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동시대 표현은 여전한 과제
[공연리뷰] 동시대 표현은 여전한 과제
  •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3.10.13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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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오페라단 '라 트라비아타', 9월 21-24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더프리뷰=서울]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국립오페라단이 새로운 프러덕션의 <라 트라비아타>를 공개했다. 국립오페라단과 <마농> <호프만의 이야기>를 작업했던 뱅상 부사르가 연출을 맡았다.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원작이 알렉상드르 뒤마 피스의 <동백꽃 아가씨>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뒤마 피스의 <동백꽃 아가씨>가 1840년대 불꽃처럼 살다 간 실존 인물 마리 뒤플레시를 모델로 삼았다는 것도. 뒤마 피스의 소설은 성공을 거두었지만, 베르디는 동시대를 적나라하게 담아냈다는 이유로 검열 끝에 1백년 전으로 배경을 바꿔야 했다.

베르디의 숙원을 풀어주고 싶은 것일까. 많은 연출가들은 보다 동시대적인 무대를 보여주려고 하는 것 같다. 2021년 국립오페라단의 <라 트라비아타>를 연출했던 아르노 베르나르는 시대적 배경을 1950년대로 바꾼 바 있다. 뱅상 부사르는 한 걸음 더 나가 완전히 현대적 무대를 선보였다.

라 트라비아타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새로운 프러덕션의 첫막은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리허설 장에서 시작된다. 비올레타를 맡은 소프라노가 점차 작품에 동화되고 비올레타를 이해하며, 마침내 비올레타와 스스로를 일체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무대에는 공연 내내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다. 2막 비올레타의 별장 같은 경우는, 고층의 시티 뷰가 화려한 펜트하우스로 표현되었다. 플로라의 파티장은 하늘과 맞닿은 펜트하우스와 상반된 지하로 묘사되었고, 남장여자나 여장남자들을 등장시켜 동성애가 자연스러운 시대를 암시했다. 런웨이에 나서도 손색없을 의상들 또한 고전과 현대를 아우르는 아름다움을 뽐냈다.

라 트라비아타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연출자는 소프라노와 비올레타의 일체화를 돕기 위해 새로운 인물을 활용했다. 소프라노의 어린 시절 혹은 내면의 기억을 상징하는 어린 소녀를 등장시킨 것. 이 소녀는 소프라노와 비올레타를 연결해주는 동시에 관객과 비올레타를 연결해주는 존재였다. 소녀는 알프레도의 고백을 받고 번민하는 비올레타의 동백꽃들을 흐트러뜨리고, 제르몽과의 만남 후 이별을 결심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비올레타를 웅크리고 바라본다. 또 3막의 엔딩에서는 병석의 비올레타의 손을 잡고 일으켰다. 엔딩이 참 인상적이었다. 죽어가던 비올레타는 이 소녀의 손을 잡고 환희에 찬 표정으로 일어서 “살아나고 있어!”를 외치며 앞을 향해 걷고, 비올레타의 죽음을 확인하고 울부짖는 다른 이들의 소리가 들려왔다. 비올레타는 죽음보다 더 힘들었던 삶을 마감하고 순수한 어린 소녀의 영혼으로 구원받은 것이다.

어린 소녀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소프라노 박소영은 <라 트라비아타> 무대가 처음인데도 가장 희생적인 여인을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물론 아쉬운 점들도 있었다. 1막에서는 역할 자체가 완전한 비올레타가 아니었기에 캐릭터 해석이 조금 혼란스러웠다. 1막이 전체적으로 어수선해서 성악가의 탓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비올레타로 변화하는 과정도 다소 급진적인 느낌이었다. 2막에서 마치 회귀 드라마처럼, 소프라노가 비올레타로 각성한 것. 그럼에도 박소영은 ‘아, 그이였던가’의 끝부분에서 호흡이 살짝 짧았는데도 여운을 남겨 감동을 주었고, 전체적인 음악을 끌고가는 내공이 대단했다. 지난해 <라 보엠>의 무제타를 할 때도 느꼈지만 박소영은 리듬감이나 곡 해석력이 탁월한 성악가다. 그녀의 비올레타는 사랑하는 이를 위해 주체적으로 희생을 선택하는 여인의 내면을 치밀하게 표현했다.

비올레타 역 박소영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알프레도를 맡은 김효종 역시 1막보다 2막부터 훨씬 좋았다. 연출자의 해석이 성악가들에게 완전히 교감되었는지 확인해볼 일이다. 김효종은 2막의 ‘그녀 없이는 내게 기쁨 없네’에서 반짝이는 음색, 미끄러지듯 유연한 고음 처리, 안정적인 호흡으로 사랑에 빠진 남자를 완벽하게 연기했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철부지 소년처럼 연인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 자기의 상처만 고통스러워한다. 김효종은 사랑에 눈이 멀어 연인과 스스로를 할퀴는 알프레도를 보여주었다.

알프레도 역 김효종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제르몽의 바리톤 정승기의 윤택한 음색과 표현력도 일품이었다. 제르몽은 여인에게 희생을 요구하는 이기적인 아비이지만 그녀를 가련히 여기며 뒤늦게나마 딸로 받아들이는 선량한 마음의 소유자다. 제르몽과 비올레타의 이중창에서, 사랑 앞에 격정적인 비올레타와 무거운 마음으로 냉정하게 대하는 제르몽의 모습은 음악적으로도 연기 면으로도 매우 입체적이었다.

일반적으로 생략되곤 하는 비올레타의 아리아 2절을 복원했고, 영상으로 배경을 표현하면서 자막을 무대 중앙에 띄운 것, 상당히 단순화시킨 무대 등 새로운 시도들이 많은 프러덕션이었다. 특히 주인공 소프라노가 비올레타와 일체화되는 과정을 통해, 관객에게 비올레타를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닌 우리 곁에 존재하는 여동생이나 친구로 생각하게 한 연출자의 의도가 돋보였다.

'라 트라비아타' 공연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솔직히 이 프러덕션이 모두에게 사랑받기는 어려워 보인다. <라 트라비아타>는 아름다운 여인의 희생이 감동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그 약자가 내 동생이라면 감동할 수 있을까. 바로 옆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힘든 마음에 외면하고 싶지 않을까. 베르디가 동시대에서 1백 년 전으로 배경을 바꾼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 같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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