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과 베트남 에피소드-7] 12시간 동안 찍은 5분짜리 댄스필름
[춤과 베트남 에피소드-7] 12시간 동안 찍은 5분짜리 댄스필름
  • 임선영 무용가
  • 승인 2023.05.08 08: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댄스필름 'Her Story' (사진제공=임선영)

[더프리뷰=서울] 임선영 현대무용가 = 베트남은 도로명 체계가 잘 되어 있어 베트남 사람들은 우리와 달리 지명이나 건물명보다 도로명과 번지수에 익숙하며, 택시나 그랩을 타면 행선지의 번지수를 잘 찾아 내려준다. 그래서 택시를 탈 때 주소만 잘 알고 있으면 집 찾기가 어렵지는 않다. 베트남의 도로명은 왕, 장군, 시인 등 역사 속 위인의 이름이나 역사적인 사건명으로 되어 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호치민이라는 도시명도 북베트남이 무력으로 남베트남을 점령하고 통일로 이끈 호치민(본명 응우엔 신 꿍 Nguyen Shinh Cung)의 이름을 받아 쓴 것이다. 호치민 시의 여행자 거리로 유명한 팜 응우 라오(Pham ngu Lao)는 베트남의 유명한 장군으로 쩐 흥 다오(Tram Hung Dao) 장군을 도와 몽골군의 침략을 물리치는 공을 세웠다. 두 장군의 이름이 모두 호치민시 거리의 이름이다.

호치민 벤탄시장(Ben Thanh Market) 뒤쪽에 꼬박(Co Bac)도로가 있는데 이는 응우엔 티 박(Nguyen Thi Bac, 일명 꼬박 Co Bac, 1908-1943)이라는 여성 독립운동가의 이름을 딴 것이다. 35세 젊은 나이에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베트남 혁명투사이다. 우리나라의 유관순 열사와 같이 조국의 독립을 위해 뜨겁게 살다간 여성이다. 나는 베트남에 거주하는 동안 꼬박, 그녀의 이야기를 내 삶의 한 페이지에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다.

댄스필름 'Her Story' (사진제공=임선영)

베트남에서 거주하는 동안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울타리 안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을 것 같았던 나는 서서히 조금 더 힘 있게 나 스스로 움직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언어의 장벽을 극복하고 어떻게 무엇을 하며 마음껏 춤을 들고 돌아다닐 수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옷은 얼마든지 갈아입을 수 있다. 겉은 치장할 수 있으나 그 속에 감춰진 본 모습, 나를 형성하고 구별하는 그 어떤 무드는 감출 수 없다. 나는 춤에 대한 생각이 점점 짙어졌고 지금 처해 있는 삶에서 가장 깊은 인상을 무엇으로 남길 수 있을까 생각했다. 하고 싶은 것은 다 해 보자 생각했다. 삶의 인상에 잊지 못할 시간을 남기고 그것을 나눌 사람이 필요했다. 이 넓은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그 누군가, 이 낯선 땅에서 나와 함께할 동료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것을 언제든 꺼내어 보며 우리가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해주는 아득한 미지의 공간에서의 작업으로 남길 시간, 어쩌면 마음 한 구석에 담아두고 꺼내 볼 수 있는 숨겨진 장소처럼... 다행히 나는 생각보다 빠르게 새로운 장소에 적응하기 시작한 것 같다. 나의 성격의 장점인 친화력, 붙임성은 외국 친구들과 함께 생활하기에 불편함이 없었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영어로 함께 소통하고 서로가 원하는 것을 나눌 수 있는 대상을 찾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나는 나만의 아고라가 필요했다. 생의 활기가 가득 차 있는 곳, 흥미로운 이슈로 넘치고 대화와 활동들이 끊임없이 만들어지는 그런 곳 말이다. 나는 베트남 생활에서 나와 세상을 연결할 것들이 무엇인지 찾고 싶었고 당시 내가 움직일 수 있는 활동 범위는 한정되어 있었기에 그것을 대신하여 활동의 제약을 받지 않는 무엇을 만들어 공유해야겠다는 생각했다. 바로 댄스 필름, 무용수와 안무가 역할은 내가 하면(당시 아는 무용수들이 별로 없었다) 되고 촬영을 해줄 사람을 찾으면 된다. 왜 만들고 싶은지는 찾았으니 무엇을 표현하고 싶은지를 찾아야 했다. 당시 베트남이라는 나라에 와서 그 땅과 공기,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고 있었기에 베트남이라는 나라에 대해 더 알아보고 그 역사의 한 조각을 해석하는 기회를 갖는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낯선 도로를 지나갈 때마다 지명이나 도로명이 역사적인 인물의 이름이나 사건이라는 설명을 남편에게서 들을 때마다 흥미로웠고, 매우 아름다운 국가적 발상이란 생각이 들었다.

꼬박 거리에 있던 Lacof Cafe (사진=임선영)

우연히 꼬박 거리에서 카페를 운영하는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그 카페에서 무용사진을 찍고 싶으면 찍어도 된다는 말에 나의 생각과 용기는 발아하기 시작했다. 나는 먼저 꼬박, 그 이름에 매료되었고 이름을 검색하기 시작했으나 영감이 될 만한 글을 찾지 못했다. 나는 한국 모 대학 무용과 이론교수로 재직 중인 친구 서모 교수에게 연락을 해서 자료를 구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프랑스 학자가 남긴 꼬박에 관한 15쪽 남짓한 원문을 찾아주었고 나는 영어사전을 찾아가며 그녀에 대한 공부를 했다.

매일 매일 남는 것이 시간이었으니 혼자 그녀에 대한 글을 읽고 해석하며 춤을 만들었다. 그리고 영화를 함께 만들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연히 알게 된 프랑스 친구 바티스트(Baptiste)를 통해 영화감독 마이 후옌 치(Mai Huyen Chi)를 만나게 되었다.

예고, 대학, 무용단, 단체 등 집단적인 그루핑을 벗어나 내가 원하는 개인적인 의식과 생각, 방식을 스스로 행할 수 있는 이 과정에서 내적인 소란과 불안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불안감과 의심에 사로잡히면 결국 나만의 익숙한 세상에 평생 갇히고 말겠다 싶어 나는 매우 사적인 사건을 스스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이 진지한 과정이 즐거울 것이라는 확신에 댄스 필름을 준비하는 과정을 즐길 수 있었다.

댄스필름 ' Her Story' 촬영 장면 (사진제공=임선영)

나는 바티스트와 함께 치를 만나 나의 생각을 전하고 댄스 필름을 만드는 데 필요한 예산과 조건들을 알아보았다. 예상보다 큰 예산이 필요한 작업에 남편 몰래 모아둔 적금을 깨고 내 생애 첫 댄스 필름을 만들기로 했다. 그녀의 이야기-꼬박(Her Story_Co Bac)은 나의 첫 댄스 필름이자 베트남의 시간과 나의 베트남 친구들의 땀을 고스란히 담은 작품이 되었다. 나는 꼬박에 관한 나의 생각을 글로 써서 치와 함께 이런저런 가벼운 이야기를 하듯 편하게 작업을 진행해 갔다.

치와 나는 버려진 폐허를 찾아 여기저기 베트남 친구들과 함께 다녔다. 며칠 후에 적합한 촬영지를 발견하고 새벽 5시에 모여 촬영기기를 옮기려는 찰나 웬 할머니의 시비, 즉 정부의 허락을 받지 않은 일이라며 공안에게 고발하겠다는 말에 촬영은 중단되었다. 다른 곳을 찾아 겨우 시작한 아침 9시 촬영이 밤 9시에 끝난 잊지 못할 그 날의 작업... 지금 다시 하라면 절대 못할 미친 짓이다. 쉬지 않고 혼자 춤을 추고 촬영을 하고 그날 온 몸의 땀은 빛처럼 빛났지만 다음날의 몸 상태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왼쪽부터) 영화감독 치, 바티스트, 임선영. 제작 준비 첫 만남. (사진제공=임선영)

그리고는 5분 길이도 채 안 되는 댄스 필름이 완성되기까지 1년 반이라는 긴 시간이 소요됐다. 필름 에디터 루(Lu)를 만나 원하는 장면을 함께 몇 시간 동안 선별하고 음악을 찾고 필름의 컬러링을 위해 전문가를 찾아가고 한국에서는 말도 안 되는 너무 긴 작업절차와 과정과 시간이 베트남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래도 그들과 함께 웃고, 함께 심각해하며 작업한 그 영상을 보는 날 우리는 축배를 들었고 한없이 감격했다. 나는 나대로, 그들은 그들 나름의 이유로 감동한 그 밤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나고 보니 수많은 날 중에 똑같은 사건이 겹치는 날은 단 하루도 없었고 앞으로 없겠지 싶다. 다시는 재연될 수 없는 지난 시간들... 베트남 꼬박 거리에서 커피 향을 맡을 때면 베트남 독립투사로서 그녀의 짧고 강렬했던 역사적 삶과 맞물려 내 인생의 잊지 못할 시간을 함께 기억한다.

그리고 2023년, 치와 나는 새로운 주제로 다음 프로젝트를 함께 준비하기로 했다.

임선영 무용가
임선영 무용가
sunyounglim@hotmail.com
이대 무용과 졸업. 2018년 아르코 국제레지던시 선정. 꾸준히 작품을 발표하고 있으며 현재는 베트남 아라베스크무용단 초빙안무가로 활동 중이다. 다른기사 보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