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현대적 연출로 재해석한 종교와 권위의 폭력 - 예술의전당 오페라 '노르마'
[공연리뷰] 현대적 연출로 재해석한 종교와 권위의 폭력 - 예술의전당 오페라 '노르마'
  •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3.11.10 0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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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프리뷰=서울]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예술의전당이 전관개관 30주년을 맞아 선택한 작품은 벨리니의 <노르마>였다. 영국 로열오페라하우스 프로덕션을 지난 10월 26일부터 29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재현한 것이다.

빈첸초 벨리니의 <노르마>는 음악적 위용으로나 무대의 스케일에서나 탁월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아름답고 격조 있는 선율로 벨칸토 오페라의 정수를 보여주며, 주체적인 여성을 내세운 위대한 서사를 지녔기 때문이다.

<노르마>의 가수로는 마리아 칼라스를 빼놓을 수 없다. 노르마가 부르는 ‘Casta Diva(정결한 여신이여)'를 칼라스의 목소리로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감정을 응축해서 터뜨리는 듯한 칼라스의 아리아 덕분에 <노르마>는 각광 받았지만, 역으로 칼라스와 겨룰만한 소프라노가 없다면 올려질 수 없는 작품이라 좀처럼 국내 무대에서 보기 힘들었다. 마침 올해가 마리아 칼라스 탄생 100주년이다. 오페라 <노르마>는 예술의전당 30주년을 축하하기에도, 마리아 칼라스라는 불세출의 프리마 돈나에게 헌정하기에도 최선의 무대였다.

오페라 '노르마 공연 장면 (사진제공=예술의전당)

<노르마>의 시대적 배경은 무려 기원전이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기>에 나오는 그 갈리아, 그 지역에 살고 있던 골족(갈리아족)의 이야기다. 골족은 자연을 숭배하는 드루이드 신앙을 가졌는데, 드루이드교의 대사제 노르마는 하필 갈리아를 점령한 로마 총독 폴리오네와 사랑에 빠져 비밀리에 아이를 둘이나 낳았다.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원하는 민족 앞에, 신은 평화를 원한다고 외치는 노르마는 오랜 시간 죄책감에 시달려 왔을 터.

원작 연출자 알렉스 오예는 “현실에서도 억압받는 여성들이 있으며 노르마가 저지른 죄가 과연 화형을 당할 만큼인가, 이는 맹목적인 종교와 권력집단의 광기가 가져온 결과다”라고 밝혔으나, 노르마는 여사제인 동시에 제정일치 시대 부족의 지도자였기에 적과의 사랑은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할 일임에 틀림없다.

로열오페라하우스 프로덕션의 무대는 작품 배경을 현대로 가져왔다. 3,500개의 십자가로 가득한 무대를 보니 엄숙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오로베소를 위시해 제복을 입고 나타난 골족의 모습은 십자가들의 무게와 더불어 강력한 권위와 위협적인 질서를 암시하고 있었다.

오페라 '노르마' 공연 장면 (사진제공=예술의전당)

연출자는 노르마의 아버지 오로베소를 군사 지도자, 노르마를 종교 지도자로 분리했다. 노르마의 권위를 약화시켜 인간적 고뇌를 강조하기 위한 해석으로 보였다. 같은 이유로 노르마와 아달지사, 폴리오네가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완전히 현대적인 의상으로 등장한다. 어머니로서의 노르마, 그리고 여느 사람들과 똑같이 겪는 사랑과 배신의 감정에 관객이 더 공감할 수 있도록 한 시도였다.

또한 노르마가 화형대로 오르는 결말을, 오로베소가 노르마를 총으로 쏘는 결말로 바꾸었다. 딸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서 혹은 딸이 만인 앞에서 형벌을 받는 수치를 면해주기 위해서였을 테지만, 그래서 노르마의 희생은 퇴색된 느낌이다. 연출자는 노르마가 자발적 결단보다는 어쩔 수 없는 죽음을 당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노르마 역의 여지원 (사진제공=예술의전당)

유럽 무대에서 Vittoria Yeo로 활약하고 있는 소프라노 여지원이 노르마를 맡았다. 노르마는 굉장한 음역대를 오가며 기교와 서정성을 다 갖춰야 하는 고난도 기량이 요구되는데, 여지원은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서사를 이끌어갔다. ‘정결한 여신이여’에서는 기대한 만큼의 기량 발휘를 못한 느낌이었으나, 이어진 아달지사와의 이중창 ‘홀로 은밀히 신전에서’와 폴리오네가 합류한 삼중창 ‘네가 그 희생자로구나’에서 콜로라투라와 드라마티코를 넘나드는 노르마의 진가를 드러냈다. 연출자가 노르마를 인간적 번민으로 괴로워한 끝에 집단 광기에 의한 희생양으로 표현하고자 했음에도, 여지원은 민족 앞에 죄를 고하고 자신의 사랑을 완성하기 위해 화형대를 선택하는 노르마의 존엄을 드러냈다.

아달지사 역의 테레사 이에르볼리노(좌측) 와 여지원
(사진제공=예술의전당)

메조 소프라노 테레사 이에르볼리노의 따뜻하고 풍부한 음색은 선한 아달지사의 면모를 잘 담아냈다. 2막에서 노르마와 부른 이중창 ‘들어보세요, 노르마’는, 여인들의 우정과 연대를 보여주는 명장면이었다. 여인들은 연적으로 대립하지 않고 동지가 되었다.

폴리오네를 맡은 테너 마시모 조르다노의 소리는 맑고 선명했으나 서정성은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워낙 금단의 사랑도 주저하지 않고 부성애도 없어 보이는 인물이기는 하나, 그래도 조금 더 부드러운 밀당이 필요해 보였다.

폴리오네 역의 마시모 조르다노(우측)와 여지원
(사진제공=예술의전당)

오로베소의 박종민은 위엄 있는 노래와 연기력으로 무게감을 더했다. 결말에서 노르마와 오로베소의 아픔이 객석까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아달지사가 사라져버려 아쉬운 엔딩이기는 했으나, ‘아이들을 희생시키지 마세요’와 ‘배신당한 마음’, 그리고 합창으로 몰아치는 피날레는 무대를 더없이 숭고한 격정으로 이끌었다. 로베르토 아바도가 지휘한 국립심포니오케스트라의 연주도 장엄한 비극을 완성하는 데 일조했다.

오로베소 역의 박종민(좌측)과 여지원
(사진제공=예술의전당)

로열오페라하우스 프로덕션이라 해서 국내 관객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 연출자의 실험과 새로운 해석은 필연적인 것이고, 그중에서 관객의 공감을 받는 무대는 진화를 거듭할 것이다. 화제가 되었던 프로덕션을 국내에 소개한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고 여겨진다.

예술의전당은 내년 여름에도 로열오페라하우스 프로덕션의 <오텔로>를 공연할 예정이다. 좋은 무대와 세계 각지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성악가들에게 관심을 갖는 이들이 늘어날 것은 자명하다. 보다 좋은 무대를 선보이고자 고민하는 예술의전당의 행보를 응원한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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