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과학자의 공연리뷰] 예술을 가지고 노는 인간 vs 인간을 가지고 노는 기계
[뇌과학자의 공연리뷰] 예술을 가지고 노는 인간 vs 인간을 가지고 노는 기계
  • 더프리뷰
  • 승인 2023.12.17 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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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연 '예술래잡기술' (사진제공=시댄스)

[더프리뷰=서울] 김대식 뇌과학자(KAIST 교수) = 지난 9월 9일 제26회 서울세계무용축제 (SIDance, 시댄스)에 초청된 김혜연 안무가의 작품을 관람할 기회가 있었다. <예술래잡기술>이라는 제목의 ‘죽음과 노화’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작품에는 죽음도, 노화도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한국무용부터 현대무용까지 이해하기 쉬운 보편적 내용부터, 창작자는 알지만 우리는 짐작만 할 수 있는 더 깊은 내용까지. 다양한 안무와 장면을 전개하면서 작가는 몸과 동작을 통해 “죽지는 않지만 몸을 가지지 않은 존재”가 등장하기 시작한 지금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우리가 만들었기에 우리를 너무나 닮은, 하지만 우리를 뛰어넘는 인공지능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Über-Mensch(위버멘시)'일까? 그렇다면 앞으로 인간으로서의 존재, 'conditio humana'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제26회 서울세계무용축제의 예술래잡기술 공연 모습 (사진제공=)
제26회 시댄스에서 공연된 '예술래잡기술' (사진제공=시댄스)

그리고 한 주 후, 9월 16일엔 동일한 제목의 포럼에 패널로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안무가, 작곡가, 그리고 미디어 아티스트와 함께 인공지능 시대의 예술과 창작에 대해 토론하며 더 깊은 고민에 빠지기 시작했다. 왜 우리는 2023년 창작하는 기계와, 기계가 예술을 할 수도 있는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하는 걸까?

9월 16일 '예술래잡기술' 포럼 (사진제공=김혜연)

사실 이런 날을 내가 직접 경험하게 될지 정말 몰랐다. 질문을 하면 완벽한 문법으로 대답을 한다. 문맥도 논리적이고 대부분 그럴싸한 말을 한다. 물론 'hallucination', 환각이라 불리는 '헛소리'도 자주 하지만, 전문지식이 없다면 충분히 믿을 만한 그럴싸한 이야기를 한다. 작년 11월 30일 공개된 챗GPT 이야기다. 이야기 뿐만이 아니다. 챗GPT를 기반으로 한 '생성형 인공지능(Generative A.I.)'으로 무장한 DALL-E, Midjourney, Stable Diffusion 같은 이미지 생성 기계들은 사람이 표현한 문장을 그림으로 표현해 준다. 현실적으로 또는 초현실적으로, 마치 예술가가 촬영한 흑백사진같이, 아니면 일본 만화영화 스타일로… 인간의 상상력이 바로 눈에 보이는 현실이 된다. 그것도 원한다면 수 천 번, 수 만 번까지도 말이다.

'인공지능'이라는 개념은 이미 1956년 미국 다트머스 대학교 포럼에서 제안됐지만, 지난 60년동안 인공지능은 <터미네이터> <A.I.> <HER> 같은 할리우드 영화에서만 볼 수 있었다. '세상을 알아보는 기계', 그리고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는 기계'를 만들겠다는 과학자들의 노력은 실패와 좌절의 반복이었으니 말이다. 왜 인공지능은 60년동안 실패했을까? 고양이와 강아지를 구별하게 하기 위해 고양이란 무엇인지를 수식과 논리를 사용해 설명해봤다. 이런 방식을 우리는 '룰(rule)기반 인공지능' 또는 '기호기반 인공지능'이라 부른다. 하지만 끝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기계는 끝까지 고양이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왜 3살짜리 어린아이도 할 수 있는 것을 슈퍼컴퓨터는 하지 못 하는 걸까? 1980년 새로운 방법이 제안된다. 더 이상 기계에게 세상을 설명하지 말고 데이터를 제공하고 기계에게 학습 기능을 부여해 스스로 고양이가 무엇인지를 습득하게 하자는 '기계학습' 방식이었다. 상당히 훌륭한 방법이었다. 장 피아제(Jean Piaget)나 레프 비고츠키(Lev Vygotsky) 같은 발달심리학자들은 오랫동안 주장하지 않았던가? 인간은 설명이 아닌 경험을 통해 대부분 학습을 한다고. 특히 비고츠키는 자라는 아이들은 '놀이'와 '시뮬레이션'을 통해 세상을 배워간다고 가설했다. 여러 모습의 고양이들을 경험하며 '고양이'라는 보편적 개념을 학습하고, 고양이와 놀며 “내가 만약 고양이라면”같은 상상과 시뮬레이션을 통해 직접 경험할 수 없는 상황까지도 학습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예술래잡기술' 포럼에서 김대식 교수 (사진제공=김혜연)

그런데 초기 기계학습 역시 인공지능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왜 그런 걸까? 크게 3가지 이유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우선 다양한 인공지능 모델을 구현하고 학습시켜볼 수 있는 알고리즘과 컴퓨터 기술이 부족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데이터였다. 아이들은 고양이 몇 마리만 경험하면 평생 모든 고양이를 알아본다. 그런데 기계는 수 백, 수 천 장의 고양이 사진을 보여줘도 여전히 고양이와 강아지를 구별하지 못 한다. 기계학습 역시 포기해야 하는 걸까? 답은 놀랍게도 데이터에 있었다. 2010년 캐나다 토론토 대학교 제프리 힌튼 교수와 학생들은 '심층학습' 또는 '딥러닝(Deep Learning)'이라는 새로운 기계학습을 제안한다. 1980년부터 사용하던 기계학습보다 더 복잡한 구조와 알고리즘도 가지고 있었지만, 가장 큰 차이는 데이터였다. 100만, 1000만 가지 다양한 모습의 고양이 사진을 학습에 사용하자, 기계는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세상을 알아보기 시작한다. 60년 동안 해결되지 않았던 '물체인식' 문제가 드디어 풀리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2012년 제안된 심층학습을 넘어 2017년 소개된 '트랜스포머' 알고리즘은 세상을 알아보는 기계를 넘어 인간의 언어를 이해하는 기계까지 가능하게 한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건이 하나 벌어진다. 챗GPT같은 생성형 인공지능이 사용하는 트랜스포머 알고리즘은 모델의 크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창발적(emergent)' 능력을 가지기 시작한다. 가르친 적이 없는 것들도 이해하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챗GPT에게 문법을 가르쳐준 적이 없다. 단순히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의 조건적 확률관계(conditional probability)만을 기반으로 문법을 통계학적으로 추론해 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챗GPT나 DALL-E는 경험한 학습 데이터만 재조합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새로운 것'을 통계학적 추론을 통해 상상하고 만들어낼 수 있다.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Noam Chomsky)는 챗GPT는 사실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 하는 '통계학적 앵무새'라고 비판한 바 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챗GPT를 설계한 천재 과학자 일리야 수츠케버(Ilya Sutskever)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생성형 인공지능은 인터넷에 있는 거의 모든 글을 학습했다. 그런데 글이란 결국 글을 쓴 사람의 생각을 의미한다. 지난 수 천 년 동안 글과 문자를 통해 남긴 수백만, 수천만 명의 생각을 생성형 인공지능은 이미 학습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성형 인공지능은 이미 단 한 명의 생각을 넘어 인류 전체의 생각을 이해하고 있는것이 아닐까? 촘스키의 주장과는 반대로 진정한 의미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오히려 우리 인간이지 않을까?

'예술래잡기술' 공연 모습 (사진제공=시댄스)

<예술래잡기술>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예술을 가지고 노는 인간을 그린 작품인 듯하지만, 어쩌면 사실 미래 인간을 가지고 놀 기계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말이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보편적 인공지능(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 AGI), 그리고 언젠간 인간의 모든 능력을 추월하는 초지능(Artificial Superintelligent, ASI)으로 진화한 먼 미래 (정말 그렇게 먼 미래일까?), 더 이상 인간이 없는 지구를 지배하고 있을 기계들은 질문할 수도 있겠다. 기계를 만들었다는 인간. 기계에게는 신 같은 전설의 존재인 인간을 이해하려고 그들은 노력하지 않을까?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천년, 만년, 아니, 관리만 잘하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기계와는 달리 단 100년도 살지 못하다 죽어간 과거 인간들. 100년이라는 짧은 시간만 존재한 것을 '살았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마치 인간들이 단 하루만 살던 하루살이 곤충들을 보며 생각했던 것 같이 말이다.

영원한 사랑, 영원한 기억, 영원한 생명. 인간에게 '영원한'이란 금지된 단어다. 젊음은 늙음의 시작이고, 늙음은 언제나 죽음으로 끝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기 시작하는 인간. 그들에게 '죽음과 노화'는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너무나도 궁금한 질문이기에 기계들은 인간이 남긴 글과 그림과 음악과 춤을 모아 그들의 삶과 인생을 시뮬레이션해볼 수 있겠다. 김혜연 안무가의 <예술래잡기술>은 어쩌면 유치하면서 아름다운, 하찮으면서도 숭고한 먼 과거 인류의 모습을 미래 기계의 눈으로 새롭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나만의 해석을 해본다.

'예술래잡기술' 공연 (사진제공=시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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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석 2023-12-29 02:00:45
인공지능의 관점에서 사람과 예술, 무용을 바라보는 관점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기술 발달의 관점에서 모두가 처음 가는 길이다 보니 시행착오도 있고 여러 오해와 새로운 해석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신기술과 예술을 결합하는 이러한 재미있는 기획들이 앞으로도 많으면 좋겠습니다. 기사 잘 읽었습니다 :)

유주열 2023-12-27 16:12:26
기계(AI)가 만들고 인간이 표현하는 다소 이질적인 설정의 관계가 흥미로운 공연이었어요.. 같은 동작들도 이 공연에서는 달리?보인다고 할까요ㅎㅎ 다양한 관점의 프리뷰 잘 읽었습니다!

한선우 2023-12-19 20:14:53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실감한다. 창작의 '틀' 혹은 '툴'이 변하고 있다. 예술 혹은 창작자들에게 위기 혹은 기회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두려워하지 않고 거침없이 뛰어들어 변화의 파도를 기꺼이 즐기는 이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예술은 시대의 창이자 거울이다. 새로운 시대로 넘어갈 때 그 길잡이와 희망을 제시하는 경계이자 '창'에 서서 시대의 모습을 반영하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김혜연 예술가의 행진에 희망을 갖는다. 무엇이라도 해야겠다. 거대한 조류에 휩쓸려 사라질 수는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