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국립현대무용단 '캐스케이드 패시지(Cascade Passage)'
[공연리뷰] 국립현대무용단 '캐스케이드 패시지(Cascade Passage)'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3.08.05 00: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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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렌드, 시도들, 그리고 유보할 수 없는 질문들

[더프리뷰=서울] 하영신 무용평론가 = 지난 623일에서 25일까지 사흘간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는 국립현대무용단의 기획으로 아티스트듀오 뭎(Mu:p, 조형준·손민선)<캐스케이드 패시지>가 네 차례 공연을 펼쳤다. ‘다크 투어라는 여행의 상품적 형식을 참작했다는 이 작품에 관하여 말하기를 오래 망설였다. 그러나 이 작품에 연관할 뿐 아니라 이젠 제법 오래되었고 더욱이 활성화되고 있는 공연예술의 어떤 현황들에 대하여 더 이상은 지체할 수 없는 질문들을 꺼내본다.

국립현대무용단 ‘캐스케이드 패시지’ ⓒ 최연근
국립현대무용단 ‘캐스케이드 패시지’ ⓒ 최연근

다크 투어(dark tour)’, 전쟁·학살·재해 등과 같이 잔혹한 참상이 빚어졌던 어두운 현장을 방문해보는, 여행의 한 방식이다. 다크 투어리즘(dark tourism)이 정확한 용어이고(1996년 영국의 International Journal of Heritage Studies라는 잡지에서 처음 사용된 이 용어는 이후 2000년 말콤 폴리(Malcolm Foley)와 존 레넌(John Lennon)의 공저 Dark Tourism의 출간으로 범용화되었다고 한다), 블랙 투어리즘(black tourism) 또는 그리프 투어리즘(grief tourism)이라고도 한다. 폴란드의 아우슈비츠수용소,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미국의 그라운드제로, 러시아의 체르노빌 등지가 그 대상이라 하는데 여하한 이 여행들의 목적은 단순한 구경이 아닌 실로 구체적인 공감, 그로 인한 반성과 성찰인 것이다. 더 나아갈 수 있다면 앞으로 기록될 인류의 역사를 위해 나의 삶은 어떤 실천적 방향성을 가질 것인가 각오를 세우는 일이기도 할 테고.

이러한 콘셉트를 차용하였노라 선언한 이상 이 작품이 성취해야 하는 품위는 위의 내용들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일상의 영위 외 모든 잉여적 활동은 그것이 여행의 항목으로든, 예술의 항목으로든, 종교의 항목으로든, 사유의 항목으로든 모두가 매한가지의 목적을 지닌다. 자신의 지평을 열어 내 밖의 세계와 소통하기. 인간은 언제나 세계에 내속하여 세계와 교섭하며 사는 존재니 그 세계 내 공속하는 타자들, 사물들, 사건들을 알고 이해하고 공감하며 더불어 살아내야 한다. 그 범속한 진실을 일깨우고 그럼으로써 급기야 실천으로 이끌어낼 윤리(‘을 분간하는 도덕과 구별하여. 존재론적으로 좋음(good)’나쁨(bad)’의 진위를 판별하는 기준으로서의 윤리)적 계기를 마련해주는 것이 예술과 사유의 존재이유이자 기능이었다. 다만 그 방점이 시절의 요청에 따라 변천할 뿐.

이 시대의 방점은 인간 주체로부터 세계로, 인식으로부터 감각의 차원으로 전치하였다. 이 변천은 사유계에는 신유물론’, 공연예술계에는 이머시브시어터(immersive theater)’라는 새로운 어휘를 등장시켰다. 사유가 객체지향 존재론과 실재론을 펼치고 공연예술이 관객 주체를 객체들의 세계, 즉 무대 위 타자들과 사건들과 무대환경 등 작품 내부로 몰입시키고(관객의 입장에서) 흡수하여(작품의 입장에서) 작품세계의 일부로 소속시키는 것은 같은 맥락에서의 일이다.

내 밖의 무한한 물질적 우주의 실존과 그 세계의 작동을 감지하고 긍정하라는 사유와 예술의 요청은 주체의 무화(無化)를 주장하기 위함일까? 아닐 것이다. ‘이미지라는 미분적 단위를 정초(定礎)하여 실재하는 시간 속에서 그 미소(微小)들이 생성과 지속과 또 다른 생성으로의 배치를 영속(永續)하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실체를 연장실체(res extensa)’사유실체(res cogitans)’로 박리해온 전통 형이상학의 이원론적이고 결과론적인 존재론을 논파하며 일원론적이고 생성론적인 현대존재론의 기틀을 구획한 베르그손조차 인간()에 관하여 만큼은 특권적 이미지라 말하지 않았던가. 누구에게나 세계는 자신을 향해 만곡(彎曲)한다. 나는 소우주가 맞다. 다만 그들도, 그 모든 그것들도 각각의 소우주이며 나의 자장 밖에서 세계는 진실로 무궁무진의 사태인 것이다.

자연 그리고 인간들조차 세계의 곳곳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다. 인류는 인간 외엔 그 무엇도 생명이 아닌 듯, 물질에는 아무런 이념도 없다는 듯 무감하고 무례하고 무참하게 진행시켜온 문명에 대하여, 그 문명 속 자신의 생에 대하여 다시 한 번 돌아볼 필요에 처했다. 이미지 존재론이든 신유물론이든 이머시브시어터든 동시대 예술문화계의 조류들이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섬세한 지각을 요청하는 이유가 더욱 자연스럽고 긴밀하며 창조적인 공생적 관계를 맺으라는 권고가 아니라면 그것은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생기론(生氣論, vitalism), 애니미즘(animism), 인류는 원래 세계 그 자체에 대한 지각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다만 문명이라는 인공의 논리가 그 능력을 무력화시켰을 뿐. <캐시케이드 패시지>는 이 능력의 활성화를 기획했다. 작품의 내역은 그 기획대로 채워졌을까?

아티스트듀오 뭎, 건축가 손민서와 무용가 조형준 ⓒ BAKI
아티스트듀오 뭎, 건축가 손민서와 무용가 조형준 ⓒ BAKI

시뮬레이션된 재난 속에서 길 잃기, 춤 잃기

작품이 개시되면 불꽃, 꽃잎들, 첨탑빌딩 등의 화려한 동영상이 점철한다. 문명의 이미지들은 이내 암전과 함께 암흑 속으로 삼켜진다. 일렉트로닉 사운드에 얹힌 발전시설 소리가 극장 시공간을 채운다. 아마도 지하 어느 저장공간에 갇혀 있던 전기들이 활력을 찾고 운행을 개시하는 소리, 잠을 깬 거대한 괴물의 포효 같기도 하다. <캐스케이드 패시지>는 전력공급망 마비라는 재난을 가정하고 발전소-극장공간에서 재난의 사태를 몸소 여행-체험하기를 설계했다. 문명을 구동시키는 세계의 혈액, 전기의 소리와 운행을 감지해보는 일, 그런 미분적 활동들에의 감각은 과연 문명의 바깥, 이런 비상시국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우리는 작품의 경과와 함께 또 어떤 간과해온 세계의 존속을 지각하게 될까.

자유소극장의 천장을 올려다보세요. 극장에서 제대로 쳐다본 적이 없었던 극장의 하늘에 구름과 같은 또 하나의 층이 생겨났습니다. 정전 이후 생명현상을 지속하고 있는 자유소극장의 공중에 외부세계에서 유입된 또 다른 유기체가 증식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플라베니아라고 부릅니다. 관광객 여러분은 플라베니아를 통해 극장의 깊이와 부피를 감각적으로 체험하며, 다채로운 경관을 선사하는 캐스케이드 패시지의 수직적 프로그램 속으로 합류하게 될 것입니다.” 올려다보면, 지름 30cm 정도의 백색 원 두 판의 교직으로 이루어진 형체들이 천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미세한 떨림을 방사하고 있는 그것들은 미토콘드리아나 플랑크톤, 각종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원형적 물질을 연상시킨다. 엄연히 있으나, 그리고 우리를 살리나, 우리가 우리네 필요와 욕망을 좇아 구성한 인위적 맥락 안에서 소거시킨 그것들. 그것들이 이제 바스락거리고 파르르 떨며, 그렇게 구체적인 움직임을 시전(視展)함으로써 실존을 피력한다.

국립현대무용단 ‘캐스케이드 패시지’ ⓒ 최연근
국립현대무용단 ‘캐스케이드 패시지’ ⓒ 최연근

이것이 이 작품, 이 투어의 핵심이다(핵심이어야 했다). 잊혀진 것들, 우리가 오래 소외시키고 급기야 망각해온 것들에의 자각. 기후위기, 문명의 고장은 그 배제와 무시에 대한 응보다(그리고 정치라는 인간 작위의 실패다). 그러나 이 비로소 자신의 실존을 알려온 그것들의 움직임은 수상하다. 그것들은 여전히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인공적 선분(線分)에 포박된 채다. 나란하고 빈틈없이 일직선으로 항렬한 플라베니아는 집체적으로 수직의 운동을 할 뿐이다. 대칭하여 다섯 쪽의 정형(定型)으로 분절된 무대 플로어의 움직임 역시 상하 수직운동이다. 그것은 여전히 문명의 명령을 따른다. 자연의 운동이 못 된다.

잊혔던 혹은 감춰졌던 물질들은 여전히 유동하지 못하고 그러므로 우리에게 스미거나 섞이지 못한다. 이머시브 개념 설립의 불발은 여러 가지의 실패로 증식한다. 건축가 손민선과 무용가 조형준의 듀오인 뭎은 공간을 조작하였으나 그 공간과 인간들(연행자와 관객 모두)의 관계는 달라진 바 없고, 그러니 그 공간의 구동은 그저 장치들의 물리적이고 기계적인 작동에 불과해져 버렸다. 그러나 기계들의 물리적 작동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이미 실용적인 목적에서든, 부러 향유하는 각종 스펙터클의 차원에서든 과도하리만치 현란해진 상태. 그 속도와 강도에 적응된 우리의 감관(感官)에 자유소극장 형틀의 저 단순한 구동은 어떤 다른 감각을 불러일으키고 어떤 다른 사유를 조직해낼 수 있을 것이란 말인가.

국립현대무용단 ‘캐스케이드 패시지’ ⓒ 최연근
국립현대무용단 ‘캐스케이드 패시지’ ⓒ 최연근

공연은 1층 관객석에서 관람할 패키지 A(apple)의 여행객과 2층 관객석에서 관람할 패키지 B(banana)의 여행객으로 관객을 선별하는 일로부터 작품세계에 도입한다. 마흔 여섯을 채워 B 선택자들을 무대로 불러 내리고, 1층 객석에 남은 A 선택자들을 앞좌석으로 밀집시키고, 그리고 B 선택자들을 2층 객석에 착석시키는 데까지 소요된 시간이 대략 20여 분. 60분 작품의 무려 삼분의 일을 소모한 이 이벤트는 어떤 의미를 창출하는 것일까? 뭎이 차린 엠유피(M.U.P) 여행사의 장황한 설명에 따르면 선택에 따라 다른 조망권을 경험할 수 있다고 했는데, 글쎄, 각층에서 경험된 공연의 내역에는 과연 의미심장한 차이가 졌을까?

어차피 관객은 구경꾼의 위치에 결박되어 사전에 모집되고 특수한 수련을 거쳐 캐스케이드 패시지의 심장부로 접근할 수 있다고 설정된 여섯 명(강호정·손민선·신상미·이소진·조형준·한아름)의 연행자 그룹 C(coconut)의 무대 위 공연을 주시할 수 있을 뿐이다. 연행자들에게 가까이 있지도 못하고 그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어떤 ’ ‘마당작품세계 내부로의 편입도 불가능. 게다가 연행자들의 연행은 대부분 뭎이 설계한 스토리텔링을 전개하는 마임과 연기이거나 아니면 구동하는 무대장치 사이로의 이동(실존적 차원의 공간 탐색이 아닌)이었을 뿐이다.

국립현대무용단 ‘캐스케이드 패시지’ ⓒ 최연근
국립현대무용단 ‘캐스케이드 패시지’ ⓒ 최연근
국립현대무용단 ‘캐스케이드 패시지’ ⓒ 최연근
국립현대무용단 ‘캐스케이드 패시지’ ⓒ 최연근

재난의 파괴력은 말미에 읊어질 따름이었다. “국립재난안전연구원이 제작한 광역정전 발생 시 국가기반시설 시나리오 등의 분석에 따르면 블랙아웃 발생 즉시 전국 270만개의 신호등과 가로등이 꺼지면서 도로교통이 마비됩니다 …… 블랙아웃이 3일 이상 지속되게 된다면 치안이 붕괴되면서 국가기능이 마비되는 큰 사회적 혼란이 야기될 것입니다.”(단수, 가스공급 중단, 의료기기와 엘리베이터 작동 중지 등등 날짜별로 진행되는 붕괴하는 일상에 관한 상세한 시나리오는 인터넷 검색으로 쉽게 볼 수 있다). 사전 홍보를 따라 기대해보았던 재난에의 감각적 체험은 내 몸에서 실행되지 못했다. 패키지 가이드(이소진)의 발작 장면을 제외하면 생명현상의 항진과 응축으로서의 춤적 순간이 출현하지 못하니, 여느 공연예술작품들에 비해 오히려 현전성이 부박하고 그러므로 공감각(共感覺,synesthesia)적 정동(情動, affect)의 순간들을 창출하지 못하는 이 작품은 어떻게 시뮬레이션’ ‘체험형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국립현대무용단 ‘캐스케이드 패시지’ ⓒ 최연근
국립현대무용단 ‘캐스케이드 패시지’ ⓒ 최연근

지금 굳이, 어떤 실패의 원인을 확인해야 하는 이유

예술의 현장은 그저 무수한 시도들의 장이어야 맞다. 어쩌다 기념비적이라 합의되는 간혹의 작품을 향해 달려가는 무수한 작품들의, 혹은 그 영향력의 지속을 가능하게 해주는 무수한 아류들의 서식지여야 맞다. 실패에의 허용은 충족적인 작품의 탄생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그러니 비평의 방향은 좌초한 의미들을 불러 세우는 것보다는 발견되는 의미들에 대한 공감의 피력으로서가 좋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론. 그러나 오늘만큼은 질문을 삼킬 수 없다. 이미 오래 묵은 누적분의 질문, 나는 작년 가을에도 이 자유소극장의 가동을 보았다(윤푸름 <정지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때도 아무도 춤추지 않았다.

융복합 작품들이 공연예술의 추세가 된지 한참 되었다. 그러니 이젠 물을 일이다. 무용예술(국립현대무용단이라는 무용계 주요 기관이 기획했고 춤 잘 추기로 인정받은 바 있는 무용수들이 연행하였으니 이 작품을 무용예술작품이라 하자)에서 몸과 춤의 지분이 소실되거나 아니면 오늘처럼 아예 소외되거나 탈락되는 것을 그대로 용인해도 좋을까? 안무라 불리든 코레오그래피라 불리든 그것은 춤을혹은 춤으로짓는 작업이다. 춤은 운동이고 그것도 항진된 생명() 현상이다. 본디 종합예술이었던 무용예술이 또 굳이 타 장르 물질들의 운동을 춤적 경지로 섭외하는 것은 물질의 생기와 활력을 구하는 일이고 그것은 타장르들이 몸과 춤을 포섭하는 이유와는 반대급부에 있다. 비인격적인 것들로 치부해왔던 것들을 하나의 몸으로, 춤추는 주체로 의인화하는 그 선택은 동시에 반문화적이고 반문명적인 코드의, 몸으로 춤으로의 귀환이어야 마땅하다.

우리가 우리 자신만의 언어로 마름질한 문명에 대하여 외부대상으로 취급해왔던 사물과 자연의 모호한 강도들을 감지하고 감촉해보려는 시도들의 지향은 인간을 포함한 이 세계 만물이 서로가 서로에게 인과적 영향관계에 놓여있는 동일한 위상의 행위소임을 긍정하는 일이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그 위계를 전복하여 우리 자신을 대상화하거나 도구화해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지 않겠는가.

내 주장들은 인간의 생존과 행복에 대한 나의 관심사와 의지로부터 우러나온다. , 나는 인간의 물질성과 사물의 물질성 사이의 세심한 만남을 추구하는 접근 그리고 더 녹색인 인간 문화를 촉진하고자 한다."  공연 후 예술가와의 대화 시간에 작가 조형준이 영감을 얻었다 밝힌 바 있는 신유물론계의 대표적인 저서 생동하는 물질에서 저자 제인 베넷(Jane Bennett)이 밝힌 자신의 연구와 활동의 방향성이다. 제인 베넷의 사유와 뭎의 작업은 그 결이 나란한 것 같진 않다. 비단 이 작품의 경우가 아니라도 근자에 목격되는 작품들에선 종종 사유의 오독, 본말의 전도를 본다. 해방적 관점의 제기, 관계의 확장 가능성으로 타진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리의 말소, 기술에의 투항, 상품으로의 전락으로 읽히는 몇몇 작품들은 이젠 위해해보이기까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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