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죄악은 우연히 시작되었다
[공연리뷰] 죄악은 우연히 시작되었다
  •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3.05.16 07: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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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오페라단 ‘맥베스’

 자비, 존경, 사랑도,

하루의 끝 해질녘의 위로도

한 송이의 꽃도 노년의 세월에 뿌려지지 않을 것이다

네 비석에 어떤 미사여구도 기대하지 말라

오로지 저주가 있을 뿐이다 

국립오페라단 '맥베스' 공연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더프리뷰=서울]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많이 올려지고 있다. 현재 연극 <리어왕>과 <오셀로>가 공연 중이다. 셰익스피어의 인간에 대한 성찰은 400여 년이 지나도 강렬하게 와닿는다.

국립오페라단이 <맥베스>(4월 27-30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를 올렸다. 최상호 신임 단장의 첫 작품이다. 베르디의 초기작이자 첫 셰익스피어 원작의 오페라로, 1847년 초연되었으나 이후 수정을 거쳐 1865년 완성된 버전이다. 베르디의 음악은 잠재된 욕망으로 악에 잠식당해가는 맥베스의 비극적인 서사를 완성했다.

연출을 맡은 파비오 체레사는 지난해 국립오페라단의 <시칠리아 섬의 저녁기도>에서 상징적 연출을 보여준 바 있다. <맥베스>에서는 거대한 눈동자로 무대를 압도했다. ‘호루스의 눈’처럼 세상과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거대한 눈동자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을 상징하고 있었다. 아무리 은밀하게 죄악을 저질러도 신(혹은 신적 존재)은 다 보고 있음을, 운명을 거스르려 마음을 먹어도 역시 알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였다. 또 연출자는 이 눈동자를 이용해 눈 앞의 무대는 현실세계로, 눈 안쪽은 초현실세계로 설정했다. 즉 죽음을 당한다면 이 눈 안 쪽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다.

마녀들은 당연히 초자연세계인 눈 안쪽에서 움직였다. 여성합창이 세 마녀의 목소리를 대신하는데, 마녀들을 성악가가 아닌 무용수가 연기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또한 이들은 던컨 왕이나 레이디 맥베스가 죽어갈 때 마치 저승사자나 운명의 세 여신처럼 눈 안쪽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던컨 왕의 죽음도 왕이 겉옷과 왕관을 벗고 눈 안쪽으로 멀리 걸어 들어가는 모습으로 묘사했으며, 방코의 유령도 마찬가지였다. 독특하게도, 그들은 살해를 당했으나 세상의 짐을 벗고 흰옷차림의 평화로운 모습으로 사라진다는 것. 전쟁과 암투 속에서 비로소 안식을 얻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의상 역시 드라마 전개에 큰 몫을 했다. 초자연세계의 마녀는 검은 옷이지만 현실의 모든 인물들은 흰옷으로 등장했다. 그러나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가 악에 물들어갈수록 피를 의미하는 붉은 색이 흰 옷에 퍼져간다. 나중에는 온통 피로 뒤덮인 듯 새빨간 망토를 입고 피 묻은 왕관을 쓰고 있다.

국립오페라단 '맥베스' 공연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양준모의 맥베스는 기대 이상이었다. 불안과 광기에 흔들리는 눈빛, 범죄로 쟁취한 왕좌를 지키기 위해 멈출 수 없는 살인으로 폭군이 되어가는 과정을 생생히 재현했다. ‘내 얼굴에 단검이 향하고 있나?’를 부르며 야욕과 양심 사이의 혼란을 노래할 때 휘몰아치는 오케스트라의 흐름은 관객을 스릴러 드라마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였다. 죄악의 길에 들어선 순간 하인들의 기도 소리에 ‘아멘’을 할 수 없는 유약한 심장의 소유자가 던컨 왕의 죽음 앞에 ‘지옥아, 입을 벌려 네 창조물들을 모두 삼켜버려라’라고 암살자를 저주하는 합창을 소리높여 부르는 장면에서 전율이 일었다. 그가 걸어갈 죄악의 길을 예고하는 장면이었다.

4막에서 ‘자비, 존경, 사랑도’를 부를 때는 모든 것을 체념한 공허한 독백이 허공을 울렸다. 악행을 인정하나 승부에서는 지고 싶지 않은 전사의 정신, 자신의 악행의 탓을 누구에게도 돌리지 않는 고지식한 권력자의 모습은 악인인데도 동정심이 들게 했다.

이날 또 다른 주인공은 단연 레이디 맥베스의 임세경이었다. 임세경의 목소리는 지배자의 색채가 짙다. 1막의 ‘어서 오세요, 내가 차가운 심장에 불을 붙이겠어요’와 이어진 카바티나 ‘일어서라 지옥의 사자들이여’에서 임세경은 역사를 스스로 이루려는 야망으로 활활 타오른다. 악녀는 욕망에 충실한 사람이다. 그녀는 망설이고 불안해하는 남편을 재촉하고 북돋운다. 그러나 4막에서 맥베스 부부의 상황은 뒤바뀐다. 맥베스가 점차 피와 죄악에 무감각해지는 반면 레이디 맥베스는 범죄의 기억에 갇혀 정신착란으로 죽음을 맞는다. 권력의 화신이었던 여인이 피 묻은 장갑을 끊임없이 벗으며 ‘아직도 얼룩이 남아있네’를 부르는 광란의 장면은 압권이었다. 맥베스를 다독이다가, 왕좌의 권력을 탐하다가도 피의 잔상으로 미쳐가는 임세경의 놀라운 연기를 볼 수 있었다.

<맥베스>는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는 베이스 박종민의 첫 국내 오페라 무대이기도 했다. 박종민은 장군 방코를 맡아 ‘하늘에서 어둠이 내려앉고’를 리치한 음색과 발군의 성량으로 불렀다. 방코는 우직하고 결연한 군인 중의 군인이다. 수많은 전투를 치른 경험으로 죽음의 냄새에 민감하다. 죽음 앞에서는 의연한 장군이나, 아들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아비의 심정을 세심하게 담아냈다.

맥더프를 노래한 정의근도 열연을 펼쳤다. 자식들을 맥베스에게 잃고 ‘아, 아버지의 손이’를 부를 때, 그 애통함이 선명한 테너의 음색을 통해 오롯이 전해졌다.

국립오페라단 '맥베스' 공연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맥베스나 방코의 죽음을 제외하고는 죽음이 이미지로 연출되었다. 죄와 벌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이들은 조금 답답했을 것 같다. 죄악이나 죽음을 의미하는 마녀의 붉은 색 천도, 의도는 좋았으나 시각적으로는 명징하게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거대한 눈동자, 그리고 4막에서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무대는 맥베스의 인생과 권력의 덧없음을 적절히 보여주었다.

성악가들의 호연은 물론, 노이오페라 코러스의 합창은 오페라의 스케일을 더 큰 규모로 만들어주었다. 이브 아벨이 지휘한 경기필은 초반에는 약하다는 우려가 들었으나 점차 깊고 진한 베르디의 드라마를 완성해 나갔다. 국립오페라단의 무대가 항상 기대되고, 보고나면 충족감이 드는 이유는 변화와 성장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가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욕망을 품으면 파멸한다는 이야기일까, 아니면 파국을 알면서도 정해진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는 것일까. 마녀의 예언이 아주 우연히 맥베스의 심연에 씨를 뿌린 것일까, 아니면 맥베스의 밑바닥에 도사린 죄악이 마녀의 예언으로 고개를 내민 것일까.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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