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포용과 확장의 축제 - 제5회 부산발레페스티벌
[공연리뷰] 포용과 확장의 축제 - 제5회 부산발레페스티벌
  • 노영재 무용평론가
  • 승인 2023.09.06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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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프리뷰=부산] 노영재 무용평론가 = '영남은 춤, 호남은 소리’라는 표현을 좋아하지만, 부산은 전통춤 못지않게 발레에 대한 자부심 또한 강하다. 이는 부산 출신 발레인들이 국내외 발레계에서 보여준 역량과 활발한 활동에 대한 긍지일 것이다. 발레는 지역 무용계 활성화에도 큰 축을 담당한다. 콩쿠르 참가 인원이 다른 장르에 비해 넘쳐나고, 특히 초등부의 우수한 기량에는 매년 감탄을 금치 못한다. 그렇다고 이러한 현상이 지역 발레공연의 장밋빛 미래로 직결되진 않는 것 같다. 즉 어린 인재 배출에 머무를 뿐, 공연 인프라의 부족으로 인해 규모와 내실을 충족하는 발레공연을 향유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난달 있었던 부산발레페스티벌이 지역 무용계에 시사하는 바는 크다. 올해로 다섯 번째를 맞이하는 부산발레페스티벌이 8월 19일, 20일 양일간 영화의 전당에서 열렸다. 부산지역 민간발레단인 부산발레시어터(단장 정성복)가 주관하는 이 축제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지원하는 대한민국 우수공연예술제에 선정됐다. 축제는 크게 두 공연과 함께 부대행사인 발레 워크숍과 댄스 필름 상영으로 구성되었다.

pille '낙화' (사진제공=부산발레페스티벌)
pille '낙화' (사진제공=부산발레페스티벌)

첫날 공연인 ‘댄스 웨이브’는 사전 공모를 통해 선정된 청년예술단체들의 경연 무대였다. 부산아이디발레단, POD댄스프로젝트, pille, ID프로젝트, 블루밍, 손오비 등 총 6개 단체가 참여한 이 공연은 발레라는 장르에 국한되기보다는 전반적으로 젊은 안무자들의 재치있는 동시대적 해석과 시도, 확장의 노력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몇몇 작품을 주목해보면, 대구를 기반으로 활동중인 pille의 <낙화>(서준혁 안무)는 꽃이 피고 지는 현상에 대한 숙고를 담았다. 남녀 2인무가 뛰어난 호흡과 친밀한 접촉을 통해 보여주는 신체의 선형과 유연함이 꽃의 절정처럼 아름다우면서도 한편으론 긴장과 불편한 감정을 포진하여 덧없는 시간의 속성을 인상적으로 묘사했다. POD 댄스프로젝트의 <하우스 오픈(How’s Open)>(이종윤, 이진우 안무)은 무대 철거 과정을 춤으로 보여준다는 아이디어가 참신했다. 완성된 결과물을 지워나가는 무대 스태프들의 감각적인 연출은 충분히 역동적이었지만 다소 긴 시간으로 인해 작품의 동력이 떨어지는 점은 조금 아쉽게 느껴졌다. <BEYOND I_D 정체성 그 이상>(이주호 안무)을 선보인 부산아이디발레단은 단체의 이름과 결을 같이하여 ‘정체성의 정체’를 탐구하는 데 주력한 듯하다. 여성스러운 남성과 레슬러 같은 남성적 여성의 분명한 대비를 통해 사회적 정체성의 압박, 성적 정체성 혼란 등 현대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정체성을 누가 어떻게 규정지을 수 있을지에 대한 현실적인 물음이 내내 작품의 바탕을 이루었다.

부산아이디발레단 'BEYOND I_D 정체성 그 이상' (사진제공=부산발레페스티벌)
부산아이디발레단 'BEYOND I_D 정체성 그 이상' (사진제공=부산발레페스티벌)

20일 ‘스페셜 갈라’는 국내 프로 무용단과 발레 스타들이 함께하는 무대로 꾸며졌다. 클래식 위주로 구성되는 관례에서 벗어나 이번 갈라 공연은 클래식, 컨템퍼러리, 창작발레를 고르게 조합한 구성이 눈길을 끌었다. 김용걸댄스시어터의 <Delibes Suit Pas de deux>는 현 파리오페라발레 예술감독 호세 마르티네스(José Martinez)가 안무한 그랑 빠 드 되(Grand Pas de Deux)로 국내 관객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귀한 작품이다. 들리브 모음곡으로 구성한 이 작품은 남녀 무용수의 뛰어난 기량을 볼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2인무 형식이지만 섬세한 부분이 차이를 가져왔다. 춤의 시작과 끝, 솔로의 연결 등에 가미된 약간의 방향과 동선 변화 그리고 무대 커튼의 절묘한 활용은 고전미의 정수를 충분히 느끼게 해주면서 스페셜 갈라의 첫 무대를 열었다.

김용걸댄스시어터 'Delibes Suit Pas de deux' (사진제공=부산발레페스티벌)
김용걸댄스시어터 'Delibes Suit Pas de deux' (사진제공=부산발레페스티벌)

대구시립무용단의 <Ceremony>(신승민 안무)는 군무를 기본으로 의식의 원형적 힘을 탐구한 작품으로 다가왔다. 운집한 무용수들의 응축된 에너지로부터 전개되는 작품은 <봄의 제전>이나 <볼레로>와 같은 명작에서 감지할 수 있는 제의성을 모티프로 삼은 듯했다. 춤을 ‘간절하고 절실한 마음의 의식’이라고 언급한 안무자의 의도는 경건함을 전하는 전형적인 종교적 색채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적인 개방성에 본능적 감각을 가미하여 군무가 발산하는 에너지를 다양하게 해석하고자 한 노력으로 읽혔다. 또 다른 컨템퍼러리 작품 <shadowland>는 올해 부산발레시어터와 협업한 이력이 있는 류장현의 안무로, 작품 전반에 백라이트 효과를 주어 ‘어둠’의 존재를 극대화한 점이 눈길을 끌었다. 춤은 밤과 어둠이란 맥락에서 그림자 처리가 되기에 일체의 표정이나 감정이 직접적으로 읽히지 않지만, 실루엣이 강조된 신체성과 충격적인 청각적 효과는 주제에 부합하여 내밀한 어둠으로 몰입하게 하는 독특한 경험을 선사했다.

류장현과 친구들 'shadowland' (사진제공=부산발레페스티벌)
류장현과 친구들 'shadowland' (사진제공=부산발레페스티벌)

창작발레 두 작품도 주목할만하다. 김용걸댄스시어터의 <Conscience>는 김용걸이 안무한 창작발레로 ‘의식과 무의식’을 모티프로 삼았다. 남녀 2인무로 이루어진 춤은 분명한 대비를 통해 상반되면서도 끊임없이 서로의 영향하에 있다는 심리성의 인문학적 해석을 현대적으로 시각화한 작업으로 읽혔다. 유니버설발레단은 <코리아이모션>에서 발췌한 <미리내길>(유병헌 안무)을 통해 발레단이 오랫동안 헌신해온 한국적 창작발레의 현대적 해석을 보여주었다. 한국적 정서를 직관적으로 그린 이 작품은 기존 스토리 발레에서 벗어나 한국적 리듬과 움직임의 특질을 발레 어휘와 잘 접목한 점이 돋보였다. 맺고 끊는 춤사위, 고전발레와는 이질적인 호흡법까지 절묘하게 조합하여 섬세한 표현을 보여준 강미선의 춤은 감동으로 다가왔다.

유니버설발레단 '미리내길' (사진제공=부산발레페스티벌)
유니버설발레단 '미리내길' (사진제공=부산발레페스티벌)

또한, 주요 공연 외에 부대행사로 전공자뿐만 아니라 일반인이 함께할 수 있는 발레 워크숍과 댄스 필름 상영이 있었다. 그중 강예나 감독의 영화 <다시 훨훨>은 부대행사 그 이상의 의미를 전했다. 국내외 화려한 활동과 오랜 기간 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로 사랑 받았던 강예나 발레리나가 배우이자 영화감독으로 변신한 결과물을 목격한 시간은 흥미로웠다. 은퇴한 발레리나, 꿈을 접은 배우, 길을 잃은 현직 발레리나의 성장 드라마를 그린 이 작품은 시카고인디필름어워즈 여우주연상 수상에 이어 여러 해외 영화제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50분이라는 짧은 독립영화임에도 강 감독은 자신의 춤 경험을 다각도의 영상으로 연출하고, 극중 천연덕스러운 연기와 발성으로 놀라움을 안겨주었다. 특히 제작, 감독, 대본, 출연 등 1인 4역을 소화하는 과정을 담은 메이킹필름과 ‘관객과의 대화’에서 보여준 강 감독의 성실함과 유쾌함은 제2의 인생을 개척하는 은퇴 무용수의 모범 사례로 다가왔다.

'다시 훨훨'의 강예나 감독 (사진제공=부산발레페스티벌)
'다시 훨훨'의 강예나 감독 (사진제공=부산발레페스티벌)

발레축제는 발레인들만의 축제가 아니다. 발레를 기반으로 하되 축제의 기본 방향과 성격은 대중화와 공공성에 있어야 한다. 부산에는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는, 규모가 크진 않아도 내실 있는 민간발레단들이 있으며, 이번 축제를 주관한 부산발레시어터 역시 양질의 전막 발레와 동시대성을 반영한 흥미로운 작품을 통해 부산경남지역 발레문화 확장에 기여해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민간발레단이 5회의 축제를 이끌어온 역량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축제가 다양한 구성을 통해 지역 젊은 무용가들의 신선한 아이디어를 포용하고 발레 애호가들에게 확장된 시각을 불어넣어 준 것임이 틀림없으나 여기엔 인력확보와 재정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적지 않은 시행착오와 어려움 또한 묻어 있다. 5회를 마감한 축제는 이제 안정기에 접어들고 서서히 변화를 모색해볼 전환점에 있다. 열정만큼 고민은 깊어져야 하고 이를 통해 다음 해엔 한층 더 성장한 모습으로 다가오리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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