누릴 길 없는 춤 예술의 속성은 인간사와 닮아있다. 흘러간 세월을 붙잡을 수 없이 죽음을 향해 가는 인간의 생은 아무리 후회하고 애원해 봐도 지나간 순간을 되돌릴 수도, 반복할 수도 없다. 주름지고 노화된 몸은 삶의 역사가 길어지는 만큼 깊어진 지혜와 경험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죽음을 향해 가고, 좋았던 청춘의 기억은 점차 희미해져만 간다. 마음이 늙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면에서 모순적이다. 그렇지만, 마음만은 늙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 아닐까.

춤의 운명과 맞닿은 인간의 운명을 담담하게 때론 비통하게 표현한 작품이 있다. <신로심불로(身老心不老)>. 몸은 늙었지만 마음은 늙지 않았음을 뜻한다. 신무용가 최승희와 조택원, 그리고 오늘의 무용가들은 저마다의 인생사를 몸에 품은 채 지나간 세월을 회상하고 남겨진 삶의 오늘을 사유했다. 같은 이름의 다른 춤을 관통하는 주제는 시대가 달라도 변하지 않는 자연의 섭리, 생의 운명을 대하는 인간의 마음이다.

<신로심불로>는 최승희, 조택원의 신무용 작품 중 하나로, 제목은 같지만 다른 춤이다. 최승희가 춤을 초연한 시기는 1937년 4월, 그녀의 나이 26세였다. 당시 이왕직 본청의 주최로 창덕궁 인정전 서행각 가설무대에서 개최된 순종 효황후를 위한 특별공연에서 <신로심불로>와 <초립동>이 처음으로 무대에 올랐다. 작품의 음악은 고전곡으로 구체적으로 알려진 바 없으나, 1939년 파리 살 플레옐 극장에서 공연된 <Rêve de sa jeunesse(젊은 날의 꿈)>에서 타악기 반주를 했다고 명시하였다. 작품의 내용은 노인이 책을 읽다가 젊은 날의 추억을 떠올리면서 청년 시절의 모습처럼 춤추려고 하지만 늙고 힘없는 다리가 말을 듣지 않아 실망하면서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구성이다.

조택원이 춤을 초연한 시기는 그로부터 12년이 지난 1949년 2월 미국 자연사박물관에서의 공연으로, 공연 타이틀은 'Korean Springtime in Dance and Song(춤과 노래로 만나는 한국의 봄날)'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 42세로, 심상건, 심태진, 김옥진 등 연주자들과 무용단을 이끌고 미국 순회공연을 펼치고 있었고, 소고춤, 봉산탈춤, 가사호접, 사랑가 등 한국 민속춤과 고전적 소재의 작품을 주로 무대에 올렸다.

사진 1. 좌측은 미국 공연프로그램 중 ‘신로심불로’ 설명, 우측은 미국 자연사박물관 공연 팜플렛 표지(1949)(출처: 『춤의 선구자 조택원』, 137쪽, 146쪽)
사진 1. 좌측은 미국 공연프로그램 중 ‘신로심불로’ 설명, 우측은 미국 자연사박물관 공연 팜플렛 표지(1949)
(출처: 『춤의 선구자 조택원』, 137쪽, 146쪽)

공연 프로그램은 <신로심불로>를 몸은 노화되었지만 마음은 젊은(Body Old, Mind Young) 노인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고 소개하였다. 반주 음악은 심상건의 가야금 산조로, 조택원은 그의 자서전에서 느린 진양조와 빠른 단머리가 하나의 악장을 이루어 작품의 바탕이 되었다고 언급했다. 작품의 내용은 노인이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춤추다가 이내 몸이 늙었음을 깨닫고 자기 모습으로 돌아가는 구성으로, 최승희의 것과 유사하다. 초연 시기는 최승희가 앞서지만 조택원이 <신로심불로>의 상념과 줄거리를 오래전부터 구상하고 있었다고 밝힌 바 있어, 안무의 구상은 30대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렇게 동일한 작품명과 소재를 사용한 것은 신무용기의 한 특징으로, 작품의 안무가 오롯한 예술가의 사고에서 발현된 것이 아니라 민족의 삶과 문화 속에서 채굴되고 무대화되었던 창작 배경을 반영한다. 특히 최승희, 조택원의 <신로심불로>는 서로 다른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일맥상통하는 나름의 의도와 작가 정신을 내포하고 있다.

<신로심불로>는 해외 공연을 염두에 두고 안무된 것이다. 작품이 초연된 시기, 최승희는 일본을 넘어 세계에 조선의 고전무용을 알리고자 해외 공연을 추진하고 있었고, 조택원은 이미 미국에 체류하며 조선의 무용가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이들은 외국 현지의 관객들에게 새로우면서, 조선이라는 낯선 나라의 생활 정서와 문화, 삶의 면면에 공감할 수 있는 소재를 찾아 안무에 직접적으로 접목하였다. 그런데 당시 조선 의상을 입고 사진 촬영을 했던 외국인들은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거진 한 모양으로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담뱃대를 들고"(한설야, 사해공론 1938년 7월호) 있었다. 외국인의 시선에서 조선 정서를 드러낸 전형적 인물상은 '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곰방대를 손에 든 남성'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조택원의 <신로심불로> 속 노인은 그 시기 외국인에게 각인되었던 조선인의 전형과 정확히 일치한다.

사진2. 조택원의 '신로심불로'(출처: 앞의 책, 132쪽)
사진2. 조택원의 '신로심불로'
(출처: 앞의 책, 132쪽)

반면, 최승희의 <신로심불로>는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쓰기는 하였으나, 선비의 흑립보다는 챙이 좁아 <에헤라 노아라> <초립동>의 초립에 가까워 흰 모자에서 노인의 진중함보다는 경쾌함을 떠올리게 한다. 이러한 복식에서 두 무용가의 춤 색이 사뭇 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최승희는 미국 공연 후 열린 기자회견에서 외국인 관객들이 보살이나 봉산탈춤, 천하대장군 등 가장 동양적인 것, 특히 조선춤에 이구동성으로 예술의 극치라며 찬사를 보냈다고 말했다. 즉, <신로심불로>의 노인은 외국인 관객을 겨냥하여 안무한, 의도된 조선인의 모습이었고, 이러한 조선풍의 작품은 현지 관객들의 열렬한 호응을 얻었다.

사진3. 최승희의 '신로심불로'(출처: 『최승희-격동의 시대를 살다 간 어느 무용가의 생애와 예술』, 194쪽) 
사진3. 최승희의 '신로심불로'
(출처: 『최승희-격동의 시대를 살다 간 어느 무용가의 생애와 예술』, 194쪽) 

무엇보다 최승희와 조택원이 <신로심불로>를 통해 특정 인물의 가면을 쓴, 극적 성격의 가면무를 신무용의 한 양식으로 시도하였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승희는 전통 유산인 봉산탈춤, 처용무를 해외 공연에서 직접 추었고, <조선의 유랑패거리> <천하대장군> <풍랑을 헤가르고> 등 기존의 탈보다 단순하고 쾌활한 분위기의 가면을 쓴 작품을 여럿 창작했다. 일례로 1939년 미국 뉴욕 공연에서 춘 <조선의 유랑패거리>는 아름답고 코믹한 가면을 쓰고 춤을 추어 관객의 환호와 앙코르 세례를 받았고, 가면은 활기찬 춤의 분위기를 더욱 우스꽝스럽게 살려주었다. <신로심불로>의 가면 또한 노인의 사실적인 얼굴 표현보다는 긴 수염을 가슴 밑까지 늘어뜨린 사뭇 재미있는 장식으로 꾸며내어 춤의 표현에 웃음을 짓게 하는 포인트가 있지 않았을까 상상하게 한다. 최승희는 월북 이후 소련 순회공연에서도 <신로심불로>를 공연하며 가면무의 스타일을 지속하였으나, 현재 그녀의 춤을 확인할 수 있는 영상자료가 발굴된 바 없어 사진과 글을 통해 춤의 장면을 유추할 뿐이다.

사진4. 조택원을 위해 제작된 '신로심불로'의 가면(출처: 『춤의 선구자 조택원』, 147쪽)
사진4. 조택원을 위해 제작된 '신로심불로'의 가면
(출처: 『춤의 선구자 조택원』, 147쪽)

조택원의 가면은 일본의 조각가 이토 히로시가 제작한 작품으로, 깊게 파인 주름, 백발의 뻣뻣한 수염, 투박하게 뻗은 눈썹, 턱에 닿을 듯 내려간 입꼬리에 노인의 세월이 절절하게 드러난다. 그가 작품에 담아낸 노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한 여름에 노인이 나무 밑에 돗자리를 깔고 누워있다. 그러자 멀리서 은은하게 피리 소리가 들려온다. 그 늘어진 가락의 피리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노인은 차차 흥이 나기 시작한다. 노인은 어깨를 으쓱으쓱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러고는 느린 진양조로 춤이 시작된다. 진양조는 차차 빨라져 격렬한 템포로 옮아간다. 춤에 지친 노인은 끝내 쓰러지고 만다. 이윽고 다시 일어나 앉아 담뱃대를 문 노인은 생각한다. 아아, 내 몸도 이제는 다 늙었구나! 마음은 이토록 날 듯이 젊었는데..."

<신로심불로>의 가면에 각인된 인물의 표정은 노인의 춤에 담긴 이야기와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해준다. 최승희는 조택원의 춤을 보고 "당신 춤에는 소곤소곤 귓속말로 들려주는 듯한 이야기가 들어있어, 그게 좋아."라고 말한 바 있는데, 기록영상으로 전해진 그의 춤을 보면 그녀의 반응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조택원의 <신로심불로>를 감상해보자. 구부정한 어깨와 허리를 간신히 일으키고 한 발 한 발 애써 내딛는 노인의 움직임은 도포 자락을 양손으로 잡고 올리면서 젊은 시절의 회상으로 전환된다. 날렵한 발걸음에 힘이 들어가고 구부러졌던 팔이 양옆으로 시원하게 뻗는다. 한 발로 딛고 회전하다가 껑충껑충 뛰기도 하지만, 몸이 버티지 못해 중심을 잃고 넘어지며 다시 노인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의 몸짓 연기는 노인 본연의 장면과 젊음을 회상하는 장면의 동작이 확연히 다른 질감을 표현하고 있다.

한편, 정인방의 <신로심불로>는 노인이 젊은 날을 회상하며 한판 춤을 추다가 나이 든 몸이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으며 인생무상을 한탄하는 내용으로, 최승희, 조택원의 작품과 주제는 같지만 가면을 쓰지 않고 백발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의 모습으로 꾸며 스타일이 사뭇 다르다. 그는 한성준에게 조선의 고전춤을, 이시이 바쿠의 제자인 스지이 랭코에게 현대무용의 기본을 배운 후 1945년 첫 발표회를 열었고, 이 무대에 올렸던 <신선도>가 훗날 <신로심불로>로 발전되었다. 그는 이후 공연에 따라 의상과 소품, 구성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1959년 33세의 나이에 춘 원각사 개관 공연에서는 검은 도포를 입고 긴 나무 지팡이와 호리병을 바닥에 둔 채 앉은 상태로 춤을 시작하였고, 1984년 제1회 박금술 추모 공연에서는 흰 도포를 입고 앉은 도입의 장면을 덜어내고 선 채로 춤을 시작하였다. 1985년 『한국의 명무』에 실린 공연 사진을 보면 <신선도>의 복식과 소품을 차용한 듯 폭이 넓고 긴 흰 도포를 입고 하얀 깃털로 만든 신선 부채와 호리병을 들고 춤을 추기도 하였다. 호리병의 술을 한잔 걸치고 세월을 한탄하다가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도포를 벗고 한판 춤을 추는 장면, 벗어놓은 도포를 어깨에 걸치고 구부정한 몸으로 아쉬운 발길을 돌리는 장면은 그만의 특징이다. 정인방의 춤은 한국의 토속적 정서를 지닌 춤 기교를 그대로 살리고 있어 "우리 춤의 정상적 모습"(동아일보 1963. 2. 20. 김경옥)이라고 호평받았다.

사진5. 정인방의 '신로심불로'(출처: 좌측은 1959년 원각사 공연에서의 한 장면, 우측은 『한국의 명무』, 434쪽)
사진5. 정인방의 '신로심불로'
(출처: 좌측은 1959년 원각사 공연에서의 한 장면. http://theme.archives.go.kr/next/movie/movieDtail.do?archiveEvntId=0052500974, 우측은 『한국의 명무』, 434쪽)

후배 무용가들에게 창작의 영감을 주며 무대로 소환된 작품은 조택원의 <신로심불로>이다. 그의 춤이 뉴욕에서 공연된 후, 타이티 태생의 흑인 무용가 장 레옹 디스티네가 아프리카 판 <신로심불로>로 개작하였고, 1년 후 같은 장소에서 발표하여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노인의 눕는 장면을 없애고 담뱃대 대신 마도로스 파이프를 물었고, 장구와 가야금 반주 대신 북을 치면서 춤을 추었다고 한다. 국내 무용가로는 최현과 조흥동이 그의 춤을 전승하였고 자신만의 시각을 덧붙여 오늘의 춤으로 재탄생시켰다. 최현은 1975년 조택원의 금관문화훈장 수상 기념공연에서 <신로심불로>를 처음으로 추었다. 그의 나이 46세로 조택원이 초연했던 시기와 비슷한 40대였다. 조택원은 "<신로심불로>는 최현 군 외에는 전수할 무용가가 없다."고 김문숙에게 말할 정도로 그를 아꼈다.

사진6. 최현의 '신로심불로'(출처: ‘이매방 무용인생 50년 특별 기념공연 북소리’ 공연프로그램, 1984)
사진6. 최현의 '신로심불로'
(출처: ‘이매방 무용인생 50년 특별 기념공연 북소리’ 공연프로그램, 1984)

최현은 이후 가면과 갓을 벗고 상투를 튼 본인의 모습으로 춤을 재해석하여 추었다. 그는 자신의 <신로심불로>를 "육신은 늙어도 춤추는 마음은 늙지 않는다. 그것은 춤과 몸에 대한 경외였다... 이 춤의 재현은 풍류를 가슴에 안는 노인의 심정이 젊음으로 승화된 육신의 축복다운 춤이었다."('최현춤향연' 공연 프로그램, 1998)라고 소개하였다. 그리고 스승의 춤을 재현, 재구성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새로운 창작 원천으로 삼아 <허행초>를 안무하였다. 김영태가 헌사한 시와 조택원의 <신로심불로>에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지팡이를 짚은 최현은 이 춤에서 마음을 비우고 자신이 걸어온 인생의 길을 돌아보았다.

최근까지 공연된 <신로심불로>는 조흥동에 의해 전승된 것이다. 2007년 조택원 탄생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연낙재가 소장한 조택원의 작품 영상(1956년 일본 공연 실황)을 토대로 그의 춤을 복원하여 국립극장에서 재현하였다('월륜 삶과 춤 60주년 기념공연 조흥동 춤의 세계' 공연 프로그램, 2012). 주름진 얼굴에 흰 수염과 눈썹을 한 노인 가면을 쓰고, 흰 두루마기 복장에 담뱃대를 든 모습이 조택원의 <신로심불로>를 떠올리게 한다. 

사진8. 조흥동의 '신로심불로'(출처: 『월륜 조흥동 자서전』, 324쪽)
사진7. 조흥동의 '신로심불로'
(출처: 『월륜 조흥동 자서전』, 324쪽)

노년의 마음을 안무의 모티브로 삼은 <신로심불로>, 인간 생에서 포착한 보편적 심리는 국경을 뛰어넘어 관객들의 마음에 닿았고 함께 젊음을 돌아보게 했다. 오늘의 젊은 무용수들은 <신로심불로>를 즐겨 추지 않는다. 탄탄하고 에너지 넘치는 몸성의 무용수가 노인을 연기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뿐더러, 전통춤에서 극성(劇性)은 점차 사라지고 추상적 움직임이 주류를 이루기에 캐릭터를 표현해야 하는 춤은 낯설기만 하다. 추상화된 춤은 전통춤에 예술적 권위를 부여했지만, 예술성이 강력해질수록 삶이 곧 춤이었던 고유의 매력은 상실되어 갔다. 이제는 예술의 상아탑을 깬 일상의 춤, 참여의 춤이 다시 관심을 받고 있다. 몸은 늙었지만 마음만은 젊은, 이 시대 노인의 마음을 무대에 올려보는 건 어떨까. 고령화사회에 진입한 지금, 조만간 <신로심불로>의 바람이 다시 불지도 모르겠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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