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논객의 춤시선-23] 아름다운 이별 - 전미숙 교수의 정년퇴임 무대를 바라보며
[낭만논객의 춤시선-23] 아름다운 이별 - 전미숙 교수의 정년퇴임 무대를 바라보며
  • 장승헌 공연기획자
  • 승인 2023.10.27 13: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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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나야 할 곳을 알고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 ‘사제동행’의 의미
전미숙교수 퇴임식(사진제공=김하영)
전미숙교수 퇴임식(사진제공=김하영)

 

[더프리뷰=서울] 장승헌 공연기획자 = 실로 오랜만에 기분 좋은 ‘사제동행’ 광경을 목도했다. 그동안 무용수로, 안무가로, 교육자로, 그리고 중년인생을 흔들림 없이 살아온 60대 중반의 현대무용가 전미숙. 그녀의 삶과 예술세계를 돌아보는 시간, 모처럼 감동적인 정년퇴임식을 지켜보며 갖가지 상념이 스쳤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우리 무용계에서 지금까지 경험한 적 없는 춤동네 풍경에 흐뭇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며칠 동안 필자의 일상을 즐겁게 만들어 주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시인, 무용평론가, 화가 등 전 방위 예술가로 평가받아 온 탐미주의자 김영태(1936-2007) 선생은 자신의 인생 후반기를 돌아보며 <뒷모습>이란 시를 남겼다. 이 짧은 시의 은유적 표현에 무척 공감되는 이즈음이다.

뒷모습

앞모습은 말을 하지만

뒷모습은 말이 없다

인간은 나이 들어

한 장의 뒷모습을 두고 간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다 지나간 뒤에 남아있는.

지난 9월 2일 (토) 오후 3시, 한국예술종합학교 석관동 캠퍼스 공연장에는 대한민국의 대표 무용인들과 문화예술계 인사 350명 이상이 이색적인 정년퇴임식에 함께했다.

전미숙교수 퇴임식(사진제공=김하영)
전미숙교수 퇴임식(사진제공=김하영)

 

완성도 높은 한 편의 작품을 보듯, 한예종을 졸업하고 이미 스타급이 된 무용가들이 저마다의 색깔로 전미숙 교수와 함께했던 작품의 장면들을 연상시키는 ‘옴니버스 댄스 콘서트’를 펼치는 동안 객석에 자리한 많은 이들은 즐겁게 혹은 먹먹하게 춤풍경 속으로 빠져들었다.

지난 1963년 이화여자대학교에 국내 대학 최초로 무용학과가 설립돼 올해 60주년을 맞았다. 지난 197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말까지 이어진 아카데미즘을 근간으로 ‘대학무용’이 대세를 이루던 때가 분명 있었다. 여러 대학동문 단체들의 활동 역시 저마다 다양한 스펙트럼을 펼쳐 보이던 때도 분명 있었다. 지난 1975년 12월 5일 창단된 한국컨템포러리무용단에 이어 1981년 현대무용단 탐이 창단, 또 다른 분위기를 이끌었다.

이 무용단의 일원으로 지난 1987년 안무가 전미숙은 대한민국무용제 참가작 <얼굴 찾기>로 안무가로서의 존재감을 무용계에 강하게 찍은 바 있다. 이후, 한국현대춤작가 12인전 등 몇 번의 기획공연을 통해 그녀는 동시대 여성적 관점에서 바라본 독특한 한국적 표현주의 형식의 수작들을 연이어 내놓았다. 중견 여성안무가 그룹의 대표적 춤작가로 그 이름에 걸맞은 인상적인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해 나갔다. 특유의 여성주의의 결이 스며든 작업의 결과물들을 쉼 없이 꾸준하게 다채로운 춤풍경으로 펼쳐 나가는 가운데 작품성 높은 안무작 목록들을 차곡차곡 채워나갔다.

전미숙교수 퇴임식(사진제공=김하영)
전미숙교수 퇴임식 (사진=김하영)

무용평론가 김태원 선생은 리뷰를 통해 전미숙의 작품을 ‘페미니스트, 표현주의적 무용가’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이러한 주변 시선에 정작 그녀는 "그저 내 얘기를 했을 뿐, 작품에 의도적으로 페미니즘적 시각을 반영하고 여성성을 나타내려는 의도는 사실 없었다"라고 했지만, 그녀는 35년 넘도록 지속적인 작품활동을 통해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했다. 해서 문화적, 사회적 현상과 결합해 예술가의 무의식 속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새삼 그 가치를 소중하게 절감하게 되었다는 인터뷰를 떠올려 본다.

전미숙교수 퇴임식(사진제공=김하영)
전미숙교수 퇴임식 (사진=김하영)

필자가 기억하고 있는 그녀의 안무작들을 추슬러 본다. <58년 개띠>(1993), <아듀, 마이 러브>(2001), <반갑습니까?>(2005), <가지마세요>(2006), <Talk to Igor: 결혼, 그에게 말하다>(2012), <바우(Bow)>(2014), <아모레, 아모레 미오>(2010), <거의 새로운 춤>(2022) 등 수십 편의 명품은 그녀를 컨템퍼러리 춤 안무가의 선두에 세웠다. 인간의 본성과 삶의 양면성, 그 위에 작품 주제의식이 오롯이 촘촘하게 그리고 밀도 있게 이루어져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안무가 전미숙은 자전적 이야기를 근간으로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경험해 봤을 법한 춤 분위기를 얘기해 주는 특별한 능력을 소지한 춤작가이다. 컨템퍼러리 작품의 경우 안무자의 개인적인 소재가 관객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며 기억할만한 잔상을 남기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전미숙은 솔로춤에서는 자신의 자존감을 오브제나 무대미술의 기술과 확장성을 통해 대작 형식으로 느끼게 하는 동안, 그녀가 표현하는 모든 움직임이 춤이 되는 신묘한 춤기운으로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는 마력의 소유자이다. 아울러 지난 2015년 대학로 아르코대극장 무대를 가득 채운 실제 집 공간을 배경으로 피아노 한 대와 찻잔 등 오브제를 통해 인간 본연의 관계와 사랑에 대한 의미들을 개성 강한 여러 스타 무용수들을 통해 새로운 모습들을 끌어냈다. 그간 자신의 작품에 영감을 준 피나 바우쉬(1940-2009)를 오마주하는 나름의 공연 형식의 의미를 가진 <아모레, 아모레 미오>를 필자는 그녀의 춤인생 대표작으로 꼽고 싶다. 신창호 차진엽 김보라 이용우 최수진 김동규 박상미 김성훈 등 당시 최고의 LDP 무용단 주역급 무용수들의 저마다의 개성과 앙상블이 어우러져 전미숙의 인생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른다. 이 작품의 레퍼토리화를 위한 시도가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무산되던 중, 이번 정년 퇴임식 공연이 이 작품을 변주해 일부분 당시 기억을 소환시켜 준 초연 무용수들과 새로운 중견 무용수들이 합세하여 공연인 듯 헌정무대인 듯 아련한 작품 한 편을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에 선물해 주었다. 전반적 분위기는 최근작 <거의 새로운 춤>처럼 심포지움과 퍼포먼스 형식으로 작품의 형식을 공고하게 펼쳐 놓았다.

무대 상수에서 피아노 한 대를 힘겹게 밀며 입장하는 김보라는 명료한 발음으로 연습실에서 스스럼없이 건네는 일상적 이야기들을 독백으로 쏟아 낸다. 반대편에서 검정 수트를 장착한 신창호의 등장으로 둘의 주고받는 서사들이 한껏 흥미롭고 매력적이다. 일찌감치 유럽 유학에서 돌아와 독자적 행보를 걷고 있는 안무가 차진엽은 바닥에 둥근 원들을 그린다. 아울러 내레이션을 통해 스승의 춤 행보를 얘기한다. 그리고 무대 가운데 자리에 원을 그린 다음 그 자리에 대한 의미를 들려준다. 그녀를 위해... 어느새 다소 두터운 붉은 직사각형 천을 몸에 휘감은 김판선의 느린 움직임은 전미숙의 작품 속 내면적 메타포를 표현하고 있었다. 다소 느린 움직임으로 멀리서 노래하듯 내공 있는 춤과 함께 스스로 작품을 재해석했다. 그리고 김형민의 독일 탄츠테아터 형식의 솔로춤은 의자 하나에 의지해 자신의 감성만으로 그 응어리를 숫자를 세며 묘한 분위기로 이끌며 그녀 특유의 강렬한 목소리에 담아냈다. 잠시 후, 무대 오른쪽 벽에 조명이 들어오자 무언가를 적은 메모를 붙인 김성훈이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어깻짓으로 힙한 움직임으로 잠시 시선을 모은다. 재즈풍의 음악이 속도감에 얹힐 무렵, 이윽고 한예종 실기과(현대무용 전공) 재학생들이 흥겨운 군무를 추며 파티장으로 들어서자 일순간 분위기가 바뀌어 버린다. 영상이 묘하게 오버랩되며 그간의 기억들, 연습실 풍경, 그리고 수 십 명의 제자들이 영상으로 참여한 스승에 대한 감사의 인사와 추억담은 눈이 시리도록 빼곡한 그녀의 제자들의 얼굴이 밤하늘의 별처럼 박혀져 새겨진다. 서로 어울려 춤을 추는 가운데 객석에 있던 몇몇 지인들이 무대로 소환되어 함께 어울리며 흥겨운 난장풍경으로 박수갈채를 받기에 이른다. 오랜만에 컴컴한 공연장에서 체감한 행복감이 스윽 밀려왔다.

이윽고 한예종 김대진 총장의 축사 그리고 동료 교수인자 오랜 친구인 발레전공 김선희 교수의 송별사가 이어졌다. 한편, 늘 우리에게 에너지를 던져 주는 전미숙 선생의 제1호 제자를 자처하는 현대무용가 안은미는 그녀 나름의 에피소드를 가벼운 농담으로 풀어냈다. 그녀는 급기야 전미숙 선생을 무대 중간으로 이끌어 손을 꼬옥 잡고 <스승의 은혜>를 선창하며 객석에 있는 모든 참석자들을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독려했고 참석자들은 합창으로 응답했다. 이윽고 피아니스트인 김대진 총장의 즉석연주 <엘리제를 위하여>가 울려 퍼지며 정년퇴임식은 1시간 여의 1부 잔치가 끝이 났다.

2부는 공연장 로비 탁자마다에 샴페인과 간단한 음료와 음식이 차려져 있었고, 모두 로비에서 저마다 기념사진 촬영과 정겨운 축하 모임이 진행되고 있었다. 또한 전미숙 교수가 준비한 붉은 메모장(일기장)을 선물로 받아드니 무슨 고희 잔칫집, 하객으로 참석한 느낌이 온기로 전해진다. 삼삼오오 주인공 전미숙 교수와 기념사진을 찍으며 환한 얼굴로 진심 축하의 인사를 건네기에 이른다. ‘소리 없이 강한’ 그녀가 교육자로 예술가로 활동해 온 그간의 시간들을 돌아 본 이번 퇴임행사에 대해 저마다 이구동성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필자 역시 그동안 오랜 시간, 우리 무용계 여러 행사나 축제, 그리고 학회행사 및 시상식에도 참석해 봤지만 이번 전미숙 교수 정년퇴임식을 지켜보며 이것이 하나의 아름다운 사례를 남긴 것이라 감히 얘기하고 싶다.

잠시 후, 로비 한 켠에 20-30여 명의 학교 관계자와 졸업생 대표, 무용가와 평론가들이 모여 제3부 아티스트 토크(진행 전수환)까지 훈훈한 분위기로 이어졌다. 저마다의 시선으로 바라본 전미숙 교수와의 기억과 경험, 그리고 자신들이 느끼고 바라본 전미숙에 대한 추억 그리고 단편들을 저마다의 목소리로 마이크에 담아냈다. 필자 역시 팬데믹 직전 동행했던 네덜란드 댄스페스티벌 <BOW> 공연 기억을 추스르는 가운데, 필자가 기억하는 그녀의 대표작 5편 목록을 나름대로 선별하여 전달하고는 다음 일정을 핑계로 그 공간을 빠르게 도망쳐 나왔다. 전미숙 교수는 정년퇴임을 앞둔 어느 날, 무용월간지 인터뷰를 통해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동안 자신에게 쉼 없이 주어졌던 숙제에 감사하며 이제 숙제가 아닌 축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 나가겠다.”라는 의미심장한 내용을 담담하게 피력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개원이 벌써 27년이 훌쩍 넘어섰다. 1기 졸업생부터 재학생들까지 스스로 꾸민 스승의 정년퇴임식 풍경은 매우 아름다운 행사로 한동안 여러 사람의 뇌리에 기억될 것이리라. <Talk to Her> - 이날 공연의 제목이 절묘하게 영상으로 맺힌다. 독일의 거장 피나 바우쉬를 너무도 존경했던 스페인 영화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가 만든 동명의 영화 제목이 문득 소환되기에 이른다. 아울러 팬심 제1호로 자처하며 이 문구로 이번 칼럼을 갈무리해 본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자의 뒷모습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그녀의 대표작 중 몇 편을 오랫동안 기억하기로 다짐한다. <아모레 아모레 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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