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키워드로 다시 읽는 춤공연-4] 국립현대무용단 '몸쓰다'
[철학 키워드로 다시 읽는 춤공연-4] 국립현대무용단 '몸쓰다'
  • 최찬열 무용평론가
  • 승인 2023.08.21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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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행적 공간과 사건의 장을 창출하는 춤공연

[더프리뷰=서울] 최찬열 무용평론가 = 공연은 무대 위에 하나의 세계를 세운다. 그런데 이 세계는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는 그곳에 속한 퍼포머와 관객을 포함한 모든 ‘~체(體, body)’의 상호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현상적 세계이다. 그리고 여기서 퍼포머와 관객은 이 세계를 대상화하는 순수한 의식적 존재자가 아니다. 외려 그들은 몸과 행위를 통해 능동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이 세계를 의미 있는 것으로 구성하는 몸-주체이다. 하나의 세계는 의식이 아니라 몸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경험을 통해 성립하고, 이때 세계는 ‘인식’되기보다는 현실로 ‘체험’된다는 말이다. 국립현대무용단의 <몸쓰다> 초연(2022년 4월 1-3일,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무대는 하나의 세계와 그곳에 속한 존재자 혹은 ‘~체’의 이러한 관계를 장면화하면서 각종 ‘체’들의 운동을 통해 생성 변화하는 무대 자체(세계)를 전경화한 공연이었다.

국립현대무용단 ⓒAiden Hwang
국립현대무용단 '몸쓰다' ⓒAiden Hwang

불빛이 번쩍하며 어두컴컴한 무대가 갑자기 환해지면, 본무대 뒤쪽 중앙에 남성 퍼포머 한 명이 객석 쪽으로 등을 보인 채 서서 두리번거리다가 허공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뒤에, 그러니까 그보다 객석과 더 가까운 곳에 검은 조명기 한 대가 오브제처럼 덩그러니 놓여 있다. 소형 로봇처럼 보이기도 하는 물체이다. 또 보통과는 다르게 본무대 양옆과 뒤, 삼면을 감싸는 하늘-막과 다리-막은 보이지 않고, 일반적 공연 상황에서는 좀체 드러나지 않는 본무대 뒷공간 전체가 관객에게 온전히 노출돼 보인다. 퍼포머의 신체보다, 조명기라는 물체보다, 그것들이 속한 무대라는 장소가 더 두드러져 보인다는 말이다. 숨김없이 제 모습을 드러낸 생경하면서도 낯선 무대 공간이 그곳에 있는 퍼포머보다, 또 조명기보다 더 강하게 어필되는 도입부 장면이다.

전체 무대는 두 부분으로 구획되어 있다. 앞쪽의 본무대와 비슷한 크기의 다른 무대가 그 뒤쪽에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거기서 뒷모습만 보인 퍼포머가 주어진 상황에 반응하듯 팔과 다리를 가볍게 움직이다가 당황한 사람처럼 뒷걸음질 친다. 그렇게 객석 쪽으로 다가왔다가 다시 뒤쪽으로 들어가기를 반복하던 그가 무대 맨 앞에서 두 손을 옆으로 벌린 채 무대 상황을 주시하면, 무대 양옆에서 다른 퍼포머들이 연이어 등장한다. 그들은 다 같이 손을 펴 거울처럼 보다가 머릿결을 쓰다듬고, 손으로 허공에 글을 쓰는 듯한 행위를 한다. 또 손바닥을 마주쳐 소리를 내고, 무심코 자기 엉덩이를 손으로 주물럭거리기도 한다. 같은 상황에 속한 까닭일까, 그들의 동작은 한결같아 보인다. 신체는 이미 언제나 특정한 상황에 놓여 있고, 그 상황에 근거하거나 말미암아 신체에 행위 도식이 새겨진다는 의미일 것이다.

국립현대무용단 ⓒAiden Hwang
국립현대무용단 '몸쓰다' ⓒAiden Hwang

비슷한 행동을 하는 그들을 무대 앞에서 바라보던 한 퍼포머가 다음에는 무대 오른쪽 모서리로 자리를 옮겨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다. 그는 그 상황에서 빠져나와 관객처럼 그것을 지켜보는 것이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그들을 보는 그는 관객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할 것이다. 이어서 경쾌하면서도 둔탁한 타악기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분위기는 반전되고, 무대 위 퍼포머들은 각자 다른 동작으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들의 움직임은 춤이라기보다 일견 일상의 도식적인 행위 같고, 혹은 자유롭게 노는 동작 같다.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지만, 상황에 순응했다가 또 거기에서 벗어나기를 반복하는 움직임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이러한 광경을 무대 오른쪽 모서리에서 유심히 지켜보던 퍼포머가 다시 본무대를 가로질러 그 뒤쪽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는 무대 뒤와 맨 앞 그리고 모서리에 차례로 있다가 다시 그 뒤로 가는 등 여러 자리에서 관점을 달리하며 무대 상황을 지켜보는 것이다. 그런데 프로그램 북에 실린 말은 인용해 보면, “세계와 관계하는 몸에는 변형이 일어나고 있고, 몸의 변형은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며 “본다는 것은 현재 있는 바로서의 나로부터 되어질 바로서의 나로 이행한다.” 곧 상황에 속한 몸들이 그것에 반응하며 변형될 뿐만 아니라, 본다는 것이 생성 혹은 되기라는 뜻이다. 이를테면 안무가 안애순은 이 공연에서 상황에 속한 몸이 거기에 전적으로 순응하며 가공되고 형태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봄’이라는 행위를 통해 끊임없는 되어감 속에 존재하며 새롭게 생성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메를로-퐁티의 말에 따르면 ‘봄’은 몸과 세계와의 단순한 만남 이상의 접촉이며, 보는 자를 보이는 것 안으로 끌어넣는 것으로, 이를 통해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동일한 존재양식을 기반으로 얽혀 있는 키아즘(chiasm)적 존재임을 알려주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모든 상황을 ‘보고’ 있는 관객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른바 공연을 ‘본다’는 것은 거리를 둔 채 의미를 발견하는 관조행위가 아니라, 나의 몸을 공연 한가운데 놓으면서 의미를 생성시키는 사건에 참여하는 것이다. 곧 의미는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다. 기실 동시대 공연에서 공연에 선행하는 차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공연의 소통구조가 변화했다는 말이다. 곧 공연을 보는 체험은 사건의 시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기에 관객이 공연을 경험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시되고, 퍼포머와 관객이 지금-여기에서 공동 현존하며, 함께 생성의 장을 구축하는 사건적 상황이 공연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국립현대무용단 ⓒAiden Hwang
국립현대무용단 '몸쓰다' ⓒAiden Hwang

이는 공연의 제목 <몸쓰다>라는 제목이 강조하는 바이기도 하다. ‘몸쓰다’라는 말은 중의적 의미를 담고 있다. 곧 ‘쓰다’는 ‘Using’과 ‘Writing’, 두 말로 번역이 가능하다. 국립현대무용단 블로그에서 볼 수 있는 안무가의 인터뷰에 따르면 “‘쓰다’는 ‘사용한다’와 ‘기록한다’는 의미를 모두 갖는데 ‘몸’이 각자의 경험, 역사 시간을 기록하고 이를 사용하여 새로운 상상을 펼쳐 나간다는 의미”이다. 곧 몸은 수동성과 능동성을 동시에 함축하며, ‘쓰다’의 의미가 전자일 경우 몸은 도구처럼 무언가를 하기 위한 매체에 불과할 뿐이지만, 후자일 경우 몸은 그 자체로 수행적 주체가 된다. 곧 몸-주체의 수행적 행위는 필연적으로 생성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몸쓰다’라는 말은 몸의 두 측면을 동시에 가리키고, 이 중 언제나 이미 무엇인가를 향하는 몸-주체의 지향적 존재함이란 바로 끊임없는 되기의 과정이고 변화이다. 따라서 몸은 상황에 그저 던져진 채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되어가는 것이다. 이것은 보통의 공연에서 소용되는 몸에 대한 통념과는 반대된다. 곧 일반적인 공연에서 퍼포머의 몸은 재현의 도구이거나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기호처럼 사용되지만, <몸쓰다>에서 몸은 되기의 과정을 지속하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유기체로 보인다. 다시 안무가의 말을 인용하면, 이런 수행적 몸이 새로운 “시공간과 만나고 이를 파괴하고 재구축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 게 이 공연의 콘셉트이다. 말하자면 안애순은 몸뿐만 아니라 몸이 속한 장소도 탈-구축하는 퍼포머의 수행적 실천을 통해 공연 공간을 생성의 공간으로 만들고자 하는 의도를 내보인 것이다.

국립현대무용단 ⓒAiden Hwang
국립현대무용단 '몸쓰다' ⓒAiden Hwang

그래서일까, 공연 내내 극장이라는 한 세계에 속한 모든 ‘체’들의 운동이 시시각각 번갈아 가며 일어난다. 움직임을 이어가던 퍼포머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각자의 자리에 가만히 서면 무대 메커니즘이 본격적으로 작동하며 극장에 속한 각종 물체가 운동하기 시작한다. 회전무대가 돌아가면서 동시에 본무대가 뒤로 미끄러져 들어가고, 그와 함께 무대 바닥에 깔려 있던 조명기는 빛을 발사하며 존재감을 드러낸다. 또 무대 천장에서는 조명 바텐이 일제히 내려오는데, 그것들은 무대 바닥 가까이 내려와 가지런하게 배열되더니 때로는 순차적으로 혹은 들쑥날쑥 올라갔다 내려오는 운동을 몇 번 반복한다. 묵직한 조명기가 주렁주렁 매달린 바텐의 상하운동은 장엄한 분위기마저 자아낸다. 그러다 무대 앞에서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한 퍼포머가 무대 뒤로 걸어가 옆으로 퇴장하면, 다시 본무대가 미끄러지듯 앞으로 밀려 나온다. 그러면 이제 그 위에서 두 팔을 벌린 채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질서정연하게 누워있던 퍼포머들이 운동하기 시작한다. 차례로 머리만 살짝 들어 객석을 바라보다가 다리를 옆으로 비틀어 움직이며 뒤척이고, 서서히 일어나더니 다시 눕고, 또 두 팔을 벌리고 발끝으로 비틀비틀하며 간신히 섰다가, 무대 바닥에 팔꿈치를 붙이고 비스듬히 누운 채 객석을 응시하며 무대 앞쪽으로 기어서 나오는 등 일련의 동작을 이어가는 그들을 서치 라이트가 탐색하듯 연신 훑으며 지나간다. 말하자면 퍼포머의 신체와 조명기, 무대와 조명 바텐, 그리고 빛과 음악, 음향, 막 등 운동하는 모든 ‘체’들이 조화롭게 협력하며 미장센을 구축하는 형국이다.

국립현대무용단 ⓒAiden Hwang
국립현대무용단 '몸쓰다' ⓒAiden Hwang

그러다 어떤 장면에서는 운동하는 퍼포머의 몸이 강조돼 보인다. 곧 무대 중앙에 발을 모으고 원형을 이룬 채 가지런히 누운 그들이 동시에 고개를 들어 서로를 응시한 후 일제히 몸통을 옆으로 뒤척여 일어나 앉더니 다시 흩어져 눕고, 두 팔을 양옆으로 벌린 채 까치발을 하고 비틀비틀하며 일어선 다음 갑자기 머리를 바닥에 대며 뒹굴고, 등을 바닥에 댄 채 꿈틀꿈틀하며 이동하다가 손에 손을 맞잡고 몸통을 펄떡거리고, 단번에 몸통을 뒤집어 두 팔을 바닥에 지탱한 채 엎드리기도 한다. 또 손을 부들부들 떨며 자기 몸통 여기저기 두드리다가 머리를 긁적이고, 부들부들 떨거나 폴짝폴짝 뛰다가 물구나무서기도 하고, 다른 이를 부여안고 대성통곡하듯 울부짖기도 하는 등 지속하는 순간순간의 움직임을 매번 새롭게 이행하는 퍼포머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통해 각각의 계기마다 실존을 표현하며 다른 존재자로 변하고자 하는 이들처럼 보인다. 또 갑자기 발작하듯 몸을 움찔거리기도 하고 다른 이를 건드리고 간지럽히면서 관계를 맺다가 서로 기대거나 손이나 발을 잡은 채 몸을 이어서 하나의 선을 만드는 등, 지금-여기에서 시시각각 발생해 지금-여기의 관객에게 곧바로 지각되는 움직임은 일종의 실제 행동처럼 체험되는데, 돌발적으로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이러한 움직임은 곧 현재성의 출현인 동시에 사라짐일 것이다. 또 맥락이 없는 듯한 이런 단속적인 움직임을 현행적으로 수행하는 퍼포머의 몸은 기호적 몸이 아니라 현상적 몸에 가까울 것이다.

국립현대무용단 ⓒAiden Hwang
국립현대무용단 '몸쓰다' ⓒAiden Hwang

주지하듯 동시대 춤공연에서는 춤을 구성하는 수단들의 사용 방식이 변화하고 있다. 곧 전적으로 춤에만 의지하던 기존의 공연과 다르게 무대 장치, 조명, 의상, 음악과 음향뿐만 아니라, 극장 메커니즘과 극장이라는 공간 자체도 공연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각각의 춤적 수단이 가진 물질성 자체가 독립적이면서 자율적인 미적 경험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각각의 춤적 수단이 가진 고유한 질감 자체가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연들에서 춤적 수단들은 단순한 매체나 도구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다. 곧 동시대 춤공연에서 이들은 재현의 도구이기를 거부하고 현시 자체를 강조한다.

국립현대무용단 ⓒAiden Hwang
국립현대무용단 '몸쓰다' ⓒAiden Hwang
국립현대무용단 ⓒAiden Hwang
국립현대무용단 '몸쓰다' ⓒAiden Hwang

이어지는 장면들에서 이러한 경향은 더 극대화되어 나타난다. 곧 무대는 더 활발하게 운동하고 수행적 몸들은 파편적이고 불연속적인 움직임을 래디컬하게 현시하며 자신들의 물질성과 현존을 드러낸다. 본무대가 다시 미끄러지듯 밀려서 뒤로 들어가고, 동시에 무대 왼쪽 옆에서 본무대 반 크기의 다른 무대가 미끄러져 들어온다. 무대 뒤쪽으로 밀려들어간 검은 바탕의 본무대와 대비되는 하얀 바탕의 무대이다. 그리고 그 위에서 두 명의 남성 퍼포머가 달 표면을 거니는 우주인처럼 무대 여기저기를 오가고, 몸통을 휙휙 돌리며 높이 뛰는 등 활기찬 동작을 하는 동안 본무대 반 크기의 다른 무대가 미끄러져 들어오고, 그와 동시에 무대 좌우와 뒤, 삼면을 감싸는 반투명 배경 막이 천장에서 내려왔다 올라가기도 한다. 그리고 무대 전면에 액자 같은 큰 틀이 내려온다. 배경 막의 수직 운동과 무대의 수평 운동, 그리고 조명 빛의 운동과 퍼포머의 역동적인 움직임 등 존재론적으로 동등한 여러 ‘~체(體)’의 운동이 동시다발적으로 펼쳐지는 이러한 일련의 장면은 그 무엇보다도 극장이라는 장소성을 전경화한다. 그럼으로써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수행적 공간이다. 이 공연의 주인공이 퍼포머가 아니라 극장 메커니즘인 것으로 보이는 이유이다.

국립현대무용단 ⓒAiden Hwang
국립현대무용단 '몸쓰다' ⓒAiden Hwang

장소는 단순히 ‘공간’ 혹은 ‘자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장소는 이들과 다르다. 장소란 궁극적으로 거기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그곳을 채우고 있는 움직임과 행위, 감정, 분위기, 의미 등과 상관적이다. 장소는 자리 혹은 공간과 각종 ‘체’와 코드, 그리고 분위기, 의미, 감정 등을 모두 아우르는 터이다. 그리고 공연은 이러한 터 위에서 이루어진다. 공연은 반드시 어떤 ‘장소’를 기초로 성립한다는 말이다. 예컨대 공연은 일정한 무대, 기기와 오브제들의 배치를 요구하며, 여러 극장 메커니즘 장치들의 세심한 연결을 동반하기도 하고, 또 눈에 보이지 않지만 어떤 일정한 코드들이 작동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진다. 퍼포머와 오브제 등 각종 ‘체’와 코드가 일정하게 배치되어야만 공연이 가능하다. 그러기에 공연의 장소성이란 그것이 일어나는 공간과 동일하지 않다. 그것은 공연 전이나 후에 존재하지 않고 공연 중에, 공연을 통해서 존재한다. 각종 ‘체’와 관객, 운동과 지각 사이의 관계를 조직하고 구조화하는 특별한 가능성이 열려 있고, 이때 이러한 가능성이 어떻게 현실화하는가에 따라 공간의 성격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장소란 일차적으로는 공간이지만 그것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시간이다. 장소에서는 각종 ‘체’와 사물, 동작, 감정, 의미 등이 조화로운 춤을 추는데, 그러다 이들이 그곳에서 싹 빠져나가면 이제 그 장소는 단순한 어떤 공간 혹은 자리로 화한다. 기하학적 공간이 이런 공간이다. 이렇게 장소란 어떤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계속 변해가는 시간의 내용에 따라 그 내용, 의미, 분위기가 바뀌어 가는 독특한 성격을 가진다. 에리카 피셔-리히테(Erika Fischer-Lichte)는 이러한 성격을 가지는 공연 공간을 일러 ‘수행적 공간’이라고 말한다. 공연 장소란 그 자체 일종의 생명‘체’와도 같고 시간적 내용의 변화에 따라 그 자체로 생성 변화해 간다는 의미이다. 각종 ‘체’와 무대, 그리고 무대 장치와 조명 빛, 소리와 음향의 울림에서 오는 모든 운동이 이 공간을 변화시킨다. 그러기에 이 공간은 준-안정적이며 끊임없이 요동친다. 공연의 장소성은 공간 속에서, 그리고 그 공간을 통해서 수행적으로 생성된다. 따라서 수행적 공간은 사건의 성격을 띤다. 수행적 공간은 곧 사건의 장인 셈이다.

국립현대무용단 ⓒAiden Hwang
국립현대무용단 '몸쓰다' ⓒAiden Hwang
국립현대무용단 ⓒAiden Hwang
국립현대무용단 '몸쓰다' ⓒAiden Hwang

사건의 장을 구성하는 모든 ‘체’들은 이제 사건을 사는 존재자처럼 운동한다. 잘 알다시피 사건은 갑작스럽게 불쑥 나타나는 예기치 못한 일이다. 이 말은 사건 발생의 시공간이 우발적이라는 말이다. 곧 허스키한 음색의 여성 가수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동안 손가락으로 자기 어깨를 톡톡톡 두드리고, 두 손을 파르르 떨고 주먹을 꼭 쥐면서 온몸을 경직하고, 두 손을 높이 들어 떨다가 그 손으로 자기 가슴부위와 몸통을 두드리기도 하던 여성 퍼포머 한 명이 급작스레 울음을 터트리며 대성통곡을 하고, 그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울다가 웃는 등 시시각각 급변하는 감정의 변화를 절제할 수 없는 사람처럼 여러 가지 묘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우왕좌왕 단말마적인 움직임을 이어가면, 경쾌한 타악기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전면의 하얀 무대가 미끄러지듯 뒤로 밀려들어 가고, 또 얼마 후 검은 본무대가 회전하면서 다시 전면으로 나오는 것과 동시에 조명 빛도 변한다. 그러다가 무대 뒤편이 어두워지면서 음악은 빨라지고, 퍼포머들의 움직임도 이에 조응하며 거칠고 급해진다. 또 팔을 흐느적거리면서 바쁘게 걷고, 뒹굴기도 하면서 무대 이리저리 휘저으며 오가던 퍼포머들이 모두 퇴장하고, 두 명의 퍼포머만 무대에 남아 발작적인 움직임을 지속한다. 그러다 한 명의 퍼포머가 무대 전면에서 허공을 올려보는 순간, 그가 서 있는 무대가 공중으로 떠오른다. 조명 빛 하나 달랑 받으면서 높이 솟구쳐 오른 무대 위에 선 그가 아슬아슬한 움직임을 이어가면, 그 무대는 다시 내려와 밑으로 사라지고, 그와 동시에 반투명 막이 내려와 무대 전면을 다 막아버린다. 그 막에는 빨강, 파랑, 노랑, 등 여러 색깔의 조명이 빛이 들어오며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그 뒤에서 움직이는 퍼포머들의 모습이 거기에 실루엣으로 나타나 보인다. 실제 몸과 이미지의 운동이 한동안 공존하는 무대가 연출되는 마지막 장면이다. 이를테면 퍼포머의 신체와 여러 물체, 그리고 빛과 소리 등 우열과 위계가 없는 각종 ‘체’들의 맥락이 없는 운동이 돌발적으로 발생하며 공연 공간은 생성 변화하는 사건의 장이 되는 것이다.

공연은 다양한 ‘체’들의 접속과 일탈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해 가는 미적 장이다. 그러기에 ‘체’는 공연을 살아 있게 만드는 주체이다. ‘체’가 있기에 공연은 행위, 관계, 사건 등이 발생하며 생성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동시대 공연에서 이러한 ‘체’들은 실재적인 것으로서 공연의 근원적 가능성으로 전경화된다. 곧 ‘체’들은 재현의 도구로 소용되는 것을 거부하고 지금-여기의 실제 공간에서 자신을 현시하며, 그럼으로써 지금-여기의 시공간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며 변화하는 사건의 장으로 만든다. ‘체’들의 물질성이 기호성을 압도하는 형국이 펼쳐지는 것이다. 예컨대 국립현대무용단의 <몸쓰다> 초연 무대는 춤적 수단들의 탈 위계화를 내보이면서 동시대 공연의 이러한 특징들을 장면화함으로써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바 체험되는 세계야말로 참된 세계라고 말하는 공연이다.

최찬열 무용평론가
최찬열 무용평론가
altai21@hanmail.net
한국춤 전공 후 모스크바대 인류학 석사,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인류학 박사과정 및 미학 박사학위 취득. 지금은 몸의 예술과 인문학에 기반한 통섭적 문화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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