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키워드로 다시 읽는 춤공연-1] 국립현대무용단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
[철학 키워드로 다시 읽는 춤공연-1] 국립현대무용단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
  • 최찬열 무용평론가
  • 승인 2023.05.19 0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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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춤꾼은 잠재적 호모 사케르이다.

*연재를 시작하며 = 동시대 춤세계를 수놓는 공연은 다종다양하다. 그중에는 공연이 끝나고 한참이 지나도 의미를 곱씹게 하는 작품들이 적지 않다. 공연을 본 이들의 사유를 촉발하는 이런 공연들이 함축한 의미를 철학자들의 개념어를 통해 살펴보고 함께 음미해보는 최찬열 평론가의 글을 대략 한 달에 한 번 꼴로 연재한다. - 편집자.

[더프리뷰=서울] 최찬열 무용평론가= 우리 사회에서 왕따가 사회 문제로 대두한 것은 오래전 일이다. 중고등학교뿐만 아니라 심지어 초등학교에서도, 또 동질성을 강요하는 군대나 권력 기관 등에서도 이런 일은 비일비재로 일어난다. 어디 그뿐이랴, 우리는 오늘날 사회 곳곳에서 사람들이 실업자와 비정규직 노동자로, 혹은 불법 체류 노동자로 내몰리는 현상을 일상다반사로 목도하고 있다. 이른바 한 사회나 집단 안에서 특정의 사람을 따로 떼어 배제하거나 멀리하며 따돌리는 경우를 일상적으로 보고 들을 수 있게 잦거나 많게 접한다. 내몰리거나 쫓겨나는 사람, 혹은 소외당하거나 추방당하는 사람이 수두룩하다는 말이다. 2021년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무대에 올랐던 국립현대무용단의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10월 22-24일, 안무 남정호)는 존재자의 이런 ‘내버려짐’, 혹은 ‘쫓겨남’을 주제화한 공연이었다. 안무자 남정호의 비판적 통찰이 돋보이는 이 공연은 오늘날의 사회가 당면한 중요하면서도 진지한 문제를 간결한 미장센으로 명징하게 들춰내 보여주고 있었다.

국립현대무용단 제공(사진 고흥균)
국립현대무용단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 (사진=고흥균)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는 누군가를 무대 밖으로 쫓아내는 게임 형식을 취하고 있는 춤 공연이다. 그리고 한 공동체에 속하는 것으로 보이는 전체 출연진이 이 게임의 진행 과정에서 순차적으로 한 명 한 명 사라질 때마다 무대 뒷벽 좌우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스크린에는 이들의 인물 사진이 나타난다. 이러한 과정은 공연이 끝날 때까지 계속되고, 급기야 단 한 명의 춤꾼만이 무대에 남겨진다. 곧 공연은 시종일관 지속되는 게임을 통해 쫓겨나는 춤꾼을 계속 양산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하지만 계기마다 이들이 밀려나는 상황과 양상은 다 다르다. 어떤 때는 폭력에 의해, 다른 때는 배신과 음모로 인해, 또 시기와 질투, 공포로 인해, 그리고 특이하게는 자발적으로, 이들은 차례로 무대에서 퇴장당한다. 그리고 쫓겨난 이들이 다시 무대에 올라와서 남겨진 춤꾼들과 함께 춤추는 경우는 없다. 그들은 게임의 장에서 배제되고 소외된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공연을 먼저 마친 사람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커튼콜만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공연 내내 무대 가장자리를 배회하며 공연 상황에 개입된다. 이를테면 남겨진 자와 쫓겨난 자, 그들 사이에는 ‘포함적 배제’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쫓겨난 자는 추방당하는 것이고, 그들은 공동체로부터 배제되지만, 공동체와 무관하게 완전히 그 바깥에 버려지는 것은 아니다. 외려 추방이라는 형태로 자신을 내버린 공동체에 종속되고 포함된다.

국립현대무용단 제공(사진 고흥균)
국립현대무용단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 (사진=고흥균)

위로 약간 솟아오른 밝고 환한 사각형 무대 오른쪽 앞에 화려하면서도 자유스러운 복장을 한 춤꾼 한 명이 앉아 있다. 경쾌하고 빠른 음악이 흘러나오고, 무대 중앙으로 이동한 그는 신나게 춤을 춘다. 가볍고 발랄한 하위문화의 춤 움직임이다. 그와 동시에 무대 뒤 컴컴한 어둠 속에서 4명의 춤꾼이 등장해 횡대로 선 채, 마치 런웨이를 하듯 무대 앞으로 힘차게 걸어 나온다. 그들은 무대 전면에서 단순하고 단조로운 행위를 한다. 군인들의 제식훈련이나 집단체조같이 도식성과 경직성이 느껴지는 일사불란한 동작이다. 진한 색의 후드형 상의를 똑같이 입고 있는 차림새로 보아 그들은 한 집단에 속하는 동질의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무대 뒤로 사라졌다가 다시 전면으로 나오기를 두세 번 반복하면, 어느덧 11명의 춤꾼이 열을 맞추어 움직이는 하나의 대형을 형성한다. 자유롭게 운동하는 한 명의 춤꾼과 퍽 대조적인 움직임을 보이던 그들은 그 춤꾼을 둘러싸고, 그의 선글라스와 윗옷과 신발을 빼앗고, 이어서 다섯 명의 춤꾼이 그를 높이 들어올린 채 바지마저 벗겨버린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 팬티만 입은 채 다른 춤꾼들에게 간신히 매달린 이 춤꾼을 무대 뒤로 끌고 나가고, 무대 뒤 벽면 상단에 설치된 커다란 스크린에는 환하게 웃는 그의 얼굴이 나타난다.

국립현대무용단 제공(사진 고흥균)
국립현대무용단 '이것은 유희가 아닙니다' (사진=고흥균)

경쾌한 음악과 함께 11명의 춤꾼이 이열횡대로 무대 뒤에 다시 등장한다. 첫 번째 열의 다섯 춤꾼은 빼앗은 상의와 바지, 신발 두 짝과 선글라스를 전리품처럼 나누어 갖고 있다. 그들은 신나게 움직이지만 열을 맞추어 똑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그런데 이들 중 빼앗은 상의를 입고 있던 한 춤꾼이 그들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춤을 추기 시작하고, 이윽고 이 춤꾼도 나머지 10명의 춤꾼에 의해 무대 밖으로 내몰린다. 그리고 그들은 앞서 빼앗은 신발과 바지 등도 무대 밖으로 던져버린다. 집단과 다른 춤을 춘 춤꾼과 그의 상의를 입고, 그를 비슷하게 따라 한 춤꾼이 폭력적인 방식으로 차례차례 무대 밖으로 쫓겨난 셈이다. 그리고 남은 춤꾼 10명은 다시 똑같은 복장 차림이다. 그들은 여럿이지만 하나일 뿐인 무리 혹은 집단이다. 그 무리는 그들과 다른 이질적인 존재자들을 무리 밖으로 몰아낸다. 동질성을 강요하는 한 공동체, 곧 군대나 학교 등에서 암암리에 작동하고 있는 배제의 원리가 구현된 장면이다. 신나고 빠른 음악에 맞춘 유쾌한 움직임과 달리 거칠고 위압적인 뉘앙스를 띠는 장면이다.

국립현대무용단 제공(사진 고흥균)
국립현대무용단 '이것은 유희가 아닙니다' (사진=고흥균)

남은 10명의 춤꾼이 상의를 벗는다. 똑같이 입고 있던 옷을 일제히 벗자, 그들은 이제 일상복 차림이다. 둥글게 원을 형성해 빙빙 도는 원무를 추다가, 뿔뿔이 흩어져서 벗어든 상의를 휘날리며 제각각 춤을 추던 그들이 일거에 그 옷을 허공으로 날리고, 무대 바닥에 머리를 묻은 채 웅크려 정지 자세를 취한다. 그 순간 검은색 복장을 한 2명의 퍼포머가 등장해 밝고 환한 무대 바닥 가장자리를 새까만 카펫으로 덮는다. 검은 카펫을 깔며 흰 무대를 잠식하거나 오염시키는 그들은 쫓겨난 이들이다. 그리고 검은 지대는 무대 안도 아니고 무대 바깥도 아닌, 그 둘 사이에 형성되는 사이-공간이 된다. 이른바 무대와 무대를 완전히 벗어난 바깥, 그 둘 사이에 이곳도 아니고 저곳도 아닌 식별 불가능의 지대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쫓겨나서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예외 상태에 처한 사람, 곧 산자도 아니고 죽은 자도 아닌, 이 둘 사이의 사이-존재자, 이른바 상징적인 죽임을 당한 존재자들이 거주한다. 게임의 장에 다시는 들어올 수 없는 이들이 마치 유령처럼 검은 옷을 입고 배회하다 이따금 모습을 보이는 장소이다.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의 용어법으로 말하자면, 검은 지대에 속하는 사람들은 ‘호모 사케르(Homo Sacer)'이다. 호모 사케르란 ‘주권 권력에 의해 추방당한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주권은 규칙의 바깥인 ‘예외 상태’를 창출함으로써 법적, 정치적 질서의 공간을 확정하는 데 그 본질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인간은 사적인 영역에서 그냥 먹고사는 문제만 해결하면 되는 동물이 아니다. 공공의 장에서 정치적인 삶을 누릴 때에만 그들은 인간답고 가치 있는 삶을 사는 존재자이다. 그러므로 공공의 장에서 추방당하는 것은 '살아 있어도 사는 것이 아닌 상태', 곧 ‘예외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예외 상태란 단순히 질서 이전이나 규칙에서 벗어난 혼돈이 아니다. 질서나 규칙이 제 효력을 스스로 정지시켰지만, 여전히 효력을 발휘하는 상태, 달리 말하자면 배제를 통해 포함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주권 권력을 닮은 권력 장치들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고, 사회 곳곳에서 호모 사케르가 속출하고 있다. 난민, 불법 외국인 노동자, 비정규직 노동자뿐만 아니라 수시로 자기 존재를 송두리째 부정당하는 처지인 장애인, 성소수자, 주민등록 말소자, 여성, 아동과 심지어는 비주류 춤꾼들도 호모 사케르로 볼 수 있다. 아감벤은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의 권리를 통제할 ‘예외 상태’가 너무 많이 등장하는 것에 주목한 것이다. 곧 예외 상태가 상시화되고 전면화되면서 사람들은 헌법적 권리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늘 어떻게든 ‘관리되거나’ ‘처분되고’ 마는 잠재적 호모 사케르이다.

국립현대무용단 제공(사진 고흥균)
국립현대무용단 '이것은 유희가 아닙니다' (사진=고흥균)

본격적으로 놀이가 시작된다. 검은 의상에 검은 모자를 쓴 다른 퍼포머 한 명이 등장해 무대 바닥 여기저기 널려 있는 옷가지를 주워 백에 담는다. 그리고 그는 호각을 꺼내 분다. 호각 소리와 함께 춤꾼들은 짝짓기 놀이를 한다. 세 명씩 그룹을 이뤄 부둥켜안거나 등을 맞댄 채 모이면 거기에 끼지 못하는 한 명의 낙오자가 남는다. 등을 맞댄 채 불안하게 관계를 유지하는 듯한 그룹들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며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홀로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하던 그는 스스로 무대 밖으로 퇴장한다. 이는 자유로운 선택이라기보다 자발적 복종에 의한 물러남일 것이다. 군대나 학교 등 동질성을 강요하는 특정한 공동체뿐만 아니라 일상의 영역에서도 변함없이 작동하고 있는 배제의 원리가 은근히 드러나는 장면이다.

그래서일까. 그들이 부둥켜안으며 그룹을 형성하고, 손에 손을 맞잡고 원무를 출지언정 남정호류의 유희 정신이 잘 묻어 있는 이 춤은 거짓과 위선을 숨기고, 경쟁심과 이기적인 속내를 감춘 그럴싸한 화합의 제스처로만 보일 뿐이다. 그들이 한데 어울려 놀지만,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 놀이도 아니고 게임도 아니다. 만약 이것이 게임이거나 놀이라면 살벌한 생존게임이자 권력놀이이다. 춤 만든 이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원리가 암암리에 작동하고 있는 현대사회의 일상적 삶을 조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진지하고 무겁게 다루기보다는 간결하면서도 담담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를테면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는 현실 사회에서 작동하는 권력의 통치 메커니즘을 놀이나 유희 형식을 빌려 역설적으로 풀어내고 있는 의미심장한 공연이다.

국립현대무용단 제공(사진 고흥균)
국립현대무용단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 (사진=고흥균)

추방령과 예외 상태의 산출은 계속된다. 그러나 추방의 기술은 훨씬 유화적이고, 폭력은 노골적이라기보다 한결 부드럽게 자행된다. 다른 사람을 발로 지그시 밟기도 하고, 무덤덤하게 다른 사람의 등에 올라타 이동하는 자들의 표정에는 권력을 쥔 자의 여유와 느긋함이 묻어난다. 유쾌한 피아노 선율에 맞추어 즐겁게 춤을 추고, 짝짓기 놀이를 하고, 남과 여, 남과 남, 둘이 짝을 이뤄 정답게 춤추다가 무대 한편에 모여 승리를 만끽하는 자들처럼 편안하게 앉거나 비스듬히 누운 채 한 폭의 정물화같이 여유작작한 풍경을 연출할지라도, 그들의 춤과 퍼포먼스에는 언제나 주종관계가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평화로운 풍경과 달리 춤꾼들이 한 명 한 명 차례로 쫓겨나는 과정은 계속되고, 무대의 밝고 환한 부분은 점점 좁아지는 형국이다. 일상에 침투한 배제의 원리가 우리 삶에서 점차 전면화되어 가듯이, 무대는 차츰차츰 검은 카펫으로 잠식당하고, 춤꾼들이 무대 밖으로 연이어 쫓겨나는 과정은 계속된다.

국립현대무용단 제공(사진 고흥균)
국립현대무용단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 (사진=고흥균)

이어지는 장면에서 남정호는 잠식하고 잠식당하고, 추방하고 추방당하고, 밀어내고 밀려나는, 남겨진 자와 쫓겨난 자 사이의 관계성을 문명과 자연의 관계성으로 치환해 보여준다. 남정호의 문명비판적 시각이 잘 묻어나는 대목이다. 무대 뒤 스크린에는 태양이 떠 있다. 검은 옷을 입은 한 퍼포머가 등장해 무대 여기저기에 억새를 놓고 퇴장하자, 남겨진 7명의 춤꾼이 살금살금 기어서 그것들에 다가간다. 그리고 그들은 억새를 들고서 신중하게 움직인다. 그것을 꼿꼿하게 세우기도 하고, 등에 올린 채 기어서 다니고, 그것으로 무대 바닥을 내려치기도 하다가, 마침내 한 춤꾼이 모든 억새를 거둬 들고서 무대 밖으로 사라진다. 그때 스크린에 걸린 태양 빛도 동시에 없어진다. 문명 안에 남은 마지막 자연이 밀려나고 없어지는 형편이자 국면을 암시하는 듯하다. 이를 안타까이 여기는 이들처럼, 춤꾼들은 일제히 반가사유상의 모습을 재현하며 상념에 빠져들기도 한다. 하지만 자연 혹은 ‘그저 사는 생명’이라는 야생 상태가 문명 안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문명과 자연, 그 둘 사이에는 남겨진 자와 쫓겨난 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포함적 배제’의 원리가 작동한다는 말이다.

국립현대무용단 제공(사진 고흥균)
국립현대무용단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 (사진=고흥균)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에는 두 부류의 인간, 곧 무대에 남겨진 자들과 무대 밖으로 쫓겨난 자들이 등장한다. 전자는 개인이나 집단에서 특유한 일상적 삶을 누리면서 누군가를 몰아내는 생존게임에 몰두하지만, 후자는 그저 사는 사람들처럼 특별한 형식 없이 무대에서 서성거리다가 간혹 공연 상황에 연루된다. 곧 그들은 쫓겨나는 자들을 끌어내고, 긴 의자를 뺏거나 들고나오고, 또 억새를 놓는 행위 등을 무덤덤하게 기계적으로 수행할 뿐이다. 그들은 공연 내내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 옷을 입고 있지만, 그들이 생물학적 죽임을 당한 것은 아니다. 내버려지고, 쫓겨나고, 추방되고, 배제되고, 탈락하고, 왕따당한 그들이 간혹 무대에 등장한다고 해도 그들은 이미 상징적인 죽임을 당한 존재이기에 존재감은 미미할 수밖에 없다. 살아있되 죽은 것처럼, 권력 놀이의 장에서는 말할 수도 없고 정치적인 행위와 게임은 더더욱 할 수 없는 존재자이다. 하지만 무대에 남겨진 자들의 처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들도 언젠가는 쫓겨날 것이기 때문이다. 곧 그들도 잠재적으로 검은 지대에 속하는 자들이다.

일상화된 권력의 아귀다툼은 한층 더 치열해진다. 남겨진 6명의 춤꾼은 등받이가 없는 긴 벤치 하나를 달랑 놓고, 좁은 자리라도 차지하기 위해 힘을 겨루며 다툰다. 먼저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5명의 춤꾼 사이로 비집고 들어서며 자기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애쓰던 한 춤꾼이 지쳐 쓰러지자, 검은 옷을 입은 두 명의 퍼포머가 등장해 그를 들고 무대 밖으로 퇴장한다. 어떻게든 자리를 잡아 보려고 아등바등하며 용을 썼지만 이루지 못하고 밀려나는 것이다. 남겨진 5명의 춤꾼도 한정된 자리를 놓고 재차 싸움을 벌인다. 앞다퉈 의자에 올라서고, 의자 주위를 빙빙 돌다 다 같이 그 위에 올라서서 자리를 공유하는 듯하다가도 어느새 다시 맹렬하게 각축을 벌이지만, 끝내 그들 모두에게 할당된 안정된 자리는 없다. 검은 옷의 퍼포머들이 등장해 벤치를 뺏어 들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자리다툼의 장이었던 긴 의자는 누군가는 포함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배제하는 권력 장치의 통치 메커니즘을 나타내는 메타포이다. 권력의 작동 방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를테면 근대 이전의 권력이 생과 사를 가르는 문제, 곧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에 관여했다면, 오늘날의 권력 장치는 이런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포함하느냐 배제하느냐의 문제에 관여할 뿐이다. 말하자면 남정호의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에서 지속되고 있는 추방의 메커니즘은 쫓겨나는 자들을 완전히 추방하거나 죽이지는 않고, 살린 채로 권력의 장 가장자리에 머물게 하면서 관리하는 권력의 교묘한 예외화 전략과 닮았다.

국립현대무용단 제공(사진 고흥균)
국립현대무용단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 (사진=고흥균)

현대사회 도처에는 생명 혹은 삶을 분류하고, 나누고, 가르고, 또 규정하고, 지배하고, 제어하는 각종 장치가 널려 있다. 무용 장치들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각종 무용 장치도 다른 권력 장치들과 별반 다르지 않게, 누군가는 포함하고 누군가는 배제하는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에 참여한 춤꾼들이 이 공연에 한 번 참여할 기회를 얻었다 하더라도, 그들도 언젠가는 배제될 수밖에 없는 처지일 것이다. 곧 그들도 잠재적으로 쫓겨난 춤꾼이다. 또 그들의 춤도 무용 장치의 목적에 부합하게 코드화된 몸의 춤일 뿐이다. 그러기에 유희나 놀이 형식을 빌린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에서, 그들의 춤이 아무리 자유스럽게 보일지라도, 이는 권력의 용도에 알맞게 소용되기 위한 몸들의 춤이며 ‘포함적 배제’의 원리로 작동하는 권력 장치의 하나인 거대한 무용 장치에 포획된 몸의 춤이라는 말이다. 그들뿐만 아니라 모든 춤꾼은 잠재적 호모 사케르라는 말이다.

그러기에 마지막 장면에서 춤꾼들이 여유로운 동작으로 기품있게 움직이다가 블루스를 추며 여가를 즐기고, 속삭이고 어루만지며 서로 위하는 체하지만, 언제 쫓겨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들은 다시 동물적 본색을 드러내며 짐승처럼 기며 서로 노려보고 위협하다가 급기야 또 한 명을 무대 밖으로 몰아낸다. 언제나, 어떤 상황에서도 서로를 쳐내는 행위는 멈추지 않는 것이다. 남은 세 명이 펼치는 퍼포먼스에서 그들이 보이는 형태는 더 가관이다. 두 명의 남성 춤꾼이 작당하여 한 명의 여성 춤꾼을 무대 모서리로 몰아낸 뒤, 그들끼리 화기애애하게 친교 하지만, 이내 둘은 거칠게 싸우다 제풀에 자빠져 퇴장당한다. 춤 만든 이의 냉소적인 시선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볼썽사나운 이 모습은 우리 삶에 침투해 은밀하게 작동하는 권력 놀이이기에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할 것이다. 포함과 배제의 원리가 미시적 영역에서 일상화되었다는 말이며, 아감벤은 이런 상태를 일러 ‘예외 상태가 전면화’되었다고 말한다.

어쨌든 어부지리로 홀로 남겨진 여성 춤꾼이 억새를 들고 무대 중앙으로 나온다. 그러는 사이에 무대는 검은 카펫으로 뒤덮이기 시작하고 무대 천장에서 검은 흙이 쏟아져 내리면서 무대는 온통 검게 변한다. 디스토피아로 변한 대지를 다시 일구듯 억새를 든 춤꾼이 홀로 발버둥 치지만 역부족이다. 이리저리 검은 땅을 헤집던 그도 지쳐 쓰러지면서 무대는 암흑 속으로 잠긴다. 억새를 든 춤꾼, 마지막으로 남겨진 인간과 자연, 이들마저 추방당하는 것이다. 예외 상태가 전면화된 현대사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이다. 예외가 규칙이 되어감과 동시에 공동체 전체가 예외 상태로 변한 것이다. 국립현대무용단의 <이것은 유희가 아니다>가 내보인 존재론적이면서도 정치적인 전언이다.

최찬열 무용평론가
최찬열 무용평론가
altai21@hanmail.net
한국춤 전공 후 모스크바대 인류학 석사,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인류학 박사과정 및 미학 박사학위 취득. 지금은 몸의 예술과 인문학에 기반한 통섭적 문화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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