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용 다시보기-13] 자신의 춤인생을 눌러 담은 자서전 ‘산조춤’
[신무용 다시보기-13] 자신의 춤인생을 눌러 담은 자서전 ‘산조춤’
  • 황희정 무용이론가
  • 승인 2023.08.07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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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걸 '내 마음의 흐름'사진제공: 김진걸산조춤보존회
김진걸 '내 마음의 흐름' (사진제공=김진걸산조춤보존회)

[더프리뷰=서울] 황희정 무용이론가 = 흔히 '산조'라 약칭하는 산조춤은 산조음악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산조는 장구 반주에 맞추어 한 가지 악기를 연주하는 독주 음악 양식이다. 흩어질 ‘산(散)’과 조화로울 ‘조(調)’가 합쳐져, 가락이 자유로이 유희하며 만나는 모습을 나타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말로 허튼가락에 해당한다. 가야금, 거문고, 아쟁 같은 현악기뿐 아니라 대금, 퉁소, 단소, 피리 등 다양한 악기의 산조가 있다. 전통악기를 사용하니 전통음악으로 생각되지만, 사실 19세기 후반 가야금 독주와 병창으로 이름을 날린 김창조(1856-1919)에 의해 독자적인 틀을 갖게 된 근대음악 양식이다.

본래 단어의 의미대로 산조는 허튼가락에서 출발하여 즉흥적이고 자유분방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로 진행되는 전체적인 짜임과 형식이 존재하지만, 연주자에 따라 변주와 창작성이 가미될 수 있는 표현력 넓은 기악 독주곡이다. 이러한 특성은 산조춤이 등장하면서 그대로 무용에 수용되었다. 무용에서는 산조 기본 4 장단이 들어가지만, 무용가의 개성에 따라 앞뒤에 다른 장단을 덧대기도 한다.

1920년대 산조음악에 한성준이 즉흥무를 추었다고 하나 현재 산조춤의 직접적인 계기는 최승희라 할 수 있다. 최승희는 1931년 5월 1-3일 신작발표회에서 <우리의 카리카튜어>라는 제목으로 가야금 산조에 맞춰 춤추었다. 옛날에 우리들의 할아버지가 즐거워 추던 춤을 만화적으로 무용화한 것을 캐리커처(caricature)로 이름 붙여 공연한 것이다. 가야금 산조음악을 특징으로 내세웠고 작품 설명으로 보아 해학적인 즉흥무적 성격임을 알 수 있다. 1942년 12월 6-20일 동경 제국극장 발표회에서는 처음으로 <산조>라는 제목으로 작품을 올렸다. 가야금 산조에 맞춰 기본 형식인 진양조-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에 휘모리를 덧붙여 추었다. 느린 속도로 시작하여 점차 고조되는 음악에 따라 전개되는 구성이었다. 가야금의 섬세함을 형상화하려 하였다. <우리의 카리카튜어>에 있었던 해학적인 즉흥무는 <산조>에서 섬세한 여성 안무로 성격이 바뀌고 다듬어졌다.

최승희 이후 1950년까지 산조라는 제목의 춤들이 간간이 등장했다. 1949년에는 신무용가 조용자가 시민관 공연에서 산조 신작을 추었다. 이후 1950년대부터는 2세대 신무용가들이 활발히 무용계에 진출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여러 무용가들이 ‘산조’라는 제목으로 작품을 올리면서 산조춤이 한 종목으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권번 출신 예인들도 이에 합세하며 최승희 산조 이후 신무용 계열과 전통춤 계열에서 모두 산조춤이 레퍼토리화되었다.

자신의 춤 인생을 눌러 담은 자서전

 
송범의 '황혼'- 한국무용가 최영숙사진: 박상윤 촬영
송범의 '황혼'(한국무용가 김향금) (c)박상윤

한국전쟁 이후 김진걸, 황무봉, 김문숙, 송범, 김백봉 등 신무용가들을 중심으로 각자 자신의 산조춤을 안무하였다. 신무용가들은 기본적으로 표현주의 현대무용에 경도되어 무용계에 입문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춤에 작가의식을 투영하려 하였다. 산조춤 역시 ‘산조’라는 장단명을 그대로 쓰는 구태의연한 명명 방식보다는 부제를 붙이거나 아예 다른 제목을 붙여 자신의 춤 세계관을 나타냈다. 김진걸의 <내 마음의 흐름>, 김백봉의 <청명심수>, 황무봉의 <잔영>, 송범의 <황혼> 등이 그것이다.

신무용가와 전통무용가들을 통틀어 가장 유명한 산조춤 창작자로는 김진걸을 꼽을 수 있다. 김진걸의 산조춤은 그야말로 ‘산조의 모든 것’이라 할만하다. 그는 1957년 처음 산조춤을 무대에 올리기 시작하여 30분 과정, 8분 과정, 6분 과정의 산조춤을 창작하였다. 제목은 <초혼> <환영을 안고서>를 거쳐 <내 마음의 흐름>으로 정착하였다. <초혼>은 김소월의 시를 읽고 영감을 받아 만들었고, <환영을 안고서>는 남녀의 판타지를 표현하려는 의도에서 안무되었다. 최종작에 해당하는 <내 마음의 흐름>은 춤으로 성숙한 자신을 비추려는 작가적 고뇌가 들어있다. 구성도 1인무, 2인무, 3인무에서 군무까지 무대에 올리며 실험하였으나 최종적으로는 1인무로 자리를 굳혔다. 김진걸 산조는 이와 같은 여러 과정을 거쳐 1970년대에서야 춤사위와 의상을 정형화한 철가야금의 1인무를 대표작으로 고정하였다.

김진걸의 산조는 고해와도 같은 반성적 내용을 담고 있는 자전적 세계관을 압축한 심상이다. 작가의 희로애락과 자신만의 색깔을 한땀 한땀 엮어 만들었다. 산조춤을 향한 그의 끈질긴 노력과 집념은 20년에 걸쳐 그의 인생을 녹인 산조춤을 완성케 했다. 즉, 산조춤은 자신의 춤 인생을 눌러 담은 자서전과 같다. 그의 산조춤은 많은 산조춤 중에서도 가장 모던하다 할 수 있다. 즐거움뿐 아니라 슬픔과 애상을 함께 표현하는 감정의 변화가 다채롭다. 조선춤의 감성이 아닌 표현주의식 자아의 내용을 담고 있다. 동작은 직선적이라는 점이 특징적이다. 팔사위에서 직선이 많이 보이며 몸통의 방향도 정면을 종종 바라본다. 정면에서 측면으로 급격히 바뀌기도 하는 등 전반적으로 남성적인 느낌을 준다. 대부분 오늘날의 산조춤이 사선과 몸의 전시로 ‘선’을 강조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의상은 벨벳을 입고 스팽글을 달아 한복의 바지‧저고리 형태에 서양 천과 장식을 사용하였다.

송범의 <황혼> 역시 자전적 춤 인생을 눌러 담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송범의 업적이 주로 국립무용단 활동에 집중되어 있어 실체가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신무용 산조춤으로 뚜렷한 색깔을 지닌 것 중 하나이다. 박성옥의 철가야금 산조인 <황혼>을 반주로 동명의 제목을 붙였다. 철가야금은 산조가야금에서 개량된 악기로 1950년대 가야금의 현을 금속성 재료로 만든 악기이다. 무용음악 연주가 박성옥이 무용반주 음악에 활용하기 위하여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송범은 1965년 초연 시에는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깊은 연륜을 쌓고 경지에 이른 한 예술가의 노년의 심성을 춤으로 표현하였다. 송범 자신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의상은 노을을 상징하는 주황색으로 그러데이션(gradation)된 실크 치마저고리를 착용하여 현대성을 더했다.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여백의 미

 

정재만의 '청풍명월'- 한국무용가 정송이사진제공: 정송이
정재만의 '청풍명월'(한국무용가 정송이) (사진제공=정송이)

근대적 주제를 담은 몇몇 산조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산조춤은 20세기 중반부터 창작되었음에도 전통춤보다 더 전통춤 같다. 그 이유는 산조춤이 최승희로부터 무대 공연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나 사실은 이전부터 기방에서 산조음악에 이미 입춤이나 즉흥춤으로 추어졌던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최승희도 기녀들에게 이러한 춤을 잠시 배운 적이 있다고 한다. 신무용가들에 이어 강태홍 산조, 추월-최선-이길주의 호남산조춤 같은 각 지방의 권번류 산조춤도 안무를 다듬으며 무대춤으로 재탄생하기 시작했다. 산조춤은 신무용 계열과 전통무 계열 모두에서 작품을 냈으나 현재는 권번의 즉흥적 입춤에서 연원한 산조춤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하지만 전통무 산조춤도 신무용에 고무되어 작품화하였기에 자기 주제를 담고 있다. 전통무용가들은 자신의 인생사를 담는 그릇으로 자신의 산조춤을 만들곤 한다. 전통춤의 이런 자기 주제의식은 신무용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산조춤은 맨손이다. 부채를 들더라도 부채를 펴고 접는 기교에 무심하다. 부채는 선을 강조하고 풍요롭게 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시작은 앉아서 하기도, 서서 하기도 하지만 동작이 전개되는 동안은 뛰거나 바닥에 앉는 동작 없이 시종일관 같은 높이로 구성된다. 선 채로 진행되는 동작은 선을 그리며 우아하게 무대 위를 움직인다. 움직임 사이사이 자잘한 멈춤은 몸을 전시하며 관객에게 동작을 각인시킨다. 전통춤이 바닥과 교감하며 종종 바닥을 향해 몸짓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황병기는 산조의 미의식 네 가지 중 첫째로 선(線)의 미를 꼽았다. 산조는 화음을 배제하고 전곡을 하나의 음선으로 전개하면서 철저히 선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고 했다. 산조춤 역시 마찬가지이다. 여성 홀춤 산조에서 특히 강조된다. 산조춤의 대표적 형태는 홀춤이라 할 수 있다. 혼자 무대에 선을 그리는 과정은 마치 한 폭의 동양화, 그중에서도 난(蘭)을 완성시키는 과정과 같다. 선으로 이루어지는 산조춤은 여백을 가로지르며 여백을 그림으로 품는 난을 연상시킨다. 동양화에서 선이 동양적 요소이므로 선의 산조춤을 전통적이라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선은 여성 신무용에서 두드러지는 특징 중 하나이다. 산조춤의 전통적인 여백미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지극히 서구적인 요소에 기반한 것이다. 

신무용가 황무봉이 남성임에도 산조춤에서 여성성을 강조한 것은 선으로 이루어내는 여백의 미와 상통한다. 그는 제목과 구성에서 다양성을 주며 지속적으로 산조춤을 재구성하여 그의 주요 레퍼토리로 삼았다. <묵화>(1962), <정금에 담은 여인상>(1968), <목련화>(1974), <잔영>(1975), <황진이>(1980)는 ‘황무봉류 산조’의 5대 작품이라 불린다. 김진걸의 산조가 남성적이고 직선적이라면, 황무봉의 산조는 여성의 섬세함과 부드러움이 담긴 작품이다. 특히 <잔영>의 경우 성금련류 가야금 산조가 박성옥의 철가야금으로 재탄생되면서 춤 움직임 또한 더욱 여성성이 강조되었다. 이로써 산조춤은 춤으로 옮겨진 한 폭의 동양화, 그 자체가 된다.

형태미와 조형미

윤미라의 '저 꽃 저 물빛'사진: 박상윤 촬영
윤미라의 '저 꽃 저 물빛' (c) 박상윤

산조춤의 미적 특징으로는 형태미와 조형미를 꼽는다. 발레와 같은 정도는 아니지만 선의 원형적 흐름과 끊기지 않는 유동성을 특징으로 하는 전통춤에 비하면, 권번류와 전통무용가들의 산조춤 역시 몸을 전시하는 형태미와 조형미가 있으며 흉부와 시선이 위로 향한다. 형태미와 조형미, 그리고 위로 향하는 시선 처리는 춤이 무대화, 즉 근대화되는 과정에서 운명적으로 따라오는 속성이기도 하다.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무용수의 춤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객석에 몸을 열고 부피가 큰 열린 포즈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형태미와 조형미는 산조춤이 이제 즉흥성보다는 정교함을 요구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유파를 형성한 산조춤은 유파별 일정한 차별성을 가지고 전승되고 있다. 산조춤은 유파별로 세밀하게 조탁되었다. 그 틀 안에서 산조는 자유분방함을 가진다. 전통무 계열의 산조춤에서는 무용수의 개인적 심상을 담는 것이 필수적이다. 마냥 즐거운 것도, 마냥 슬픈 것도 아닌 인생의 희로애락이 골고루 안배되어 있다. 무용수 자신의 인생사를 새긴다. 이 무수한 개성이 형태미와 조형미로 통제되는 것을 따라가며 감상하는 것이 산조춤의 묘미이다.

이현주의 '산조'(대금산조)사진제공: 이현주
이현주의 '산조'(대금산조) (사진제공=이현주)

산조춤은 산조음악과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하는 만큼 초반에는 음악과 동명의 제목을 붙였다. 하지만 1980년대 후반부터 점차 ‘산조춤’으로 구분하기 시작하였다. 시나위, 굿거리, 살풀이 등 장단명을 작품명으로 그대로 사용하던 관행에서 점차 벗어나는 시류에 합류하여 ‘춤’자를 붙인 것이다. 산조춤은 한국무용의 한 종목이지만 살풀이춤이나 태평무처럼 ‘산조춤’으로만 제목을 붙이지 않는다. 산조춤은 종목을 나타낼 뿐 여러 부제나 아예 다른 제목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권번류 산조춤은 제목이 일률적이지만 주로 신무용 계열에서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제목이 다르더라도 일단의 춤을 산조춤이라 부르는 이유는 산조음악을 사용한다는 근본적인 이유 외에도 자전적 이야기, 대상에 대한 감흥, 동양화 같은 여백의 미, 형태미와 조형미라는 공통점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산조춤은 지극히 전통처럼 보이지만 그 면면을 보면 지독히 모던하다. 모던함으로 인해 현대적 전통미를 갖는다. 산조춤만큼 시대상을 반영하는 춤도 드물 것이다. 2000년 이후에도 꾸준히 새로운 조류의 산조춤이 창조되고 있다. 정은혜 <새가락별무>(2003), 윤미라 <저 꽃 저 물빛>(2007), 정재만 <청풍명월>(2007), 손경순 <다스름>(2011) 등이 작가적 제목을 가진 21세기 산조춤이 될 수 있다. 현재도 창작되고 있는 산조춤은 그 무용가의 인생과 예술관의 압축본이다. 새로운 심상을 담은 산조춤은 신전통을 창조하고 있다. 악기도 가야금에서 벗어나 거문고, 대금 등으로 다양해지고 있다. 현재는 전통으로 쏠려 있는 산조춤이지만, 자기 고뇌와 반성적 내용을 담은 신무용 산조춤도 더욱 풍성해지길 기대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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