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리뷰] 몬트리올의 공연예술축전 Festival TransAmériques, 그 두 번째 이야기
[축제리뷰] 몬트리올의 공연예술축전 Festival TransAmériques, 그 두 번째 이야기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3.07.22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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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fFTA, 반짝반짝 빛나는 춤적 충동들

Festival TransAmériques(FTA)는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춤과 연극의 축전이다. 열일곱 번 째 연혁으로 기록된 올해의 행사는 5월 24일에서 6월 8일까지 16일에 걸쳐 아르헨티나·호주·벨기에·브라질·캐나다·칠레·스코틀랜드·미국·프랑스·북아일랜드·모로코·노르웨이·짐바브웨 등 13개국에서 온 24편의 onFTA 공식 초청작과 몬트리올의 삶과 경향에 밀착된 50여 편의 offFTA 작품을 공개했다. 원천적인 춤과 연극으로부터 음악·서커스·퍼포먼스·설치미술·디지털아트 등과 더불어 장르를 횡단중인 확장형 작품들에 이르기까지 총천연 빛 작품들이 도시 구석구석 낮과 밤을 화려하게 채색했다.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시댄스)의 프로그래머로 축제의 현장을 다녀왔다.

[더프리뷰=몬트리올] 하영신 무용평론가 = offFTA의 작품들은 대개 쇼케이스 형식으로 만날 수 있었다. 작가의 설명과 부분 시연을 곁들인 피치(pitch) 형식이거나 작품의 하이라이트를 실연하는 발췌본(extrait)은 어쨌든 2분 내외의 교차편집으로 강화되고야마는 비디오클립 버전보다는 훨씬 더 실체적이고 현장적이다. 춤과 관련한 특정 공간들, 스튜디오와 전용 소극장에서 조명과 장치 등의 부가(附加)를 덜고 작품의 원천으로서 민낯 춤과 직면하는 일은 페스티벌 고어(festival goers)들이 누릴 수 있는 또 다른 묘미이기도 하다.

Fables ⓒ Raphael Ouelle
Fables ⓒ Raphael Ouelle

첫 순서로 만났던 비르지니 브뤼넬 무용단(Compagnie Virginie Brunelle)<Fables>는 그러한 춤의 원형적 위력을 유감없이 피력했다. 2022년 스위스 루가노 댄스 프로젝트 페스티벌(Lugano Dance Project Festival)에서 초연되었다고 하는데, 절정으로 치달아가는 열두 명 남녀의 군무씬은 격렬한 관계항과 그의 원인이자 결과인 내적충동의 사태들을 면밀하게 보여주었다. ‘우화라는 작품세계는 65분 전작(全作)의 드라마투르기를 통과해야 온전히 파악될 일이겠지만, 20여 분의 항진적인 실연은 단체를 책임지고 있는 춤작가 비르지니 브뤼넬의 춤 어휘를 직관하게 해주었다. 가학과 피학의 작용과정을 거쳐 해방적 분출에까지 이르는 무용수들의 긴밀한 심리적, 물리적 과정의 연쇄와 점층이라는 특장점이 단박에 보였다. 캐나다는 물론 유럽권역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는 작가로 과거 한국무대(서울세계무용축제, 시댄스)에도 선 적이 있는 그는 이미 10여 편의 컨템퍼러리댄스 레퍼토리를 축적하고 있다고 하니 언젠가 완충된 무대도 볼 수 있기를 고대한다.

L'un L'autre © David Wong
L'un L'autre © David Wong

실뱅 라포르튄(Sylvain Lafortune)과 에스테르 루소-모랭(Esther Rousseau-Morin)의 이인무 <L'un l'autre>는 춤, 관계, 생에 관한 전적인 탐구의 결과물이다. 흔하진 않지만, 때로 충족적이고 명증한 개념은 사태 전체를 포착해주기도 한다. 회전으로 점철하는 이 이인무가 그렇다. 지지(支持)와 작용, 구심력과 원심력, 전이되는 에너지의 루프, 그 생멸(生滅) 순환의 역학. 자칫 아크로바틱의 지대로 실축하기 쉬운 이 기술집약적인 이인무는 절묘한 지점에서 조형성과 의미망을 포착해낸다. 회전을 통한 교환의 영속(永續)은 어느 순간에는 인력(引力, pull)과 척력(斥力, push), 심지어는 도약(lift)의 순간을 창출하며 one, the other, 한 사람과 다른 한 사람이 우리로 결착되어 살아내는 생의 과정과 원리에 관한 조밀하고도 간명한 시학(poetic)으로 거듭난다. 타국의 한 공연예술 관계자의 귀띔에 의하면 2018년의 초연으로부터 공연을 거듭하며 가감(加減)을 통해 완결의 경지로 나아가고 있는 작품이라고. 개인적으로도 컨셉추얼한 작품들의 목록 중 인상적인 작품으로 기록해둔다.

Homo Deus ⓒ Damian Siqueiros
Homo Deus ⓒ Damian Siqueiros

샤를-알렉시스 데가녜(Charles-Alexis Desgagnés)의 독무작 <Homo Deus>는 판단을 보류해두어야 할 작품이었다. ‘호모’ ‘데우스’, 인간과 신을 가리키는 학명(學名). 안무자이자 실연자인 데가녜의 움직임은 심리와 물리력, 유기체와 무기물, 거창하게는 실존과 탈존의 먼 양단을 종횡하며 출현한다. 독학으로 춤을 습득하였고 춤과 연주와 영상 등 장르를 가로지르는 다학제 작업을 해나가고 있다고 소개되었는데, 여하간 목도한 절취적 춤의 장면만으로는 그 행랑이 무엇으로의 지향인지를 파악하기에 충분치 않았다. 춤이야말로 무엇보다도 존재 혹은 존재의 방식을 증빙한다는 평소의 신봉대로 춤만으로 그 혹은 그의 작업을 추적해보려 해도 녹록치 않다. 초록 의상을 입고 바닥에 접지한 신체의 부분들, 어깨, 꼬리뼈 등으로부터 발생시키는 느리고 묵직한 움직임으로부터 기립의 유려한 웨이브 연속으로의 드라마틱한 진행에서 발견되는 이질적 순간들은 낯섬그 자체를 환기한다. 그러나 이내 무엇으로의 의미화로 귀결되지 못하고 산화하는 동시대 춤의 무수한 장면 더미로 귀속하면서 익숙한 것이 되어버린다. 제도권 밖에서 얻은 춤이라고 했는데 오히려 몸을 잘 쓴다라는 춤에 관한 오래된 수사의 양가(兩價) 사이에서 길을 잃게 만드니, 지연되는 감응과 유보할 수밖에 없는 동의는 20243월 초연에서 공개될 60여 분의 완성본 혹은 데가녜의 축적되는 작품 연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성싶다. 물음표를 그려두기, 이 역시 축제가 선사하는 재미 중 하나다. (p.s. 사진을 제공받기 위해 연락을 취하였더니 <L’appel des Braises(The Call of the Embers)>로 제목을 바꾸었다고 알려왔다).

L'écho des racines ⓒ Folkographe
L'écho des racines ⓒ Folkographe

뿌리의 울림쯤이 적정한 번역일 성 싶은 사라 브롱사르(Sarah Bronsard)<L'écho des racines>는 제목자 그대로 근원들의 얽힘이다. 우선, 다섯 명의 무용수와 네 명의 연주자는 플라멩코와 퀘벡의 전통무 지그(jig, 프랑스어로는 gigue)’라는 두 뿌리로부터 얽혔다고 한다. 지그에 관한 선험과 지식이 없는 탓도 있겠으나 빠르고 정교하면서도 자유분방한 리듬에 실리는 스텝 위주의 춤은 익히 알고 있는 플라멩코의 그 짙고 화려한 인상 그대로였던지라 지그적 장면 혹은 지그와의 작용을 알아차리기는 힘들었다. 무용수들이 하얀 실타래를 풀어 길게 잡은 양단 사이 사라의 독무가 진행되는 장면에서 전통의 재현을 넘어서고자 하는 작가의 의욕을 엿볼 수 있었는데, 당장은 일차원적인 가시성과 의미로 드러난 그 뿌리 선()들이 어떻게 뻗어나가고 조직되어 무용수들의 몸과 섞이는지가 동시대성 확충의 관건이 될 것 같다.

What Will Come ⓒ Marie-Pier Meilleur
What Will Come ⓒ Marie-Pier Meilleur

쥘리아 라페리에르(Julia B. Laperrière)와 세바스티앵 프로방셰(Sébastien Provencher)가 공동으로 창작하고 연행한 <What Will Come>은 쇼케이스 형식으로는 가장 불투명해지는 종류의 작품이다. 하얀색 입방체들의 나열과 더불어 시연된 그들 춤의 내역은 공간과 사물과 서로의 존재를 탐색하는 상태함수(state function). 아마도 동시대적 감수성의 바탕적 세계가 되어주는 협업장르들은 카오스의 무질서를 향해 치달아갈 것이고 탐색과 반응으로부터 아예 생존의 기제로 태세를 전환할 춤은 그 조형과 에너지량이 즉흥으로 열려 있을 것이다. 거기, 그때의 춤이 살아있음 그 자체를 감각하게 해줄 수 있으리만치 농밀하다면 작품은 결국 몸의 일로 귀결되는 열렬한 춤이 될 것이다. 그러지 못하다면 이미 컨템퍼러리댄스계를 횡행하고 있는 무수한 클리셰들 중 하나가 될 터. 개인적인 소회를 첨언하자면, 이런 트렌드가 염증 나기도 하다가도 결국 이런 범주의 작품에 경도되니 말이다. 살아내고 있다는 그 사태의 환기야말로 현재의 모두를 사로잡을 이야깃거리 아니겠는가.

Radio III/ᎦᏬᏂᏍᎩ ᏦᎢ ⓒ Melika Dez
Radio III/ᎦᏬᏂᏍᎩ ᏦᎢ ⓒ Melika Dez

<Radio III/ᎦᏬᏂᏍᎩ ᏦᎢ>는 이번 페스티벌 관람 중 가장 이질적인 작품. ‘sehoby’라 음차(音借)되는 ᎦᏬᏂᏍᎩ는 아메리카 원주민 체로키족의 언어로 ‘radio’ ‘speaker’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몬트리올 태생의 하나코 호시미-케인즈(Hanako Hoshimi-Caines)의 안무와 공인(公認) 아메리카 원주민 예술가인 엘리자 하킨스(Elisa Harkins)의 가창과 춤은 잊혀가는 언어와 전자음악의 병합 안에서 지배적인 미학의 관행과 보편성들에 대한 불편한 질문을 제기한다. 고증되어야 할 것들과 새로이 교접 생성하는 것들, 예술적인 것과 예술적이지 못한(않은) , 예술의 미학적 성취와 일상적 실천과 기능적 가능성들 간의 어떤 경계. 예술의 오래된 그러나 영원히 공회전할 바로 그 질문.

Montreal-MarrakechⓒLuc Senécal
Montreal-Marrakech ⓒLuc Senécal

<Montréal-Marrakech>는 제목이 적시하는 바, 이항적인 두 도시의 교류로부터 발생하는 춤을 추적하는 리서치 작업이다. 캐나다 퀘백 무용계의 방점적 작가인 다니엘 데누아이예(Danièle Desnoyers)와 모로코 마라케시에서 동시대 춤의 진행을 견인하고 있는 작가 타우피크 이제디우(Taoufiq Izeddiou)는 두 도시의 삶과 예술이 기입된 4명의 무용수(몬트리올의 Myriam ArseneaultAbe Simon Mijnheer, 마라케시의 Chourouk El MahatiMoad Haddadi)의 일원론적 몸으로부터 타자성과 관계에 관한 여러 각도의 물음을 진척시키기를 원했다. 2018년에 기획되어 여러 차례에 걸쳐 진척되었다는 탐구. 여건상 반편의 연행을 훔쳐볼 수밖에 없었는데도 긴밀하고 열렬한 관계항으로 간파되는 춤은 그간의 치열하고 집요하였을 과정을 짐작케 한다. 623일부터 25일까지 몽펠리에 댄스 페스티벌(Festival Montpellier Danse)에서 초연되어 좋은 반응을 얻었다는 후문이다.

The Door Opened West © Michael Slobodian
The Door Opened West © Michael Slobodian

안무가 사라 체이스(Sarah Chase)의 작품 <The Door Opened West>는 기억의 지층을 탐색한다. 무용수 마르크 부아뱅(Marc Boivin)의 발화와 춤으로 시간의 주름을 펴고 접는 이 작품을 위해 체이스와 부아뱅은 꼬박 5년의 면밀한 작업과정을 통과해왔다고 했는데. 과연 시연되는 기억의 장면들은 마치 부아뱅의 몸 그 내부로부터 출현하는 듯한 가시성을 지닌다. 자연광 스튜디오에서의 부분 실연임에도 거구의 부아뱅이 어린 시절을 행하면 작은 부아뱅이 보이는 듯했다. 한 사람의 기억들이 어떻게 들춰지고 어떻게 배열되어 모두의 공감대로 확장 가능해지는지는 작품 전()시간에 걸친 여행에 동참하고 나서야 비로소 확인 가능하겠지만, 적어도 연행의 품질만큼은 장담해도 좋을 듯하다. 본공연에서는 빛의 건축적 설계가 가세한다고 하니 기억은 더욱 실체적으로 도드라질 것으로 예측된다.

GOUND ⓒ Denis Martin
GROUND ⓒ Denis Martin

카롤린 로랭-보카주(Caroline Laurin-Beaucage)가 안무하고 몬트리올 댄스(Montréal Danse, 몽레알 당스)가 연행하는 <GROUND>60여 분에 걸쳐 펼쳐지는 중력과 생동(生動)의 드라마다. 회색 티셔츠와 형광색 바지 차림으로 트램펄린 위에 올라선 사람들(쇼케이스 현장에서는 세 기()의 트램펄린이 놓여 있었는데 본 공연은 무대 규모에 따라 조정이 있지만 대개 다섯 기로 이루어진다고 한다)이 항진시키는 리듬으로부터 중력으로 약분된 생의 조건에의 조응과 저항, 개인과 집단 사이에서의 고립과 연대의 장면들이 펼쳐진다. 2018년에 초연되었다는 이 작품에게는 다소 억울한 언급이 될 수도 있겠으나 요안 부르주아(Yoann Bourgeois)의 인상을 떨칠 수가 없다. ‘중력의 장에서 펼쳐지는 익명적 서사는 이제 하나의 양식으로 자리 잡는 것일까. 예술과 테크닉이라는 오래된 테제와 신체성(physicality)과 몸성(corporeality)간의 애매모호한 경계, 그리하여 결국 춤과 아크로바틱과 아트서커스의 변별에 대한 미묘한 입장차들을 낳고 있는 중력의 드라마들은 어쨌든 아직까지는 유효한, 세계 공연예술계의 트렌드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La disparition des choses ⓒ David Wong
La disparition des choses ⓒ David Wong

아멜리 라조트(Amélie Rajotte)<La disparition des choses>는 실연이 아니라 작가의 설명으로만 만났기 때문에 소개하기가 망설여지지만 작품의 주제와 관련하여 전하고픈 시류(時流)가 있어 더불어 전한다. 페스티벌에 참가하여 관계자들과 이런저런 ‘small talk’를 나누다보면 국적 불문하고 요즘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다. 우리는 내연기관차의 판매를 중지했어, 우리는 탄소배출량을 줄이기 위해 자전거 도로를 확충하고 있어 등등의 정책 정보는 모르던 바도 아니고 규모와 밀집도와 도심 구획과 도로망 환경 자체가 유럽의 도시들과 영판 다른 우리네 환경에 어떻게 적용 가능할까 막막해지곤 한다. 이번엔 예술가들의 구체적인 실천 사례가 전해지기도 한다. 누구누구가 친환경정책에 일조하기 위해 월드투어를 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대, 온라인을 통해서만 작업을 공유한다나봐. 다음의 질문은 뼈아팠다. “시간은 정말 얼마 남지 않았어. 너희 나라 예술가들은 어떻게 하고 있어?” 우리에게도 물론 환경의 위기를 말하는 작품들이 등장하고 있다. 몇 작품의 경험으로부터 말하자면 솔직히 이 목전의 위기에 대해 긴박해지게 만드는 작품은 못 만났다. 작품의 연출과 연행의 지향이 위기를 그리는 데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현대의 예술작품들이 누누이 풍겨온 디스토피아의 뉘앙스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 엄살과 말초성을 의혹하게 되곤 하는 것이다. 작가는 정말로 이 주제에 깊이 천착해보기는 한 걸까?

아멜리 라조트는 제법 오래 환경과 관련된 신체의 잠재성과 소통가능성에 관심을 두고 작업을 해왔다고 말했다. ‘사물들의 소멸이라 직역 가능한 이 50분간의 2인무는 자연의 부재를 상정하고 영상 프로젝션에 조응하여 새로운 질료와 공간을 탐색하고 파헤치는 작업이라 소개했다. 작품을 보고 싶은 마음이 동하여 동영상을 검색해보았다. 카메라의 초점과 편집 능력을 감안해야겠지만 그 짧은 동안에도 무채색의 표정 없고 완강한 공간을 더듬고 휘젓는 두 무용수의 몸짓으로부터 간명하고도 절박한 의지가 감지되었다. 몸짓의 강도는 사유의 누층으로부터 발생한다. 위기 목전의 시절, 감응의 힘을 지녀 변화의 계기를 촉발하는 작품들이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Le Flaneur ⓒ Wayne Eadrley
Le Flaneur ⓒ Wayne Eadrley

방랑객, 음유시인쯤으로 번역 가능한 <Le Flâneur>는 'This is Tap'이라는 부제가 선언하듯 무려 40여 년의 이력을 자랑하는 탭댄서 빌 콜먼(Bill Coleman)이 연주자 한 명을 동반하여 즉흥연행을 펼치는 90분에서 120분 가량의 장소 특정형 공연물이다. 장신의 마른 체형에 탐색자의 눈빛을 지닌 빌 콜먼은 스튜디오에 그저 서 있기만 해도 유럽 거리공연예술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데 그 짧은 시연에도 정교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장인의 경지가 물씬 느껴졌다. 스튜디오에서의 시연에서는 의족을 달고 춤을 춰보였는데 그야말로 세 다리로 추는 춤이 되었다. 평소 모든 것들을 제어하여 완벽한 한 세계를 만드는 무대예술을 선호하지만, 거리공연에 나가보면 길이 숙명인 작품들, 연행자들이 간혹 있다. 빌 콜먼이 그렇다.

Future Ghost 사진 제공 Zoë Vos
Future Ghost 사진 제공 Zoë Vos

조에 보스(Zoë Vos)<Future Ghost(Hugger)>는 부재를 촉각하는 방법에 관한 집요한 탐구의 결과물이다. 죽음을 견디어내는 방법. 기억을 감각에 현행화시키는 방법을 구하는, 사라진 것들을 내 삶의 반경 안으로 다시 초대하는, 일종의 제의지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방식들과는 현저히 다르다. 아주 모던한 방식의 수행(修行)이랄까. 느리고 완만한 주파수대를 유영하는 음악은 그러나 밝고 영롱한 뉘앙스의 시공간을 창출하고 감청색 스트라이프 바지와 먹색 긴 셔츠에 캡 모자 차림을 한 조에 보스는 앉아서 서서 누워서 뒤돌아서 재킷을 거꾸로 입고 모자를 돌려쓰고 긴 머리로 얼굴을 가리고 등등의 갖가지 방법과 양손의 연출로 안고 안긴 이중(二重)의 몸을 연출한다.

이 아주 기발하고 섬세한 방식의 변형들은 역설적으로 상실을 위무하고 죽음을 애도하게 만들어준다. 죽음은, 그 상실과 부재에 대한 가장 깊숙한 충격은 더 이상 만질 수 없음, 다시는 내 몸과 그 몸의 그 온도와 감촉으로써 영원히 만날 수 없다는, 촉각적 사태의 좌절로부터 오지 않던가. 한 번만이라도 더 만져보고 싶다는 염원은 실현 불가능하다. 부재를 촉각해낼 방도는 누구에게도 없다. 그러나 살아있는 자들은 이렇게, 조에 보스가 겪어온 죽음을 위로하고(죽음의 경험들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궁리들을 해내겠는가) 그로부터 내가 겪어온 죽음의 과정을 이해하면서, 그러한 공감과 연대로부터 살아낼 힘을 보충하여 남은 날들을 살아내는 것이리라. 작지만 예술의 진정한 힘을 느끼게 해주었던 작품.

Dérives ⓒ Angelo Barsetti
Dérives ⓒ Angelo Barsetti

퀘벡의 현대무용을 견인해온 무용가라 소개되는 뤼시 그레구아르(Lucie Grégoire)55분 솔로작 <Dérives>는 우선 그 적당한 번역어가 고민스럽다. ‘표류변화·변동도 적당치가 못하다. 순백의 셔츠와 바지 차림으로 장치 없는 소극장 무대에서의 전 시간을 홀로 감당하는 이 노년 무용가의 춤은 순전한 내면의 발로다. 무엇에 대한 반응, 무엇에 의한 작용이 아니다. 깊고 어둡고 격정적이며 때로는 황량한 아이슬란드 첼리스트 힐두르 구드나도티르(Hildur Guðnadóttir)의 음악은 여타에 장치를 동반하지 않는 이 춤에 입체적이고 인상 짙은 음악적 공간을 제공하지만 그렇다고 뤼시 그레구아르의 춤이 음악에 순응하는 것도 아니다.

음악으로써 대리되는 환경, 작품 내 세계의 한복판에서 뤼시 그레구아르는 세계와 마찰하는 자신을 끄집어낸다. 그 어떤 무용예술의 관행적 동작구도 발견되지 않는, 이 철저히 자필적이고 반미학적이고 자기몰입적이고 자가발전적인 춤은 어쩌면 과거의 시간대에 있다. 익명적인 몸의 춤들이 득실대는 요즘의 추세에서 간만에 발견하는 실존적 선언, 가끔 이런 향수도 좋다. 기술(記述)하진 않았지만 자신의 정체성을 탐구 중인 몇몇 작품들도 있었다. 뤼시 그레구아르의 춤까지, 과거로부터 장래할 시간까지, 전형적 춤에서 확장형 춤까지, 몬트리올 춤 지형의 용적은 넓고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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