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용 다시보기-14] 나이를 비껴간 변신, 미소년이 연기하는 '초립동'과 조혼문화
[신무용 다시보기-14] 나이를 비껴간 변신, 미소년이 연기하는 '초립동'과 조혼문화
  • 이정민 무용이론가
  • 승인 2023.08.14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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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프리뷰=서울] 이정민 무용이론가 = <초립동>을 아시나요.

<초립동>은 결혼을 앞둔 어린 신랑의 캐릭터를 유쾌하게 풀어낸, 최승희의 신무용 작품 중 하나이다. 이 춤은 “초립을 머리에 씌우고 두루마기와 버선 차림의 화려한 의상을 입은 결혼을 앞둔 소년이 결혼이란 뜻도 모르고 주변의 축하 분위기 속에서 뛰노는 모습”(「최승희 탄생 100주년 기념 전설의 무희 최승희의 예술세계」, 37쪽)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작품 설명은 오늘의 시선에서 의아하다. ‘결혼을 앞둔’ 사람이 성인이 아닌 미성년자로, 어린 사내아이를 지칭하는 ‘소년’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결혼이 뭔지도 모른 채 기뻐 춤춘다는 내용 또한 인물을 다소 무지한 캐릭터로 비추고 있다. <초립동>은 어리지만 어른이 되어감에 기대에 부푼, 순수한 소년의 마음을 투영한 춤인가? 아니면 희화화된 소년을 통해 조혼의 문제점을 꼬집고 있는가? 어떻게 해석하든 이 춤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작품이 탄생한 시대 문화와 안무 배경을 추적할 필요가 있다.

최승희의 결혼, 그리고 안무가로의 성장

세계 제일의 무용가가 되고 싶었던 최승희의 곁에서 그녀를 성장시킨 주역은 남편 안막이었다. 안막은 공연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재정적 후원자를 물색하고 극장을 마련하는 등 모든 공연의 대소사를 챙기며 그녀가 세계적인 무용가로 성장하는 데 조력을 아끼지 않았던 인생의 동반자였다.

최승희는 이시이바쿠연구소에서 수련을 마치고 독자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던 스무 살의 봄, 안막과 부부의 연을 맺는다. 그는 결혼 비용을 최승희의 무용연구소의 운영비로 쓰고 작은 결혼식을 제안할 정도로, 결혼 전부터 이미 그녀의 예술활동에 적극적인 도움을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자신도 일본 와세다대학 노문과를 다닌 지식인이었고 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었으나, 결혼 후 이시이 바쿠와 주변인들이 최승희의 춤을 위해 문단에 나서지 말 것을 조언하자 자신의 활동을 접고 아내를 지원하는 데에 전념하였다.

사진1. 1931년 5월 9일 서울 청량리의 음식점 ‘청량원’에서 최승희와 안막의 결혼식 모습(출처: 정병호. 『춤추는 최승희』. 1995. 64쪽)
사진1. 1931년 5월 9일 서울 청량리의 음식점 청량원에서 열린 최승희와 안막의 결혼식 모습 (출처: 정병호, 『춤추는 최승희』, 1995, 64쪽)

안막의 영향으로 최승희의 작품은 점차 대중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정병호는 최승희의 안무에 그의 사상이 큰 밑거름이 되었고, 최승희가 <자유인의 춤> <미래는 청년의 것이다> 등을 안무한 것이 부부가 생각해낸 독립운동의 한 방편이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해외 순회공연을 구상하며 그녀는 조선사회의 면면에 관심을 가지고 조선인의 일상을 안무의 소재로 삼았고, 시대를 살아낸 소시민의 모습을 춤에 담았다. <초립동>은 그 중 조혼 풍습을 포착한 결과로 탄생한 작품이었다.

조혼(早婚) 문화를 춤으로

과거 조선사회의 풍속에는 조혼(早婚)의 관습이 있었다. 이는 혼인이 무엇인지 모르는 어린아이들이 부모의 뜻에 따라 결혼하게 되는, 즉 혼인할 수 있는 일정 나이에 이르기 전에 이루어지는 혼인이었다. 1908년 「가정잡지」에 실린 리경숙의 글에는 당시 남녀의 혼인 나이가 언급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혼인하는 법이 남자는 십이삼세요, 여자는 십칠팔세면 혼인하는 보통 시기라. 아내가 남편보다 삼사세 혹은 사오세를 더함은 예상사다”라고 하여 열 살 초반의 어린 소년이 결혼하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혼이 성행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수명과 관계가 깊다. 1900년대 한국 남자의 평균수명은 22.6세, 여자의 평균수명이 24.4세에 불과하였다(김경일, ‘일제하 조혼 문제에 대한 연구’, 2007). 이에 조상의 대를 잇는 유교적 전통을 사수하기 위해서는 일찍 혼인하여 자식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혼 풍습은 평균수명이 높은 서구사회를 기준으로 ‘조혼’으로 명명되었고, 근대 지식인들의 반봉건 운동에서 주요한 쟁점이자 근절되어야 할 악습으로 치부되었다. <초립동>이 초연된 1937년의 언론 기사를 살펴보면, 조혼을 폐풍(弊風)이라 단정하였고, 조혼이 집에 불을 지르거나 남편을 살해하는 조선 여인의 범죄를 조장한다면서 부정적인 의견을 제기하고 있다.

최승희와 안막이 조혼 관습에 대해 당시 언론인, 지식인들과 동행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밝혔는지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안막이 자신의 문학운동을 내려놓고 아내의 예술에 매진하였기에, 자신의 신념과 사회관을 그녀의 예술에 투영했을 것이란 짐작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최승희 또한 신여성이자 엘리트 예술가로서 계몽운동의 주제로 논의되었던 조혼에 관심을 기울이고, 풍자의 의도를 담아 춤으로 풀어내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기록이 남긴 최승희의 <초립동>

조혼에 대한 사회의 비판 담론과는 별개로 최승희의 <초립동>은 낭만적이고 쾌활하며 희극적인 작품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새신랑’ 또는 ‘꼬마 신랑’이라는 작품명을 달고 일본을 넘어 미국, 유럽 등지를 돌며 활발히 공연되었다. 공연을 본 관객들은 최승희가 표현하는 미소년의 모습에 매료되었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벨기에 공연에서 제일 갈채를 받은 작품 또한 <초립동>이었다.

특히 소품인 모자는 최승희의 파리 살 플레옐 극장 공연 이후로 파리의 여인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최승희는 제자 김백봉에게 “프랑스는 이상하다. 내가 초립동 춤을 추고 난지 일주일 만에 파리 전체에 그 초립동 모자가 퍼지더라. 그만큼 유행에 민감한 곳이란다.”라고 이야기했다(정수웅, 『최승희, 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어느 무용가의 생애와 예술』, 2004, 26쪽). 파리 고동필름센터에 당시의 패션 필름이 소장되어 있는데 “여성용 새로운 모자가 지금 막 유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생 시프라는 모자 디자이너가 초립동 모자를 처음 도입했는데, 파리 여성들을 더욱 사랑스럽게 보이게 합니다.”라는 멘트가 등장한다고 한다.

월북 이후에도 최승희는 <초립동>을 놓지 않았다. 1947년 신의주에서 열린 북한 최승희무용연구소 첫 공연의 종목으로, 그리고 1949년 북경에서의 조선예술단 공연에서도 이 춤을 직접 추었다. <초립동>은 1950년 소련방문예술단의 공연에서도 공연된, 최승희 무용연구소의 대표 작품 중 하나였다.

원작이 사라진 후, 오늘의 <초립동>

최승희의 <초립동>이 어떤 춤이었는지는 우리는 짐작만 할 수 있다. 그녀의 공연 영상이 아직 공개 혹은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쉬운 대로 아래 사진 2와 같이 발을 힘껏 차올리며 활짝 웃음 짓는 미소년의 사진이 <초립동>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전해진다. 발끝으로 지지하며 발을 높이 찬 모습은 발레의 바뜨망을 연상케 하고, 허리를 객석 방향으로 비틀고 두루마기 모서리를 잡은 두 팔을 양옆으로 크게 펴서 뒷자락을 하늘로 날린 모습은 동작의 역동성을 느끼게 한다. 두건을 맨 머리에 쓴 앙증맞은 모자, 이에 걸맞은 화사한 눈매와 시원한 웃음에 경쾌한 춤사위를 덧입혀보지만, 모두 상상 속의 움직임일 뿐이다.

사진2. 최승희의 '초립동' 포즈(출처: 정수웅. 『최승희, 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어느 무용가의 생애와 예술』. 2004. 25쪽)
사진2. 최승희의 '초립동' 한 장면 (출처: 정수웅, 『최승희, 격동의 시대를 살다간 어느 무용가의 생애와 예술』, 2004, 25쪽)

오늘의 <초립동>은 원작의 희극성과 유쾌함을 이어가고 있다. 몇 안 되는 공연 영상과 공연 프로그램의 작품 설명이 이를 근거한다. 1996년 서울예술단 창단 10주년 기념공연으로 개최된 <최승희, 어제와 오늘>에서 최승희의 수제자였던 김백봉에 의해 복원된 <초립동>(춤 양성옥)은 “혼인의 기쁨에 넘친 천진난만한” 소년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으로 소개되었다. 마찬가지로 2011년 제1회 <한국 명작무 대제전>에서 김백봉이 재안무한 <초립동>(춤 안귀호) 또한 어린 총각의 “새색시가 온다고 뛰는 기쁜 마음”과 “부끄러움과 웃음의 동심 세계”를 표현하는 작품으로 설명되었다.

 

사진 3. 양성옥의 '초립동' 공연 모습(사진 제공 양성옥)
사진 3. 양성옥의 '초립동' 공연 모습 (사진제공=양성옥)

양성옥의 <초립동>은 최승희의 초립, 두루마기, 저고리와 바지 등 원작 이미지와 외형적으로 매우 닮아 있다. 춤의 전개는 다음과 같다. 으쓱거리며 뒷짐을 진 채로 무대 좌우를 성큼성큼 횡단한다. 상체를 뒤로 젖히고 앞으로 발을 크게 디디는 폼에서 이 춤이 어른인 척하는 어린아이의 과장된 연기임을 상기시킨다. 아이는 밀양아리랑의 타령 장단에 맞춰 팔짝팔짝 뛰어다닌다. 고개를 옆으로 까닥까닥,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와 하고 입을 벌리고, 발을 머리 위까지 차올리고, 두 손과 두 발을 바닥에 둥둥 구르는 등 잔뜩 신이 나 있다. 춤의 하이라이트는 두루마기를 양손에 잡고 뒤집어 진분홍색 속 면이 드러나게 머리와 어깨를 덮어쓴 동작이다. 두루마기를 뒤집어 덮고 고개를 까닥거리며 앞으로 발을 차올렸다 뒤꿈치를 찍는 자세는 늠름함을 강조한다. 표정의 변화도 춤의 묘미이다. 활짝 웃었다가, 찌푸렸다가, 신부를 기다리는 듯 애태우다가, 무표정이었다가, 웃으며 다시 흥을 내는 다채로운 감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춤이 끝나고 아이는 뒷짐을 진채 걸어 나간다.

비슷한 시기 조총련계 재일동포 무용가 백향주에 의해 <초립동>이 무대에 오른 바 있다. 북한을 찾아 평양 만수대예술단 안무자이며 최승희의 제자였던 김해춘에게 직접 최승희의 춤을 사사했다고 한다. 춤의 내용은 원작과 동일한 반면 춤 동작은 앞선 양성옥의 것과 사뭇 차이를 보이는데, 백향주는 자신의 춤을 “최승희 춤을 바탕으로 북한에서 발전시킨 것”(동아일보, 1998년 6월 23일)이라고 밝힌 바 있다. 상체를 뒤로 젖혀서 시상축의 앞뒤 폭을 확장하여 춤을 추는 방식, 고개를 앞으로 쑥 내밀었다가 넣는 제스쳐, 상체를 좌우로 틀어 두루마기를 흔들며 걷는 동작, 바지춤에 찬 복주머니를 돌리는 동작, 제자리에서의 빠른 회전이 독특한 인상을 준다. 양성옥과 백향주의 춤은 각자의 춤 해석력과 개성이 가미된 <초립동>의 시대적 전형이라 할 수 있다.

사진 4. 백향주의 '초립동' 공연 모습 (출처: ArtsKoreaTV, https://youtu.be/iznY1-5SFLs)
사진 3. 양성옥의 '초립동' 공연 모습 (사진제공=양성옥)

한편, 2005년 임이조 전통춤전수원의 발표회 <학선유풍>에서는 전황이 1950년에 최승희의 딸 안성희에게 배워서 추었다고 하는 <초립동>(춤 임현종)이 무대에 올랐다. 그런데 작품의 내용이 다르다. 공연 프로그램에 따르면 “어린 초립동이의 하루를 묘사한 것인데 초립동이 서당에 갔다가 훈장에게 꾸중을 맞고 돌아오는 길에 일어나는 재롱과 익살을 무용화해 본 작품”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를 통해 안성희에 의해 재구성된 <초립동>은 혼인의 스토리를 덜어내고, 소년의 나이에 맞는 이야기와 감정으로 극적 구성이 변모하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작품이 탄생한 문화적 배경과 사회에 대한 일단의 고찰과 이해는 작품을 깊이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최승희와 안막을 하나의 예술적 울타리 속에서 들여다보며, 밝고 명랑했던 정서 이면의 메시지가 무엇이었을까를 추론해보는 것은 작품을 더욱 신비롭고 흥미롭게 만든다. 최승희는 여성의 몸으로 소년의 캐릭터로 변모하여 춤추는 몸을 타자화하였다. 그녀가 <초립동>을 통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우리는 관객을 희롱하는 쾌활한 소년의 모습에 허허 웃고 말아버릴 수도 있고, 그 춤의 이면에 담긴 조선 관습에 대한 암묵적 비판에 잠시 멈춰 생각할 수도 있겠다. 더 나아가 어른이라는 권위적 계층에 의해 주도된 축제 분위기 속에서 순수하게 웃음꽃을 피우는 소년의 모습에서 일제강점기라는 식민지 치하의 시기에 휩쓸리는 가운데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는 소시민의 비애를 비추어보는 관객도 있겠다. 모든 감상과 해석은 관객의 몫이며, <초립동>을 살아 숨쉬게 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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