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논객의 춤시선-15] 현역 원로들에 대한 존중과 지역 춤작가의 내공
[낭만논객의 춤시선-15] 현역 원로들에 대한 존중과 지역 춤작가의 내공
  • 장승헌 공연기획자
  • 승인 2023.05.15 08: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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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7회 한국무용제전 개막공연의 대비적 춤 풍경
제37회 한국무용제전 개막초청공연 '면벽(面壁)'. (왼쪽부터) 김매자 국수호 배정혜 ⓒHanfilm (사진제공=한국춤협회)

[더프리뷰=서울] 장승헌 공연기획자 = 너무 결이 다른 두 춤 풍경을 일요일 저녁,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무대에서 흥미롭게 마주했다. 하필 축제 개막일(4월 16일)이 세월호 참사 9주기 날이었고, 아울러 일요일 저녁 7시 공연이라 공연장 나들이를 잠시 주저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80대 전후 원로 현역 무용가들의 화제작 <면벽>을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하는 맘에서 극장행을 결심했다. 평소와는 달리 티켓박스에서 입장권을 받아 객석에 일찍 들어가 조용하게 자리했다. 그리곤 조명이 빨리 꺼지기를 기다렸다.

이날 개막 초청공연은 1부 <면벽>과 2부 <상냥한 호소 - 마지막 페이지>의 더블 빌이었다. 팬데믹 이후 대면 공연의 반가움은 원로와 지역 직업무용단의 젊은 무용가와의 세대 차이 춤 풍경이 오히려 신선함으로 다가오리라는 기대감으로 끝까지 객석을 지켰다.

올해로 제37회를 맞이한 한국무용제전은 서울문화재단이 지원하는 서울예술축제의 하나로 선정되었다. 지금까지 한국창작춤 발전과 확장을 통해 매년 우리 무용계의 대표적 봄 시즌 행사로 평가 받아 왔다. 특히, 지난 3년여 팬데믹 기간에도 쉼 없이 임원진이 차선의 선택과  대안을 지혜롭게 찾아온 만큼, 올해 봄꽃들이 형형색색 지천에 피고 지는 가운데 본격적인 축제다운 모습으로 개막식 및 초청공연으로 그 시작을 알렸다. 4월 16일부터 29일까지 진행된 이 축제의 주제는 이즈음 우리 사회의 화두를 반영하듯 <Ecology 춤, 상생의 관점>이라 매우 흥미로웠다.

'면벽(面壁)' 김매자 ⓒHanfilm (사진제공=한국춤협회)

먼저 제37회 한국무용제전 홍보영상이 올려졌다. 출연 단체들의 작품 사진이 속도감 있게 편집, 상영되면서 참가 단체와 레퍼토리에 대한 흥미를 촉발했다. 이 축제를 주최하는 한국춤협회의 윤수미(동덕여대 교수) 이사장은 개막 환영사에서 올해 한국무용제전의 주제와 프로그램, 대.소극장 경연 작품들에 관해 예의바른 목소리로 깔끔하게 소개해 기대감을 고조시켰다. 통상적인 외부 축사를 줄이고 개막 초청공연을 빠르게 진행한 점을 칭찬하고 싶다.

깊은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무대공간 뒤편에서 악기들 사이사이에 자리한 10여명의 현장 연주자들(음악감독 이아람)이 조심스레 공간을 소리로 채우기 시작하자, 무대 위쪽 동그란 정원 모양의 무대가 먼저 시선에 들어온다. 저마다 개성있는 창작 작업을 해 온 분들이라 그런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번 무대 역시 한 분씩, 등장 방향도 다르다. 배정혜 선생이 먼저 등장해 자신의 공간(정원)에서 슬쩍 어깨에 걸친 숄을 오브제로 자연스럽게 춤을 선보였다. 깊은 호흡과 팔의 움직임에 정겨운 고향 누이의 모습이 투영된다. 뭔가를 찾으려는 세심한 감성을 조심스레 이동시키면서 무대 공간을 넓게 활용하며 영민하면서도 유연한 몸짓을 선보였다.

개막초청공연1. 김매자, 배정혜, 국수호 '면벽(面壁)' ⓒHanfilm
 김매자, 배정혜, 국수호의 '면벽(面壁)' ⓒHanfilm (사진제공=한국춤협회)

아련한 감성을 자극하며 다시 돌아와 하얀 조각돌 몇 개를 공기 놀이하듯 손에 잡고 부딪는 소리까지 자연스럽게 연출한다. 조각돌을 바닥에 무심히 내려놓기도 하면서, 혼자만의 공간을 숨겨둔 놀이터처럼 어루만진다. 조금씩 원형 공간을 벗어나면서 나오는, 부드러운 감성을 담은 상체와 하체의 움직임. 다정다감한 표정으로 연륜에 비해 여전히 소녀 감성을 자아내는 부드러운 미소는 관객들에게 한 줄기 봄바람으로 다가왔다.

이제, 팔을 서서히 들어 올리며 대륙적 풍모로 분장을 한 국수호 선생이 객석을 압도한다. 자연스럽게 배정혜 선생과 멀어지는 가운데, 뒤쪽 무대 공간 속에 드러난 풍체에서 선생의 검정 장삼이 유독 시선을 모은다. 승무 장삼이 변형된 조선시대 왕의 복식처럼 팔의 동선이 풍성하고 넉넉하다. 오래 전 마당춤의 하나인 탈춤의 팔사위와 발디딤새는 남무의 특징적 호흡의 힘과 그간 몇 편의 신전통 홀춤 안무 및 직접 무대 실연에서 다져진 춤 내공을 통해 자신감으로 표출됐다. 상체와 어깨부터 팔목까지 힘이 실린 과감한 동작으로 ‘기운생동’으로 힘껏 높이 날리는 검정 장삼은 일순간 제의적 수장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그 남무의 기상은 장엄한 기마민족의 표상으로 다가왔다. 두 원로 무용가가 그 동안 국.공립 단체의 스펙터클한 대극장 무대를 장식해온 공력에 걸맞은 자신만의 개성 강한 홀춤들을 연이어 발표해 왔는데, 여전히 명불허전, 국립무용단 무용극 시대의 주역다운 표정 연기와 자신감 넘치는 걸음걸음은 압권이다.

'면벽(面壁)' 배정혜 ⓒHanfilm (사진제공=한국춤협회)

세 번째 주인공 김매자 선생이 하수를 통해 일순간 중앙에 자리를 잡는다. 이윽고 오른쪽 팔을 허공을 향해 뻗는 특유의 춤사위로 일순간 ‘창무이즘’의 세계로 몰입하게 만드는 기운, 가히 마력의 춤이다. 몇 년 전 <봄날은 간다> 공연 이후 황무봉류 <산조춤>, 그리고 자신의 기념비적 작품 <춤본1> <춤본2>를 제자들에게 전승하며 최근부터 음악그룹 나무, 혹은 거문고 연주자 박우재와 공동작업을 하며 80대 인생 후반기 예술세계를 더욱 강건하게 지켜 무용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이번 <면벽>에서 선생은 수 년 전 일본 무대에서 먼저 소개된 <광-샤이닝>과 자신의 <숨> 작품의 춤사위가 교차, 이중적 교집합을 이루며 또 다른 분위기로 공간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한국 무용가 중 벗어 넘긴 이마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무용가라는 지인들의 얘기를 다시 한 번 확인케 하는 찰나의 짜릿한 행복감이 충만하다.

이제 차례로 무용가들이 합세해 저마다 춤 연륜으로 제 각각 마음 비운 춤사위가 절묘한 합을 이룬다. 한 순간, 김매자 선생이 국수호 선생의 어깨에 고개를 접고, 일순간 온 기운을 담아 배정혜 선생이 합한 하나의 조각상처럼 한동안 가쁜 호흡을 추스르는 모습이다. 하여 2023년 축제의 주제인 <춤, 상생의 관점> 초청공연 의미에 방점을 찍는다. 근래 역대급 춤의 시공간 속 세 인간의 모습은 동시대성의 <면벽>을 감동적으로 실천하며 진정성을 증명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근대화 경제발전의 시기를 오로지 춤이라는 외길을 걸어오며 무용가, 안무가, 춤 교육자로서 70년 이상 한 길을 지켜온 그들의 쉼 없는 노고와 치열한 실천에 경의를 표할 뿐이다.

 제36회 한국무용제전 대극장경연 최우수작 김민우 '상냥한 호소-마지막 페이지' ⓒHanfilm (사진제공=한국춤협회)

잠시 휴식 후, 2부 무대 김민우 안무작 <상냥한 호소-마지막 페이지>. 지난 제36회 대극장 경연 최우수 작품으로 선정되어 올해 개막공연에 다시 초청되었다. 청주시립무단의 중견 남성 무용가 김민우는 크고 작은 습작 안무를 통해 춤작가로 위치를 굳히고 있다.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펼쳐 보이며 충정지역의 차세대 대표주자로 자리매김한 '미완의 대기'이다. 특히 솔리스트 여성 무용수 최유민은 초반, 강렬한 조명에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의 감성을 격렬하게 관객들의 시선으로 집중시키며 아우라를 과시했다. 한 쪽 손으로 칠판에 분필로 개인적 사연인지 사회적 이슈인지 모를 텍스트들을 열과 성을 다해 풀어놓았고 그 칠판과 분필이 부딪히는 소리의 음향효과는 관객의 귀를 기울이게 한다. 그 어떤 사연인지 7명의 무용수는 검정 원피스 자락, 저마다 조금씩 다른 길이로 세련된 이미지는 물론, 격렬한 움직임의 춤을 노출하면서 그 표정들이 공간을 바꾸어 달리며 조금은 분노의 인상(?)으로 펼쳐졌다.

'면벽(面壁)' 국수호 ⓒHanfilm (사진제공=한국춤협회)

조금은 불안해 보이는 여성 주역 무용수의 존재감이 코러스와 동선이 교차되기도 하고 때론 공간을 대칭적으로 만들면서 서로를 경계하는 분위기로 갈등과 익명성 혹은 내면의 대비를 차별화시킨다. 그 흔들리는 감성과 불안한 관계의 모습은 현대인의 초상으로 읽힌다. 김민우 안무가는 매우 섬세한 몸의 반복적 움직임으로 군무의 앙상블과 서로를 연결하는 일종의 연대의식을 펼치며 어떤 갈증에 대한 만만치 않은 무용수들의 앙상블이 객석에 자리한 사람들에게 전하려는 처연한 감성이 우리를 숙연케 한다. 우리 모두에게 호소하는 서사가 대체 어떤 내용인지 꼭 알고 싶지는 않다. 분명한 것은 자신의 절절한 호소문의 내용을 조금씩 빨라지는 분필의 음향효과로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칠판에 빠른 속도로 써 내려가는, 일견 뫼비우스의 띠를 연상시키는 김민우의 속내가 담긴 듯하다.

지난해 초연 때보다 무용수 2명을 더 보강, 에너지와 공간을 조명효과 및 과감한 동선 이동을 통해 강한 분위기로 연출했다. 군무진의 칼 군무와 감성표현 및 주역 무용수의 표정연기로 객석을 압도하는 극적 장치로서 내면의 상징성을 표현, 안무적 보완을 실천하면서 초연보다 완성도를 높였다. 직업무용단원 신분을 유지하면서도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은 지역 춤작가로서 이 작품의 재공연 기회를 통해 자신만의 대표 레퍼토리로 구축하고 성장하려는 우직한 집념과 실천의지가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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