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리뷰] 몬트리올의 공연예술축전 Festival TransAmériques, 그 첫 번째 이야기
[축제리뷰] 몬트리올의 공연예술축전 Festival TransAmériques, 그 첫 번째 이야기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3.07.12 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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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stival TransAmériques(FTA)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춤과 연극의 축전이다. 열일곱 번 째 연혁으로 기록된 올해의 행사는 5월 24일에서 6월 8일까지 16일에 걸쳐 아르헨티나·호주·벨기에·브라질·캐나다·칠레·스코틀랜드·미국·프랑스·북아일랜드·모로코·노르웨이·짐바브웨 등 13개국에서 온 24편의 onFTA 공식 초청작과 몬트리올의 삶과 경향에 밀착된 50여 편의 offFTA 작품을 공개했다. 원천적인 춤과 연극으로부터 음악·서커스·퍼포먼스·설치미술·디지털아트 등과 더불어 장르를 횡단중인 확장형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총천연 빛 작품들이 도시 구석구석 낮과 밤을 화려하게 채색했다.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시댄스)의 프로그래머로 축제의 현장을 다녀왔다.

[더프리뷰=몬트리올] 하영신 무용평론가 = 밴쿠버, 토론토 등과 더불어 광활한 캐나다의 거점 대도시 중 한 곳인 몬트리올은 몽레알(Montréal)’이라는 현지 발음이 알려주듯 프랑스로부터의 내력과 취향이 간직되어 있는 도시다. 아마도 대부분의 방문객들에게 몬트리올의 관문은 벽돌로 길을 놓은 골목과 17-18세기 양식의 건축물들과 그에 딸린 광장 등을 간직한 구시가지(Vieux Montréal)일 것이다. 과연 북미대륙 속 유럽’ ‘캐나다 속 파리라는 몬트리올의 애칭을 만들어주는 매력적인 구역. 이 계절 햇살의 찬란함과 강변 바람의 자유분방함을 온몸으로 만끽하며 과거의 풍광 속으로 타임슬립(time slip) 해보는 경험, 몬트리올 유랑의 서막이다.

레스토랑과 카페, 상점과 갤러리들, 구시가지에도 현재적 삶의 장면들이 교차하고 있지만 이 도시의 동시대성과 정체성을 와락 알려줄 탐방의 본격적인 전개는 다운타운 동쪽 문화지구 카르티에 데 스펙타클(Le Quartier des Spectacles) 구역으로부터 개시된다. 1963년에 설립되어 교향악단(Orchestre Symphonique de Montréal)과 오페라단(Opéra de Montréal), 발레단(Les Grands Ballets Canadiens de Montréal) 등 상주 공연단체와 현대미술관(Musée d'art contemporain de Montréal, MAC)을 품고 있는 캐나다 최대 규모의 공연예술센터인 플라스 데자르(Place des Arts)를 기점으로 주요 문화 유관기관과 30여 개의 전용극장이 즐비한 이 구역에서는 매해 국제재즈페스티벌(Festival International de Jazz de Montréal) 등을 위시한 40여 개 문화예술축제가 펼쳐지고 있다고 하니 몬트리올은 눈과 혹한의 동절기를 제외하면 항시 향연 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성 싶다.

몬트리올 문화지구 카르티에 데 스펙터클 사진 제공 하영신
몬트리올 문화지구 카르티에 데 스펙타클 (사진=하영신)
카르티에 데 스펙터클의 거점 극장 플라스 데자르 사진 제공 하영신
카르티에 데 스펙타클의 거점 극장 플라스 데자르 (사진=하영신)

필자는 529일부터 63일까지 대략 절반 분량의 작품들과 조우하였다. 체류기간 동안 저녁에는 onFTA의 일정을 좇았고 낮에는 offFTA의 목록들을 섭렵했다. onFTA의 스케줄로는 춤과 연극과 행위예술을 고루 배분 받았지만 offFTA의 경우 공연장소 간의 이동 등 선택의 정황들이 있었고 이때 고려된 것은 이었다. 또한 장르 교접(交接)적 작업보다는 작품의 원형질로서 춤이 예측 가능한 작품들로 선택했다. 누락분에도 분명 단호하게 빛나는 춤의 순간들이 있었을 터이지만, 어쩌겠는가, 무엇보다도 현지의 춤 생태 지형을 확인하고픈 직업병쯤의 의욕이 있으니. 자의성을 의혹할 수밖에 없는 필자의 경험담이지만 인상적인 장면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onFTA. 생성을 환대하는 열린 무대

각각의 작품은 하나의 제안서입니다. 우리는 그 제안이 현실에 의해 그리고 관객들의 조응에 의해 테스트되기를 바랍니다(Each edition is a proposalwe want it to be tested by reality and by our audiences’ reactions).” 국적 불문, 장르 불문, 다양한 가능성들에 무대를 열어준 FTA 공동 예술감독 마르틴 덴왈드(Martine Dennewald)와 제시 밀(Jessie Mill) 그리고 총괄감독 다비드 라부아(David Lavoie)의 인사말로부터 감지되는 자신감에는 근거가 있었다. 굳이 어떤 미학적, 담론적 경계를 설정하지 않아도 각종 작품들의 수위는 꽉 차 있었고 그 다양성에 대하여 혹은 어떤 급진성에 대하여 관객의 기호와 관심은 충분히 열려있었다. 학생으로부터 중장년층에 이르는 너르고 고른 관객층에 의해 이모저모의 작품들이 환대를 받는 다양체들의 서식지. 과연 마리 슈이나르(Marie Chouinard) 같은 서슴없고 과감한 작가가 탄생할만한 토대로 확인된 몬트리올. 이 개방형 도시가 초청한 올 해의 작품들을 소개한다.

Lay Hold to the Softest Throat ⓒ Do Phan Hoi
Lay Hold to the Softest Throat ⓒ Do Phan Hoi

<Lay Hold to the Softest Throat> performance

 choreographed and performed by Ellen Furey                                                                                                                       created with and performed by Romy Lightman + Alanna Stuart

()과 춤, 예술을 가능케 하는 온갖 매체들 가운데 추상적이고 휘발적이라는 점에서 가장 유사한, 그래서 음악과 춤은 친연적이고 서로를 촉발한다. 생각해보면 연주도 몸의 일인 것이다. 건반을 치는 일도, 활을 긋는 일도, 북을 두드리는 일도 몸의 강도와 호흡에 기인한다. 음악을 감상하는 최상의 방법은 청각적 사태에 온전히 귀의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몸의 일에 집중하는 습관을 오래 들인 필자로서는 연주 현장도 흡사 춤 현장에서의 일처럼 느끼곤 한다. 심지어 음원의 감상도 연주 과정의 물리적 심도(深度)로 다가오고 바람, 파도, 숲 뭐 그런 바깥의 서사가 아니라 그에 처한 내면의 드라마로 번역되곤 한다. 고즈넉해지면 침체되는 대로, 흥을 돋우면 박수든 발구름이든 환호든 몸적 반응도 별로 사리지 않는다. 이러니 가장 좋아하는 악기는 무엇보다도 목소리. 다른 매개물을 경유하지 않는 만큼 감응이 즉물적으로 들이닥친다고나 할까, 춤에 천착하는 이유와 같다. 특히 인위적 서사, 가사를 탈락시킨 구음은 언제나 전율적이다.

이 작품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무용가로서의 역사 안에 예지 그로토프스키(Jerzy Grotowski, 지각에 호소하는 연출론으로 현대극의 한 문파를 이룬 폴란드 출신 연출가. ‘가난한 연극이 그 연극론의 핵심어)라는 강렬한 이름을 새긴 엘렌 퓌레(Ellen Furey)는 여전히 그 큰 이름의 자장 안에서 작업을 한다. 일상용 조명기들이 군데군데를 간신히 밝히고 있는 어두침침한 무대에 낡고 부서진 가구들, 악기, 온갖 잡동사니가 잔뜩 널려져 있고 그것들과 매한가지로 널브러져 있는 세 사람. 작품은 그들이 자신의 몸을 연주하는 일, 목소리를 내어놓는 일로써 개시된다. 그러나 그 발성은 발화도 가창도 아니다. 가사도 멜로디도 없는 그저 성대의 울림, 확연한 리듬과는 다른 섬세한 바이브레이션, 존재의 떨림. 단박에 존재의 존재함, 그 존재적 상태를 고지하며 작품은 이렇게 그로토프스키적으로 출발한다.

자신의 존재론적 사태를 활성화시킨 그녀들은 세계와 작용하기 시작한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장소도 아닌 불특정 공간에 그 실용적 가치로부터 탈락된 그러나 버젓이 있는사물들. 구음으로써 자신들을 출현시킨 그녀들은 완강한 사물들과 작용한다. 가구는 넘어지거나 부서지고 이리저리 옮겨져도 정돈이 되거나 용도를 되찾는 것은 아니다. 악기가 연주되어도 음악은 못되는 것처럼, 갖가지 사물들은 자신들의 용도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녀들과 부대끼며 제각각의 마찰음(전자음향), 새로운 소리를 웅변한다.

그녀들이 온몸에 힘을 빼고, 그러니까 사회적 상황 맥락에서의 처신으로부터 탈각한 가장 솔직한 상태의 말랑말랑한 성대로부터 내어놓는 존재의 반향(反響)들은 불협, 그런 그녀들과 탈락된 사물들이 빚는 소리도 역시 불협, 인류가 일궈온 음들의 문명체계 음악바깥의 소리들이다. 불협하는 음들의 세계, 당연히 신경이 긁힌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이 과정에 오래 몸을 담그고 있다보면 불협화음이라는 형용모순의 세계에 적응이 된다. 다양성 혹은 다중성의 가능성들이 몸에 적셔진다고나 할까. 작품 목록을 받은 그날로부터 해소를 기다리던 궁금증, 쉽사리 번역되지 못하던 ‘lay hold to’라는 구동사(句動詞, phrasal verbs)의 의미는 ‘lay’‘hold’ 사이의 무수한 가능성들, 불협하는 화음, 의미연관체계를 이탈하는 각종 텍스트들의 얽힘과 설킴, 그 모든 가능태들에 대한 긍정, 완역(完譯) 불가능한 열린 세계로의 초대로 밝혀진다.

Lay Hold to the Softest Throat ⓒ Do Phan Hoi
Lay Hold to the Softest Throat ⓒ Do Phan Hoi

컨템퍼러리 예술 씬은 전통으로부터의 탈구를 감행하는 온갖 시도들의 장이다. 그러나 그 해체적 작업들의 더미 속에서 해방의 신학으로까지 나아온 성숙한 작품을 발견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로토프스키의 개념을 차용한 공연예술작품도 무수하다. 그러나 신성한 몸’ ‘집단무의식의 해방등 그의 이념을 실현한 작품을 만나기는 어렵다. 엘렌 퓌레의 작품은 그로토프스키의 이념을 충족적으로 현행화한다.

그 실현 장소가 오래된 교회를 개축한 극장 라 샤펠(La Chapelle Scènes Contemporaines)이었다는 점도 꽤 의미심장했다. 의도적인 선점이었는지 우연한 배치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옛 예배당의 뉘앙스를 지우지 않은 이 극장의 인상도 작품에 일조했다. 불협을 화음으로 받을, 세계의 부조리들을 수용해볼 도리에 관한 화두를 얻었으니 충족적인 작품의 시간들이란 종교의 시간들과 어찌 다르겠는가.

 

Navy Blue ⓒ Sinje Hasheider
Navy Blue ⓒ Sinje Hasheider

<Navy Blue> dance

 choreographed by Oona Doherty

벨파스트(Belfast)의 우나 도허티(Oona Doherty). FTA2023의 모든 프로그램들을 통틀어 개인적으로 가장 기대를 가졌던 작품이 바로 이 <Navy Blue>. ‘dance’란 명패로부터 그러하기도 하였지만 에딘버러 프린지(2017 Edinburgh Fringe, Total Theatre AwardThe Place Dance Award 부문베네치아 무용 비엔날레(2021 Venice Dance Biennale, Silver Lion for Dance 부문) 등의 수상 경력 소유자와의 초면. 무엇보다도, 런던 컨템포러리 댄스 스쿨(London Contemporary Dance School)과 라반 컨서버토리(Trinity Laban Conservatory)라는 엘리트 교육체계로부터 퇴출당하고(인터뷰들에 의하면 당시 그녀는 약물과 파티문화에 심취해 있었다고 한다) , 세계 무용계에 놓여 있는 안정적인 한 계단으로부터 내려서 종교·인종·행정적 차별 등 각종 정치적 분쟁의 도가니라 할 수 있는 북아일랜드의 주도(州都) 벨파스트의 치열한 삶에 두 발을 딛고 비정통적이고 창의적이며 날 것이며 용감한 접근 방식(웨인 맥그리거(Wayne McGregor)의 베네치아 무용 비엔날레 선정 소감)”의 춤을 발산하고 있다는 그녀. 아이로니컬하게도 소위 세계 무용계의 힙한씬에서 한 이름이 된 그 우나 도허티.

의외로, 작품은 내역으로나 유명세로나 클래시컬 예술 내 정점 중 하나인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악장에 실려 출발한다. 라흐마니노프 음악은 명증한 표제에 다르지 않다(이 곡은 곧잘 라흐마니노프를 평생 괴롭히고 동시에 음악가로서 구원하기도 했던 증환, 우울증의 드라마로 설명되곤 한다). 푸른색 작업복을 입은 다양한 연령대의 열두 명 연행자들이 도열해있는 장면으로부터 우나 도허티의 드라마는 시작된다. 다소는 우울하고 얼마간은 무력한 블루존(우울증에 관한 구어적 표현은 ‘the blues’)의 사람들에게 어디선가 느닷없는 총탄이 날아든다. 첫 번째 죽음, 두 번째 죽음, 세 번째 죽음당황하여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사이로 차례차례 죽음이 도래하고 죽은 자들을 살피며 비통해한 한 여성을 계기로 남은 자들은 애도와 생존을 위한 연대를 형성한다. 그러나 어디서, 어째서, 누구에 의해 언도되는지 모르는 죽음으로부터 결국 아무도 살아남지 못했다.

나는 이 서사의 단조로움이 꽤 좋다. 죽음이야말로 이 세계 내 모든 삶들의 공평한 결론이 아니던가. 첨예한 드라마를 엮고 별난 등장인물들을 출동시키는 작품들로부터의 동의와 공감은 부분적일 수밖에 없지만 이렇게 생의 근저를 말하는 작품은 누구에게나 공감대가 된다. 역사적 비극을 상기하든(북아일랜드의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이 아니더라도 어느 나라, 어느 민족에게든 유사한 비극이 산적해있는 것이 인류의 역사) 사회적 죽음으로 환기하든. 무수한 보조관념들을 파생시킬 수 있는 원관념이야말로 진리값이다.

Navy Blue ⓒ Sinje Hasheider
Navy Blue ⓒ Sinje Hasheider

그러나. 전작들의 부분영상이나 혹은 문헌상의 기록들로부터 충혈적 감응의 쇄도를 예측했던 나로서는 좀 당황스러운 조우다. 현장의 작품들은 언제나 기대와 예상 바깥에 있기 마련이지만 나는 혹 우나 도허티의 급선회 지점에서 그녀를 만난 것일까. 물론 라흐마니노프에 실려 출발한 블루의 드라마는 네이비, 컴컴한 심연으로 심화된다. 그런데 그 심화는 일렉트로닉 음악가 제이미 xx(Jamie xx)가 연출하는 디스토피아의 뉘앙스와 그 사이사이 파편처럼 삽입된 통렬하고 파열적인 운문(韻文)의 독백이 견인한다. 물론 충족적인 춤을 추는 연행자의 장면도 있었고, 몰입적인 연기로 공감을 불러준 연행자도 있었다. 그러나 아마도 광범위한 범주에서 결집된 인원으로서의 연행의 총인상은 부쉬 무카르젤(Bush Moukarzel)과 공저하였다는 도허티의 신랄한 독백보다 강렬하지 않았다. 가장 생()의 사태를 피력해주어야 할 춤에서 남는 아쉬움. 동의는 가능하나 동감은 충분치 못했던, 다소 섭섭했던 그러나 예측 밖 방식으로 주저 없던 나의 기대작.

​L’étang ⓒ Jean Louis Fernandez​
​L’étang ⓒ Jean Louis Fernandez​

<L’étang> theatre

 concept, direction, design, dramaturgy by Gisèle Vienne                                                                                                 performed by Adèle Haenel + Henrietta Wallberg

<L’étang(The Pond)>의 연출가 지젤 비엔(Gisèle Vienne)은 다학제(multidisciplinary)를 선호하는 오늘날 공연예술계 풍토에서 환영받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철학 학위를 소지한 작가이자 퐁피두센터(Centre Pompidou)와 휘트니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 등에서의 사진과 설치미술 전시 경력이 있는 미술가이며, 지난 20여 년간 꾸준히 유럽과 미국 무대의 환대를 받아온 공연연출가. 안무가로서는 프랑스 국립무용센터(Centre National de la Danse)가 선정한 협업작가이며 하이 주얼리 워치 메종 반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Jewels>(1967)의 제작을 지원한 바 있는 반클리프 아펠은 <<Dance Reflections>>라는 이니셔티브 프로그램을 통해 안 테레사 드 케에르스매커(Anne Teresa De Keersmaeker)·뱅자맹 밀피에(Benjamin Millepied)·보리스 샤르마츠(Boris Charmatz)·루신다 차일즈(Lucinda Childs) 등 무용계 저명작가들은 물론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과 같은 혁신적 공연예술가들의 작품제작과 공연을 지원해오고 있다)의 지원 작가 리스트에도 포함되어 있다. 프랑스 국립 마리오네트 학교(Ecole Supérieure Nationale des Arts de la Marionnette)를 졸업한 퍼페티어(puppeteer: 마리오네트 인형 조종 예술가)라는 특이한 이력까지, 이 믿기 어려운 다방면의 전문성이 총 집약된 작품이 <L’étang>이다.

표면적으로 <L’étang>은 로버트 발저(Robert Walser: 스위스 국적의 작가로 모더니즘 문학계의 주요한 이름 중 한 명. 카프카(Franz Kafka)와 베냐민(Walter Benjamin)의 칭송을 받았음에도 당대에는 주목받지 못했다가 사후 1970년대에 재발견된 작가로, 여러 각도의 암시로 작동하는 몽타주적 글쓰기가 특징적이다)의 짧은 시극(詩劇) <Der Teich(The Pond)>를 각색한다. 가족사와 작가 자신을 침식한 불안과 환각에 관한 사적 토로였던 원저로부터 지젤 비엔은 소년 프란츠(Franz)의 자살 충동을 취한다. 부모와의 유대관계로부터 내상을 입은 프란츠, 상처 입은 영혼은 쉽사리 어른이 되지 못하는 법. 자존감은 병약하고 권력의 작동에는 취약하니 미시적 권력관계의 함수로 점철된 이 세계 내에 어떻게 안착할 수 있겠는가.

피상적이고 무시로 이율배반적으로 비틀리는 관계맺기에서 번번이 실패하고야 마는 이 유약하고 과민하고 대책 없이 투명한 한 영혼을 사로잡은 죽음충동으로부터 권력관계의 원천적 구도를 추적하는, 전망의 반경이 넓은 작품이지만 작품 내부의 밀도는 매순간 뻑뻑하리만치 조밀하고 작가의 지향을 향해 내달리는 모든 파편적 요소들의 운동은 긴밀하고도 충돌적이다, 몽타주되는 장면들 속 두 배우의 능란한 연기는 무기력과 광기 사이를 진자운동하는 불온한 캐릭터들의 사태를 곧장 빙의해낸다. 무엇보다도, 명백히 말하는 침묵, 파열하는 언어, 생에의 갈망이 초래한 무력감, 사랑에의 갈구가 빚은 광기사태의 배면을 끄집어내는 비엔의 사유능력은 깊고 집요하고 그 능력이 촉진한 프리츠의 내면세계를 생생이 촉각하게 만들어내고야 마는 사운드와 빛과 색을 다루는 다방면의 솜씨. 완성도의 임계치에 다다른 수작은 그렇게 출현했다.

L’étang ⓒ Jean Louis Fernandez
L’étang ⓒ Jean Louis Fernandez

 

MIKE ⓒ Francoise Robert-RHoK
MIKE ⓒ Francoise Robert-RHoK

<MIKE> performance

 created and performed by Dana Michel

다나 미셸(Dana Michel)의 이 3시간에 달하는 공연에 대해 FTA가 표기해둔 주요 키워드는 앵티미스트(intimiste)’. ‘일상적 대상을 개인적인 정감을 강조하여 그리는 화가·작가'. 과연 그렇다. 다나 미셸은 3시간여 동안 갖가지 대상물들의 관성적 용례를 파기하고 부정확한 용도로 활용하는데 그것의 논리는 끝끝내 불투명하여 어떤 새로운 아이디어나 개념을 창출해내지는 못했다(작가의 의도로부터는 않았다가 정확한 워딩일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탈구시킨 것은 비단 사물들만이 아니다. 그녀는 공연예술의 관행적 시공간도 비틀었다. <MIKE>의 공연 장소는 몬트리올 소재의 퀘백 주립대학 UQAM(L'Université du Québec à Montréal)의 한 다목적홀(salle Polyvalente). 도착하면 입구에서 담요를 나눠준다. 필요하다면 접이식 간이의자를 사용해도 좋다고 안내 받는다. 마주 보는 벽채 두 면에 큰 창이 있는 꽤 너른 사각 공간에 입장하면 바퀴달린 행거 예닐곱, 대걸레, 장스탠드 2, 탁상용 스탠드 2개 등등 어떤 특정 장소로의 유추도 불가능한 갖가지 기물들이 여기저기 대충 맥락 없이 놓여 있다. 관객들도 그 기물들처럼 산발적으로 앉아 있었다. 나는 3시간의 압박을 대비해 벽에 기대어 모포를 펼쳤다.

작품이 개시되면 다나 미셸이 들어와 이것저것을 이렇게 저렇게 조작한다. 제 기능대로 쓰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발한 용도가 계발되는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상태의 지속이다. 조끼와 바지와 셔츠 차림의 다나 미셸부터 무엇을 해온 사람인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심지어 여성인지 남성인지도 식별불가능하다. 초면의 작가 이름을 기억해두지 않았던 나는(개인적으로 가능한 선입견 없이 작품과 조우하기 위해 공연 전 사전 자료들을 부러 읽지 않는 오래된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오직 작품이 말한다.) 중반쯤 그녀가 셔츠를 벗고 조끼만 입었을 때 비로소 그녀의 성별을 알아차릴 수 있었을 따름인데, 애초에 의미있는 분간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녀가 행하는 행위로부터는 어떤 정감, 어떤 의미가 발생하지 않는다. 투명한 주체의 판독 불가능한 행위들, 관객의 주체성도 무력화된다.

나는 화가 나기도 했었다. 1시간여의 시간이 경과하였을 즈음 다나 미셸은 홀 중간에 매립되어 있는 레일을 통해 조작되는 가벽을 세웠다. 졸지에 나는 미셸의 바깥 편에 앉아 있는 셈이 되었고 그 가벽 안쪽에서 그녀가 무얼 하고 있는지를 목도할 수도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안 그래도 동감과 동의가 불가능했던 경과만큼 피로가 누적되어 있던 차, 보지 말라면 보지 말지 뭐! 어깃장을 부리며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애당초 입퇴장의 자유를 고지한 작품. 순순히 자리를 이동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관람을 포기하는 이탈자도 더러 생겼다. 망설이지 않은 것은 아니나 나는 오기를 접을 수 없었다. 이 시간의 끝엔 무엇이든 맺힐 것 아닌가?

MIKE 사진 제공 하영신
MIKE 사진 제공 하영신

평시에도 그냥 그저 있는 일을 못하는 축이니. 오래 버티지 못하고 나는 아예 자발적으로 움직여 다니기로 했다. 사람들은 잔디밭인양 모포 위에 드러누워 있기도 했지만 나는 내가 하고픈 일을 하기로 했다. 미셸 근방에 누가 두고 간 의자에 앉아 아예 수첩을 꺼내 들고 생각나는 것들을 끄적거리는 일로부터 심지어는 공연의 장면들을 촬영하는 일까지. 소통으로써 동감의 지대로 진입하는 것이 공연예술의 본령이라 믿는지라 대놓고 관찰자의 입장을 취하는 일은 여태 조심해왔던 일. 봉인이 해제된 금기의 실행은 점점 과감해졌고 스스로 적극적인 행위 역량을 가지게 된 순간으로부터 그토록 느리게 휘어졌던 시간의 속도에도 가속이 붙었다.

돌아와 수첩을 들춰본 바 장면의 상세한 스케치들이라고 해봐야 여전히 어떤 의미망으로 구축되는 것은 아니다. 종국에 미셸은 행거들을 바닥에 누이고 겹쳐 놓아 뭔가의 구조물을 만들고 작품을 종료했는데 그 구조물은 끝끝내 미감이 출중하거나 기발한 기능의 발견으로 새로운 무엇이 된 것은 아니었다. 수첩에는 “You're making 'meaningless' the whole time!(당신은 내내 의미없음을 만들어내고 있군요!)”이라고 적혀 있다. 중반쯤 적어둔 항의의 글귀. 이 자리를 빌려 그 문장을 이렇게 수정한다. “You created 'freedom' after all!(당신은 결국 자유를 만들어내었군요!)”.

MIKE 사진 제공 하영신
MIKE 공연 장면 (사진=하영신)

이상이 다나 미셸이 만든 텅 빈 기표들의 연쇄 속에서 필자가 붙든 자의적인 기의다. 다른 관객들에겐 어떤 경험이었을지 궁금하다. 누군가들은 미끄러지는 기표들의 항렬 그 자체로 즐겼을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나처럼 자신의 경험을 밑천 삼아 의미에의 강박을 나름껏 해결하였을지도 모르겠다. <MIKE>는 나에겐 이율배반적인 작품이었다. 지루했으며 동시에 통쾌했고, ‘자유라니! 나의 공연예술 역사상 가장 해방적인 작품임에도 나의 예술지형도 어디쯤에도 위치시킬 수 없는 작품이다. 오늘의 충족감은 어쩌면 유일무이한 경험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비슷한 시도는 불발될 수도 있고 <MIKE>의 재관람 역시 유의미하리란 보장이 없다. 이례적이고 일회적인 충족감, 나에게 예술작품이란 여전히 일상을 초과하여 어떤 정감, 어떤 의미를 보강해주는 완충적 계기이리라. 아이로니컬하지만 <MIKE>는 페스티벌에서 성취할 수 있는 가장 큰 의미를 획득해준 작품이었다. 다양한 것들이 우글거리는 현장에 나의 몸으로 임하다보면 나의 경험치 바깥에 있는 것들, 생경하거나 혹은 동의 불가했던 것들에 대한 이해의 단초가 생기곤 한다, 이렇게.

모든 해석이 주관적이지만 이 작품의 경험이 각별히 더 그러한 관계로 다나 미셸의 수상 이력을 부연함으로써 그 혐의를 덜어보고자 한다. 다나 미셸은 춤을 전공했고, 임풀스탄츠 어워드(ImPulsTanz Award, 2014)와 베네치아 무용 비엔날레(2018, 혁신적인 춤 부문(Innovation in Dance) 은사자상) 등 무용계의 공신력 있는 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2017년에는 뉴욕타임즈(New York Times)에 의해 주목할 만한 여성 안무가(Notable Female Choreographers)’로 선정된 바 있다. 춤이었다니, 그녀의 궤적이 흥미로워졌고 앵티미스트혹은 라이브 아티스트라는 현재적 정의는 일종의 안도감을 준다. 아니었다면 나의 물음은 자유의 해방감으로부터 다시 도대체 어디에 춤이, 혹은 춤적 가능성이 있다는 것인가?’ 되돌이표를 그렸을 터이다.

In My Body ⓒ Jerick Collantes
In My Body ⓒ Jerick Collantes

<In My Body> dance

 choreographed by Crazy Smooth

캐나다 퀘벡주 남서부에 있는 도시 가티노(Gatineau)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크레이지 스무스(Yvon “Crazy Smooth” Soglo)의 작품 <In My Body>는 아홉 명의 출중한 브레이크 댄서들의 연행으로 이루어지는 힙합 컬처 코드의 작품이다. 24세에서 58세 사이 다양한 연령, 성별, 인종의 댄서들이 출산, 부상, 거듭되는 수술과 재활 등 인생 고락의 드라마를 배틀, 솔로, 듀엣, 군무의 다양한 구성을 통해 펼쳐낸다.

간혹, 발레씬 대형 컴퍼니의 무대에서나 볼 수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무용수의 은퇴식을 목격하게 된다. 은퇴하는 예술가라니예술 어느 장르에 정년이 또 있을까도 싶고, 그런가하면 무용계의 한정된 자원과 기회를 생각하면 합리적인가 싶기도 하고, 발레에 대하여 젠더·계급 등의 저항 이슈를 지니고 등장한 모던댄스 이후의 계열에서는 은퇴식은커녕 소속도 불투명한 경우가 다반사니 오히려 인간적인가도 싶고, 무엇보다도, 세상 여타 일보다 헌신을 요구했던 이 업을 그만두면 당장 내일부터 저이는 어떤 아침을 맞이하게 되는 걸까 염려가 되기도 하고만감이 소용돌이치는 장면이다. 비보이/비걸의 경우도 마찬가지, 이들의 춤도 발레 못지않게 고도로 숙련된 신체 기능에 의존하니 부상이든 노화든 항시 춤이 박탈되는 삶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며 살아내고 있는 것이다.

오늘 크레이지 스무스와 동료들의 토로는 우리 모두가 껴안은 불안에 공명한다. 전 세계가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여 조기 퇴직, 평생 교육, 노인 일자리, 존엄사에 이르기까지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의 여러 입장을 다투고 개개인들 역시 소위 안티-에이징(anti-aging)’으로써, ‘2의 직업으로써 갱신하는 자존감을 입증하며 살아내고 있지 않은가. 고로 단절될 뻔했던 춤 인생을 기적처럼소생시킨 무용수들의 극복기와 그를 독려하는 동료애를 지켜보는 일은 그 자체로 좋았다. 개인적으론 이 장르의 중핵으로 여기는, 배틀 형식을 지니고도 언제나 완성해내는 힙합 커뮤니티의 연대의식이 한껏 느껴져 더욱 좋았다. 거리춤의 무대화는 필요한가에 관한 고민은 논외로 두고, 무대를 찾은 관객들에게 공감과 연대의 계기를 불어넣어준 스토리텔링에 박수를 보낸다.

p.s. 한편, 우리 모두는 기어이 난관을 극복해낸 기적 같은 삶의 영웅으로서만 살아남을 수 있는 걸까라는 최후의 의식을 소거할 수는 없었다. 일상사에서도 안티-에이징이란 단어의 범람에 부대끼며 인투-에이징(into-aging)’이란 대체어를 상기하는 편. 나이 든 몸 그 자체로 추는 춤들의 자리를 고민한다. 전통춤 영역의 일부에서는 춤에의 연차로써 비로소 그 춤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춤들이 있고, 컨템퍼러리댄스의 일각에서는 아예 생물학적 몸을 제거하는 안무가 작성되기도 한다. 전자의 장인정신은 동시대 무용예술 환경에서는 정책과 지원의 보호 아래 있지 않으면 개인으로서는 점점 더 실현 불가능한 일이 되어가고 있고, 후자의 경우는 안무와 춤의 경계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아직 힙합 장르에서는 목도된 경우가 없으니 <In My Body>의 주제로부터 심화되어 나와주기를 기대해본다. 퇴화된 몸들의 연행이 아니면서 제약을 전시하는 연행도 아닌, 장년한 몸으로서의 고유의 미감과 의의가 성취된 춤사위가 힙합에서 발견되기를 고대해보며.

The Beach and Other Story ⓒ Vanessa Fortin
The Beach and Other Story ⓒ Vanessa Fortin

<The Beach and Other Stories> dance, performance

 concept, choreography and performance by Maria Kefirova                                                                                                   text by Maria Kefirova + Michael Martini    photos by Olivier Tullie

이미지가 범람하는 시대다. 갈수록 과잉하는 이미지는 이젠 그에 결착되어 있던 서사의 사슬을 풀고 독립된 감각물로써 세계를 활보한다. 그것은 간혹 강렬한 일각의 통찰을 성사시키기도 하지만 언제나 추상의 의의에 완벽히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는 그저 의미와 역사가 탈락된 텅 빈 기호, 각질적 이미지로서 대기에 휘날리고 있을 뿐이다. 몬트리올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는 불가리아 태생의 무용가 마리아 케피로바(Maria Kefirova)는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으로부터 <The Beach and Other Stories>의 작업을 설계했다. 과용과 남용으로 오히려 무감해져버린 이미지에 다시 의미를 충전하기, 그 의미를 공유하고 소통시키기.

불가리아의 사진작가 올리비에 튈리에(Olivier Tulliez)가 일상으로부터 포착해낸 작품들(1996-1998)을 선택한 마리아 케피노바는 문필가 마이클 마티니(Michael Martini)와 동반하여 한 장 한 장의 사진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이미지의 세계 속을 거닐고 그로부터 다시 만난 기억, 현재를 두드리는 상념, 미리 일어서는 전망을 채집하여 그를 다시 관객과 공유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담소, 순박한 유희는 아니다. 케피노바와 마티니의 발화 기제는 위트와 아이러니. 압축된 언사들은 간혹 촌철 같은 문학적 순간으로 빛났지만 작품의 내역을 견인한 많은 말들은 언어가 지닌 숙명적 미끄러짐, 사태에 대해 언제나 간접적이고 부분적이라는 본질적 취약성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모두의 모국어는 몸짓이 아니던가, 이미지에 관한 숙고가 공연예술에 관한 숙고로 인계된다. 역시 의미의 양각은 만만치 않은 일이다. 아마도 동시대 예술가들이 자신의 매체의 한계를 밀고 나아가 다른 장르의 매체들과 연합하는 이유이리라. 그러나 어떻게도 의미의 양각은 결코 만만치 않은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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