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고단한 세상살이 어떻게 풀어낼까 - '산전수전 토별가'
[공연리뷰] 고단한 세상살이 어떻게 풀어낼까 - '산전수전 토별가'
  • 유화정 무용이론가
  • 승인 2023.10.05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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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프리뷰=서울] 유화정 무용이론가 = 객석에서 일어서는 순간 뇌리에서 깔끔히 지워지는 공연이 있는가 하면, 보름이 지나도록 잔상이 남아 곱씹는 공연이 있다. 곱씹을 수 있는 공연을 관람한 날은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쁘다. 무대 위에서 실행된 소리와 몸짓은 허공에 흩어지는 무형의 것인데 관객의 기억 속에 각인되어 어디에나 살아 숨 쉬니까, 그 과정의 목격과 체험이 마법처럼 신비롭다. 누구나 그러한 공연을 보고 싶고, 하고 싶고, 만들고 싶은 마음을 품는다. 하지만 마법 같은 성공의 이치를 알기란 어렵다. 과연 무엇이 성공적인 공연을 이루는 에센스일지. 공연의 골자(骨子)가 확실한 가운데 매력 한 꺼풀 얹어지면 반은 성공이라는데, 보다 구체적인 비결은 세상에 노출되지 않았다. 다만 성공적으로 끝난 공연에서 드러나는 특징은 분명하다. 공연이 좋았던 이유들이 극장 로비에서, 인근 음식점에서, 목격자들의 증언에 의해 울려 퍼질 때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사람이 무언가에 매료되면 관대해지는 것인지, 공연이 싫은 이유는 갖가지인데 좋은 이유는 매한가지라는 점도 재미있다.

지난 9월 16일, 작품이 좋았던 이유를 오래도록 곱씹게 되는 공연을 만났다.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관람한 국립민속국악원의 창극 <산전수전 토별가>는 판소리 <수궁가>를 바탕으로 절제와 자부(自負), 여유와 긴장, 익살과 품위를 자유자재로 주무르며 관객이 누려야 할 것을 충실히 선사한 무대였다. 지난 5월 19일부터 21일까지 남원 국립민속국악원 예원당에서 초연된 작품인데, 사랑과 인정을 한 몸에 받아 재공연되었다. <수궁가>는 그간 수많은 창극 단체에 의해 공연된 바 있으나 육지와 심해를 오가는 스펙터클한 서사 속에서 별주부의 충심과 토끼의 지혜 중 어디에 중점을 두는지에 따라 그 해석이 다양했다. 조광화 연출가는 이번 무대에서 서민으로서의 별주부와 토끼의 삶, 그리고 연대에 주목했다. 또 별주부의 가족들을 부각시켜 포악한 권력자들에 맞서는 가족애를 그려내 독창적인 색을 취했다. 바쁜 세상살이를 반영하듯 한 시간을 채 넘기지 않는 공연이 대세인 요즘, 150여 분간 진행되는 공연에 걱정이 앞섰으나, 시간은 상대적이라고 했던가! 박장대소하고 눈물짓고 사유하는 동안 시간은 금세 흘렀다.

'산전수전 토별가' (사진제공=국립국악원)
'산전수전 토별가' (사진제공=국립국악원)
'산전수전 토별가' (사진제공=국립국악원)
'산전수전 토별가' (사진제공=국립국악원)

시대, 지역, 장르를 뒤섞고 무대의 경계마저 넘본다.

창극은 본질적으로 오묘하다. 춤, 노래, 연기가 뒤섞인 종합예술장르인데 동양과 서양의 무대극이 만난 지역적 혼합물이기도 하다. 또 전통의 미감에 현대의 철학을 얹어 시대적으로도 자유로이 넘나든다. 사방팔방으로 융합된 창극은 공략할 부분이 많다는 점에서 유리하다. 웃음 터지는 대사, 심금 울리는 거친 소리, 사유(思惟)를 이끄는 연출 포인트 등 깊은 잔상으로 남을 조건이 풍부하다. 한편 다채로운 요소들을 모조리 신경 쓰고 조화로이 배치하지 않으면 맥락 잃기 십상이라는 점에서 불리하다. 연출가는 보다 넓은 시야를 가져야 하고 배우는 다재다능해야 한다. 이런들 저런들 관객은 볼거리, 이야깃거리 많아 즐겁다. 창극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 즉 서민적인 이야기에 울고 웃을 준비가 된 관객들 앞에서 배우와 스태프들은 관객의 기대를 충족하면서도 예상을 뒤엎는 새로움을 겸비해야 한다. <산전수전 토별가>의 구성원들은 노련하면서도 신선하게 각자의 매력을 쏟아내며 오묘한 시공간을 형성했다.

납작하게 다가가서 입체적으로 공략하다.

막을 올린 무대가 훤하고 균형감 있다. 네모진 무대 위에 네모진 평상을 올려 안정감을 강조했다. 배우들의 몸짓과 동선 역시 관객 시선에 최적화된 방향으로 질서정연하여, 프로시니엄 무대의 이점을 살렸다. 여자 광대들과 남자 광대들이 길게 늘어서 서로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주고받고, 객석을 향해 크게 합창할 때는 시선을 멀찍이 던진다. 그리고는 불시에 관객 한 명 한 명 눈 맞춤하며 ‘세상살이 어떻게 괜찮으시냐’고 친근히 말 건넨다. 평상에는 산전수전(山戰水戰)의 네 글자가 반듯이 비춰지고, 무대 뒷면에는 팔난(八難)을 의미하는 한자(배고픔, 목마름, 추위, 더위, 물, 불, 칼, 질병)가 여덟 조각의 걸개로 납작하게 걸려있다. 이후 등장하는 토끼와 별주부 모양의 걸개도 납작하여 나란히 눕혀놓은 한 폭의 동양화 느낌이다.

'산전수전 토별가' (사진제공=국립국악원)
'산전수전 토별가' (사진제공=국립국악원)

별주부 앞에 누운 용왕의 기다란 몸체는 무용수들이 하나씩 들고 있는 조각들로 표현하고, 토끼 앞에 앉은 호랑이의 몸체 또한 ‘머리, 오른쪽 앞발, 꼬리’의 세 조각으로만 연출한다. 화려한 색감과 질감으로 동물의 몸체를 사실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특징적인 몇 개의 신체부위만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사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수궁가>의 기본 서사는 물론 등장 동물들의 외형과 성격을 익히 알기 때문에 불필요한 묘사와 설명을 장황히 늘어놓을 필요가 없다. 전통공연예술이 관객과 나눌 수 있는 암묵의 약속이자 생략된 기호인 셈이다. 영리한 생략 기법으로 무대가 묘사하지 않는 입체감을 관객의 상상에 맡겼다.

‘나는 멧돼지를 연기하는 배우라서 멧돼지 인형을 들었다.’

국립민속국악원의 <산전수전 토별가>는 특별한 방식으로 갖가지 동물을 무대 위에 재현한다. 별주부와 토끼를 포함하여 역할을 부여받은 모든 캐릭터들, 즉 여우, 멧돼지, 너구리 등 산짐승과 잉어, 홍어, 오징어, 뻘떡게, 전기장어 등 바다생물은 실감나는 동물 탈을 쓰거나 분장을 하지 않는 대신, 꼭두 형태의 퍼핏(인형)을 매달아 놓은 기다란 장대를 들고 다니며 자신의 역할을 표시한다. ‘나는 멧돼지다’가 아니라 ‘나는 멧돼지 역할을 하는 배우라서 멧돼지 인형을 들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관객은 극 속으로 침잠해 몰입하기 보다는 한 걸음 뒤에서 배우가 자신의 역할을 어떻게 대하는지, 연출은 소품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생각할 수 있다.

배우들은 소리를 할 때나 연기를 할 때나, 손에 든 장대 인형을 놓지 않는다. 적절하게 힘을 가해 인형이 흔들거리며 말을 하는 것처럼 연출하고, 달려갈 때는 사정없이 흔들고, 잘 때는 인형의 들숨 날숨을 제대로 표현한다. 인형은 나무질감의 얇은 와이어 프레임으로 만들어졌는데 특히 토끼와 별주부 인형이 필요 이상으로 귀엽게 만들어졌다. 토끼의 귀, 별주부의 뒷다리는 가벼워서 연신 팔랑거리고, 볼록 나온 아랫배가 만져보고 싶을 만큼 통실통실하다. 때로는 배우가 무릎 위에 인형을 눕혀 어루만지는데 극 내내 동일시되었던 배우와 인형의 관계가 2인칭의 관계로 변화하는 순간이다.

'산전수전 토별가' (사진제공=국립국악원)
'산전수전 토별가' (사진제공=국립국악원)

인형만 귀여운 것이 아니다. 배우들의 의상은 한복의 기본 구조를 살리되 부분적인 변형을 가해 깜찍하고 우스운 광대의 느낌을 살린다. 토끼 역의 배우는 좌우 서로 다른 색의 신발과 옷을 입어 이른바 짝짝이 언밸런스 패션을 선보인다. 방언이 고루 섞인 대사는 ‘그 짝도 내 아래요!’ ‘토끼똥 환약, 자라탕 가마솥’ ‘그 때 그냥 남생이랑 결혼할 걸!’을 연신 외치며 폭소를 부른다. 진지하게 대사하더니 갑자기 ‘옆돌기’하며 퇴장하는 의원을 보고 어찌 웃지 않으랴. 대사와 노래는 전통의 묵직함을 고수하는데 춤과 몸짓은 현대적이라 동시대 관객들의 웃음코드를 정확히 겨냥한다.

'산전수전 토별가' (사진제공=국립국악원)
'산전수전 토별가' (사진제공=국립국악원)

소리로 세상을 풀자!

<산전수전 토별가>는 충심과 가족애로 똘똘 뭉친 별주부가 팔난을 지혜롭게 헤쳐 나가는 토끼와 연대하며 새로운 미래를 그리는 이야기다. 별주부는 바다세상의 말단 신하이지만 용왕에 대한 충심이 높아 얼굴도 모르는 토끼의 간을 구하러 육지로 떠난다. 토끼에게 농락당해 간 대신 똥을 받았을 때도 아내와 두 자녀를 걱정하며 쉽사리 도망가지 못한다. 관객은 별주부의 모습에서 가정과 사회를 관통하는 동시대의 복잡한 관계와 개인의 미약함을 떠올리며 공감한다. 극의 초중반까지는 토끼와 별주부가 대응구도를 이루지만 용왕, 삼해왕, 호랑이왕, 독수리왕의 탐욕에 정신없이 희생되는 연약한 서민이라는 공통점을 인식하고 연대한다.

동물들은 ‘못된 짐승은 어디에나 있어!’라며 완벽하게 안전하고 평등한 세상은 존재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험한 세상 정신 똑바로 차리면 ‘팔난도 살만혀~’라며 생각과 태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토끼는 독수리에게 잡아먹히기 직전, 꾀를 부려 자신에게 ‘의사줌치’가 있는데 한 번도 쓰지 못하고 죽으니 아쉽다고 말한다. ‘의사줌치’는 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내놓는 요술주머니인데,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은 아니지만 토끼와 거북가족을 살려내는 생각의 힘을 상징한다. 그리고 산전, 수전, 공중전의 위기 상황마다 꺼내놓는 다채로운 토끼의 지혜가 이천오백년 뒤 대한민국에서도 꼭 필요한 덕목임을 외치며 무대가 종결된다.

각 5장, 4장으로 구성된 두 개의 막에 스물여덟가지의 곡이 삽입된 <산전수전 토별가>. 수많은 사건과 노래와 역할을 하나의 흐름으로 꿰어내기란 쉽지 않은 일인데 그 사이 웃음, 눈물, 귀여움까지 살려내며 대서사극을 완성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웃음 지으며 객석을 떠나는 모습을 보니 이 공연은 마법의 시공간을 연출하는 데 성공했다. 예악당 허공에 흩어진 배우들의 소리와 몸짓이 관객의 일상에 동행하며 살아 숨 쉴 것이다.

'산전수전 토별가' (사진제공=국립국악원)
'산전수전 토별가' (사진제공=국립국악원)
'산전수전 토별가' (사진제공=국립국악원)
'산전수전 토별가' (사진제공=국립국악원)
'산전수전 토별가'의 포스터 (사진제공=국립국악원)
'산전수전 토별가' 포스터 (사진제공=국립국악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유화정 무용이론가
유화정 무용이론가
hjyoo27@gmail.com
이대 무용과 박사. 어릴 적부터 춤춰온 몸의 기억을 머리와 손끝으로 전달해 좋은 글을 쓰고자 한다. 춤추는 사람들의 경계가 해체되는 순간을 포착할 때 짜릿함을 느낀다.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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