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키워드로 다시 읽는 춤공연-5] LNYdance 정기공연 '파놉티콘(PANOPTICON)'
[철학 키워드로 다시 읽는 춤공연-5] LNYdance 정기공연 '파놉티콘(PANOPTICON)'
  • 최찬열 무용평론가
  • 승인 2023.09.25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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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형 감옥에 대한 춤적 상징과 은유

[더프리뷰=서울] 최찬열 무용평론가 = 2022 서울국제안무페스티벌(SCF) 무대에 올랐던 전작 <이음-다가서다> ver. 2에서 스펙터클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인간 군상의 모습을 표현성 짙은 몸짓으로 예리하게 묘파했던 이남영이 이번에는 권력에 의해 감시당하는 개인들의 모습을 담은 사회비판적인 공연 <파놉티콘>(2023년 8월 18일, 구로아트밸리 예술극장)을 선보였다. 기실 스펙터클이 만인이 한 사람의 권력자를 우러러보는 행위를 통해 그들을 소외시키는 권력 장치라면, 이와 대조적으로 파놉티콘은 한 사람이 만인을 살펴봄으로써 그들을 포획하는 권력 장치이다.

LNYdance’s ‘PANOPTICON’@잔나비와 묘한계책
LNYdance ‘PANOPTICON’ @잔나비와 묘한계책

춤꾼 한 명(이혜인)이 무대 왼쪽에서 환하게 불이 켜진 텅 빈 무대로 걸어서 들어온다. 무대 중앙에 다다른 그는 몸을 정면으로 둔 채 허리를 숙이더니 객석을 유심히 바라본다. 냉소적인 눈초리로 살펴보는 그의 시선은 관객을 대상화하는 듯하다. 말하자면 그는 근대적 주체로서의 ‘보는 자’이다. 곧 보이는 모든 대상을 자신의 눈길 아래에 두는 오만하고 거만한 주체이다. 그리고 그가 다시 몸통을 세워 잠시 객석을 쳐다보는 사이 무대 양옆에서 두 명의 춤꾼이 차례로 등장해 무대 좌우로 오가는 그를 막아서지만, 그 둘 사이를 비집고 나온 그는 허공을 쳐다보면서 뛰고, 또 뭔가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다소 격정적인 춤을 추더니 쓰러지고 만다. 그 순간 비상 상황을 알리는 듯한 사이렌 소리가 흘러나오고, 이어서 등장한 군무가 쓰러진 그를 에워싼 채 억누르거나 을러대는 듯 일제히 내려다보고 있다. 그가 부지불식간에 ‘보는 자’에서 ‘보이는 자’로 처지가 변하는 모습이 연출되는 것이다. 이 공연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둥근 라인을 그리며 서 있는 무리는 원형 감옥을 연상시키고, 그는 그곳에 갇힌 자로 보인다. 이러한 불상사는 누구에게나 일상다반사로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리라.

LNYdance’s ‘PANOPTICON’@잔나비와 묘한계책
LNYdance ‘PANOPTICON’ @잔나비와 묘한계책

익명의 무리에 둘러싸여 그들의 시선에 온전히 노출된 그가 거기에서 벗어나고자 허우적거리다가 뛰쳐나가 보지만, 군무가 뒤따라 와 그를 다시 붙잡는다. 일렬로 쭉 늘어선 군무의 라인이 마치 일상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살피는 권력의 매서운 눈길같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 순간 그들 곁으로 다른 한 명의 춤꾼(이남영)이 무심하게 스쳐 지나간다. 아마도 일상의 영역에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암암리에 작동하는 권력의 감시망을 나타내는 상징적 인물일 것이다. 그러다 무리가 무대 중앙 뒤쪽에 모여 여유 있게 몸통을 흔들거리며 서 있으면, ‘보이는 자’도 그들 속으로 잠겨 든다. 일상에서 작동하는 미시 권력의 감시망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산다는 것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전언으로 읽히는 인상적인 장면이다.

일상 공간에 만연해 있는 CCTV나 몰래카메라, 사이버 공간에서의 감시와 역 감시 등, 규율 사회와 함께 창시된 전면적인 감시는 각각의 제도 안에서 권력을 행사하는 심급을 통해 개인들 전체가 언제나 가시적이 되도록 요구한다. 곧 ‘봄’과 ‘보임’의 관계를 이룬 권력과 개인 사이에는 언제나 이미 일방적 시선에 의한 권력의 작동 방식이 내재해 있는 것이다. 무릇 모든 보고 보이는 관계는 권력관계를 수반한다. 이를테면 LNYdance 예술감독 이남영의 안무작 <파놉티콘>은 이러한 ‘봄’과 ‘보임’의 관계를 주제화하면서 현대사회의 규율 권력이 대중 속에서 작동하는 원리를 일깨워 주는 흥미진진하면서도 의미심장한 공연이다.

LNYdance’s ‘PANOPTICON’@잔나비와 묘한계책
LNYdance ‘PANOPTICON’ @잔나비와 묘한계책

이제 그들은 한 무리, 곧 군중이 되어 역동적인 군무를 펼친다. 감시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듯이 펄쩍펄쩍 뛰면서 손을 허공으로 치켜올리고, 부유하는 군중처럼 허리를 숙인 채 무대 양옆으로 오가다가 엎어져 기어가기도 하던 군무가 원형을 이룬 채 엎드리면, 그것의 안과 밖에서 각각 한 명의 춤꾼이 그 주변을 따라 맴돈다. 안팎으로 나뉘어 선 둘은 원 주변을 반대 방향으로 돌고, 각자 다른 곳을 바라본다. 그러다 원의 안과 바깥에서 겨우 마주한 그들이 잠시 손을 맞잡아 보지만, 이내 그 손을 놓고 만다. 운동 방향과 눈길을 달리하던 둘은 끝내 엇갈리고, 각자의 시선은 서로에게 가닿지 못한다. 요컨대 원형 감옥을 상징하는 원의 안과 바깥에서 보고 보이는 관계를 이루는 이들의 어긋나는 시선을 통해 파놉티콘의 작동 원리인 ‘시선의 비대칭’을 장면화해 보여주는 것이다.

허밍턴 포스트
허밍턴 포스트

‘일망 감시 체제’, 곧 ‘일거에 다 본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는 파놉티콘은 18세기 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이 설계한 원형 감옥을 가리킨다. 그는 당시 사회에서 권력이 취하는 형태들에 대한 정밀한 묘사를 구상하며 모든 것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건축 모델을 제시했다. 미셸 푸코가 그의 책 <감시와 처벌>에서 묘사한 바에 따르면, 파놉티콘은 원환(圓環) 형태의 건물이다. 건물의 중심에 높은 탑이 있고, 중간에는 뜰이 있다. 그리고 원환 둘레를 따라 창이 난 감방이 쭉 늘어서 있다. 중앙 탑에 있는 간수는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한눈에 감방 안 죄수의 모든 행동과 움직임을 일일이 감시할 수 있는 구조이다. 죄수들이 하는 모든 일은 창을 통해 간수의 시선에 노출되지만, 반대로 감방 안의 죄수 중 그 누구도 간수를 볼 수 없다. 파놉티콘은 시선의 비대칭을 통해 작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셸 푸코의 주장에 따르면 이는 근대의 규율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파놉티콘은 일방에서 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가동되는 이상적인 권력 장치이다. 이때 ‘봄’은 앎과 직결된다. 대중의 모든 행동을 빠짐없이 모조리 볼 수 있는 권력은 대중에 대해 전부 알게 되지만, 반대로 대중은 그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시선의 비대칭은 인식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인식의 불균형은 권력의 불균형으로 이어진다. 권력은 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손쉽게 대중을 통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공연에서는 조명기가 파놉티콘을 대신하는 것처럼 보인다. 높이 걸린 조명기에서 내리쏟아지는 가늘고 날카로운 불빛은 마치 춤꾼들(대중)을 꿰뚫어 보는 권력의 시선 같고, 또 시시때때로 무대 바닥에 새겨지는 크고 작은 원형 빛들은 춤꾼들의 행동반경을 제한하고 가두는 권력의 감시망처럼 보인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이러한 역할을 하는 조명기에서 발사되는 원형 빛이 무대 바닥에 떨어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데, 이는 흡사 무리를 이룬 군무가 원형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나기를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무리는 거기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라도 하듯 사방으로 흩어져 각자 먼 바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숙인 몸통을 거칠게 튕기면서 두 팔을 앞으로 쭉쭉 내뻗었다가 빠르게 회전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도발적인 동작을 구사하면서 무대 좌우로 오간다. 그러면 원형의 조명 빛은 이리저리 이동하면서 무리를 그 빛 안에 가두었다가 풀어주기를 재차 되풀이한다. 무리는 원형의 조명 빛 안팎을 넘나들며 가열 찬 춤을 추지만, 끝내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하지만 원형의 조명 빛이 집요하게 그들을 가두려 하면 할수록, 그들도 한층 더 기세를 올리며 거세면서도 힘찬 군무를 이어간다.

LNYdance’s ‘PANOPTICON’@잔나비와 묘한계책
LNYdance ‘PANOPTICON’ @잔나비와 묘한계책

이남영의 솔로 춤이 이어진다. 앞 장면에서 감시하는 권력을 대표하던 그가 감시당하는 개인으로 입장이 뒤바뀌는 모습이 그려진다. 무대 왼쪽에서 등장한 그가 몸통을 한 바퀴 휙 돌린 후 쓰러지면, 무대 천장에서 여러 대의 육중한 조명기가 굉음을 내며 내려왔다 올라가기를 반복한다. 치밀하면서도 위압적으로 작동하는 권력의 힘을 과시하는 장면으로 보인다. 기이하면서도 거대한 곤충의 눈처럼 생긴 조명기가 한 개인을 압박하고 짓누르는 장면은 규율 권력의 감시 체계가 전면화되는 국면을 나타내는 것이리라. 이에 조명기 밑에서 괴로워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움직임을 이어가던 그가 내리쬐는 감시의 불빛을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고통을 감내하듯 엄지손가락을 입에 넣어 문 후 상체를 거칠게 뒤틀고, 누워서 뒹굴다가 일어나 도망가듯 뛰고, 앞으로 돌진하다 장벽에 막힌 듯 뒤로 돌아 다시 뛰다가 쓰러지고 만다. 한층 더 일반화되는 권력의 감시망에 의해 점점 왜소해지는 주체의 모습을 섬세하게 그리고 있는 춤이다. 권력의 감시 체계를 내면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넌지시 알리는, 예사롭지 않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춤이다.

LNYdance’s ‘PANOPTICON’@잔나비와 묘한계책
LNYdance ‘PANOPTICON’ @잔나비와 묘한계책

다음 장면에서는 조명기들이 타원형을 이루며 무대 중간 높이 정도에 걸려 있고, 그 밑에서 3인무에 이어 군무가 펼쳐진다. 조명기들은 원형 감옥의 감시탑에서 죄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는 간수의 눈처럼 보인다. 배경음악 없이 조용하게 진행된 이혜인, 최시울, 정예주의 잔잔한 3인무와 달리 군무는 시종일관 활기차면서도 격정적인 몸짓으로 거친 에너지를 발산하며 무대를 뜨겁게 달군다. 하지만 두 춤은 똑같이 묵직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곧 그들은 셋이 조화롭게, 그리고 모두 함께 활발하게 춤을 추면서도 춤이 진행되는 중간중간에 서로 쫓고 쫓기며 상대에게 등을 보이고, 각자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는 배타적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그들이 바로 권력의 감시 체계를 내면화한 인물임을 내보이고 있다. 때로는 솔로 춤이 특징적으로 돋보이고, 또 다른 때는 듀엣이나 트리오 춤이 특히 두드러지지만, 그때마다 다른 춤꾼들은 그 춤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만 보거나, 아예 등을 돌린 채 서서 무시하곤 한다. 보고 보이는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집단 속에서 서로서로 자발적으로 감시하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이른바 규율 권력의 감시 체계를 내면화한 군중 속에서 작동하는 미시 권력의 효과가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춤이다. 하지만 동시에 뛰어서 무대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기를 반복하고, 두 팔을 옆으로 거칠게 뿌리치며 펴는, 기세가 아주 강하면서도 일사불란한 군무는 역설적으로 그러한 권력의 감시 체계에서 벗어나고 싶은 그들의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다. 강렬한 에너지를 내뿜으며 넓은 대극장 무대를 꽉꽉 채우는 잘 훈련된 춤꾼들의 빼어난 춤이 도드라져 보이면서도 양의성이 드러나는, 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매력적인 군무 장면이다.

파놉티콘의 구조는 ‘일망 감시 체제’의 모든 특징, 곧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한다. 각각의 개인은 자신들이 실제로 감시당하는지 혹은 아닌지 알 수 없다. 이것의 작동 원리가 보여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의존하고 있고, 그러기에 각각의 개인은 마치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데, 그 이유는 언제 어떤 순간에 권력의 시선이 자신에게 미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가 목표로 하는 바는 개인의 내면에 규범을 새겨넣는 것, 이른바 ‘내면화’이다. 실제로 ‘감시당하지 않는 데도 감시를 받는다’는 원리야말로 비할 데 없는 규율 메커니즘을 산출한다. 권력이 원하는 규율을 내면화한 개인은 심지어 그 누구도 그를 보지 않을 때조차도 권력이 원하는 대로, 기꺼이 자발적으로 ‘정상적으로’ 행동하는 ‘정상인’이 된다. 시선의 비대칭에 의해 작동하는 파놉티콘의 감시 시스템은 점차 규율을 ‘내면화’한 개인을 낳고, 급기야는 그들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감시하게 만든다. 애초에는 감옥용으로 고안된 파놉티콘에 구현된 이런 감시의 원리는 사회 전반으로 스며들어, 비단 감옥뿐만 아니라 학교나 공장, 병원이나 요양소 등에도 적용되고, 더 나아가 일반적인 감시 모델이 되어 모든 사회 영역과 일상생활에서도 작동하는 통제 시스템이 된 것이다. 말하자면 푸코는 파놉티콘에서 근대 규율 권력의 전형을 보는 것이다.

LNYdance’s ‘PANOPTICON’@잔나비와 묘한계책
LNYdance ‘PANOPTICON’ @잔나비와 묘한계책

일렬로 사선으로 붙어 앉은 채 서로의 눈을 가리는 그들은 이제 각각 감시하면서 동시에 감시 당하는 인물들이다. 그들이 줄줄이 뒷사람을 베고 누운 채 허공을 바라보다가 일어서면 무대 바닥에는 다시 큰 원형 조명이 들어오고, 무대에 남은 춤꾼들은 또다시 거기에 갇힌다. 그들은 원의 둘레를 걷고 뛰다가 다시 돌아서 가고, 또 가만히 서서 원 안의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고, 맞은 편 둘레에 서 있는 춤꾼과 마주 보다가 함께 모여 몸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허공을 응시하더니 무대 옆으로 퇴장한다. 이를테면 원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거나 원의 둘레만 맴돌다가 그곳에 서서 이리저리 다른 방향으로 몸을 틀면서 서로 감시하는 듯한 이들은 보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보이는 대상이 되는 이중 상황에 놓인 인물이다. 그런데 이 공연에서 자주 보이는 원의 형상은 이른바 원형 감옥의 메타포일 것이다. 어떤 때는 춤꾼들이 타원을 이뤄 다른 춤꾼을 가두고, 또 다른 때는 타원을 이루며 배치된 조명기가 감시자의 눈처럼 춤꾼들을 내려다보다가 무대 바닥에 크고 작은 원형 조명 빛을 새기면, 춤꾼들이 그 안에 갇힌다. 요컨대 이 공연에서 여러 형태의 원은 감시와 감금의 상징으로 작동하며 춤꾼들(대중)의 행동반경을 제한하거나 구속한다.

LNYdance’s ‘PANOPTICON’@잔나비와 묘한계책
LNYdance ‘PANOPTICON’ @잔나비와 묘한계책

규율은 신체와 능력을 분리함으로써 순종하는 신체를 만들어 낸다. 여러 대의 조명기가 서서히 내려와 무대 바닥의 국소적인 지점들에 여러 개의 원형 빛을 새기면, 거기로 춤꾼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조심조심 들어서는 그들의 모습이 마치 자발적으로 감시 체계 안으로 들어가는 순종적인 이들처럼 보인다. 그들 중 어떤 이는 드러눕고, 다른 이는 그를 바라보거나 혼자 먼 곳을 응시하다가 제자리에서 나풀거리는 춤을 춘다. 이른바 규율 권력에 포획된 유순하고 온순한 신체들의 춤이다. 팔과 상체를 부드럽고 유연하게 움직이는 그들의 몸짓은 그들의 신체가 이미 포획당했음을 시사한다. 엎드린 다른 춤꾼의 등에 올라서서 허공을 바라보다가 느리고 나약하게 움직이는 그들의 몸짓은 더 이상 취해야 할 마땅한 행동이 없어 체념에 이른 듯한 수동적인 몸짓이다. 무대 전면에 선 한 춤꾼의 춤이 이러한 그들의 답답한 심정을 대신 나타내 보인다. 두 발을 바닥에 고정한 채 제자리에 서서 몸통과 팔을 기이하게 비틀고, 갖가지 표정을 짓다가 얼굴을 괴상하게 찡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연신 뱉어내면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몸통을 과하게 뒤로 젖히기도 하는 최시울의 독특한 솔로 춤이 이를 잘 대변하고 있다. 그 순간 이남영이 또 무심하게 그들 곁을 휙 지나간다. 자발적으로 순종하고 복종하는 유순한 신체들의 어리고 약한 몸짓을 통해 규율 권력의 감시가 일상화된 현대사회의 참모습을 냉소적인 시각으로 담아낸 장면이다.

LNYdance’s ‘PANOPTICON’@잔나비와 묘한계책
LNYdance ‘PANOPTICON’ @잔나비와 묘한계책
LNYdance’s ‘PANOPTICON’@잔나비와 묘한계책
LNYdance ‘PANOPTICON’ @잔나비와 묘한계책

호외가 뿌려지듯 무대 천장에서 종이 무더기가 떨어진다. 중요한 세상 소식을 알리고 전하는 매체 일반을 나타내는 메타포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규율 권력에 점령당한 시대상을 비판하는 내용은 없을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매체는 대중들의 눈을 가리는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매체에 실리는 말들은 절대로 중립적이거나 객관적일 수 없고, 그 말의 생산 혹은 억압은 어느 특정한 사회 조건에서 항상 정치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른바 지식과 권력이 짝을 이뤄 사회를 통제하는 지식-권력 복합체를 암시적으로 드러내는 마지막 장면이다.

LNYdance’s ‘PANOPTICON’@잔나비와 묘한계책
LNYdance ‘PANOPTICON’ @잔나비와 묘한계책

지식과 권력은 별개가 아니다. 지식 속에는 반드시 권력이 작동하고, 권력은 그 작동을 위해 지식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춤꾼들은 지식-권력의 그물망을 찢듯 종이를 입에 물어 씹고, 집어던지다가 발로 차고, 널브러진 종이 무더기 위를 뒹굴고, 소리치며 거칠게 저항하다가 일거에 무대 밖으로 퇴장한다. 그리고 잠시 후 다시 조명이 들어오면 무대 오른쪽 뒤에서 무리를 이룬 예닐곱 명의 춤꾼이 등장해 무대를 천천히 한 바퀴 돈다. 몇 명의 춤꾼이 머리에 흰 천을 덮어쓰고 눈과 귀를 가린 채 걷고 있다. 듣고 보고 말하기를 거부하며 지식-권력 복합체를 이룬 현대사회의 규율 권력과 매체에 경종을 울리는 조용하면서 부드러운 저항의 몸짓처럼 보인다.

조명기까지 마침맞게 활용하며 원형 감옥에 관한 춤적 상징과 은유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 LNYdance의 <파놉티콘>은 대극장 무대에 어울리는 1시간 이상의 몰입감 있는 대형 작품을 만든 안무자의 능력이 돋보인 공연이었다.

최찬열 무용평론가
최찬열 무용평론가
altai21@hanmail.net
한국춤 전공 후 모스크바대 인류학 석사,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인류학 박사과정 및 미학 박사학위 취득. 지금은 몸의 예술과 인문학에 기반한 통섭적 문화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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