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키워드로 다시 읽는 춤공연-2]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
[철학 키워드로 다시 읽는 춤공연-2]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
  • 최찬열 무용평론가
  • 승인 2023.06.20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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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새로운 춤'은 새로운 춤이다.

[더프리뷰=서울] 최찬열 무용평론가 = “저는 오늘 네 개의 각자 다른 발제 춤을 가지고 춤 심포지엄을 하려 합니다.”

공연 중 전미숙이 한 말처럼 제41회 국제현대무용제(MODAFE 2022) 무대에 오른 전미숙의 <거의 새로운 춤>(5월 26일,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은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 중 하나인 <향연(Symposion)>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만든 심포지엄 형태의 춤 공연이다. 비록 플라톤이 <향연>에서 묘사한 바 걸쭉한 술판과 푸짐한 음식이 함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음악과 춤, 논쟁이 수반되는 연회 형식의 고대 심포지엄(향연)처럼, <거의 새로운 춤>도 대화와 춤, 렉처와 퍼포먼스, 그리고 영상이 알맞게 섞여 그에 걸맞게 구성되었다. 다만 플라톤의 <향연>이 사랑 혹은 에로스를 논하고 있다면, 전미숙의 <거의 새로운 춤>은 춤에 관해 논한다. 이를테면 고대 심포지엄 형식을 빌려와 춤을 이야기하는 <거의 새로운 춤>은 개별적인 공연예술들이 한데 섞여 장르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장르 혼종적인 공연이었고, 여기에 테크놀러지와 매체까지 더해지면서 동시대성이 한층 강화된, 그야말로 공연예술의 최신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 새로운 형식의 춤 공연이었다.

전미숙'거의 새로운 춤'(사진제공=류진욱)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 (사진=류진욱)

한데 전미숙은 이러한 춤 심포지엄을 위해 4명의 개성 있는 안무가, 곧 김보라, 김동규, 신창호, 그리고 차진엽을 발제자로 초대했고, 이들 4명의 개별 작품을 한곳에 모아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은 공연을 꾸몄다. 그런데 초대한 각각의 발제 형식 공연들은 그 자체로 공연되어도 무방한 각기 다른 특성과 안무 유형을 가진 독립적이면서도 자율적인 공연으로 보였다. 전미숙은 하나의 공연을 창작한 것이 아니라 제작한 것이다. 기실 동시대 예술가들이 다른 사람들이 만든 작품을 새롭게 해석하거나 거듭 생산하거나 다시 전시하는 방법으로 제작하고 있기에, 전미숙도 이렇게 제각각 성격이 다른 독특한 여러 공연을 하나의 맥락 안에서 이질적으로 재편성해 보여주고 있었다. 자기 색깔이 뚜렷한 내로라하는 다른 안무가들의 완성된 작품을 오리지널한 형식으로 간주하기보다는 새로운 의미망 안에서 다시 설명하고 자신의 작업을 덧붙이고 있는 그는 창조와 복제 작품을 구분하던 전통적 분류 체계마저 불식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다른 이들이 이미 완성한 작품을 재프로그램하는 전미숙은 안무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큐레이터(Curator)이자 프로그래머인 셈이다.

전미숙'거의 새로운 춤'(사진제공=한필름)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 (사진=한필름)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사진제공=류진욱)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 (사진=류진욱)

첫 장 ‘춤에 대해 춤하기’는 김보라가 안무한 렉처-퍼포먼스(Lecture-Performance) 형태의 공연이다. 무대 뒤 벽면 앞에 설치된 커다란 삼면 화이트보드(이하 보드)에 ‘준비’라는 글자가 보이고 무대 앞에는 의자 세 개가 놓여 있다. 춤꾼 한 명이 등장해 의자 두 개를 더 갖다 놓고 그 앞에 서면, 보드의 글자가 ‘등장’으로 바뀐다. 그러면 나머지 춤꾼들이 등장해 무대 양옆을 가로지르며 놓인 의자에 각각 앉는다. 이어서 ‘퍼스트스텝’이라는 글자가 보드에 투사되면서 공연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공연은 춤꾼들의 대사와 대화, 그리고 그와 연관된 춤과 퍼포먼스가 합세하며 진행된다. 연이어 보드에는 춤과 공연에 관련된 용어들 곧 ‘발란스’ ‘속도’ ‘암전’ ‘점프’ ‘방향’ ‘절정’ 등의 단어가 투사돼 보이고, 새 단어가 차례로 보일 때마다 춤꾼들은 각각의 단어가 환기하는 기억과 경험, 감정과 생각 등을 대사나 대화 형식으로 말하며 간간이 춤과 퍼포먼스도 곁들인다. 그러다 보드에 ‘커튼콜’이라는 단어가 나타나면 그들은 함께 모여 관객에게 인사하고, 또 ‘퇴장’이라는 말과 함께 의자와 소품 등을 챙겨 무대 밖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그 끝자락에 한 명이 남아 마지막 대사를 한다. “많은 시간을 함께했던 댄서들이 무대를 떠났고, 그래서 언제까지 혼자 남아서 춤을 출 수 있을까?” “앞으로 몇 번의 퇴장이 남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 슬프다고 말한 그는 “저의 마지막 퇴장은 지금처럼 안 슬펐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퇴장한다. 춤추기 위해 몹시 애쓰며 살아남은 한 주체가 전하는 의미심장하면서도 진솔한 말이다.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사진제공=류진욱)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 (사진=류진욱)

‘춤에 대해 춤하기’에서 대사와 대화는 춤에 관한 내러티브로 구축되는데, 잘 짜진 대사는 이 공연이 시나리오를 전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출연자들은 넋두리하듯 또 하소연하듯, 춤 세계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진지한 문제들을 마치 심포지엄의 총론 발제자처럼 제시하고 있는데, 그들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한 듯한 이 발화들이 묘한 울림을 주며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비록 그들의 말이 얼마만큼 서술이고 얼마만큼 구성(꾸며냄)인지 확연히 구별하기는 쉽지 않지만, 달리 말해 어디까지가 극 중 대사이고 어디까지가 실제 경험담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발화된 말들의 기본 골격과 극작술이 살짝 입혀진 춤에 관한 언급들은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곧 김보라가 안무한 첫 장 '춤에 대해 춤하기’는 현실과 허구가 미묘하게 겹친 강연 형식의 대사와 퍼포먼스를 통해 춤의 과거를 되짚어 보고, 현재를 진단하며, 어떻게 미래를 맞이할 것인지를 묻는, 춤에 관한 꽤 진지한 물음들을 제기하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서사시에서 시작된 고대 그리스의 글쓰기는 그 후 서정시와 산문을 거쳐 드라마를 낳았고, 당대의 드라마를 접한 플라톤 역시 드라마를 썼던 것으로 전한다. 곧 플라톤은 드라마 형식의 ‘대화편’들을 통해 본격적으로 자신의 사상과 철학 체계를 세웠다. 그런데 그가 대화편 형태로 글을 쓰게 된 결정적 동기는 분명 소크라테스에게 영향받은 결과에 연유한다. 그는 대화를 통해서 진리로 상승해 가는 ‘변증법’이 철학의 진정한 방법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플라톤의 대화편들은 정-반-합으로 진행되는 변증법적 대화 과정을 통해 조금씩 공통의 진리를 찾아가는 사유의 오디세이아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처럼 전미숙의 <거의 새로운 춤>도 묻고 답하는 대사 위주로 짜진 공연이다. 플라톤이 자신의 대화편에서 연극적 극작술을 통해 진리에 이르듯이, 전미숙은 자신의 공연 중간중간에 삽입된 제법 긴 대화를 통해 춤이 무엇인지, 아니 더 정확하게는 새로운 춤이 무엇인지를 찾고자 한다. 공연 중 주고받는 대화는 주로 두 명의 출연자가 비교적 길게 나누는 편이지만 첫 장에서는 여럿이 함께 나누기도 하는데, 이들은 이를 통해 춤과 춤추는 몸, 그리고 움직임 메소드 등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새로운 춤과 그것의 가능성에 대해 논한다. 요컨대 <거의 새로운 춤>은 춤이 가진 감응적 힘을 내세우기보다는, 팬데믹이라는 불가항력적 힘이 우리 사회에 미친 급격한 변동과 관련된 동시대 춤의 여러 난제에 대한 분석을 제안하고, 춤 보는 이와 춤 창작자의 춤에 관한 이성적 인식을 제고하는 공연이다.

거의 새로운 춤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 (사진=류진욱)

이어지는 장면에서 전미숙은 사회자 혹은 강연자로 무대에 직접 오른다. 무대 중앙으로 나와 선 그는 비교적 긴 대사를 이어간다. “아직 40이 채 되지 않은 젊은 무용수가 은퇴를 걱정해야 하는 삶, 이것이 우리 무용수들의 일상입니다. 무용수의 세계에 오신 여러분 환영합니다”라고 운을 뗀 그는 첫 장의 출연자들처럼 자신의 지난 춤 인생을 회고한다. 그러나 전미숙의 말은 그들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면서도 명쾌하다. 그는 “춤춘 지 58년이 지났고, 17살 때부터 시작한 현대춤을 춘 지는 햇수로 48년, 날짜로는 1천 7백일, 이를 시간으로 환산하면 6만 8천 시간”이 지났다고 말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술은 길고 인생은 짧다”고 말하지만. 오랜 시간 춤추고 보니 이는 완전히 거짓말이고, 그 반대로 “예술은 짧고 인생은 길”더라고 주장한다. 또 “사람들은 인생을 축제처럼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에게 인생은 “늘 숙제였다”면서, 그것은 “예술가는 늘 새로워야 한다는 그런 강박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발제 형식의 이번 공연이 제기하는 문제의 핵심에 와닿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이를 거듭 강조한다. “어떤 때는 제가 성실히 탈수기로 걸어 들어가서 아주 열심히 제 몸을 쥐어짜는 것 같았어요. 6만 8천 시간 동안 말이죠. 창작은 저에게 있어서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아니 직업이라고 말하는 게 맞겠습니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도 투철하게 춤추면서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대체 불가능한 그런 춤을” 춰왔다며, 험난한 춤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벌인 격렬한 ‘투쟁의 경험’을 얘기한다. 그러나 갑자기 밀어닥친 팬데믹으로 또 다른 “새로움을 강요”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그는 이러한 사태를 ”어떻게 춤의 최전방에서 마주하고 있는지 보여드리고 싶다“고 힘주어 말한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전미숙은 치열하게 살아온 자신의 지난 춤 인생을 의미 깊게 전하면서, 동시에 인류가 처음 맞닥뜨린 사태, 곧 몸과 몸의 접촉과 만남이 금지되는 위중한 상황에서도 사라지지 않을 지속 가능한 춤의 미래와 새로운 ‘춤의 존재 방식’을 묻고 있다. 대화나 대사 형식으로 구성된 시나리오나 텍스트를 가지고 춤에 접근하면서도, 다른 안무가들이 이미 완성한 작품을 사용하는 동시대 제작 기법을 수용하는 방법을 구사하며 새로운 춤이 무엇인지 질문하고, 또 이를 통해 동시대 춤의 대안적 담론을 모색하고자 한다.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사진=류진욱)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 (사진=류진욱)

어두컴컴한 무대에 홀로 춤추고 있는 춤꾼이 보인다. 무작정 주어진 일에만 매달리는 사람처럼 잠시 춤에 빠져들던 그가 일순간 정지 동작을 취하자,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시끄러운 도시의 거리에서나 들릴법한 메마르고 비정한 소리이다. 관객이 보기에 무대 왼쪽 뒤에서 다른 춤꾼 한 명이 더 등장해 그의 주위를 뛰어서 돌기 시작한다. 뛰다가 머뭇거리며 멈추고, 뒤로 돌아 다시 뛰어가기를 반복하는 그의 모습이 흡사 갈 곳을 잃어 방황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이어서 다른 춤꾼들이 의자와 작은 탁자, 창틀, 그리고 앙상한 가지가 두드러져 보이는 나무가 심긴 차가운 금속화분을 각각 들거나 밀며 무대 여기저기로 등장해 제각각 자리를 차지한다. 가만히 앉아 있거나, 우두커니 서 있거나, 멍하니 바닥을 응시하고 있는 그들은 서로에 대해서는 무관심해 보인다. 이윽고 분절적인 움직임이 강조돼 보이는 여성 춤꾼의 기계적이면서도 무덤덤한 솔로 춤과 함께 회전무대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일정한 속도를 유지한 채 쉼 없이 돌아가는 무대는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듯하고, 그 위에서 무심하게 혼자 움직이거나 멍하니 앉아 상념에 빠지거나, 다른 이 주위를 아무 일 없는 사람처럼 돌거나 서성거릴 뿐인 춤꾼들은 팬데믹 시대를 힘겹게 견디며 살아가는 지친 사람들처럼 보인다.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사진=류진욱)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 (사진=류진욱)

그러다 그들은 창틀과 화분, 탁자와 의자 등 오브제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무대 배치를 바꾼다. 암울한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킬 수 없어 분풀이하듯 애꿎게 제 방에 놓인 가구들 배치만 요리조리 바꾸고 있는 소심하고 나약한 사람들 같다. 이윽고 그들은 오브제를 한곳에 모은 후 그 주위에 서서 그것을 멍하니 바라본다. 무미건조한 일상이 하루하루 지나가듯 회전무대는 계속 돌아가고, 급기야 한 춤꾼이 그 바깥으로 뛰쳐나오기도 한다. 갑갑하고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려 하지만, 그는 어쩔 줄 몰라 두려움에 휩싸인 듯 몸을 숙인 채 가만히 섰다 무대 밖으로 퇴장한다. 마침내 빙빙 돌고 있는 회전무대에는 오브제만 덜렁 놓여 있다. 삭막한 도시 한가운데에 을씨년스럽고 초라하게 남겨진 듯한 물건들이 마치 비대면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사물화된 실존의 모습처럼 보인다. 김동규가 안무한 두 번째 장 ‘없는 변화’는 팬데믹에 휩싸인 황폐하고 쓸쓸한 도시의 일상 풍경과 그 속에서 홀로 떨어져 살아가는 실존의 무기력한 일상을 시니컬하면서도 담담하게 묘사한다.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사진=한필름)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 (사진=한필름)

신창호가 안무한 세 번째 장 ‘춤과 노동 사이’는 춤과 기술, 대화와 영상이 어울린 공연이다. 김보라가 무대 중앙에 등장해 VR 헤드셋을 쓰면 무대 뒤 보드에는 춤추는 로봇의 영상 이미지가 나타난다. 그가 VR기기로 보는 광경이 보드에 나타나면서 관객도 동시에 이를 보는 것이다. 뒤이어 등장한 신창호와 김보라는 로봇의 춤과 실제 인간의 춤을 비교하는 대화를 이어가고, 보드에는 이들의 춤이 함께 보이는 영상 이미지가 나타난다. 무대에는 두 종류의 춤, 곧 인공지능 로봇의 춤과 실제 춤꾼의 춤이 등장하는 것이다. 전자는 인간의 춤을 따라 하고 후자는 로봇의 춤을 따라 한다. 관객이 두 춤을 비교해 보면서 둘 중 어느 쪽에 더 공감할지는 알 수 없다. 대화 중 신창호의 말처럼, 로봇의 춤은 인간보다 빠르기가 월등하거나 팔다리의 오버 스트레칭과 팔다리를 늘리는 것과 같은 기묘한 변신술과 테크닉은 뛰어나지만, 이른바 휴먼 터치 곧 소통이나 공감 능력에 있어서는 인간의 춤보다 아직 훨씬 모자란다. 이른바 로봇은 창조적 노동으로 만들어진 인간미 넘치는 춤을 아직은 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사진제공=한필름)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 (사진=한필름)

그러나 뒤이어 소개되는 안무하는 인공지능 ‘마디’의 춤은 예사롭지 않다. 그의 춤은 신창호가 국립현대무용단과 협업으로 진행한 프로젝트에서 처음 선보였다. 점과 선으로 이루어진 별자리 같은 인공지능 로봇 마디의 춤은 인간의 춤과 유사할 정도로 정교하고 섬세하다. 대화자들이 두 춤을 비교해 보자고 말하며 퇴장한 뒤 펼쳐진 실제 춤꾼들의 군무와도 별반 다르게 보이지 않는 춤이다. 가로 세로로 열을 맞춰가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도식적이면서도 기계적인 군무와 마디의 춤은 서로 닮았다. 더 나아가 공연에서는 마디의 춤이 감정과 정서, 느낌과 의지의 생산물인 인간의 춤을 대신할 수 없음을 밝히고 있지만, 서로의 움직임을 따라 하는 비슷한 두 춤을 순차적으로 보면서, 어쩌면 로봇의 춤이 실제 춤꾼의 춤을 대신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발달한 과학 기술과 융합한 춤이 어떻게 변화해 나갈지 강한 궁금증을 유발하는 흥미로운 장면이다. 요컨대 신창호가 안무한 세 번째 장 ‘춤과 노동 사이’는 일상 속으로 빠르게 스며들고 있는 첨단 기술이 인간에게 고유한 감성적 ‘휴먼 터치’의 산물인 춤과 창조적 노동에 기반한 우리의 미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지에 대한 사유를 촉발하는 공연이다.

그런데 전미숙의 <거의 새로운 춤>에 더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그것은 내용보다 형식에 있다. 전미숙은 이번 공연에서 전통적 의미의 안무를 실행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이미 만든 작품을 단순하게 재편성했다. 형식이 다른 완성된 작품들을 이용한 예술적 행위일 뿐이다. 그의 제작 방식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창조 행위가 아니라 다른 이들의 작품을 선택하고 그것들을 새로운 문맥 안에 끼워 넣는 것이다. 물론 그가 발제를 의뢰하는 학술 심포지엄의 주최자처럼 4명의 안무가에게 의도나 콘셉트 등을 미리 알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전미숙이 4명의 안무자가 각각 완성한 4개의 작품을 취합해 연결하는 역할만 한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이들의 독특성과 독창적 형식이 담긴 이 작품들을 자신의 의도에 부합하게 하나의 맥락 안에 적절하게 배치했을 뿐이다. 실제 촬영이 모두 끝난 뒤에 필름을 잘라내고, 이것들을 요리조리 다시 이어서 붙이는 작업을 하는 영화 편집자처럼 말이다. 여기서 각각의 개별 작품이 발신한 메시지는 전미숙이 재프로그램한 맥락 안에서 다시 나타나고 반복되면서 새로운 가치를 지니게 된다. 말하자면 <거의 새로운 춤>은 현대춤의 최신 흐름을 다르게 반영하고 있는 4명의 안무가의 작품을 편집한 공연이고, 전미숙은 이질적인 성격을 가진 이 작품들을 마치 회화의 콜라주처럼 재배치해 새로운 의미를 생성하는 창작 기법을 선보인 것이다. 다른 사람이 만든 작품에 새로운 관점과 생각을 부여하는 이런 선택적 행위도 분명히 예술적 과정일 것이다.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는 이러한 생산 작업을 포스트-프로덕션(post-production)이라고 부른다. ‘후반 작업’ 또는 ‘마무리 작업’으로 번역될 수 있는 편집 용어이다. 그러면서 그는 현대예술의 주된 흐름 중 하나가 이것과 유사한 경향이라고 본다. 이미 있는 작품을 자신의 의도에 맞게 재배치하며 다른 이질적인 매체와도 융합하는 것, 이른바 현대예술은 작품 시작 단계에서부터 큐레이션과 같은 역할을 포함한다. 수많은 공연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해 그것을 제 의도에 맞게 활용하거나 변용하여 새 맥락을 생성하고 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이질적인 것들을 서로 소통시키는 이런 역할도 창조적 생산 활동임이 분명하다.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사진=류진욱)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 (사진=류진욱)

차진엽이 안무한 네 번째 장 ‘새롭게 포맷되는’은 전미숙과 차진엽이 묻고 답하는 긴 문답식 대화에 영상 이미지를 곁들인 공연이다. 하지만 그 전에 전미숙이 잠시 등장해 관객들에게 말을 걸며 그들의 생각을 유발한다. “인간처럼 추는 AI의 춤과 AI처럼 추는 인간의 춤, 여러분은 둘 중 어느 춤을 보시겠습니까?” 당연히 인간의 춤일 것이라고 덧붙인 그는 무용은 “가장 인간다운 예술”이며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고 “시간 속으로 소멸”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그러기에 그는 어느 무용수에게나 닥쳐오는 순간, 곧 “아름다운 외모와 기술을 포기할 때”가 실제 생물학적 죽음보다도 더 고통스러울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뒤이어 등장한 차진엽은 이와는 완전히 다른 정반대의 생각을 피력하고, 정반합으로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는 계속된다. 어느덧 40 중반에 이른 몸이 노화해 “현역 무용수로서 효용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는 위기감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는 차진엽은 “그렇지만 20-30대에는 담아내지 못했던 또 다른 무언가를 지금의 몸으로 더 담아낼 수 있지 않을까?”라고 여기고 있고, 이런 생각은 결국 자기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지더라고 말한다. “매일 미친 듯이 앞만 보면 달려왔는데, 어느 순간 문득 내 안에 있는 새로움을 발견하지 못한 채 저 멀리 있는 새로움만을 좇았던 건 아닌가?” 하는 자각이 들더라고 말한다. 그도 젊은 시절에는 “완전한 새로움에 대한 열망”으로 불안과 혼돈의 시간을 보냈으며, 지금에서야 자기의 '원형'을 알게 되었고, 그 원형이 자기 “춤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강조한다.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사진=류진욱)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 (사진=류진욱)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아니하면 일정한 정도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둘은 춤에 미친 지난 삶을 차례로 회고하는 대화를 이어가고, 대화 중간에 차진엽은 신비주의적 경향을 띠는 이슬람교의 한 종파인 수피즘의 춤을 춘다. '제자리에서 빙빙 돌면서 무아지경에 빠지는 춤'이다. 동북아시아나 시베리아의 샤먼이 접신을 위해 단순하면서도 간결한 회전무와 도약무를 추듯이, 차진엽은 빙글빙글 도는 수피 춤을 춘다. 샤먼처럼, 혹은 수피족 춤꾼처럼 그가 이 춤에 몰입하며 접신 상태에 도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이 춤을 통해 어떤 원형 혹은 본질에 가닿은 건 분명한 듯하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거예요. 슬퍼서 흘린 눈물은 아니었고요.” 그의 말에 비추어 보면 어렴풋하게나마 어떤 각성에 이른 환희의 눈물로 여겨진다.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사진=류진욱)
전미숙 '거의 새로운 춤' (사진=한필름)

이제 둘의 대화 주제는 물속으로 침잠해 물과 하나가 되는 ‘잠수’로 옮겨간다. 차진엽은 말한다. “최근에 제가 잠수하는 경험을 해본 적 있어요. 근데 너무 황홀하고 편안하고 마음이 확 펴지는, 처음으로 느껴보는 경험이었어요.” 수피 춤을 추면서, 그리고 잠수하면서, 차진엽은 그것이 신이든 원형이든 혹은 본질이든, 또 만물의 근원인 물이든, 이것들과의 충만한 합일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그리고 보드에 ‘원형하는 1’이라는 자막과 함께 영상 이미지가 나타나고, 그는 몸과 몸짓의 원형에 대해 언급한다. 물의 순환을 그린 그의 전작 <원형하는 몸 1>의 공연 영상을 다시 보여줌으로써, 그는 몸과 몸짓의 원형을 물과 물의 생성적 순환 운동에서 찾는 듯하다. 이를테면 플라톤이 <향연>에서 상승 운동하는 변증법적 대화 과정을 통해 초월적 이데아계(界)에 거주하며 항구적으로 변하지 않는 진리를 찾았다면, 이와는 정반대로 차진엽은 네 번째 장 ‘새롭게 포맷되는’에서 이 세계 안에서 내재적 순환 운동을 지속하는 변화 그 자체에서 몸과 몸짓의 원형을 찾는다. 그리고 급기야 그도 순환 운동 속으로 잠겨 든다. 극장 전체가 광활한 바다 이미지 물결에 휩싸일 때 차진엽은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몸통을 일렁이거나 제자리에서 빙빙 돌며 그에 조응하고, 자연의 순리에 순응하듯 부드럽고 유연한 움직임을 이어간다. 물과 차진엽이, 아니 이 세상에 속하는 온갖 것들이 조화롭게 어울리며 지극히 평화로운 물아일체의 경지로 빠져드는 듯하다. 큰 감응을 주는 장면이다.

이와 달리 전미숙의 마지막 대사는 당면한 춤의 여러 문제를 제기하며 관객들의 사유를 자극한다.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것 같은, 처음 맞이하는 지난 2년간의 팬데믹은 우리에게 이런 평화를 가져왔을까요? 완전히 새로운 춤은 아니지만 당연한 춤을 새롭게 만드는 그런 새로운 출발이었을까요?” 그가 제기하는 질문은 간결해 보인다. 곧 ‘우리가 어떤 춤을 만들 수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이미 가진 춤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이다. 날 것의 재료를 바탕으로 의미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의미망 안에 삽입할 재료와 수단을 찾아내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오늘 춤 세계를 수놓고 있는 각양각색의 춤 공연들, 유명 안무가들, 춤에 관한 여러 참조점에서 어떻게 새로운 의미와 특이성(singularity)을 끄집어낼 수 있는가?

정돈된 극작술에 의한 시나리오를 바탕에 두고 있는 <거의 새로운 춤>은 성격이 다른 4개의 춤이 마치 여러 산봉우리가 이어져 있듯이 짜진 연산구조 형식의 공연이다. 곧 다른 안무가들이 만든 개성이 강한 작품들, 렉처-퍼포먼스와 기술과 결합한 춤, 그리고 매체와 융합한 춤 등을 자신이 구상한 대사와 대화 중심의 시나리오 안에 이산적으로 접속해 엮은 공연이다. 달리 말하면 ‘새로운 춤’에 관한 대안적 극작술 혹은 시나리오 안에 다른 이들의 작품을 삽입해 재배치한 공연이라는 말이다. 오늘날 춤 공연은 넘쳐나지만 정작 새로운 춤 공연을 만나긴 어렵다. 춤의 과잉 시대라 불릴만한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춤 세계에서 주제와 스타일을 찾아 비평적 판단과 관점을 추가하고 새 맥락을 만들어 내는 것, 비단 그것이 ‘2차 작업’ 성격을 띤다고 할지라도, 기존 작품을 다른 관점으로 새롭게 읽고 재배치하며 타 매체와 융합해 표현하는 작업은 매체와 장르의 다양성과 확장성을 가져오는 창의적인 활동이다. 그러기에 완성된 작품에 비평적 판단과 인문학적 소양을 추가해 가치와 의미를 더하고, 동시대 공연예술의 흐름에 부합한 형식으로 내보인 전미숙의 작업은 분명 창의적인 생산 활동이다. 4명의 안무가가 완성한 작품들과 형식 구조들을 이용해 춤 공연의 새로운 관계성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거의 새로운 춤>을 포스트-프로덕션 곧 후반 작업 방식으로 만든 전미숙은 이 공연의 안무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큐레이터와 프로그래머, 또 비평가이기도 하다.

혁명의 철학자 마르크스는 자기 이외의 모든 철학자가 단지 세계를 해석할 뿐이지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한탄했지만, 부리오가 보기에 이 세계에 더 이상 새로운 것은 없고 오직 창조적 재배치만 있을 뿐이다. 그에게는 이것이 변화이고 변혁이며 생성이다. 현대 사유와 동시대 공연예술의 한 흐름을 상당 부분 반영하고 있는 전미숙의 <거의 새로운 춤>이 새로운 춤일 수 있는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것이다.

최찬열 무용평론가
최찬열 무용평론가
altai21@hanmail.net
한국춤 전공 후 모스크바대 인류학 석사,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인류학 박사과정 및 미학 박사학위 취득. 지금은 몸의 예술과 인문학에 기반한 통섭적 문화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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