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복수의 끝에는 무엇이 남을까
[공연리뷰] 복수의 끝에는 무엇이 남을까
  •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3.07.28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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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오페라단 <일 트로바토레>
국립오페라단 '일 트로바토레'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국립오페라단 '일 트로바토레'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더프리뷰=서울]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국립오페라단의 2023년 공연은 모두 베르디의 작품들이다. 풍부하고 선굵은 베르디의 오페라들은 몇 세기가 지나도 감동을 안겨준다.

대한민국 오페라 페스티벌의 대미를 장식할 작품으로 국립오페라단은 <일 트로바토레>(6월 22-25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를 선택했다. 1853년 로마의 아폴로 극장에서 초연된 <일 트로바토레>는 벨칸토 오페라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국립오페라단의 무대에서도 음악으로 스토리를 장악해버리는 베르디의 힘을 만끽할 수 있었다.

지난해 <아틸라>를 맡았던 잔-카를로 델 모나코가 연출을, 젊은 마에스트로 레오나르도 시니가 지휘봉을 잡았다. 원작은 15세기 초 스페인 피레네 산맥 남부의 아라곤 공국과 바스카야의 내전을 배경으로 하지만, 연출자는 현대의 미국 어느 범죄도시를 배경으로 무대를 세웠다. 귀족과 집시의 대결은 세력을 다투는 갱들의 대립으로 변모했다. 럭셔리한 검은 제복의 루나 백작의 그룹은 백인 우월주의자들로, 만리코가 이끄는 힙합 패션의 그룹은 이민자들로 형성되었다. 연출자는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에서 아이디어를 얻었으며 ‘동시대를 투영하기 위한’ 의도에서 이런 무대를 고안했다고 한다. 만리코나 레오노라는 가죽 재킷과 부츠를 신고 노래했고, 만리코의 이민자 집단은 칼과 쇠사슬, 몽둥이 등을 들고 루나 백작과 싸웠다.

솔직히, 무대를 대하며 이질감이 짙었다. 기나긴 복수의 악연을 표현하기에 현대적 배경은 무리가 있어 보였다. ‘대장간의 합창’을 부르며 격투기 시합을 구경하는 집시들이라니. 'Il Trovatore'는 ‘음유시인’을 의미하는데, 현대사회의 음유시인은 과연 시를 노래할까. 의상을 보면 갱스터 랩이나 록을 불러야 할 것 같았다.

국립오페라단 '일 트로바토레'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그러나 벨칸토 오페라의 특성상 단순한 플롯의 스토리는 전적으로 음악에 의지하기 때문에 무대의 이질감은 곧 덮였다. 레오나르도 시니가 이끄는 거침없는 전개, 성악가들의 노래가 하드캐리한 무대였다.

연출자는 단순한 캐릭터들을 관객이 공감할 수 있도록 빌드업했다. 루나 백작은 마초적인 인물이고 군림하는 위치에 있지만 사랑에는 서툴고 약한 내면을 지녔다. 결말에서 그는 자기가 동생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자 혼란에 빠져버린다. 바리톤 이동환은 ‘그대 환한 얼굴’ ‘그대의 미소는 별보다 아름답고’에서 베르디 작품들 중에서도 특별히 아름다운 바리톤 아리아를 부드럽고 묵직하게 불렀다. 달콤히 감기던 이동환의 음색은 질투심에 불타게 되자 분노로 일렁였다. 1부 결투 장면의 팽팽한 3중창은 이동환 없이는 나올 수 없었다. 루나 백작은 레오노라를 진심으로 사랑했기에 만리코를 풀어주며 기쁨에 떨었고, 레오노라가 자신을 속인 것을 알고는 배신감으로 이성을 잃었다.

아주체나는 이 거대한 비극의 한가운데 서있는, 숨은 주인공이다. 복수를 위해 백작의 아들인 줄 알고 자신의 아들을 불길에 던져버린 후 착란과 혼돈 속에 살아왔다. 복수와 애정의 양가감정을 지닌 아주체나의 인생은 처절하면서도, 다른 이들의 운명을 쥐고 있기에 위태롭다. 메조 소프라노 김지선은 아주체나의 명 아리아 ‘불꽃은 타오르고’에서 공허한 소리로 기구한 그녀의 비극을 울부짖었다. 그녀는 트릴과 공명을 기가 막히게 활용해 텅 빈 아주체나의 인생을 표현했다. 마침내 그녀의 복수는 이루어지나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결말을 그녀는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인형을 이용해 비극이 시작된 과거를 재현한 연출도 강렬했다.

벨칸토 아리아는 서정적인 카바티나와 빠른 템포의 카발레타로 이루어져 있는데, 베르디는 카바티나와 카발레타에서 상반된 분위기로 극적인 반전미를 꾀했다. 3부에서 만리코가 ‘아! 그대는 나의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카바티나를 부른 후, 어머니 아주체나가 루나 일당에게 붙잡혔다는 소식에 ‘저 타오르는 불길을 보라’라는 카발레타로 격정을 뿜어낸 것이 그 예이다. 테너 국윤종은 음유시인에 걸맞은 미성을 뽐냈고,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만리코의 내면을 섬세히 묘사했다. 수녀원에 들어간다는 레오노라에게 달려가기 위해 어머니 아주체나를 뿌리치고, 아주체나를 구하러 가기 위해 레오노라를 밀치는 장면에서 그가 얼마나 단순하고 다혈질의 기질을 지녔는지를 알 수 있었다.

국립오페라단 '일 트로바토레'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이날 압권은 누가 뭐라 해도 레오노라를 맡은 소프라노 서선영이었다. 자기 감정만 중요하고 분노로 길길이 날뛰는 캐릭터들 속에서 결연히 움직인 단 한 사람. 4부에서 그녀가 ‘사랑은 장밋빛 날개를 타고’와 ‘내 사랑보다 강한 것은 세상에 없네’를 부르며 탄식과 절규로 바닥을 기어다닐 때 그녀의 아픔과 고통이 절절히 느껴졌다. 레오노라는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며 만리코를 구출하려 했으나, 성급하고 어리석은 연인은 오히려 그녀를 배신자라 비난하고, 죽어가는 레오노라를 보면서도 질투심에 사로잡힌 루나 백작은 만리코를 바로 화형시켜 버린다. 레오노라의 희생과 결단이 아무 열매도 거두지 못해 더욱 비통한 순간이었다.

마지막 복수의 피날레는 아주체나의 “그가 바로 네 동생이다! 어머니, 마침내 복수를 해냈어요!”라는 절규와, 정신이 나간 채 아주체나에게 분노의 난도질을 퍼붓는 루나, 그리고 미친 듯한 템포로 몰아치는 오케스트라가 완성했다. 위너 오페라합창단도 ‘대장간의 합창’ ‘미제레레’ ‘병사들의 합창’을 통해 거대한 비극적 서사에 합류했다.

편견과 차별이 낳은 원한과 복수의 인연은 대를 이어 모두의 파국을 불렀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 어디나, 지금도 편견과 차별과 고통은 이어지고 있다. 연출자는 15세기와 다름없는 완악한 시대를 고발하고자 한 것일까, 복수를 위해 인생을 바쳐봐야 허무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했을까. 혹은 사랑에 빠지면 옹졸하고 편협해진다는 것을 그리고 싶었을까.

레오노라의 고통어린 사랑에 이입했고, 아주체나의 인생이 가여웠다. 무엇보다 벨칸토 오페라 음악의 힘에 압도된 무대였다. 많은 해석의 여지를 남긴 연출자에게도, 폭풍 같은 베르디의 음악으로 휘감아준 지휘자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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