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용 다시보기-4] 조선 기생의 흥취에 예술적 지위를 부여한 ‘장고춤’
[신무용 다시보기-4] 조선 기생의 흥취에 예술적 지위를 부여한 ‘장고춤’
  • 이정민 무용이론가
  • 승인 2023.05.28 07: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더프리뷰=서울] 이정민 무용이론가 = 장고춤은 사실 신무용과 완전한 합일을 이루기 어렵다. 역사적 발생 순서를 고려하면 장고춤이 신무용의 시기를 앞서기 때문이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장고의 전신인 요고를 치는 신이 등장하여 천상에서 춤추고 있으니, 장고춤의 발생은 신무용의 시기를 월등히 앞선다. 또한 농경 생활 속을 연희하며 마을 곳곳에 흥과 기운을 북돋아 주었던 농악무에는 장고를 메고 추는 설장고춤이 포함되어 있어, 민간 생업의 길고 긴 역사와 장고춤의 역사가 동행한다. 근대에 이르러 농악무가 극장 무대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였을 때도 장고춤은 함께였다. 고전무용가 한성준이 조직한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1938-1940년 공연에 <농악무>가 해마다 등장했는데, 이 농악무의 공연단 사진에서도 장고를 멘 연희자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역사성에도 불구하고 <장고춤>을 신무용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는 이유는 최승희(1911-1967)의 안무를 통해 민족무용 작품으로서 새로운 지위를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사진1. 조선음악무용연구소 공연단의 농악무(출처=조선일보 1940.02.25. ‘전원의 농악무’)
사진1. 조선음악무용연구소 공연단의 농악무
(출처=조선일보 1940년 2월 25일. '전원의 농악무')

조선무용의 현대화와 <장고춤>

이번에 조선 각지를 순회하면서 조선 고대의 춤과 각지의 민속과 정서를 연구하여 이것을 가지고 레퍼토리를 준비한 후 출발하려 합니다.” (최승희, 조광4월호, 1937)

<장고춤> <승무> <검무> <초립동> <신로심불로> <보살춤> 등 삼백여 편에 달하는 최승희의 안무작들은 조선의 전통춤을 배워 창작하거나 조선 생활을 소재로 한 것, 동양적 주제로 창작한 것들로 매우 다양했지만, 무엇보다 중요하게 탐구했던 것은 민족의 문화와 정서였다. 그녀는 이시이 바쿠(1887-1962)의 문하에서 습득한 서양무용의 기법을 기반으로 조선무용의 현대화에 매진하였고, 조선의 향토 풍습을 담아낸 작품들을 창작하여 신무용의 시대를 열었다. 민족적 소재를 모티프로 한 안무에 매진한 것에는 세계 무대에 조선무용의 양식을 알리고자 하는, 신무용에 대한 진지한 사명감이 내재하여 있었다. 한성준은 이러한 최승희의 지향과 실천에 자신이 집대성한 우리춤의 미래가 달려있다고 보았다.

나는 금년 64세 되기까지 오로지 조선무용을 이론적으로 실제적으로 연구해왔으나 조선 민중은 아직 무용에 대한 이해가 없어 무용하는 사람은 일종 천한 예인으로 인식됐던 것입니다 무용에 대해 이해가 없던 조선 민중도 최승희씨의 놀라운 무용으로 하여금 조선무용을 재인식하게 되었으니 그 기쁨은 무어라 말할 수 없습니다. 저로서 최승희씨한테 바라고 부탁하는 바는 내가 금일까지 연구해온 50여 종의 조선무용을 계승하여 조선무용을 영원히 살리도록 하여달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러하지 않는다면 내가 연구해온 조선무용은 나의 죽음과 함께 죽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한성준, 삼천리10권 제1, 1938년 1월 1일)

한성준의 바람이 최승희에게 전해졌던 것은 1937년 겨울 저녁의 일이다. 최승희, 한성준, 김형준, 현철, 최승일, 안막의 명월관 회동은 최승희의 <무녀>, 한성준의 <학춤>, 김형준의 <덧배기춤>을 나누는 교류의 장으로 이어졌고, 조선음악무용연구회가 결성되었다. 비록 이들이 살아온 환경과 축적된 삶의 경험이 다를지라도, 각자의 자리에서 조선의 춤과 민속의 무대화라는 같은 꿈을 실천해왔기에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었을 것이다. 최승희의 <장고춤>이 세계 무대에 오른 것은 이후의 일이다.

<장고춤>에 나타난 조선 여인의 미적 표상, 기생

최승희의 <장고춤>우리 민족 생활에서 소재를 찾아 새롭게 창작한 춤”(문학신문, 1966년 3월 22일)이다. 새로운 춤은 무대의 주인공을 농악에서 장고로, 집단의 춤에서 개인의 춤으로, 그리고 남성의 일상에서 여인의 일상으로 변모시켰다. <장고춤>에 투영된 조선 여인은 바로 기생이었다. 1939년 프랑스 파리의 살 플레옐 극장에서 공연된 <장고춤>Danse de <Kiisan>, 즉 기생춤으로 소개되었다. 이 춤에서 그녀는 장고의 흥겨운 리듬을 타고 멋을 부리며 노는 기생의 모습”(정병호, 춤추는 최승희, 1995)을 표현하고자 했다. 창작 모티프가 된 기생의 장고 놀음을 관찰, 분석한 결과였다. 최승희의 수제자였던 김백봉(1927-2023)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기생이 오면 그 사람 추는 것을 불러다가 봤어. 그 기생을 데려다가 시키고 보고 그래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자기 작품화했지.”(김백봉, 증언으로 듣는 근대무용사, 2007) 

 

사진2. 장고 반주에 맞추어 서서 노래하는 기생(1930)(출처=국립국악원. 『근현대 한국음악풍경』. 2007. p.105)
사진2. 장고 반주에 맞추어 서서 노래하는 기생(1930)
(출처=국립국악원. 『근현대 한국음악풍경』. 2007. p.105)

그런데 당시 기생을 대하는 사회의 시선은 어떠했을까. 일본에 있는 최승희에게 어머니가 보낸 편지의 한 부분을 들여다보자. “우리 집이 구차해서 딸을 기생으로 팔았다고들 수군거린단다. 너는 기어이 훌륭한 사람이 되어 보란 듯이 돌아와서, 이러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해주어라.” (최승희, 불꽃, 2006) 편지를 받아 든 소녀는 마음이 아려 눈물을 쏟았다. 어머니의 편지는 춤추는 여성과 기생을 동일시하고 멸시했던 조선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최승희가 서울에서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접하고 무용을 배우기로 결정했을 때도 친척들은 양반 가문 딸이 기생이 되려 한다며 외면했고, 부모님도 가슴 아프고 슬픈 일이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무용가의 꿈을 품은 소녀에게는 분명 아픈 기억으로 가슴에 남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훗날 세계를 누비는 무용가로 성장한 그녀가 해외무대에 선보이고자 한 조선의 춤, 조선 여인의 모습으로 기생을 택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현실 속 일제강점기 기생의 삶은 사연 투성이였다. 사회의 차별과 부당한 대우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야 했고, 조선의 예술을 생존의 수단으로 연희했다. 그러했던 기생은 최승희의 몸을 빌려 세계를 누비며 박수갈채를 받았고 자유를 만끽했다. <장고춤> 무대를 통해서 현실에서 대우받지 못했던 기생의 지위가 조선 여인의 한 군상이자, 미적 표상으로 격상된 것이다. 춤에 실린 여인의 미소가 가볍지 않은 이유다.

사진3. 최승희의 장고춤(출처=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e-뮤지엄)
사진3. 최승희의 장고춤
(출처=대한민국역사박물관 소장. e-뮤지엄)

<장고춤>의 변신과 장르 혼용

최승희의 명성이 그러했듯, <장고춤> 또한 그녀의 월북 이후 희미해져 갔다. 부재한 무용가를 추억하고 그녀의 춤이 무대 위에 명명되고 현현되기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최승희의 이름은 지워졌지만, 최승희가 주도했던 신무용의 기법과 양식은 김백봉을 통해 계승, 발전되었고, <장고춤>은 새로운 안무가를 만나 변혁과 성장을 거듭해갔다.

사진4. 김백봉의 장고춤(출처=김백봉춤보전회. '翠峰 김백봉 춤60년 아, 김백봉!' 공연 프로그램. 1997)
사진4. 김백봉의 장고춤
(사진제공=(사)김백봉춤춤연구회, '翠峰 김백봉 춤60년 아, 김백봉!' 공연프로그램. 1997)

김백봉은 1954년 독무 장고춤인 <여인의 향기>를 발표하였고, 장고를 공간의 선을 그리는 춤의 주체로 전환한 군무 <여인화사>, 그리고 호남우도농악의 설장고가 덧붙여진 군무 <타의 예> 등(안병주, 김백봉의 예술세계, 무용예술학연구15, 2005) 연작 시리즈 안무를 통해 장고춤의 예술적 확장을 지속적으로 탐구해나갔다. 김백봉의 <장고춤>은 무용수를 보다 강력한 테크닉으로 무장시킨 채 여인의 흥과 정서를 스펙터클의 향연으로 진화시켰다. 손장구와 열채 가락으로 충분했던 장고의 음역에 궁채를 더해 다채로운 장단 소리가 무대를 채웠고, 서정적 춤사위는 속도감이 붙어 빠르게 무대를 횡단하고 회전하는 여인의 역동적인 몸짓으로 변모했다.

사진5. ‘타의 예’ 후반부 설장고 장면(사진 제공=(사)김백봉춤연구회. ‘翠峰 김백봉 춤60년 아, 김백봉!’ 공연. 1997)
사진5. '타의 예' 후반부 설장고 장면
(사진제공=(사)김백봉춤연구회. ‘翠峰 김백봉 춤60년 아, 김백봉!’ 공연. 1997)

한편 신무용가 조택원 문하에서 춤을 사사한 진수방(1921-1995)1961년 한국발레 <괴로움·즐거움>을 발표하였는데, 농악무, 무녀무, 장고무 등 민속무용을 현대적으로 안무하여 민속무용의 발레화”(조선일보, 1961년 6월 22일)를 시도하였다. 무용평론가 김경옥은 이 작품이 발레와 우리춤을 적당히 배합한 것이 아니라, 발레를 기조로 하여 우리춤의 움직임을 화합시킴으로써 한국발레의 당위를 제시해주었다고 호평하였다(동아일보, 1961년 6월 18일).

사진5. 진수방의 '괴로움·즐거움' 중 장고무(1961)(출처=동아일보 1963.02.15. ‘한국근대문화 80년(6) 무용’)
사진6. 진수방의 '괴로움·즐거움' 중 장고무(1961)
(출처=동아일보 1963.02.15. '한국근대문화 80년(6) 무용')

열채와 궁채를 장고 채편에 붙이고 상체를 비스듬히 틀어 열린 대각선 방향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포즈를 취하고 있는 진수방의 모습은 오늘의 장고춤 스타일과 크게 다를 바 없어 친숙하다. 흥미로운 것은 관련 기사들이 장고춤을 민속무용으로 지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1960년대를 지나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장고춤은 문화사절단의 임무를 띠고 한국을 알리는 민속예술단의 해외 공연 고정 레퍼토리로 자리 잡으면서 고전무용, 또는 민속무용으로 불렸다. 일례로, 1983년 송수남 한국고전무용단이 이탈리아 순회공연에서 무대에 올린 작품 <원초의 신전>은 전통적인 고전무용 12종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 하나가 장고춤이었다.

사진6. 송수남의 장고춤(출처=조선일보 1983.07.12. ‘송수남 고전무용단 伊 페스티벌에 참가’)
사진7. 송수남의 장고춤
(출처=조선일보 1983.07.12. '송수남 고전무용단 伊 페스티벌에 참가')

장고춤에 예술적 지위를 부여한 것이 신무용임에도 불구하고, 후세대 무용가들이 이를 고전무용, 민속무용의 하나로 인식한 이유는 복합적이다. 우선 장고춤의 원천이 품고 있는 역사성, 민속성과 관계가 있고, 둘째, 세계 진출의 흐름 속에 한국춤=우리춤=고전으로 맥락 짓는 무용계 안팎의 경향이 영향을 미쳤다. 셋째, 그럼에도 한국무용의 장르 개념에 대한 학술연구와 논의가 미진했으며, 넷째, 한국무용 영역에서 활동하는 무용가들이 저마다 안무, 재안무 혹은 재구성한 장고춤 버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용가 국수호는 최승희와 조택원, 그리고 제자들에 의해 창작된 신무용 양식의 작품들이 전통무용과 더불어 한국무용의 역사에 남는 신고전이 되었다고 보았고 그런 작품으로 <장고춤> <부채춤> <화관무> <가사호접> <사랑가> 등을 지목하였다(경향신문, 1982년 11월 6일). 신무용을 근현대사의 유산으로 수용하고 있는 무용가의 사고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신무용의 고전이 된 <장고춤>

<장고춤>이 최승희의 이름을 다시 찾은 계기는 1996년 서울예술단이 창단 10주년을 기념하며 선보인 최승희-어제와 오늘공연을 통해서였다. 50년 만의 재현이었다. 김백봉의 주도 아래 <장고춤> <초립동> <검무> <보살춤> 8개 작품이 원형의 독무 양식 그대로 무대에 올랐다. <장고춤>은 당시 서울예술단 무용감독이었던 양성옥이 추었다.

사진8. 양성옥이 재현한 최승희의 '장고춤'(사진제공=양성옥)
사진8. 양성옥이 재현한 최승희의 '장고춤'(1996)
(사진제공=양성옥)

최승희가 세계적 무용가로 대중의 인기를 사로잡을 수 있었던 주된 요인은 그녀의 무용 연기에 있었다. 특히 최승희의 눈은 관객을 빨아들이는 흡인력과 표현력에 있어 눈의 춤을 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관객의 혼을 장악했다(정병호, <최승희, 어제와 오늘> 공연 프로그램, 1996). <장고춤>도 마찬가지로 눈으로 춤의 주제와 감정을 연기했고, 시선으로 열린 공간을 채워 공간과 신체의 조화를 이루었다(양성옥, 2023). 이러한 신무용적 기법은 동시대 장고춤에도 유효하다.

오늘의 장고춤은 한강수타령, 신고산타령, 청춘가, 경복궁타령, 태평가 등 민요 연주에 맞춰 무용수의 춤과 장고 가락이 어우러지고, 춤의 앞 또는 뒤에 설장고를 배치하여 재구성하는 방식을 취한다. 배정혜의 <풍류장고>, 한혜경의 <십이채장고춤>, 조흥동의 장고춤, 이매방, 강선영 등 여러 전통춤보존회의 유파별 장고춤과 농악 계열의 설장고춤, 호적장고춤 등 장고춤의 종류도 다양하고, 성윤선의 장고춤 네트워크-<고고go>와 같이 스토리와 캐릭터를 탈바꿈한 새로운 창작물로 재탄생하기도 한다. 기존의 장고춤을 시대의 감성에 맞게 재구조화하고 새롭게 덧입히는 모두의 실천이 민족의 시대 문화와 정서를 춤으로 풀어냈던 최승희의 창작 정신을 살아 숨 쉬게 한다. 하늘에서 재회했을 최승희와 김백봉을 떠올리며, 무대에서 피어날 새로운 장고춤이 신무용의 정신을 기억하길 바란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