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컴플렉션즈 컨템퍼러리 발레단(Complexions Contemporary Ballet)
[공연리뷰] 컴플렉션즈 컨템퍼러리 발레단(Complexions Contemporary Ballet)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3.12.05 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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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렬하게, 힙하게 발레!

[더프리뷰=뉴욕] 하영신 무용평론가 = 컨템퍼러리발레 단체로서는 제법 큰 규모로 안정적인 활동을 지속하며 고정 팬층의 성원을 받고 있는 컴플렉션즈 컨템퍼러리발레단(Complexions Contemporary Ballet)이 단체 초연작 <For Crying Out Loud>와 리카르도 아마란테(Ricardo Amarante), 저스틴 펙(Justin Peck), 젠 프리먼(Jenn Freeman) 등 객원 안무가의 세 작품, 그리고 <Ballad Unto...>(2015), <Elegy>(2020), <Endgame/Love One>(2022), <Blood Calls Blood>(2023) 등 네 편의 단체 레퍼토리를 포함, 총 여덟 작품을 엮은 스물아홉 번째 시즌(1114-26일)을 조이스씨어터(The Joyce Theater)에서 펼쳤다,

뉴욕 조이스씨어터에서 스물아홉 번째 시즌을 펼친 컴플렉션즈 컨템퍼러리발레단. 모든 프로그램의 서막을 장식한 작품 ‘Ballad Unto’의 한 장면. © Taylor Craft
뉴욕 조이스씨어터에서 스물아홉 번째 시즌을 펼친 컴플렉션즈 컨템퍼러리발레단. 전체 프로그램의 서막을 장식한 ‘Ballad Unto’의 한 장면. ©Taylor Craft

컴플렉션즈 컨템퍼러리발레단(이하 컴플렉션즈)은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씨어터(Alvin Ailey American Dance Theatre)의 수석 무용수였던 드와이트 로든(Dwight Rhoden)과 아메리칸 발레씨어터(American Ballet Theatre)에 기용된 최초의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 수석 무용수로 활약했던 데스몬드 리차드슨(Desmond Richardson)1994년에 설립한 단체로, 우리나라의 주재만이 상주 안무가로 동행하고 있는 바로 그 무용단이다. 2015년 시더 레이크 컨템퍼러리 발레단(Cedar Lake Contemporary Ballet)이 해단한 이후 알론조 킹 라인즈 발레단(Alonzo King LINES Ballet)과 더불어 미국 컨템퍼러리 발레 씬을 견인하고 있는 주요 단체. 샌프란시스코를 기반으로 활동 중인 알론조 킹 라인즈 발레단이 그 단체명이 표명하는 바 발레 장르 본연의 선형(線形)적이고 기하학적인 미감을 고수하면서 동시대적 주제의 창작물들로 그 예술세계를 주형(鑄型)해 나가고 있다면(알론조 킹은 ABT의 올 가을 시즌 중 컨템퍼러리발레 작품을 소개하는 기획전 ‘21st Century Works’에서 <Single Eye>를 선보였는데 발레의 구문(舊文)적 인상이 완연했다), 컴플렉션즈의 경향은 훨씬 더 진취적이고 트렌디한 감수성을 구가한다.

컴플렉션즈 컨템퍼러리발레단의 공동 창립자이자 예술감독인 드와이트 로든과 데스몬드 리차드슨 © Geoffrey Miller
컴플렉션즈 컨템퍼러리발레단의 공동 창립자이자 예술감독인 드와이트 로든과 데스몬드 리차드슨 ©Geoffrey Miller

안색' ‘낯빛이라는 번역어의 가능성을 지닌 단체명이 암시하는 바 다인종·다문화권의 무용가들이 집결했지만 그 다양한 몸들은 마치 하나의 몸인 양 시종일관의 능수능란함과 최고조로 끌어올려진 에너지 강도를 발현하며 극명함과 유동성 사이를 종횡. 이 특출한 몸들의 역량으로써 컴플렉션즈는 클래식발레로부터 훨씬 더 탈구적인 단체의 특유한 정체성을 성취한다. 한계를 초탈하는 신체들을 만드는 극강의 운동역학적 기량은 드와이트 로든과 데스몬드 리차드슨이 직접 고안하여 니크(Nique)’라 명명한 자신들의 메소드로부터 오는 듯하다. 클래식발레가 허용하지 않았던 몸통의 역량을 드와이트와 데스몬드는 최대한으로 활용한다. 팔다리 사지의 표현력을 확보하기 위한 지지축, 버팀목, 에너지가 출발하는 원점으로 고정되어 있던 몸통이 자체로 운동하며 신체의 각 부분과 연동하거나 혹은 절연한 채 자체로 뉘앙스를 가지고 춤의 표현을 강화하게 된 것은 클래식 문법으로부터 전진해온 모든 춤들의 방향성이긴 하지만 드와이트와 데스몬드의 니크는 그 온몸적 춤에 각별한 방점을 지닌 듯하다.

단체와 부설 아카데미에서 훈련되고 있다는 니크 역시 오하드 나하린(Ohad Naharin)가가(Gaga)’처럼 전수의 과정을 밟지 않는 한 온전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다만 무용수들의 SNS 등에서 발견되는 훈련의 일부 장면들로부터 추정해보자면 니크는 특이하게도 마치 일반 운동센터들에서 활용하고 있는 설치형 운동기구들처럼 추에 연결된 줄의 탄성을 이용하는 기구를 활용하는 훈련 원리의 지속적 누적을 포함하는 듯하다. 그러나 중점적인 근육(target muscle)의 강화를 겨냥하는 다른 훈련 매뉴얼들과는 달리 니크는 몸통으로부터 팔과 다리로 연속하는 움직임 패턴의 반복으로 보인다. 그러한 절차적 훈련의 축적이 근골격계 가동의 항진적 반경과 강도를 지닌 컴플렉션즈 특유의 춤 어휘를 가능하게 하는 듯하다.

운동역학적으로 다져진 강도적 특성은 컴플렉션즈의 연행적 특질이 된다. 조이스씨어터에서의 펼친 이번 시즌(조이스씨어터는 신작 발표의 경우 대개 일주일 단위로 공연일정을 편성하는데, 축적된 레퍼토리가 많아 그 재연을 포함하는 단체의 경우 두 주로 편성하고 A·B·C 세 분할로 작품을 고루 배치한다. 일부 작품의 중복을 감안한 두 차례의 관람이면 그 시즌 작품들의 대개를 섭렵할 수 있는데, 이번에는 무용수의 부상으로 인해 B프로그램으로 편성되어 있었던 최신작들인 <Blood Calls Blood>(2023)와 <Endgame/Love One>(2022)이 다른 작품으로 대체되어 아쉬움을 남겼다)에는 브라질 출신 안무가로 유럽 유수 발레단체들로부터 꾸준히 작품 의뢰를 받고 있는 리카르도 아마란테의 대표작 <Love Fear Loss>(2012)와 뉴욕시티발레단(New York City Ballet)의 상임 안무가 저스틴 펙이 솔리스트 사라 먼스(Sara Mearns)와 아마르 라마사르(Amar Ramasar)를 위해 만들었던 <The Dreamers>(2016) 등 신고전주의(neo-classicism)적 성향을 부인할 수 없는 두 작가의 파드되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마치 웨인 맥그리거(Wayne McGregor)에게 영국 로열발레단(The Royal Ballet) 상주안무가 직책을 선사해줬던 <Chroma>(2006)가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씨어터의 연행에서 더욱이 강도적 파토스로 빚어지는 것처럼, 컴플렉션즈의 무용수들은 이 두 객원 안무가의 작품으로부터 신고전주의라는 라벨을 말끔히 제거해낸다. 에디트 피아프(Édith Piaf)‘La Vie en Rose’ ‘Ne me quitte pas(If you go away)’를 편곡한 라이브 피아노 연주(Brian Wong)에 사랑이 피고 지는 과정을 실은 <Love Fear Loss>와 로미오와 줄리엣 류의 죽음을 불사하는 로맨스의 장면들인 <The Dreamers>는 컴플렉션즈 무용수들의 강렬한 연행으로 드라마적 상투성을 모면한다.

‘Love Fear Loss’ © Taylor Craft
‘Love Fear Loss’ ©Taylor Craft
‘The Dreamers’ © Taylor Craft
‘The Dreamers’ ©Taylor Craft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월광> 1악장에 실린 짧은 독무작이지만 드와이트 안무의 <Elegy>(2020)는 그의 안무적 세계관과 단체의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작품을 연행한 질리안 데이비스(Jillian Davis)190센티미터 장신 거구에 중성적 이미지를 지닌, 발레계는 물론 장르 불문 여성 무용가로서도 전무후무한 캐릭터인데 단체의 거의 모든 작품에 출연하며 힘과 기량, 그에 기반하여 수위가 한껏 높아진 표현력(퇴장시 달려가기만 해도 시선을 몰고간다)이라는 단체의 성격을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드와이트의 페르소나 같은 인물이다. 그녀의 비가(悲歌)는 우리가 엘레지하면 흔히 떠올리는 어떤 서정성의 차원을 넘어선다. 몸통과 사지의 각도가 비틀리고 움직임이 불연속으로 절단되는, 심지어 정지의 순간들조차도 다스리고 있는가 하면 또 곧장 한없이 연장하고 확장하는, 너무도 확연히 가시화되는 항진된 육체성. 육화(肉化)로 훨씬 더 생생하고 강렬하게 재생되는 슬픔. 늘상 들려왔고 또 많은 무용가들의 춤에서 그 바탕적 세계가 되어왔던 <월광 소나타>가 이렇게까지 깊숙한 감도의 작품이었던가, 처절함으로까지 이행하는 처연함, 음악이 새삼 다시 들릴 만큼 짙은 파토스의 춤은 화려한'이라는 수사로는 그 표현이 불충분하거나 부정확하다. 그 춤은 글래머러스(glamorous)’하다소위 섹시, 생의 원천적 충동을 발산한다.

‘Elegy’ © Cherylynn Tsushima
‘Elegy’ ©Cherylynn Tsushima

합이 맞는 적확한 번역어를 찾아낼 수 없는 외국어를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글쓰기의 방도를 넘어서는 일이지만, 컴플렉션즈의 춤은 실로 글래머러스하니 말이다. 과거에 필자가 보았던 2017년 시즌의 메인 작품은 그야말로 글램 록(glam rock) 스타였던 데이비드 보위(David Bowie)의 노래들을 엮어 만든 <Stardust>(2016)였다. 휘황찬란한 의상을 걸치고 플랫폼 슈즈를 신고 성차(性差)의 경계 없이 물씬한 퇴폐미를 풍기는 무용수들이 최후의 한 겹도 두르지 않은 욕망을 투사해내는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를 돌아가며 립싱크하던 그 작품은 정말로 문자 그대로 글래머러스'했다. 대중문화 코드가 완연한, 무용예술 작품으로서는 유례없이 이질적인, 그러나 뮤직비디오나 뮤지컬과는 선연히 다른. 일말의 여지없이 춤작품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두말할 나위 없는 무용수들의 춤 실력이었다.

‘Stardust’ © Taylor Craft
‘Stardust’ ©Taylor Craft
‘Stardust’ © Taylor Craft
‘Stardust’ ©Taylor Craft

이번 시즌의 메인 작품인 초연작 <For Crying Out Loud>도 록그룹 U2의 노래들로 편성된다. ‘Where The Streets Have No Name’, 이름 없는 거리로 함께 가자는 내용의 노래를 첫 곡으로 ‘Two Hearts Beat As One’ ‘I Will Follow’ ‘Every Breaking Wave’ ‘Invisible’ ‘Vertigo’ ‘With or Without You’ ‘Pride(In The Name Of Love)’ 등으로 서사를 모자이크하고 그 내역을 춤춘다. 드라마틱한 호소력으로 세계의 청중을 사로잡은 보노(Bono)의 보컬 플레이지만 드와이트의 안무와 컴플렉션즈 무용수들의 연행은 노래의 번안 이상의 춤으로 무대를 장악한다. <Stardust>에서처럼 화려한 의상, 강렬한 분장, 찬란한 무대장치가 없음에도 컴플렉션즈의 춤은 여전히 글래머러스하다.

무작위로 삽입되는 발레 테크닉에 실린 가공할만한 힘과 유연성의 전시. 컴플렉션즈 무용수들은 아라베스크(arabesque)나 데블로페(développé) 등 발레의 고난도 테크닉을 클래식발레의 그것처럼 마침내 당도하여 어떤 고양감을 드러내보이는 목적적 동작이 아니라 마치 스텝같은 과정적 동작으로서 시도때도 없이 구사한다. 이 기술적 과정들의 누층은 드와이트와 데스몬드가 창출하고자 하는, 한껏 활성화된 감각의 가시적 형태와 운동의 충혈적 구동으로 총화된다. 단신에서 장신, 다양한 인종적 구성, 그러나 어느 한 명의 실력과 개성에도 한 치 물러섬이 없는 아주 팽팽한 스펙트럼. 그러나 그 다채로운 몸들의 스펙트럼은 철저하게 드와이트 로든이라는 프리즘을 통과한다. 로든의 형태, 로든의 리듬, 로든의 강도에 복속된 채로다. 심지어 그 몰입은 완벽하기까지 하다.

‘For Crying Out Loud’ © Taylor Craft
‘For Crying Out Loud’ ©Taylor Craft
‘For Crying Out Loud’ © Taylor Craft
‘For Crying Out Loud’ ©Taylor Craft

로든의 동작구들은 음악의 비트 혹은 가사의 내용으로부터 간극을 갖지 않는다. 명약관화하다. 그러므로 재인 불가능성으로부터 발생하는 의혹, 물음들의 연속, 그리하여 나름의 답을 궁리하게 되는 사유의 과정이 작동할 새가 없다. 컴플렉션즈의 세계에서 무용수들의 질주는 작품의 표면 아래 도사리고 있는, 숨겨져 해석을 기다리는 드라마로의 진행이 아니라 신체들의 정렬, 항렬, 대형의 변화, 1차원적 디자인이다. 특정 메시지나 세계관으로의 결합을 예비하지 않는, 추호의 망설임 없는 명백하게 상업적인 코드. 운동역학적으로 완벽하고 출중하지만, 그 미감은 세련되고 현란하지만, 그러나 해석적 범주에서 정감을 산출하지 못하고 사유는 진척시키지 못하는 이런 유형의 춤들 앞에선 늘 같은 질문을 하곤 했었다. 이렇게 잘 추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지? 그러나 이렇게까지 잘 추는 춤 앞에선 그 예외 없던 질문이 무력해진다. 탄복에 탄복을 거듭할 뿐. 소위 스펙터클의 위력을 장착한 단체다.

컴플렉션즈의 공연은 춤이 지닌 스펙터클, 춤이 지닌 위력의 가능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한다. 한 번 파악된 흥행적 요소는 이내 싫증을 불러일으키기 마련이건만 두 시즌의 관통에도, (의도치 않았던) 단기간의 반복적 관람에도 춤들은 능히 나를 충격하니, 일원론적 몸들의 정동(情動, affect)적 사태, 무용예술의 본위에 우뚝 선 작품들 아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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