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27) - 팝핀현준과의 인연을 떠올리며
[김윤정 칼럼] 펜으로 쓰는 춤(27) - 팝핀현준과의 인연을 떠올리며
  • 김윤정 무용가
  • 승인 2023.05.01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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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프리뷰=뒤셀도르프] 최근에 내 오랜 친구이자 동료인 팝핀현준의 <세상의 모든 것이 춤이 될 때>라는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인생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완성되는 과정에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온갖 역경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온 자신의 경험담을 진솔하게 들려준다. 그가 춤을 통해 인생을 배우고 성장하는 이야기 속에 남겨진 메시지들은 꽤나 울림 있다. 그는 힙합 스트릿 댄서에서 다양한 예술무대로, 그리고 최근에는 K현대미술관에서 미술작품까지 전시하고 있는 멀티 아티스트로 성장했을 뿐 아니라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가는 모습까지, 춤을 추는 젊은이들에게는 희망의 아이콘이 아닐까 한다. (아는 이들은 알겠지만 팝핀현준은 지금 진행 중인 K현대미술관 전시 말고도, 갤러리 몸의 발달장애인을 위한 기부전시회,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에서 열린 위안부 피해자 추모기록관 개관 전시 등에도 참가한 이력이 있다)

'닻을 내리다-피터를 위하여'(2005년) (사진제공=김윤정)
'닻을 내리다-피터를 위하여'(2005년) (사진제공=김윤정)

팝핀현준과의 오랜 인연을 떠올려 본다. 그러니까 18년 전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정부와 뒤셀도르프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서울과 독일에서 공연했고 ‘올해의 예술상’을 받았던 <닻을 내리다. 피터를 위하여… (Leinen los für Peter)>라는 작품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피터 팬> 원작과 영화를 보면서 영감을 받았던 작품이었다.

어린 시절 누구나 꿈을 가지고 있지만 어른이 되어가면서 자신들의 꿈은 어딘가 깊숙이 숨겨 두고 현실을 향해 전투하듯 살아가는 어른들이 어느 날 허무함을 깨닫고 어린 시절의 꿈을 기억하게 될 때, 죽어 있던, 아니 잠자고 있던 우리 안의 피터 팬이 살아 나온다는 이야기로 각색을 해서 만든 무용극이었다. 피터 팬 이야기의 캐릭터들이 각자 나름의 의미가 있었기에 나는 그 캐릭터에 맞는 무용수들을 캐스팅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나는 피터 팬의 캐릭터상 관절을 잘 이용하는 인형 같기도 한 춤을 상상하면서 그 역할의 무용수를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홍대 근처 한 클럽에서 독특한 춤을 추는 일본 무용수를 보게 되었고 그는 이주노 씨의 초청으로 서울에 왔기 때문에 일단 이주노 씨와 함께 이야기하자고 했다. 바로 그날 밤 이주노 씨를 만나서 나의 프로젝트에 관해 설명을 했고 그는 자기가 추천하고 싶은 무용수 한 명을 더 보고 결정하라며 나를 어느 연습실로 데리고 갔는데 거기서 밤 늦도록 연습을 하고 있는 팝핀현준을 처음 만나게 되었다. 어딘가 반항기 가득 하지만 춤을 출 때 만큼은 순수한 에너지와 열정이 넘치는 모습이 내가 상상하던 피터 팬을 닮아도 많이 닮은 친구였다. 나는 바로 그를 캐스팅하기로 했고 그 일본 무용수는 나중에 피터 팬의 그림자 역할을 했다.

그렇게 우리의 긴 인연은 시작되었다. 처음 연습을 하는 과정에서 그는 무용수가 무대에서 어떻게 등을 돌리고 춤을 추느냐고도 했고 왜 자신이 춤을 잘 추는 동작을 못하게 하고 이상한 걸 시키느냐는 천진한 질문을 하기도 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 시간 잠에서 깨어나는 피터 팬의 등장에서 팝핀현준의 넘치는 에너지를 일단 많이 절제하고 힘을 빼야 했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가 그때까지 하던 방송이나 팝핀에서 무언가 조금 새로운 걸 도전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그는 자신의 춤의 본질을 살리면서도 당시로서는 낯설었을 현대무용 동작까지 열심히 해주었다. 그리고 피터 팬의 장례식으로 시작되는 작품에서 천천히 깨어나 힘을 되찾기까지 그가 춤추던 스타일과는 다른 지점까지 완벽하게 소화해 주었다. 작은 시선 하나까지도 한번 지적을 하면 절대 두 마디가 필요 없을 정도였다. 늘 장난기 넘쳤지만 일단 연습에 들어가면 집중력이 대단했고 자신의 역할을 일백 퍼센트 이상으로 해냈다. 웬디 역할을 했던 나와 만나는 듀엣에서는 우리 두 사람 모두에게 조금 낯선 탱고와 왈츠를 합친 듯한 스텝을 추면서 무대를 도는 장면이 있었는데 오히려 내가 스텝이 꼬였고 그를 따라가야 했었다. 우리는 기나긴 연습에서부터 서울 초연, 독일 공연, 그 후 재공연까지 가는 여정에서 무대라는 공간과 콘셉트에 관하여 디테일한 캐릭터 연구까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소통했다.

초연을 앞두고 모 신문사 기자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예술춤의 주류인 무용계에서 어떻게 백댄서를 주인공으로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나는 작품을 하면서 어떤 것이 주류이고 비주류인가 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다만 내 작품을 위해서 필요한 춤을 녹여줄 무용수라면 장르에 상관없이 우리는 동등하며, 더구나 이 작품은 피터 팬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결국 꿈을 잊고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에 내 작품에 나오는 모든 캐릭터들은 다 의미가 있고, 따라서 주연과 조연의 개념은 없다고 했다. 그 후 신문에 나온 기사는 ‘힙합과 현대무용의 만남’이라는 주제로 꽤나 우호적인 내용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만 해도 그렇게 다른 장르의 춤이 한 작품에서 함께하는 경우가 흔하지는 않았었다. 그리고 후크 선장 역할로는 이스라엘에서 온 무용수 나숑 스타인이 함께했는데 그는 웬디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파트너로 듀엣을 하기도 했었다. 시간을 상징하는 시계 악어는 이경이 춤과 연기로 풀어주었고, 팅거벨의 요정은 전승현(남성 무용수)이 앙증스러운 연기로 역할을 해주었다. 후에 독일에서 공연을 본 친구의 어린 딸이 어찌나 집중을 하고 보았던지, 원작과 비교하며 질문들을 쏟아내면서 왜 요정이 남자냐고 물어오기도 했다.

'문워크'(2010년) (사진제공=김윤정)
'문워크'(2010년) (사진제공=김윤정)

그리고 몇 년 뒤(2010년) 우리가 두 번째로 만난 작품은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와 공동 제작한 <문워크>라는 공연이었다.

우리 누구에게나 한때 열광하던 자기만의 스타가 있다. 나에게는 현실 세상에 있는 사람이 아닌 그야말로 글자 그대로 빛나는 별 같은 존재가 마이클 잭슨이었다. 나에게 그의 음악과 춤은 언제 어디서 듣고 보아도 시선을 사로잡는 마력의, 유일무이한 스타였던 것이다. 틴에이저 시절 귀로만 듣던 음악에서 뮤직 비디오가 생겨나면서 다시 본 음악과 비디오 속 그의 춤은 그야말로 나에게는 열광의 세상이었다.

언제나 반짝이는 스타로 남을 것 같았던 마이클 잭슨이 너무 갑자기 죽었고 나는 그를 애도하는 마음으로 작품을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나이와 세대가 다름에도 함께 출연했던 류장현과 팝핀현준 모두가 마이클 잭슨의 진심어린 팬들이었기에 함께 뭉치는 데 더욱 힘을 받았다. 나는 마이클 잭슨과 팬들의 이야기를 나르시스와 에코의 신화의 이야기로 풀고 싶었다.

매혹 당한 시선, 이 시선들은 수천 년 동안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며 신화, 연극, 회화 등으로 인간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작품들로 탄생했다.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Pascal Quignard, 1948-)는 <섹스와 공포>라는 책에서 인간들이 누군가 혹은 무언가에게 매혹 당하는 순간의 시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키냐르의 말을 인용하면, 시선을 빼앗겨 매혹 당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주체할 수 없는 잔인한 욕망에 빠져들어 버린다. 나는 이렇게 위험한 매혹에 빠져 자신을 파멸시키는 신화의 인물들 중 나르시스와 에코를 마이클 잭슨과 그를 따르는 팬들의 이야기로 풀어 가려고 했다. 평생 자기 자신만을 사랑했던 나르시스는 물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물에 빠져 죽었고, 나르시스만을 짝사랑했던 에코는 결국 지쳐서 모래시계의 모래가 빠져나가듯 육체는 사라지고 자신의 소리에 응답이 없는 나르시스의 소리를 따라 하다가 결국 메아리로 남게 되는 이야기 말이다. 어쩌면 나르시스는 신화에서처럼 자기 자신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결국 물결에 반사된 자신의 이미지 즉 허상에 매혹 당한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이 작품은 마이클 잭슨이 갑자기 죽음을 맞이하는 찰나 자신의 삶이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여정을 보여주듯이 시작한다. 이미 죽은 마이클 잭슨은 류장현이, 그리고 그의 마지막 스치는 상상 속 마이클 잭슨은 팝핀현준이 맡았고 에코 역할은 김윤아가 맡았다. 다양한 음악을 라이브로 연주해준 권우유와 그의 뮤지션 친구들 정경일, 류정석, 류형준, 김준영이 함께했었다.

죽은 시점의 마이클과 아직 현세를 떠날 수 없는 마이클이 된 나르시스와 팬으로 상징되는 에코, 세 사람이 서로 쫓고 쫓기고 서로를 드러내고 매혹하고 매혹 당하는 이야기로 풀어보았다. 현대 사회와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미지, 그것을 쫓는, 그것에 매혹 당하고 열광하는 대중, 우리 시대의 영원한 우상 마이클 잭슨에 나르시스와 에코를 투영해 보았던 것이다. 어쩌면 환영에 갇혀 평생 ‘자기 자신’을 바라보지 못했을 지도 모를 한 인간의 삶과 죽음을 애도하며 그를 쫓는 대중을 통해 ‘매혹’과 ‘열광’ 속에 있는 현대사회와 그 깊은 고독을 표현하고자 했었다.

팝핀현준이 내면의 대사를 하면서 춤을 추는 장면도 있었는데 그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대사와 동작을 해주었다. 류장현과 팝핀현준이 이인일역으로 유니슨 듀엣을 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두 사람이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난도가 꽤나 높은, 현준은 그때까지 전혀 해본 적이 없었을 클래식한 스텝들을 끝까지 연습과 연습으로 버텨주었다. 특히나 무거운 휘장이 달린 10kg도 더 나갈듯한 무거운 의상을 입고 그 복잡한 발동작과 점프를 끝까지 연습하며 토할 것 같다고 하면서도 불평 한 마디 없이 해내는 모습에서 극한을 넘어서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런 베스트 댄서 현준과 깃털처럼 가벼우면서도 묵직하고 진지하게 연기를 해준 류장현, 가녀린 몸으로 에코 역할을 훌륭하게 해준 김윤아 같은 무용수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건 나의 행운이었다.

심판
'심판'(2015년) (사진제공=김윤정)

그 후로도 나는 내 작품의 콘셉트에 맞는다고 생각되면 현준에게 콜을 보냈고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단박에 달려와 함께해주었다. <완벽한 사랑>(2013년)에서는 굽이 꽤 높은 하이힐을 신고 팝핀을 추었는데, 잘못하면 발목이 삘 수도 있었지만 늘 새롭고 어려운 상황에 도전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훗날 <심판>(2015년), <그런데 사과는 왜 까먹었습니까?>(2021년)까지 함께했는데, 그 무렵 그는 이미 자신의 영역에서 거침없는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지만 늘 겸허하게 충실하게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며 역할을 해내 주었다.

그와의 연습실 에피소드 하나. 군무 연습 중 현준에게 전화가 왔는데 그는 받아야 하는 전화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계속 춤을 추면서 통화를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순간 눈살을 찌푸리려다가 그렇게 전화로 할 말을 다하면서도 동작의 순서를 정확히 하는 것을 보면서 다른 이들과 함께 모두 웃고 말았다. 심지어 옆에 있던 드라마투르그 현지예는 무대에서 저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면 어떻겠냐고 했다. 공연에서 그렇게 하지는 못했지만 사실 제법 괜찮은 아이디어였다.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한번 해보고 싶다. 무대 안에 갇힌 세상에서 무대 밖의 세상과 연결된 실제 통화를 하면서 추는 춤, 목소리는 무대 밖의 현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몸은 무대 안의 춤을 추는 장면 말이다.

'그런데 사과는 왜 까먹었습니까?'(2021년) (사진제공=김윤정)

그가 결혼 후 부인 박애리 씨와 함께 독일로 와서 오랜만에 다시 만나기도 했었다. 애리 씨는 당시 막 음악을 하겠다고 하던 아들이 그녀의 창법을 신기해하자 즉석에서 발성법을 가르쳐주고 아들은 어설프게라도 주저 없이 따라했던 순간, 그리고 북을 치는 장단을 경이롭게 보던 내 파트너에게 북 장단을 가르쳐주던 순간들이 떠오른다. 그녀의 남편만큼이나 순수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명창 박애리 씨는 언제나 진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모습 그대로 내면도 바르고 긍정적인 멋진 사람이다. 그리고 그들 부부가 다르면서도 잘 맞을 수밖에 없는 것이 상대방의 일과 예술적 정신을 서로 존중하고 지지하는 데 있어 보였다.

나는 인생에 변화(발전)가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게 즐겁다. 의외로 사람들은 늘 같은 문제, 같은 고민을 평생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매일을 같은 생각과 같은 생활방식으로 살면서 더 나을 것 같은 내일을 꿈꾸고 그렇게 되지 않을 때 세상을 향해 불평을 쏟아낸다.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한다. 어제와 똑같이 살면서 내일이 나아지기를 바란다는 건 사기 아니냐고 말이다. 현준을 보면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하고 발전해 나가는 현재진행형의 그에게 경의를 표한다. 만나면 서로의 말에 귀 기울이고 좋은 영향을 주고 그 영향이 각자의 삶에 변화를 주고 행동하게 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친구는 없을 것이다. 그는 내가 처음 보았던 반항기 가득하던 청춘에서 이제는 충분히 가진 듯한, 어느 정도 안정기에 들어선 어른이 되어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안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소년 피터 팬의 순수한 열정과 빛을 본다.

팝핀현준이 그린 작품들 (사진제공=김윤정)
2021년 2월 19일 열린 '세상의 모든 것이 춤이 될 때' 출간 기념 저자 사인회 포스터 (사진제공=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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