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라흐마니노프 본연의 사운드와 본류의 서정을 맛보다
[공연리뷰] 라흐마니노프 본연의 사운드와 본류의 서정을 맛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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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12.26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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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라이 루간스키와 함께 한 KBS 교향악단의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 연주회

[더프리뷰=서울] 박제성 음악칼럼니스트 = 한국 오케스트라에서는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유럽의 클래식 음악 작곡가들의 기념 해에 걸맞은 이벤트, 예를 들어 전곡 연주회 같은 규모가 큰 싸이클을 진행하는 경우가 극히 드문 것이 항상 아쉬움으로 남곤 했다. 이번 2023년은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탄생 150주년을 맞이한 해였는데, 놀랍게도 KBS 교향악단이 고무적인 기획을 선보여 청중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아버렸다. 그것은 바로 이틀에 걸쳐 진행된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전곡 연주회로서, 피아니스트와 지휘자 모두 A급 러시아 음악가들을 섭외하여 음악사적인 의미와 흥행 성과, 연주의 완성도 모두를 잡아낸 획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  

우선 피아니스트로는 엄격한 고전성과 뜨거운 내연기관을 탑재하고 낭만적인 아름다움과 초인적인 비르투오시티의 조화로움을 보여주는 니콜라이 루간스키가 등장했다. 그리고 지휘자로는 2017년 국립 오페라단의 <보리스 고두노프> 프로덕션과 스베틀라노프 오케스트라 내한공연 지휘자로 등장한 바 있는 스타니슬라프 코차놉스키가 6년 만에 다시 한국 무대에 섰다. 이 두 사람의 기량을 세부적으로 서술하기에 앞서 이들 앙상블이 던져준 가장 중요한 교향악적 의미를 되짚어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바로 라흐마니노 피아노 협주곡에서 오케스트라의 표현력과  피아니스트와의 앙상블이 주는 온전한 음악적 정서의 중요성일 것이다. 지휘자가 러시아의 정서와 작곡가만의 이디엄을 소화해내지 못하고 독주자와 따로 움직이는 반주에 머무르는 경우 얼마나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퀄리티가 엉성하고 이질적인가를 경험하곤 했는데, 이번 KBS 교향악단에 등장한 루간스키와 코차놉스키를 통해 올바른 러시아의 라흐마니노프 사운드를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 가장 큰 성과라고 말할 수 있다. 

루간스키와 코차놉스키(사진제공 = KBS교향악단)
루간스키와 코차놉스키 (사진제공=KBS교향악단)

확실히 그 동안 경험했던 루간스키는 힘과 스케일에 있어서 압도적이어야 하는 협주곡보다는 자신만의 목소리가 오롯이 살아나는 리사이틀이나 실내악에 더 잘 어울렸던 것 같은데, 이번 연주회로 이러한 편견을 산산조각낼 수 있었다. 루간스키의 냉혹한 열기와 광활한 서정이 번복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들을 하나하나 보노라니 모든 음악적 질료를 꼼꼼하면서도 정확하게 풀어내면서 작품의 새로운 드라마를 적확하게 보여주는 모습에 진실로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키신이나 마추예프, 볼로도스 같은 비슷한 연배의 슈퍼 러시안 비르투오소들의 연주와는 전혀 다른, 피아니스트로서 라흐마니노프가 추구했던 고전성과 서정성을 연상시키는 정통성의 직인을 찍어보여주는 듯했다. 

압도적이라기보다는 오케스트라 및 음악의 발전적 질료들과 대화하는 듯한 루간스키의 스타일은 <1번 협주곡>에서는 보다 풋풋한 작곡가의 에너지와 농도 짙은 러시아적 리듬감을, <2번 협주곡>에서는 보다 장대하면서도 탐미적인 아름다움을, <4번 협주곡>에서는 파괴적일 정도로 뜨거운 비르투오시티와 타오르는 듯한 다이내믹의 롤러코스터를 보여주었다. 특히 첫 날 연주한 아름답기 그지 없었던 <2번 협주곡>과 둘째 날 연주한 화려한 <3번 협주곡>이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어느 하나 흐트러지지 않고 홀의 공간을 가득 메우는 정교회 종소리 같은 무수한 음표들의 섬광과 루간스키만의 신랄한 서정성의 여운, 그리고 비르투오시티의 내재적인 심오함과 외연적인 흥분감이 대조를 이루며 청중으로 하여금 전원 기립박수를 이끌어냈다.  

루간스키 (사진제공 = KBS교향악단)
루간스키 (사진제공=KBS교향악단)

이러한 기적 같은 공연은 루간스키 외에 코차놉스키의 역할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드라마의 굽이와 변곡점에서의 강약 컨트롤, 심원함과 치열함을 부각시키는 템포 조절을 통해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에서 오케스트라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실히 깨닫게 해 주었다. 근육질의 고성능 스포츠카 스타일인 마추예프-게르기예프 콤비의 음악적 스타일과는 또 다른 러시아의 심원하면서도 섬세한 감수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루간스키-코차놉스키 콤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KBS 교향악단도 몇몇 미세적인 실수 외에는 코차놉스키의 의도에 충실하게 반응한 탓에 올해 공연 중 마렉 야노프스키의 연주와 더불어 가장 인상적인 공연으로 손꼽을 만하다.  

라흐마니노프의 첫 출판 작품인 <Op.1>과 마지막 관현악-협주곡 작품인 <Op.43>까지를 일별하며 작곡가의 초기부터 후기까지 변화해온 음악적 스펙트럼을 폭넓게 보여준 이번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전곡 연주회. 이틀 모두 루간스키가 라흐마니노프의 솔로 작품을 앙코르로 연주한 것도 인상적이었지만, 특히 마지막 날 <3번 협주곡> 3악장 피날레 부분을 다시 한 번 연주한 것이야말로 매우 훌륭한 아이디어였다. 메인 프로그램에서와는 달리, 루간스키가 보다 자신의 타이밍과 페이스에 집중하며 맹렬하게 돌진, 청중으로 하여금 평생 잊을 수 없는 음악적 엑스터시를 선사해주었기 때문이다.

공연포스터 (사진제공 = KBS교향악단)
공연 포스터 (사진제공=KBS교향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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