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모니터] 여성 주체성을 불어넣는 갈라테이아의 춤
[공연모니터] 여성 주체성을 불어넣는 갈라테이아의 춤
  • 이재인
  • 승인 2023.09.30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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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프리뷰=서울] 이재인 무용이론가 = 2023 크리틱스 초이스 댄스 페스티벌(7월 16-17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의 첫날 두 번째 순서로 공연된 조혜정의 <갈라테이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작품이다. 조각가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생각하는 여성의 이상적인 모습을 조각상 갈라테이아에게 투영한다. 그리고 물질인 조각상이 실제 인간이 되길 간절히 원했고, 그 바람이 마침내 이루어져 조각상 갈라테이아는 생명을 얻는다.

주인공 피그말리온의 관점에서 본 이와 같은 이야기는 기대하는 바를 간절히 원하면 실현된다는 삶에 대한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그러나 안무가 조혜정은 이러한 신화 속 피그말리온의 기대와 바람을 남성의 여성에 대한 욕망의 시선으로 재해석하면서 갈라테이아를 남성중심주의적 관점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남성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여성상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기에 공연에 출연한 무용수들 각각은 조각상 갈라테이아의 분신들로서, 자유롭고 능동적인 춤을 통해 자기 몸에 각인된 피조물로서의 수동성을 떨쳐내고 여성 주체성을 드러내고자 한다.

조혜정 '갈라테이아' (사진제공=조혜정)

첫 막은 갈라테이아가 물질-조각상에서 인간으로 생명력을 얻는 춤이다. 조명이 들어오면, 무대 중앙에 하얗고 긴 튀튀 위에 타이트한 살구색 언더웨어를 입은 채 두 손을 갈비뼈에 모으고 서 있는 여성 무용수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난다. 어둠이 감싼 무대 한가운데 아무런 미동 없이 서 있는 그녀는 조각상 갈라테이아일 것이다. 그녀는 호흡을 크게 들이쉬면서 흉곽을 과장되게 움직이기 시작하다가 상체의 근육과 갈비뼈 마디마디를 미세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가녀리고 청순한 여성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몸이지만, 이와 반대로 춤은 강렬한 이미지를 구현한다. 흉곽의 움직임을 극대화하는 반면, 다른 신체부위는 긴장을 풀어 축 늘어트림으로써 갈비뼈로부터 생명력이 솟아나는 것을 표현하는 인상적인 도입부이다.

조각상 갈라테이아의 갈비뼈에서 발아된 생명력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가듯, 움직임은 점점 빨라지는 음악에 맞춰 흉곽으로부터 전신을 이용한 움직임으로 확장되어 간다. 손으로 갈비뼈를 쓸어내리다가 두 팔을 펼치고, 마치 인간으로서 첫 발을 내딛듯 위태위태 걸음을 옮기다가 기어보기도 하고 다리를 뒤로 뻗어 보기도 한다. 물질-조각상인 갈라테이아가 생명력을 얻고, 그 기운이 전신으로 퍼져나가는 과정을 형상화하는 춤이다. 갈비뼈를 비비고 쓸어내리다가 무엇인가를 털어내고 뿌리치는 듯 움직임을 이어 나가는데, 이는 작품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메인 동작으로 보인다.

조각상 갈라테이아의 생명이 흉곽의 들숨을 통해 생겨나는 것은 상징적이다. <성경>의 창세기는 하나님이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창조했다고 말한다. 이러한 창조론에 따르면, 이브의 탄생과 존재 목적은 아담에게 가장 적합한 짝이 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갈라테이아의 운명도 이와 똑같다. 그녀가 여성-인간으로 재생된 근원에도 피그말리온이라는 남성의 이상과 욕망이 자리하는 것이다. 조각상-갈라테이아의 생명은 조각가-피그말리온의 기대로부터 생겨났고, 그녀의 신체는 그가 바라는 바대로 빚어졌다. 그러기에 갈비뼈의 미세한 움직임에서 시작하는 갈라테이아의 춤은 이러한 성경 속 창조론과 맞물려, 갈라테이아의 신체에는 근본적으로 수동성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하지만 갈라테이아로 분한 조혜정의 솔로 춤은 갈비뼈를 비비고 털어내는 동작을 연속적으로 구사함으로써, 신체와 영혼에 각인된 이러한 수동성을 부정하고 지워내야 할 것으로 여기는 듯하다.

조혜정 '갈라테이아' (사진제공=조혜정)

신비로운 음악이 흐르고 안개 낀 듯한 어스름한 조명이 들어오면, 흰색 튀튀를 입은 무용수들이 각자 포즈로 무대 여기저기에 흩어져 서 있다. 가녀린 몸매에 연약한 여성상을 대표하는 낭만발레의 발레리나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지는 무용수들의 춤은 이러한 발레리나들의 춤과는 상반된다. 한 무용수가 정적인 포즈에서 깨어나 메인 동작을 구사하고, 답답한 듯 가슴팍을 치다가 무엇인가를 털어내듯 팔을 거칠게 움직이더니 어디로 뛰쳐나가려는 듯한 격한 움직임을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급기야 이 탈주와 저항의 동작을 다른 무용수들도 따라하기 시작하고, 연이어 모두가 정적인 포즈에서 깨어나 같은 동작을 반복한다. 이를테면 갈라테이아의 분신들이 물질-조각상의 상태에서 하나, 둘 깨어나더니 남성의 욕망이 투영된 자신의 이상화된 신체를 부정하는 격한 몸부림을 이어 나가는 것이다.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흩어져 제각기 춤추던 무용수들이 무대 앞에 모여 하나의 '집단신체'를 현시한다. 포즈 중심의 정적인 움직임으로 시작한 무리의 움직임은 점점 역동적으로 변해간다. 이는 집단적 신체가 정제된 포즈로 조화롭게 구성한 형태미를 흐트러뜨리는 듯하다. 한 명이 무리에서 탈출해 홀로 조명 밖으로 달려가 쓰러지면 음악이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호흡을 맞춰 조화롭게 군무를 이어가던 무용수들도 하나, 둘 무리 밖으로 벗어나 쓰러진다. 이를테면 정제되고 잘 정돈된 형태미를 의도적으로 해체하는 집단적 신체의 군무를 통해, 남성에 의해 질서 잡힌 이상화된 형태를 깨부수고자 하는 의도를 내보이는 것이다.

조혜정 '갈라테이아' (사진제공=조혜정)

다음 장면에서는 무대 뒤편에서 무용수들이 일렬횡대로 서서히 걸어 나온다. 그녀들의 모습은 검은 실루엣으로 보인다. 무용수들이 하나, 둘 연이어 무대 중앙으로 나와 춤을 추다가 다시 뒤편으로 들어가면, 또다시 그들은 검은 실루엣 속으로 잠긴다. 무대 뒤편 어두운 조명 아래 실루엣으로만 보이는 포즈 중심의 군무와, 밝은 조명 아래 실제 몸의 동적인 솔로 춤의 대비는 갈라테이아의 가상 이미지와 실제 모습이 번갈아 나타나는 교차편집 식 연출을 통해 여성이라는 하나의 속성, 곧 보편성 속에 은폐되는 개별적 여성으로서의 갈라테이아를 보여준다.

그러다 무대 중앙에서 춤추던 군무는 모두 뒤편으로 돌아가 하나의 실루엣이 되어 퇴장하고, 한 명의 무용수만 무대 중앙에 남으면 무대 배경이 붉은색으로 바뀐다. 남겨진 무용수는 입고 있던 흰색 튀튀를 벗어 손에 쥐고, 붉은 무대 배경을 뒤로한 채 홀로 천천히 무대를 가로질러 걷는다. 전라와도 같은 무용수의 몸은 양의성을 갖는 것으로 보인다. 즉, 여성의 관능적인 신체미를 드러내는 한편 신체의 해방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흰색 튀튀를 벗어버림으로써 무용수가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순백의 순응적이고 정적인 이미지 뒤에 숨겨진 여성 주체적인 움직임의 에너지다. 말하자면 갈라테이아는 자신에게 덧씌워져 있는 남성 중심적인 여성에서 벗어나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여성 주체성을 구현하듯 스스로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능동적인 움직임을 구사하는 것이다.

공연의 종반부에는 이러한 능동적인 움직임의 군무가 이어진다. 음악이 바뀌면 무대 뒤편에서 붉은색 치마를 입은 무용수들이 전진하듯 걸어서 무대 중앙으로 나온다. 흰색의 낭만발레 튀튀가 아닌 신체의 개별성이 드러나는 붉은색 의상을 입은 채, 보편성 속에 숨은 여성성을 떨쳐내고 각자의 존재감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당당한 걸음으로 등장하는 장면이다. 또한 작품 전반부에서 구사한 탈주와 부정의 동작들과는 대조적으로, 이 장면에서 무용수들은 역동적인 동작을 구사하면서 무대 여기저기를 누비고 다니는 등 진취적이면서도 자유로운 동작으로 활개치는 몸을 현시한다. 요컨대 이들의 춤은 개별 존재로서의 새로운 여성성을 표현하는 군무다.

조혜정 '갈라테이아' (사진제공=조혜정)

무용 공연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주의적 시각은 1830-40년대 낭만발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남성의 관점에서 가장 이상적인 여성상을 반영한 낭만발레의 발레리나들은 순백의 색깔에 가느다란 발목이 드러나는 길이의 튀튀를 입고, 신비감을 조성하는 어스름한 조명 아래 요정과 같은 손짓과 발짓으로 순종적인 여성상을 구현했다. 이후 무대에서 여성 무용수의 몸은 남성 관객이 보고 싶어 하는 여성적인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기 위해 조정되었다. 클래식 발레의 원천을 여성이라고 칭송한 조지 발란신은 ‘발레리나의 기능은 남성을 매혹시키는 것’이라며 발레가 남성의 관점에서 만들어졌다고 했다. 즉, 발레리나는 움직임의 주체가 아니라 그녀들을 욕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남성의 시각적 즐거움에 복무하는 춤을 췄을 뿐이다.

무용 공연에서의 이러한 남성중심적 여성성을 전복시키려는 시도가 <갈라테이아>에서 보인다. 공연 초반에는 낭만발레를 연상시키는 무대 연출에 메인 동작을 대비적으로 맞세움으로써 남성의 환상으로부터 이상화된 아름다운 여성신체를 부정하고, 종반부에서는 춤의 동적이고 감응적인 운동감을 강조해 시각적 형태의 신체 포즈, 즉 보이기만을 위한 춤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여성 무용수의 움직임의 주체성, 능동성의 회복을 시도한다. 요컨대 <갈라테이아>에서 안무가가 탈피하고자 한 여성성은 나 자신이 배제된 남성, 타인의 시선에 의해 일괄되게 규정되는 아름답고 순종적인 신체의 미적 형상이며, 이와 동시에 추구하고자 한 여성성은 스스로 주체가 되어 자신을 드러내는 개별적 신체의 능동성이다. 안무가는 재기발랄한 무대 연출과 독창적인 안무를 통해 무용 감상의 경험을 시각적 경험에서 공감각적 경험으로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이재인
이재인
janelee9145@gmail.com
이대 한국무용 전공. 일본 동경대 석사/박사(미학예술학). 암흑부토를 중심으로 일본 전위무용과 현대무용 연구. 현재는 한국의 동시대적 춤작품의 분석, 비평,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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