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논객의 춤시선-19] 녹슬지 않은 ‘안성수표 안무’ - 음악해석의 섬세함과 춤변주가 주는 행복감
[낭만논객의 춤시선-19] 녹슬지 않은 ‘안성수표 안무’ - 음악해석의 섬세함과 춤변주가 주는 행복감
  • 장승헌 공연기획자
  • 승인 2023.07.11 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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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서양 음악과의 소통을 즐기는 무용수들의 낭만감성
- 5월 25-26일, 예술청 쿼드극장
안성수픽업그룹 <도발> <차피타씨> 포스터 (사진제공=쿼드극장)

[더프리뷰=서울] 장승헌 공연기획자 = 요즈음 우리 컨템포러리 춤계의 지형도를 보면 20-30대 안무가들이 주류를 이루는 가운데 국내무대는 물론, 해외 초청공연 기회도 부쩍 많아지고 있다. 또한 지난 3년 여 팬데믹 시기에도 현장에서는 이른바 MZ세대 젊은 안무가들을 중심으로 댄스필름 제작과 영상 협업작업, 그리고 대안공간 및 야외무대에서도 다소 거친 미완성형 작품들로 ‘코로나 팬데믹에도 춤은 계속되어야 한다’는 지상명제를 실천해 왔다.

이에 반해 중진 무용가들의 신작이나 레퍼토리 등 상대적으로 큰 규모의 작업들은 다소 위축되는 인상을 주고 있다. 공적 지원의 혜택에서 멀어지는 상황이 가시화하면서 무용계는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가고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아마도 중진급 무용가들로서는 다소 섭섭하다고 느끼면서 청년 일자리 창출이라는 명분 아래 다소 과하게 쏠린 듯한 신진 예술가 위주의 지원 시스템에 대해 우려하거나 혹은 묵비권으로 속내를 감춘 채 어디선가 묵묵히 작업을 조심스레 진행하고 있을 터이다.

이렇듯 다소 위축된 분위기에서 금년 봄 서울문화재단 산하 대학로 예술청 쿼드(구 동숭아트센터)가 새로운 무용공간으로의 자리매김을 위해 적극적 행보를 취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공공 기관이 직접 기획과 제작을 자처해 시스템을 운영하려는 사전 제작시스템 구축이 이루어지는 이 방향은 상대적으로 나이 든 예술가들에게 경제적 무게감과 마음의 짐을 다소나마 덜어줄 것으로 기대된다. 금년 5월 시작된 '쿼드 초이스'를 통해 실로 오랫만에 40대 안무가인 안수영, 그리고 연극과 무용을 오가며 자신의 존재감을 새삼 확인 받고 있는 50대 후반의 박호빈에 이어 세 번째 안무자로 중진 안무가 안성수 픽업그룹이 3년여 만에 신작을 발표, 큰 관심을 모았다.

안성수 픽업그룹 <차피타씨> 공연 (사진제공=쿼드극장)

<도발> 및 <차피타씨>라는 이색적 제목으로 서로 다른 결의 동서양 음악을 사용해 2인무와 5인무 형식의 춤을 보이는 가운데 여전히 녹슬지 않은 ‘안성수표’ 안무가 주는 세심한 감각과 한층 여유로워진 안무가의 낭만적 감성을 통해 관객들에게 ‘사유의 시간’과, 그리고 ‘춤꾼들이 전하는 행복감‘을 동시에 선사해 주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 남성 안무가 안성수(한예종 무용원 창작과 교수)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신문방송학과 출신으로 미국으로 유학해 영화를 공부하던 중 재활치료 과정에서 발레 기본의 효과로 몸의 건강을 되찾은 체험을 계기로 무용으로 진로를 변경, 줄리어드 대학에서 뒤늦게 무용을 시작해 음악해석에 남다른 재능을 과시하면서 음악을 분석하는 안무가로 인정받았다. 미국 유학시절에 이미 안성수 픽업그룹을 창단, 프로페셔널 활동을 시작해 뉴욕의 여러 춤 전문극장에 초대받은 실력파이기도 하다.

지난 1990년대 말 귀국, 새로운 프로젝트 춤단체를 설립해 다채로운 작품을 발표하며 신드롬적 인기와 평단은 물론, 일반 관객들의 호평 속에 여러 매체에서 주는 작품상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선정 ‘올해의 작품상’까지 수상하며 안성수 픽업그룹과 한예종 무용원 교수로 겸직활동을 하기 이르렀다. 이어서 지난 2017년부터 2020년 초반까지 3년 여 동안 제3대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으로 일하면서 <볼레로 시리즈> <혼합> <쌍쌍> <스윙> <제전악-장미의 잔상.> < 쓰리 볼레로> <라벨과 스트라빈스키> <검은돌: 모래의 기억> 등 다채로운 안무 목록을 축적해 나갔다. 특별한 능력의 컨템포러리 안무자로서 우리 시대 최전선에서 수작들을 연이어 발표했다.

두 작품 중 필자는 <도발>에 더 눈길이 갔다. 연주자 라예송이 한국의 악기(가야금, 주발, 승무 북가락)를 신비롭게 연주하는 가운데 뒤쪽 붉은 천 위에 누워 있던 무용수 장혜림과의 조우는 객석의 분위기를 온전히 집중시키면서 명상적, 제의적 분위기를 연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른바 ‘정중동의 미학’을 선연하게 실천해 보인 것이다. 무대 공간을 자유롭게 변형하며 연주자와 함께하는 호흡, 그리고 춤의 밀도는 가히 범접하기 어려운 다른 세계로 우리를 여행시켜 주었다. 호흡이 남다른 한국춤꾼과 작곡가/연주자인 두 예술가의 조합을 이끌어 낸 안무자의 안목에 새삼 경의를 표하고 싶다. 작품 제목 <도발>을 통해 관객들에게 ’감각‘과 ’감성‘을 도발시키려는 안무자의 의도가 기대 이상의 조율과 섬세한 마음의 교집합을 도출시키면서 안무의도를 찰떡같이 소화해 낸 두 출연자를 만남으로써, 세 사람의 닮은 듯 서로 결이 다른 ’감각의 힘‘이 드러난 것이다. 미니멀한 명상적 연주와 춤사위의 구도와 감성의 밀도, 그리고 서로를 배려하는 유연한 소통의 풍경은 객석의 시청각을 자극하며 소리 없이 강한 예술가들의 ’협업 교과서‘로 인식될 만치 농익은 기량과 절묘한 감성을 선도했다.

잠시 휴식 후, 신작 <차피타씨>는 흥겹고 넉넉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오후에서 해질 무렵까지 다섯 여인이 수다를 즐기는 모습이 다채롭기만 하다. 국립현대무용단 예술감독 시절, 스웨덴 재즈밴드와 협업한 <스윙> 역시 일반관객들에게 현대무용의 친숙함을 선사했다. 믿고 보는 이주희, 이은경 두 뮤즈의 농익은 춤사위와 젊은 세 명 (김보경, 석지우, 임혜원)의 개성 넘치는 재기발랄한 춤 연기가 펼쳐졌다. 특히 The Green Car Motel 밴드가 연주하는 흥겹고 이국적 감성을 자극하는 귀에 익은 음악들이 들려온다. 수 년 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흑인 천재 피아니스트와 백인 매니저(운전기사)를 주인공으로 인종 차별에 대해 경종을 울린 영화 <그린 북>의 OST 주제곡들이 제각기 다른 분위기로 편곡된 7편의 음악은 피아노, 현악과 타악 연주를 위주로 흥겹고 정겹게 객석을 흠씬 들뜨게 만들어 놓았다. 그 리듬만큼이나 5명 여성 무용수의 밝고 명랑한 춤사위는 각자 소품(보석반지, 붉은 부채 등)이 상징하는 매력들을 뽐내며 자랑했다. 특히 빠른 움직임으로 싱그러운 초여름 밤의 관객들에게 이국적 풍경 속 여행과 서정적 춤 나들이를 유쾌, 상쾌하게 그리고 기분 좋게 도와주었다.

안성수 픽업그룹 <도발> 공연 (사진제공=쿼드극장)

이 공연을 보고 귀갓길에서 문득 스친 필자의 생각을 피력해 본다. 이번 더블 빌 형식의 두 작품을 <도발>이란 명사형 단어로 연결해 1편과 2편으로 묶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왜냐면 <차피타씨>란 외국어 제목이 낯설기도 했고, 이 어려운 단어가 영화음악을 담당한 음악밴드 이름이라는 설명을 듣고서야 그 궁금증이 어렵사리 풀렸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제목이야 어쨌거나 2023년 봄날 끝자락에서 낭만적 서정과 ‘도발’이란 단어의 의미 해석에 상상력까지 실천해 준 안성수 픽업그룹에게 신뢰의 마음을 새삼스레 전하고 싶다.

안성수 픽업그룹 <도발> 공연 (사진제공=쿼드극장)

서울문화재단(대표 이창기)이 옛 동숭아트센터 건물을 매입해 약 2년 동안 리모델링을 거쳐 블랙박스 가변형 무대로 변신시킨 것이 쿼드극장이다. 지난해 가을 개관 기념 페스티벌을 마친 데 이어 금년 봄 시즌에는 자체 기획공연과 함께 다채로운 대관공연들이 이어졌다. 지난 1980년대 초 이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예술극장과 대학로예술극장이 연극과 무용 중심의 공공극장으로 자리해 온 것이 사실이다. 수많은 대학로 소극장들이 비싼 임대료로 인해 외곽으로 밀려났다. 어느새 상업지구로 변질된 대학로. '문화의 거리' 회복에 서울문화재단 예술청 쿼드극장이라는 상징적 공간이 앞으로 적극적인 역할을 해줄 것같아 무척이나 반갑고 기대된다.

안성수픽업그룹 <차피타씨> 공연 (사진제공=쿼드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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