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리뷰] 제26회 서울세계무용축제 – 두 번째 이야기
[축제리뷰] 제26회 서울세계무용축제 – 두 번째 이야기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3.10.22 0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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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화된 발레의 현주소 스펠바운드 컨템퍼러리발레단, 최수진과 이루다

[더프리뷰=서울] 하영신 무용평론가 = 매해 서울 전역 크고 작은 극장에 갖가지 춤을 풀어 가을을 축하해온 서울세계무용축제(SIDance, 예술감독 이종호, 이하 시댄스)가 스물여섯 번째 잔치를 성료했다. 91일부터 17일까지 9개국 23개 단체의 26편 작품이 열연한 올해의 축제는 더욱 유난히 그 가두리가 넓고 깊었다. 그 인상적인 장면들을 복기한다.

제26회 시댄스 포스터

춤들을 관찰하는 일을 업으로 삼은 입장에선 고백컨대 일찍이 양식화를 선취하고 세월을 견뎌낸 클래식 발레 레퍼토리는 특별한 계기로 주어지지 않는 한 주의의 순위에서 미뤄두게 된다. 물론 클래식 발레의 완결한 양식적 춤은 지금에도 마스터피스적 위력을 발휘한다. 다만 그 춤을 소지한 등장인물, 이야기의 내용과 전개방식은 너무 오래된 낭만주의의 유산이고 게다가 경험이 축적된 나의 입장에선 더욱이 숙지된 전형에 속하니 말이다.

그렇다고 발레라는 장르의 춤을 박제된춤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시중을 떠돌던 춤을 무대라는 특정 시공간을 상정하여 작위(作爲)되는 무용예술로 세우기 위해 고안된 특유의 메소드와 테크닉은 그 자체로 여전히 유효하다. 발레의 동작적 기법은 신체의 미감을 향상시키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무용수의 몸을 멀리 있는 관객에게 전달시키고 도약과 회전 등 강화된 춤의 동작들을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구동할 수 있도록 고안된 기능적 체계이기도 하다. 유럽 무용예술 전통에의 저항으로 발기된 미국 모던댄스의 메소드들은 따지고 보면 선재한 클래식 발레의 기법으로 말미암아 성취된 것들 아니겠는가. 확장과 상승을 도모하는 클래식 발레의 에너지 구동에 대하여'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수축과 이완(contraction and release)’, 도리스 험프리(Doris Humphrey)낙하와 회복(fall and recovery)’의 원리를 말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무용예술의 진척에 더불은 메소드와 테크닉의 축적이 오늘날 무용수들의 기량을 첨예화하였고 춤작가들의 창작 지평을 넓혔다. 무대(설령 극장환경을 벗어난 공간이라 할지라도)와 관객이라는 대상이 상정되는 한 표현의 원리로서, 정동(情動, affect)의 가능성으로서, 작가와 단체의 정체성으로서, 메소드들과 테크닉들은 항존(恒存)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춤을 예술의 반열에 진입시킨 발레의 그것들은 무용예술의 형태소(形態素, morpheme: 더 이상 분석하면 뜻을 상실하는, 의미의 가장 작은 내포 단위)가 아닐까 싶다. 연관하여 의미심장한, 전위 무용예술의 아이콘이었던 윌리엄 포사이드(William Forsythe)의 최근 인터뷰(영국 가디언지(The Guardian, 20223)를 소개한다.

포사이드의 문제작 <In the Middle, Somewhat Elevated>(1987)를 필자는 아직도 인상적인 컨템퍼러리발레/컨템퍼러리댄스로 꼽는다. 그러나 어느 시점에서부턴가는 포사이드를 움직임을 활용하는 미술가로 여겨야 하는 것 아닌가 의혹해야 했다. 나는 그가 춤과 안무의 한계를 너무 멀리 밀고 나아갔다고 섭섭해하였다. 그랬던 그가 최근작들 <Blake Works I>(2016), <Playlist(track 1,2)>(2018) 등으로부터는 선회했다. 대중음악의 리듬과 음색을 구현하는 동시대적 운동감각의 특질적 발휘, 그런데 <In the Middle, Somewhat Elevated>처럼 선연히 발레로 특정 가능한 춤으로 회귀한 것이다. 이에 가디언지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작품을 통해 클래식 발레로부터 멀리 나아갔던 당신은 왜 다시 클래시컬한 발레로 돌아가나요?(Why go back to classical ballet when you had travelled so far from it in your work?)” 이에 포사이드는 발레는 알파벳과 같기 때문입니다. (발레를 배척한다면) 셰익스피어 이후 더 이상의 작문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알파벳 철자들과 그 철자들로 만들어진 단어들을 사용했습니다. 발레의 알파벳은 영원합니다. 그저 그것을 사용하기만 하면 됩니다(Ballet is like the alphabet. It’s like saying there is no more writing after Shakespeare. He used letters from the alphabet and words that were made with letters. The alphabet of ballet is eternal you just have to use it.).”라고 답했다.

무용예술의 형태소로서 발레도 동시대 춤의 미감과 의미를 편직해오고 있다. 그것이 충족적일 때, 관행적 동작을 연결하는 앙셴망(enchainement) 이상의 작가적 발화로 감지될 때, (클래식발레작품처럼) 여성 혹은 특정 신분에 한정된 드라마가 아닌 공동의 서사로 우리네 삶에 공명해올 때, 그렇다면 컨템퍼러리발레는 여타의 계열에서보다 확연히 예술적이다. 올해 시댄스 무대에서 발레의 종주국 이탈리아에서 온 스펠바운드 컨템퍼러리발레단은 트리플 빌과 대표작 <비발디아나(Vivaldiana)>로 컨템퍼러리발레의 현재적 주소와 그 경지를 공개하였다. 고도의 테크닉으로 숙련된 무용수들은 너나할 것 없이 표현의 깊숙한 지대를 춤추어내었고 이들의 기량을 바탕으로 춤의 작가들은 완연한 춤의 발현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베어 내었다.

스펠바운드 컨템퍼러리발레단 ‘비발디아나’ ©박상윤
스펠바운드 컨템퍼러리발레단 ‘비발디아나’ ©박상윤

트리플 빌의 첫 작품은 객원안무가 마르코스 모라우(Marcos Morau)<화성(Marte)>. 20회 시댄스를 통해 선보였던 그 자신의 단체 라 베로날(La Veronal)<죽은 새들(Los Pájaros Muertos)>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 모라우는 현대적 극작과 생동하는 이미지와 사운드, 그리고 표출적인 동작으로 강렬한 토털씨어터의 감도를 운영하는 작가다. 생경한 세계 내 이질적 생으로써 우리 삶의 진면모를 그린 <화성> 역시 압도적인 물질성으로부터 구축된다. 세상의 심부(深部)건 외계건, 모라우가 제시한 일상 밖 초탈적 세계의 명징한 빛은 개체들을 삼켜버리고야 마는 두터운 어둠을 닮았다. 아홉 명의 무용수들은 그 차갑고 짙은 세계를 마찰하고 저항하며 살아낸다(어둑한 감청으로 시작한 작품은 선연한 붉음으로 마감된다). 여섯 개의 형광등으로 직선과 각진 도형의 인공(人工)을 출현시키고, 복면을 벗고 비로소 개체로 거듭난 그들은 탈각(脫角)적으로 분절과 연동 사이를 종횡하는, 중력의 영향력에서와는 확연히 다른 리듬과 강도의 움직임으로 단독을, 작용을, 공생의 사태를 빚는다. 삶의 출현과 생의 과정을 응축한 이 이질적 질감의 춤들은 오히려 생명의 강렬한 사태들을 증빙해주었다.

스펠바운드 컨템퍼러리발레단, 마르코스 모라우의 ‘화성’ ©박상윤
스펠바운드 컨템퍼러리발레단, 마르코스 모라우의 ‘화성’ ©박상윤

단체의 상임안무가이자 예술감독인 마우로 아스톨피(Mauro Astolfi)의 소품 <신뢰(Trust)>10여 분 남짓의 작은 춤이지만 관계의 모든 양상을 펼친다(이 춤의 장면들은 <The Real You>에도 포함된다). 흰색 민소매 티셔츠와 검은 면바지, 하얀 양말, 일상적 차림의 두 여성 무용수가 마주침으로부터 사랑의 순간으로까지, 탐색과 반목과 화해와 결속에 개연하는 기쁨과 슬픔과 분노와 절망과 유머와 환희의 사태를 춤춘다. 생상스(Saint-Saëns)<동물의 사육제(Le carnaval des animaux)> 백조의 악장으로 마무리되는 작품 내 은밀한 서사는 그 음악처럼 익숙하고도 풍요로운 정감을 발현했다.

스펠바운드 컨템퍼러리발레단, ‘신뢰’ ©박상윤
스펠바운드 컨템퍼러리발레단 ‘신뢰’ ©박상윤

세 번째 작품 <The Real You>는 아스톨피와 단체의 본격적인 군무다. 막이 오르면 엎드려 있던 한 남자가 꿈틀거리다 일어선다. 주변부 군데군데 사람들이 무기력하게 주저앉아 있다. 종말물(post-apocalypse)의 한 장면 같기도 한 도입부로부터 작품은 군상(群像)의 역사로 해독 가능한 세계의 운동을 펼친다. 충동들이 상충하는, 심리적이건 실질적이건 무너진 곳, 폐허로부터 비로소 진실을 찾아가는 그 여정. 배회해보지만 쉽사리 세계를 구동시키지 못하고 절망하는 남자에게 다른 한 사람이 다가와 남자의 동작을 따른다. 동기화(同期化, synchronized) 되던 동작은 이내 분열하고 모든 관계들이 술렁이고, 비장하고 암울했던 음악에 자막이 제공되지 않은 채 소통 불가능성으로 제시되는 외국어 대사의 난발이 병치되면 관계의 양상은 쟁투적으로 전환된다.

지면 가까이 웅크려 움직이던 사람들은 필사적인 기립의, 생존을 거행한다. 움직임이 극렬해지면 각국의 언어들은 위험을 고지하고 종종 해독 불가능해지는 그 언어들은 역시 식별 불가능한 자연 혹은 외계의 소리들과 중첩하며 위기감을 고취시킨다. 그에 내연하여, 단독과 다중(多衆), 정형과 비정형의 관계로 얽히고설키는 장면들의 동시다발적 아상블라주(assenmblage)가 공동체적 생 그 자체의 입체적 양상을 빚으며 삶의 저의를 뒤진다. 충동적이면서도 어느 순간 모서리가 날렵히 살아있고 사지 말단으로까지 극렬히 항진하는 무용수들의 증폭적 움직임은 세밀하고 강도 높은 훈련의 과정을 투사하지만 발레의 고전적 인상과는 먼, 아스톨피의 화술을 확인시켜 준다.

스펠바운드 컨템퍼러리발레단, ‘The Real You’ ©박상윤
스펠바운드 컨템퍼러리발레단 ‘The Real You’ ©박상윤

전날의 트리플 빌에 이어 시댄스 폐막무대를 채운 <비발디아나>(2019년 초연)1994년에 창단된 단체의 축적된 역량이 총망라된 작품이었다. 제목으로부터 유추되다시피 <비발디아나>는 바로크 시대의 이탈리아 작곡가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의 음악을 섭렵한다. 바로크-바흐-대위법-규칙과 조화 등으로 일렬되는 선입견을 부수는, 아스톨피가 선곡한 비발디의 음악들에는 오히려 격정적인 정감과 강렬한 충동이 도사리고 있었다. 비발디의 음악과 사이사이 배치한 침묵을 축으로 펼쳐내는 아스톨피의 춤 역시 고전적 문법을 파기하고 <The Real You>의 확장과 심화, 세계의 심부로 침잠하는 대서사를 짓는다. 이 작품에 진입하기 위해 비발디의 시대, 그의 삶, 그의 음악, 행여 아리아의 가사 등에 관한 상세한 지식은 필요치 않을 성 싶다. 작품의 내역인 다층적 무기명 서사를 엮는 건 비발디 음악에 길항하는 아스톨피의 춤이니까.

작품은 뒷걸음질로 어둑한 무대로 나온 한 남자로부터 시작한다. 자신의 머리에 권총을 겨누는 동작을 해보이고는 무너지고 일어서고 주저앉고 다시 일어서고 비틀거리고 다시 머리에 권총을 겨누고 무너지고 비틀거리며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그는 일찍이 사제 서품을 받았으나 음악에 전념, 객사로 생을 마감한 비발디의 페르소나로 닫히지 않는다. 그와 함께, 이내 무대로 쏟아져 들어와 도합 아홉의 군상을 이루는 남녀 무용수들은 각기, 매양 우리 모두의 초상이었다. 군무와 2인무와 4인무 등으로 교차, 중첩, 강화되는 관계성은 <The Real You>의 내밀한 서사로부터 나아와 <봄의 제전> , 역사의 원형성을 담보하는 대서사의 위상으로 자리를 옮긴다. 먹먹해지도록 생의 순간들을 깊숙이 추어낸 이 작품의 위력으로 이번 춤 축제의 그림자가 제법 길어진다.

스펠바운드 컨템퍼러리발레단 ‘비발디아나’ ©박상윤
스펠바운드 컨템퍼러리발레단 ‘비발디아나’ ©박상윤
스펠바운드 컨템퍼러리발레단 ‘비발디아나’ ©박상윤
스펠바운드 컨템퍼러리발레단 ‘비발디아나’ ©박상윤

동시대 발레의 현재적 첨점(尖占)을 찍어준 스펠바운드 컨템퍼러리발레단의 방문에 더불어 올 해의 시댄스에는 발레의 동시대성을 확보해나가고 있는 우리네 두 작가, 최수진과 이루다의 작품도 소개되었다. 대학로 쿼드 극장에서 펼쳐진 최수진의 <Alone>은 제목이 적시하는 바 개체가 지닌 숙명적 외로움에 관한 독무로부터 신영준과의 파드되로 나아와 끝끝내 결렬되는 관계로부터 더욱이 확인되는 외로움을 춤췄다. 그러나 외로움은 그녀로부터의 내역이 아니었으니

그녀는 챗GPT가 구성한 외로움을 연기했다. 물론 시더 레이크 컨템퍼러리 발레단(Cedar Lake Contemporary Ballet: 뉴욕을 근거지로 2003년에 창단, 2015년에 해단할 때까지 혁신적인 안무가들의 레퍼토리로 컨템퍼러리발레의 선구적 경향을 주도했던 단체)에서의 이력에서 다져진, 탁월한 기량으로 몸의 가동과 표현의 한계를 뚫고나가는 최수진의 춤은 여전히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그 춤을 포위한 패셔너블한 세계가 오히려 춤의 인상을 잠식한다. 트래버스 스테이지(traverse stage : 패션쇼 런웨이처럼 가로가 긴 직사각형 공간을 중앙에 두고 관객석을 마주보게 배치한 무대구성)를 유동하는 프로젝션 맵핑(projection mapping) 이미지들은 너무 화려했고 GPT가 일인칭 독백을 빙자하며 방사하는 글귀들은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문학적 역량을 발휘하지 못한 채 결국 시각이미지적으로 산화했으니 나는 최수진의 춤,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외로움에 진득이 가닿을 수가 없었다.

최수진 ‘Alone’ ©박상윤
최수진 ‘Alone’ ©박상윤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에서 펼쳐진 이루다의 30여 분 소품 <디스토피아 3-중독>의 가능성은 양가(兩價) 사이에서 팽팽히 겨루어진다. 단체명 블랙토(Black Toe)’의 작명으로 천명했듯 핑크와 화이트의 여리고 가벼운 낭만주의 망령들을 흔적 없이 지우고 블랙의 타이트한 의상과 대범한 망사 스타킹과 부츠 차림 여전사로 변모, 흑백으로 충돌하고 증식하는 이미지와 조명이 적시하는 어둡고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세계에서 격돌하는 이루다의 춤은 발레의 계열로부터는 과연 파격적이다. 그러나 현대무용 계열의 컨템퍼러리댄스는 물론 여타의 예술장르에서도 익히 만연했던 묵시록의 정황에 비추어보면 중언부언, 작가 고유의 것이라 할 만한 세계인식과 그에 기인하는 특유의 표현은 발견되지 않는다. 흐물거리는 은박지로 조형된 허물적 인간, 누드톤 드로즈로 표상된 맨몸으로 남은 최후의 인간, 그 상투적 이미지에 결착된 춤의 격렬함은 그조차 상투의 혐의로 포박된다. 작가가 자신의 미감, 스타일을 구축하는 것은 몹시도 중요하다. 안무와 연출을 총괄하고 있는 이루다의 감각적인 스타일은 우리 발레에서는, 아니 세계 발레의 맥락에서도 특이점인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 모드가 내포하는 의미의 영역 역시, 어쩌면 더더욱 중요하지 않겠는가. 그 강화된 감각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에 관한 질문은 생략되지 않을 것이다.

이루다 ‘디스토피아3-중독’ ©박상윤
이루다 ‘디스토피아3-중독’ ©박상윤

올 가을 시댄스가 차린 춤들의 만찬에서 필자는 죽음과 노화를 다룬 특집과 컨템퍼러리발레를 음미하였다. 이 외에도 프랑스 특유의 미감과 장년의 몸에 배인 원숙한 그루브로 커머셜 장르의 색다른 흥취를 달궈주었던 아르무브(Cie Art Mouv')제임스 B를 기다리며(Waiting for James B), 섬세히 주조된 영상과 조명과 사운드라는 시료(試料)에 긴밀하게 반응하는 일원론적 몸의 구동을 건축적으로 펼치며 미감적으로도 의미론적으로도 충족감을 선사했던 유빈댄스 이나현의 <감각자료>, 조명으로 축조한 사각공간에서 강밀도(强密度)의 존재론을 전사(轉寫)한 김수정의 <생의 찬미>, 감축되는 세계를 통과하는 이인무를 통해 관계를 면밀히 탐구한 호주 출신 안무가 루시 게린(Lucy Guerin)쪼개진(Split)등 미처 상세히 거론하지 못하는 다수의 수작들이 있었다.

축제의 후반부에서 호주 레스틀리스 댄스시어터(Restless Dance Theatre)노출된(Exposed)의 의미는 각별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으로 구성된 단체가 실제의 경험으로부터 퍼올린 치유와 공생의 장면들은 실제의 허기를 구원하는 밥, 빵처럼 각종 풍미를 다투는 작품들 사이에서 예술의 존재이유를 명백히 증거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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