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완벽한 더블빌의 밤 - 발레 드 로렌(Ballet de Lorraine)
[공연리뷰] 완벽한 더블빌의 밤 - 발레 드 로렌(Ballet de Lorraine)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3.05.25 18: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421일과 22, 뉴욕 NYU 스커볼(NYU Skirball)에서는 프랑스의 무용단체인 발레 드 로렌(Ballet de Lorraine, 이하 로렌)의 더블빌 공연이 펼쳐졌다. 첫 번째 작품은 로렌의 예술감독인 페터 야콥슨(Petter Jacobsson)과 그의 오랜 창작 파트너 토마스 케일리(Thomas Caley)의 공동작 <For Four Walls>(2019)이고, 다른 한 편은 뉴욕의 춤작가 미겔 구티에레스(Miguel Gutierrez)<Cela Nous Concerne Tous(This Concerns All of Us)>(2017)였다. 페터는 자신의 예술적 자양분이 되었던 뉴욕의 아방가르드를, 미겔은 현대 세계사의 정세는 물론 사유와 문화예술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우리 시대의 변곡점 프랑스 68혁명을 소환하여 의미를 맞교환했다. 두 작품 모두 프랑스에서 초연, 시차를 두고 북미대륙에 당도한 것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새로운 합의와 연대가 필요한 지금 이 시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했다. 뿐만 아니라 그 해석적 가치로부터 비등점을 훌쩍 넘어 지극히 열렬했던 연행이 관객석을 하나로 달구어내었으니, 여러모로 충족적인 공연이었다.

페터 야콥슨의 ‘For Four Walls’ © Jose Caldeira
페터 야콥슨의 ‘For Four Walls’ © Jose Caldeira
미구엘 구티에레즈의 ‘Cela nous concerne tous’ © Yi Zhao
미겔 구티에레스의 ‘Cela nous concerne tous’ © Yi Zhao

[더프리뷰=뉴욕] 하영신 무용평론가 = 한 번씩 뉴욕에서 봄이나 가을 한 계절을 지낸다. 정작 집중하는 컨템퍼러리댄스는 유럽에서 초면하였고 애정하는 작가들은 대개 미국 바깥에 있지만, 개인 여건상 시즌을 러닝하기에 뉴욕이 좀 수월한 편이라 그리 한다. 경험해본 바 뉴욕은 별칭 멜팅팟(melting pot)’ 답다. 항시 세계 각지 여러 층위의 것들이 이합집산 중. 요즘은 각 문화의 존속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샐러드 볼(salad bowl)’이라고 부른다는데, 어쨌든 3개월쯤 이 도시에 체류하다보면 이러저러한 각종 춤과 조우할 수 있다.

아메리칸발레시어터(American Ballet Theatre, ABT)의 클래식 레퍼토리로부터 뉴욕시티발레단(New York City Ballet, NYCB)의 신작들(물론 발란신(George Balanchine)과 로빈스(Jerome Robbins)의 유산이 매 시즌의 두 축이지만 상임안무가 저스틴 펙(Justin Peck)의 주도로 신작들이 발굴되고 레퍼토리로 안착되는 <21st Century Choreography>와 같은 기획도 있다), 조이스씨어터(The Joyce Theater)와 브루클린 아카데미 오브 뮤직(Brooklyn Academy of Music, BAM)이 불러들이는 세계 전역 동시대 방점의 단체들과 작가들의 작품들, 인종·섹슈얼리티·정체성과 예술에 관한 시대적 쟁점들을 다투어온 춤작가 빌 T. 존스(Bill T. Jones)가 이끄는 뉴욕 라이브 아트(New York Live Arts)의 레지던스와 가치지향적 기획이 지탱해내는 독립 예술가들의 무대들, 그리고 우리나라 무용가 김영순이 관장해온 덤보 댄스 페스티벌(DUMBO Dance Festival. 올 해로 22번째를 맞는 DDF는 622일부터 나흘간 마크 모리스 댄스 센터(Mark Morris Dance Center)에서 개최될 예정) 등이 선보이는 신예들의 춤들, 그리고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 호세 리몽(José Limón), 트리샤 브라운(Trisha Brown), 앨빈 에일리(Alvin Ailey) 등 자국 무용계를 일궈낸 무용가들의 유산과 현재를 연결하는 유명 무용단들의 지속적인 활동까지, 뉴욕 댄스 씬은 다층적이고 각 층위의 물량이 넘쳐난다.

극장의 예술작품으로부터 공원의 커뮤니티댄스까지, 뉴욕은 춤이 넘쳐나는 도시다. 사진=하영신
극장의 예술작품부터 공원의 커뮤니티댄스까지, 뉴욕은 춤이 넘쳐나는 도시다. (사진=하영신)

그 모든 춤들이 전부 감동 깊거나 인상 짙은 것은 아니다. 그래도 한 계절에 한두 장면씩은 꼭 남는다. 볼쇼이발레단(Bolshoi Ballet)과 파리오레라발레단(Paris Opera Ballet)과 뉴욕시티발레단이 발란신의 <Jewels>를 한 보석씩 나누어 춘 좀처럼 성사되기 힘든 기획을 목도하게 된다거나, 소위 컨템퍼러리 씬의 핫한' 이름들과 좀 일찍 만날 수 있었다거나, 올 해의 부야니 댄스시어터(Vuyani Dance Theatre, 남아프리카 공화국 단체)처럼 쉬이 조우할 수 없는 지역의 춤을 목격하게 된다거나… 곳곳에 산재한 크고 작은 공원에서 펼쳐지는 각종 공동체의 생짜춤들이 필자의 슬럼프를 구원한 적도 있다. 아름드리 거목(巨木) 아래 맨발과 붙든 손들의 어수룩한 원형무, 그러나 세계로부터 오롯해지는 집단적 시공간. 그렇지, 이것이 춤의 순간이었지, 작별을 작심했던 필자를 다시 춤 앞으로 불러 세운 순간들이 이 도시에서 더러 있었다. 오늘의 공연이 그렇다. 간만에, 울컥하여 절로 열렬한 박수를 보내게 만들었던 두 작품.

자족적이고 상보적인, 완벽한 더블빌의 밤

감상은 이지적이고 동시에 감성적인 활동이다. 필자가 특히 춤작품의 특성으로 누누이 심신일원론적 몸들의 정동(情動, affect)을 강조해왔지만, 그건 춤이 지극해진 순간 작품의 어떤 부분에서의 작용일 뿐 전체가 정동적 시간으로만 영위되는 그런 작품은 없다. 대개의 감상은 기억, 사유, 감각의 교직(交織)으로 구축된다. 이런 순간들을 풍부히 만들어줄수록 충족적인 작품이고 그런 순간들의 빌드업(build-up)을 통해 마침내 작품과 관람자, 연행자와 관객 그리고 관객과 관객들마저도 정동, 물아일체(物我一體), 완벽한 소통과 연대의 순간을 창출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연예술작품이다. 오랜 관찰자로서 필자가 얻은 기준은 그러하다.

그러나 현재 공연 트렌드의 키워드들, ‘컨셉추얼이나 해체적등등의 어휘들은 집약적이지만 동시에 소거적이다. 춤이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라고 춤추기를 멈춘 작품, 색다른 춤을 만들겠다고 춤으로 성립할 수 없는 행위로만 점철하는 작품들. 그야말로 춤이란 무엇인가,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에 빠지게 되지만 작품의 공백으로부터 회의에 빠지게 되는 것일 뿐 작품으로부터 연원하는 계기는 아닌 것이다. 이성 없는 감성이나 감성 없는 이성, 공허하기는 매한가지. 한 개인 한 인생 모두에서 중요한 것이 밸런스이듯 개념과 감각, 사변과 실천 사이, 예술과 사유에서 중요한 것 또한 조화로움일 성 싶다.

발레 드 로렌의 더블빌 <For Four Walls><Cela Nous Concerne Tous>의 세계에 그 모든 것들이 있었다. 개념과 감각, 사유와 유희, 과거와 현재, 정형과 비정형, 실존과 탈존, 구호와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렬한 춤. 그 모든 양단 사이에서 페터적이지만 로렌적인, 미겔적이지만 로렌적인, 로렌의 춤이었지만 우리 모두에게 춤적 순간들을 전도(傳導), 그리하여 마침내 춤의 충격에 울컥 뜨거운 박수를 보내게 만든 두 작품. 그 모든 것들은 각각의 작품 내에 충족적으로 있었다. 그리고 크게 <For Four Walls><Cela Nous Concerne Tous> 순으로의 연행은 앞서 나열한 양분(兩分)을 전자에서 후자로 이행하며 공연의 시간을 춤적 순간으로 승화해내었다. 그 모든 것들이 자족적이면서도 상보적으로, 일상을 초과하는 극장 내 세계, 총족적인 로렌 공동체의 세계를 이뤄내었다.

<For Four Walls>, 사방 벽을 밀어내고 펼친 카오스모스의 세계

발레 드 로렌은 프랑스 국립무용센터(Centre Chorégraphique National, CCN: 프랑스는 1984년 문화부 산하로 지역 거점, 안무가 중심의 15개 춤단체를 발족시켰다. 이로써 프랑스 무용계는 지역 분권화와 장르 배분 등 예술행정적 난제를 해결할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고 미학적으로는 작가주의 정착과 컨템퍼러리로의 진입을 촉진할 수 있었다. 현재 프렐조카주무용단(The Ballet Preljocaj) 19개 CCN 단체가 있다) 소속 낭시(Nancy) 소재 춤단체다. 1999년에 CCN에 편입되었고, 예술감독 페터 야콥슨은 2011년에 부임하였다.

프렐조카주무용단과 마찬가지로 로렌 단체명의 발레역시 양가(兩價)성 어휘다. 우리가 발레'라고 규정하는 춤으로부터는 멀고 모든 춤적 경험으로부터 자필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컨템퍼러리댄스로서는 발레적 계열로 추정된다. 스웨덴 출신으로 영국 새들러스웰스왕립무용단(Sadler’s Wells Royal Ballet)의 수석무용수로 활동하다 게스트 아티스트로 머스 커닝엄(Merce Cunningham), 트와일라 타프(Twyla Tharp), 데보라 헤이(Deborah Hay) 등 뉴욕 아방가르드 씬의 대표적 작가들과 다년 간 작업한 후 스웨덴왕립발레단(Royal Swedish Ballet)의 예술감독을 거쳐 현재에 이른 야콥슨의 이력이 확인해주는 바이기도 하지만 ‘artiste chorégraphique(choreographic artist)’라는 직함으로 소개되는 무용수들의 연행에서도 어떤 엣지(edge), 첨예하게 다다른 춤의 모서리들이 보인다.

작품이 개시되면 온통 검은 무대 위에 무채색 계열 애슬레저룩 차림의 무용수들이 2열 횡대로 서있다. 무대 상수에 그랜드 피아노 한 대가 놓여있고, 40여 분간의 작품은 바네사 바그너(Vanessa Wagner)가 연주하는 존 케이지(John Cage)<Four Walls>에 병행한다. 2019년의 초연은 머스 커닝엄의 탄생 1백 주년을 맞아 성사되었다. 커닝엄과 케이지의 첫 공식 공동작업으로 기록된 <Four Walls>(1944)가 인용되었다고 하는데, 원작을 공연물로써 확인할 방도가 없어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알려져 있는 커닝엄의 작품들과 테크닉을 감안하자면 이 작품의 친연성은 커닝엄의 춤보다는 케이지의 음악에 있다고 보는 편이 맞을 성싶다.

‘For Four Walls’ © Laurent Philippe
‘For Four Walls’ © Laurent Philippe

1960-70년대 뉴욕 아방가르드 예술 씬의 주요한 두 인물의 작품으로부터 기원(起源)하였지만 <For Four Walls>는 로렌적이다. 실험의지가 완연히 실현되기 이전 초창기 작업이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문헌상 가족 구성원이라는 등장인물을 소지한 무용극(물론 서사성이 약하다고 언급되어 있다)으로 기록되어 있는 커닝엄 춤의 내역은 흔적이 없고, 케이지의 음악도 그 유명한 <433>에서 제기한 급진적 문제의식(이 작품은 연주 없는 기악곡이다. 침묵적 연주 행위를 통해 공간 내 소리를 감지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음악과 그 감상에 관한 전복적인 개념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과는 멀다. 느리고 빈번한 휴지(休止)를 포함하며 낮은 음역 운용에 타악기적 인상을 지니지만 그래도 필립 글래스(Philip Glass) 정도, 미니멀리즘의 정서적 진폭쯤은 지니고 있다. 케이지의 음악으로서는 이례적인 이 심리적인 시공간을 24명의 무용수들이 춤춘다.

‘For Four Walls’ © Laurent Philippe
‘For Four Walls’ © Laurent Philippe

초반 설명에서의 ‘2열 횡대는 곧 착시로 확인된다. 이 작품의 유일하고도 중요한 장치는 거울 벽, 무용수들이 하나둘씩 움직이기 시작하면 그 반영(反影)으로써 거울의 존재가 확인된다. 거울은 여느 작품들의 활용에서처럼 무용수의 존재를 복제하고 공간을 중첩시키거나 확장하며 작품세계에 의미와 심도를 부여한다. 야콥슨과 케일리가 직접 세팅한 가동(稼動)하는 거울 장치는 오히려 음악보다 역동성을 부가한다. 반대로 작품의 가시적 구조를 만드는 것은 음악이다. 개연성으로 설계된 전개는 아니지만, 심지어 느닷없기까지 하지만(후반부 어느 대목에서는 무용수들이 스스로의 음성과 호흡으로 멜로디와 리듬을 만들며 춤을 추고 피아니스트가 그들을 바라보기도 한다), 중단과 재개로써 피아노 연주는 단락을 갖고 그 단락 안에서 러닝과 점프와 리프팅의 가속과 교차로 증폭하는 무용수들의 춤은 단락의 종지부마다 솔로의 중요한 이미지로 수렴된다.

‘For Four Walls’ © Laurent Philippe
‘For Four Walls’ © Laurent Philippe

 

‘For Four Walls’4 © Laurent Philippe
‘For Four Walls’4 © Laurent Philippe

단락들을 분절적으로 연결한다는 점에서 작품은 만들어둔 움직임 프레이즈를 무대 위 동전 던지기를 통한 순서로 배치하여 우연성의 구조를 창출하곤 했다는 커닝엄의 실험 ‘chance technique’을 환기한다. 그러나 커닝엄의 작품들과는 달리 야콥슨의 작품은 강도(强度, intensity)를 적층하고 이완시키는 구조를 지님으로써 드라마틱해진다. 그 토대에 구체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우주적 드라마를 연출해내는 것은 무용수들의 춤이다. 일상의 행위양식을 연상시키는 움직임 군무는 어느 순간 예리한 라인과 고도화된 테크닉으로 조형적 춤의 순간들을 베어내고 다시 일상적 행위양식으로 함몰하기를 반복한다. 그 차이나는 반복의 구조는 카오스적 혼돈과 코스모스적 질서의 혼재가 삶과 세계의 운행원리라 말하는 현대사유가들의 조어(措語) ‘카오스모스(chaosmos)’를 닮았다.

<Cela Nous Concerne Tous> 핑크빛 혁명의 노래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연관한다' - 이 뜨겁고 강렬한 작품의 제목으로 이보다 더 좋은 문장은 없으리라. 50주년을 기리기 위해 68혁명이 소재로 의뢰되었다고 하지만 미겔 구티에레스는 원체 68혁명적인 인물이다. 유럽 전역은 물론 미국과 일본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를 몸살케 했던 19685월혁명의 구호는 금지하는 것을 금지한다!(Il est interdit d'interdire!)”였다. 사회 전 영역 내 권위와 위계의 와해를 촉구했던 그 기치는 여전히 미완이지만 어쨌든 68혁명은 후기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중심주의 미시담론의 세계를 촉발한 중요한 계기였다. 미겔은 그 세계 복판을 가로지르며 변혁의 실천과 진전을 설득하는 작가다.

뉴욕 컨템퍼러리댄스씬을 종횡무진 중인 춤작가 미구엘 구티에레즈 © Chloe Cusimano
뉴욕 컨템퍼러리댄스 씬을 종횡무진 중인  미겔 구티에레스 © Chloe Cusimano

뉴욕 퀸즈의 콜롬비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미겔은 퍼포머이자 안무가이자 가수이자 작곡가이자 비주얼 아티스트이자 문필가이자 팟캐스터로서 과정을 중요시하는 실험적 성향의 예술가들, 진실을 말하는 동성애자들, 예의범절을 문제시하는 다양한 성정체성의 유색인들의 유산에의 동참을 실행하고 있다(“I join a legacy of process-focused experimental artists, truth-telling queers and POC folx who take issue with propriety.” 작가 홈페이지 www.miguelgutierrez.org 참조. 참고로 ‘POC’‘person of color’의 약자. ‘folx’‘folks’를 변형하여 LGBTQ(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퀴어 혹은 questioning(아직 혼란을 겪고 있는) persons) 커뮤니티 구성원의 포함을 의도하는, 성 정체성 표기의 중립적 방법으로 고안된 신조어. 아직 우리나라에는 도입되지 않아 임의적으로 번역할 수밖에 없었는데 뉴욕에서는 이미 이 다양한 시각이 정착되어 필자가 작성을 경험한 예술문화 관련 설문지들의 성별 표기 난에는 LGBTQ가 포함된 다문항이 제시되어 있었다).

그의 실천이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인지 혹은 화제로 소비되고 있는 것인지 아직 판가름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2023년 봄 시즌 뉴욕 춤계는 각 장()을 열어 그를 맞았다. NYU 스커볼 대극장에서 펼쳐진 이 작품에 이어 바리시니코프 아트센터(Baryshnikov Arts Center)에서 신작 <I as another>가(5월 4-7일), 댄스페이스 프로젝트(Danspace Project: 포스트모던댄스의 근거지로 유명한 세인트막스교회(St. Mark's Church)에 소재하며 실험적인 성향의 춤들을 소개하는 제작극장)에서는 <Variations on Themes from Lost and Found: Scenes from a Life and other works by John Bernd>(2016: 다소 장황한 제목의 이 작품은 에이즈합병증으로 요절한 뉴욕 다운타운 댄스 씬의 중추적 작가 존 번드(John Bernd)의 작품들을 이스마엘 하우스턴-존스(Ishmael Houston-Jones)와의 공동연출로 재구성한 작품으로 베시어워드(Bessie Award)를 수상하였다)가 재공연을 준비하고 있다(5월 25-27일, 그리고 6월 1-3일). 소위 ‘on’ ‘off’  전 구역에서 출현하고 있는 핫한' 작가다.

‘I as another’ © Maria Baranova
‘I as another’ © Maria Baranova
‘Variations on Themes from Lost and Found’ © Ian Douglas
‘Variations on Themes from Lost and Found’ © Ian Douglas

미겔 구티에레스에게 혁명은 여직 환한 희망이다. 네온핑크빛 무대라니, 혁명에 관한 상투를 버리기로 작정하고 보아도 꽤나 도발적인 바탕이다. 반원으로 서 있는 무용수들의 의상도 센세이셔널하다. 미겔 자신이 제작에 관여하였다는 무용수들의 복장은 분열적이다. 복식의 종류·기장·색상에서 상하좌우가 비대칭인데 묘하게 패셔너블한 것이 꼭 현대인의 표상 같다. 한 명씩 대열을 이탈하여 움직여본다. 아직은 소심하고 주변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발동이 걸린 움직임은 독무가 되고 독무들이 되고 이인무가 되고 다발적인 이인무·삼인무가 되고 전체의 춤으로 번진다.

‘Cela nous concerne tous’ 사진제공=미구엘 구티에레즈
‘Cela Nous Concerne Tous’ (사진제공=미겔 구티에레스)
‘Cela nous concerne tous’ © Yi Zhao
‘Cela Nous Concerne Tous’ © Yi Zhao

45분의 러닝타임은 가속의 크레셴도(crescendo), 그대로 쭉 치닫는다. 옷들이 벗겨질 정도로 거침없는 난무들, 무대 내 광포해진 에너지가 임계치에 달하면 무용수들은 객석 곳곳으로 뛰쳐나온다. 조명이 무용수들을 따라 객석을 돌아다니고 어디선가 각종 동물 모양의 커다란 풍선들이 나타나고 관객들도 정좌(正坐)를 풀어 이리저리로 몸을 돌린다. 삼삼오오 무리지은 무용수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머리 위로 팔을 휘두르고 서슴없이 내달리며 “Adieu! Adieu! Adieu!” 단순한 3도 음계의 절규로 시절의 부정(不正)들에 작별을 고한다.

이토록 감각적이며 역동적인 선동이 또 있을까. 아무도 제 손에 닿은 풍선을 가지지 않았다. 풍선들은 희망인양 여러 사람들의 손에서 손으로 무대를 향해 옮겨졌다. 기후며 정치경제 상황이며 각종 위기가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고 각자도생의 사투를 벌이느라 공동체 의식이 허물어졌다고는 하지만, 인류의 역사가 언제나 그래왔듯, 깊숙이 묻힌 사람들의 성스러움에 불을 지피는 어떤 결정적 순간이 도래할 것이라고 그러니 열렬히 살아내자 독려하는 춤. 세상이 위독을 모면할 때까지 이 작품의 순회가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오랜만에 열렬해져 뜨거운 갈채를 보냈다. <Cela Nous Concerne Tous>의 다음 공연은 오는 62, 발레 드 로렌의 상주극장인 프랑스 국립 로렌 오페라극장(Opéra national de Lorraine)에서 펼쳐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