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키워드로 다시 읽는 춤공연-7] 모션아키텍트 '켜(couche)'
[철학 키워드로 다시 읽는 춤공연-7] 모션아키텍트 '켜(couche)'
  • 최찬열 무용평론가
  • 승인 2023.12.27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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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식의 지층을 탐험하는 몸짓의 미학

[더프리뷰=서울] 최찬열 무용평론가 = 한국춤의 동시대성을 추구하는 모션아키텍트(Motion Architect)의 안무가 백진주가 또 하나의 야심작 <켜>(2023년 7월 21-22일, 언더스탠드애비뉴 아트스탠드)를 내놓았다. 우선 이 공연은 콘셉트를 구현하는 데 적합하게 공간을 새롭게 꾸민 점이 매우 인상적이다. 직사각형의 박스형 공간을 좌우로 가로지르는 긴 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무대의 좌우 끝부분에는 스크린처럼 크고 흰 천이 드리워져 있다. 그리고 관객들은 무대 양옆으로 길게 놓인 간이 의자에 앉아, 마치 패션쇼에서 런웨이를 즐기는 관객들처럼 공연을 접한다. 실험적인 공간 배치를 통해 한국춤의 다양성과 확장성을 꾀하는 셈이다. 그리고 공연에서 기량이 출중한 세 춤꾼(이이슬, 김승현, 오현택)은 듀엣 춤 세 번과 솔로 춤 두 번을 번갈아 펼치며 인간 존재의 무의식을 탐험하고, 마음 깊숙이에서 울리는 소리를 감각적인 몸짓으로 생동감 있게 실현해 보이는데, 각각의 춤은 수미일관하게 연결되는 것이 아니라 자율적이고 독립적인 춤으로 보아도 무방한 옴니버스 형식의 공연을 이룬다.

Motion Architect(켜)@윤보람
Motion Architect '켜' (c)윤보람

컴컴한 극장에 청량한 방울 소리 같은 음향이 울려 퍼지면서 공연이 시작된다. 관객들의 내면 깊숙한 곳, 이른바 무의식을 파고들어 일깨우는 듯한 소리이다. 곧이어 무대 양옆에 설치된 스크린에 두 종류의 운동하는 사람 이미지가 나타난다. 하나는 여러 색이 입혀진 영상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흑백의 그림자이다. 무대 양 끝에서 서로 마주한 두 이미지가 춤추기 시작한다. 영상 이미지는 둘로 갈라졌다가 다시 하나가 되고, 여러 다른 형상으로 변형되기도 한다. 또 그림자 이미지는 한 손을 들고 선 채 몸통을 흔들어 댄다. 그러다 경쾌하면서도 빠른 타악기 풍 음악이 흘러나오면 이에 조응하듯 이미지의 운동이 활발해지고, 두 이미지의 절도 있는 팔동작과 격렬한 상체 위주의 움직임이 한동안 이어진다. 다채롭게 변형되는 영상 이미지가 화려한 컬러 필름처럼 보인다면, 그림자 이미지는 흑백 필름 같다. 이를테면 이질적인 성격을 띠는 두 이미지, 곧 휘황찬란한 망상 혹은 환상의 세계와 색이 없는 꿈의 세계가 공존하는 미장센을 통해 관객들을 혼란스러운 마음의 심연으로 이끈다.

정신분석학에 따르면, 우리의 정신은 뚜렷하게 구분되는 두 세계, 즉 의식과 무의식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중 정신의 하부구조를 이루는 무의식 세계는 바로 그 위에 있는 또 하나의 세계, 의식적인 세계와 완전히 다른 특징을 가진다. 그런데 <켜>는 바로 이런 무의식 세계에 초점을 맞춘다. 즉 이 공연은 의식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비이성적인 욕구나 충동, 혹은 감정이나 정념 등을 다루고 있다. 그러기에 어떤 뚜렷한 스토리텔링이나 서사구조가 없는 공연은 갖가지 비이성적인 정서들을 추동하고 부추기는 듯한 일탈적인 몸짓이 주를 이룬다. 요컨대 안무가 백진주는 <켜>에서 억압된 마음의 차원을 과감하면서도 저돌적인 몸짓으로 무대 위에 펼쳐 보이는 것이다.

Motion Architect(켜)@윤보람
Motion Architect '켜' (c)윤보람
Motion Architect(켜)@윤보람
Motion Architect '켜' (c)윤보람

스크린의 이미지가 사라지고 잠시 꺼졌던 조명이 다시 들어오면, 무대 바닥에 엎어져 누워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젠더(gender)가 다른 둘은 조금 떨어진 채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들이 꼼지락꼼지락 움직이기 시작하면 무대 바닥에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이미지가 보였다가 사라진다. 고착되지 않은 채 자유롭게 유동하는 그래픽 비주얼 이미지는 인간의 의식 밑바탕에 잠재하는 에너지의 흐름처럼 보인다. 고개를 살짝 들어 서로를 확인한 두 사람은 가깝게 다가서고, 여성이 남성의 몸통을 타고 넘어간다. 그런데 그렇게 엇갈려 갈 것만 같던 그들이 갑자기 몸을 돌려 서로를 향해 돌진하더니 부둥켜안고, 멀어졌다가 다시 엉키기를 반복한다. 하나의 탯줄로 연결된 엄마와 아들로 보이는, 둘이면서도 하나인 듯 밀착했다가 떨어지기를 되풀이하는 그들의 움직임은 미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유아 시절 어머니에게서 느꼈던 완벽한 사랑을 (무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반복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는 춤이다.

그런데 이 춤에서는 두 가지 의미가 더 읽힌다. 한편으로는 뒤엉켜 더듬고 만지다가, 밀어내면 더 강하게 달라붙고, 그러다 다시 떨어지면 서로의 몸을 잇고 있는 끈을 당겨 엉키기를 반복할 때, 그들은 서로의 몸을 갈구하는 연인 같다. 또 거칠게 싸우고 투쟁할 때는 짐승처럼도 보인다. 의식 아래에 혹은 배후에 있다고 여겨지는, 명확하게 언어화해서 파악할 수 없는 이율배반적인 무의식의 논리를 구현하는 춤으로 보인다. 무의식에서는 상반되는 감정이 서로 충돌하지 않고 공존한다는 말이리라. 다른 한편으로 이 춤은 의식과 무의식이 비슷한 힘으로 서로 버티어 대드는 인간 존재의 마음 상태를 드러내는 것으로도 여겨진다. 멀어지고, 당기고, 버티고, 기대고, 올라타고, 필사적으로 반대 방향으로 기어가기도 하지만, 그들은 끝끝내 묶인 끈에 의해 완전히 갈라서지 못하고, 또 이란성 쌍둥이처럼 둘이면서도 하나인 듯한 그들의 춤이 의식과 무의식이 분리되지 않은 채 맞물려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격렬한 움직임을 이어가며 기세를 올리는 춤에 조응해 이미지가 무대 바닥을 뒤덮기도 하는데, 모였다 퍼지기를 반복하는 이미지의 운동은 의식의 심연을 흐르는 에너지 같다. 요컨대 격정적이면서도 정념적인 둘의 춤은 의식과 무의식이 맞버티는 존재의 심연을 상징하고, 무대 바닥에서 울렁이는 이미지는 무의식에 거주하는 리비도의 운동을 나타내는 메타포처럼 보인다.

Motion Architect(켜)@윤보람
Motion Architect '켜' (c)윤보람

내면 깊숙이 침잠하는 여성 솔로 춤이 이어진다. 스크린에 난 틈 사이로 한 여성 춤꾼이 등장한다. 고개를 들어 한동안 허공을 쳐다보던 그녀가 뒷걸음치다가 무대 중앙에 쓰러지면 이미지가 그 주위에서 잔잔한 물결처럼 일렁인다. 그 이미지 한가운데서 두 팔을 벌린 채 얼굴을 무대 바닥에 묻은 그녀가 요동치면서 앞으로 나아가면 그녀를 따라가던 이미지가 더 넓게 퍼진다. 그러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은 채 긴 머리채를 흔들고, 두 팔과 몸을 심하게 떨다가 뒹굴고, 몸통을 뒤척이며 무대 여기저기로 오가면 이미지도 무대 전체로 퍼져나간다. 무의식 세계에 잠겨 드는 한 존재자의 모습을 묘사하는 춤이다. 엄청난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이 세계와 마주하여 제어할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원초적인 욕망에 휩쓸린 그녀가 마치 엑스터시 상태에 빠진 샤먼처럼 발작적인 춤을 펼쳐 보인다. 부글부글 끓던 용암이 지층을 뚫고 솟구치듯 의식 아래에 억압된 야생적 에너지가 분출하는 듯한 춤이다.

구조도 없고 논리도 없이 어떤 욕구 혹은 충동(drive)을 즉각적으로 표출하는 듯한 감각적인 춤은 의식의 관리와 통제에서 벗어나는 이드(id)의 무절제한 힘을 가감 없이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리라. 말하자면 마음의 기저에 억압된 카오스적인 힘을 거리낌 없이 펼쳐 보이는 춤이다. 그런데 아마도 이러한 힘은 우리 안에 있는 역설일 것이다. 기실 무의식은 내가 알 수 없는 내 안의 자연이며 ‘타자’이다. 내 안에 나 스스로 다루는 법을 잘 모르는 이런 타자가 있고, 그것에 의해 나는 춤을 추게 되는 것이다. 생기 있게 살아 움직이면서도 혼란스러운 이드의 세계를 황홀경 상태에 빠진 듯한 춤을 통해 형상화하는 매력적인 춤이다.

Motion Architect(켜)@윤보람
Motion Architect '켜' (c)윤보람

다음 장면에서는 두 개의 오브제가 이목을 끈다. 무대 한쪽 가장자리에 둥그렇게 설치된 물체가 놓여 있고, 그 위 허공에는 뾰족하게 돌출된 물체가 매달려 있다. 두 물체는 음과 양을 나타내는 듯하다. 곧 무대 바닥에 둥글게 설치된 오브제는 여성의 성기를 의미하고 그 위에 매달린 뾰족한 물체는 페니스, 곧 남성 성기를 뜻하는 듯하다. 서서히 등장한 다른 여성 춤꾼 한 명이 몸통을 잔뜩 수그린 채 무대 바닥에 놓인 오브제를 바라보다가 허리를 펴고 앉아 무대 중앙으로 나아간다. 그 순간 허공에 매달린 뾰족한 물체가 바닥에 놓인 둥근 오브제를 덮치듯 아래로 툭 떨어지면 어디선가 깊고 쉰 듯한 신음이 들린다. 과거에 겪었던 어떤 사건, 특히 성적인 사건을 마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무의식은 자신이 경험한 과거의 여러 요소가 켜켜이 쌓이고 뒤엉켜 군데군데 매듭이 생겨나면서 형성되고, 그것이 지금의 행동에 경향을 부여한다. 성적인 것과 결부된 과거의 사건을 지금 그녀가 목도하는 것이다.

무의식은 위장술을 통하지 않으면 결코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다. 그래서 그것은 종종 꿈의 형태로 발현된다. 꿈은 전치와 압축을 통해 원래의 의미를 변형시키고, 명확한 단어와 의식 세계의 언어 법칙에 반하여 애매모호한 단어와 시각적 이미지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가 이런 꿈의 세계를 마주하는 모습이 전개된다. 무대 한쪽 스크린에 커다란 여성 얼굴상이 나타난다. 금방 춤을 마친 그녀의 얼굴이다. 그리고 침실과 거실 같은 실내 공간과 욕실이 보이고, 좁은 공간에서 우두커니 앉아 있거나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고, 욕조에 담긴 물에 잠긴 출연진의 모습 등이 클로즈업 화면에 잡힌다. 그리고 여러 이미지가 연이어 어지럽게 나타나는 스크린을 그녀가 무대 중앙에 멍하니 퍼질러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그러면 스크린에 자그마한 글씨체로 자막이 뜬다. “그곳에서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닌 다른 존재자로 변해가고 있다. [...] 잠에서 깬다.” 요컨대 전치(displacement)와 압축(condensation)을 통해 이곳과 저곳이 분별없이 나타나고 여러 출연진의 모습이 혼란스럽게 뒤섞이는 꿈의 세계를 유영하는 그녀의 모습이 그려지는 장면이다.

Motion Architect(켜)@윤보람
Motion Architect '켜' (c)윤보람
Motion Architect(켜)@윤보람
Motion Architect '켜' (c)윤보람

이어지는 듀엣 춤은 성적 상징과 은유가 돋보인다. 남녀가 몸이 엉킨 채 무대 중앙으로 이동하고, 남성 춤꾼이 엎드려 누운 채 온몸을 흔들면 여성 춤꾼이 그의 등 위에 올라탄다. 그녀를 등에 태운 채 기다가, 다시 어깨에 올린 채 서서히 걷던 남성 춤꾼이 그녀를 내리면 큰 사각 조명이 무대 바닥에 새겨지고, 그 안에서 둘의 빠르고 분절적인 움직임 위주의 춤이 이어진다. 경쾌하면서도 역동적인 춤이 사각 틀 안에서 한동안 이어지다가 남자가 여성 춤꾼을 자신의 배 위에 태우고 이동하기도 한다. 둘의 몸이 조합돼 만들어진 형상이 길쭉한 몸을 치켜든 전갈같이 보이기도 하고, 또 뜨겁게 사랑을 나누는 남녀의 이상야릇한 체위 같기도 하다. 성적 뉘앙스가 강하게 풍기는 춤과 포즈가 이어지다가 여성이 쓰러지면, 마치 어슬렁거리는 짐승처럼 기어서 그녀에게 다가가던 남성 춤꾼이 비틀비틀 성난 짐승처럼 움직이며 여성 춤꾼 주위를 맴돌고, 먹잇감을 찾아 맹렬하게 돌진하는 짐승처럼 무대 여기저기로 돌아다닌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우리의 무의식에는 무엇인가 성적인 에너지의 응어리가 있고, 그것이 외견상 성적으로 여겨지지 않는 행동에 동기를 부여한다. 인간의 사고와 행동은 대단히 성적이라는 말이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런 에너지, 즉 성적 충동을 리비도(libido)라고 한다. 성욕을 에너지론의 관점에서 기술하기 위해 프로이트가 고안한 개념이다. 충동은 바로 우리의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오르가슴(orgasme)을 향한 끊임없는 요구이며 만족을 갈구하는 갈증이다. 우리의 몸과 외부 세계가 경험하는 끝없이 다양한 쾌락의 원천이 바로 충동인 것이다. 그것은 증가하거나 감소할 수 있고 대체되기도 하는 에너지의 일종으로, 프로이트는 태어나면서부터 서서히 발달해 가지만 도중에 중지되기도 하고, 거꾸로 되돌아가는 예도 있는 이런 에너지가 지극히 성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용어법에서 어떤 대상에 대한 리비도 집중이란 곧 성화(sexualization)이다. 대상에 리비도가 집중된다는 것은 성적인 관심 아래 그 대상과 관계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서로 열중하며 짙은 교감을 나누듯 지속되는 둘의 몸짓이 이런 리비도 집중, 혹은 리비도의 활기찬 운동을 형상화하는 것으로 감지된다. 정신분석학적 개념의 춤적 변주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Motion Architect(켜)@윤보람
Motion Architect '켜' (c)윤보람

마지막 장면은 여성 춤꾼 둘의 듀엣 춤이다. 리비도가 향하는 대상은 보통 젠더가 다른 신체이지만, 때로는 같은 젠더의 신체로도 향한다. 또 그것은 마조히즘(masochism)이나 사디즘(sadism)이 보여주듯이 어느 정도 파괴적이고 폭력적이다. 그래서일까, 같은 젠더인 둘은 처음부터 거칠게 대립한다. 상대의 어깨 부근을 밀치며 거칠게 몰아붙이고, 돌아서 가는 이를 잡아 세운 뒤 파르르 떨고 있는 그를 잡아 쓰러뜨리기도 한다. 줄무늬 이미지가 요동치는 무대 바닥에서 뒹굴고 엉키며 거세게 대립하던 두 여성은 다시 일어나 머리채를 잡아 끌어당기고 밀치면서 싸움을 지속한다. 부딪치고, 엉키고, 밀치고, 쓰러지고 잡아채다가 한 명이 엎어지면 그를 짓누르던 다른 이가 무대 가장자리, 오브제가 놓인 곳에 이른다. 그러면 또다시 허공에 매달린 뾰족한 물체가 빠른 속도로 툭 떨어져 흔들거린다. 무의식에 숨어 있는 힘이란 존재는 성적이면서 동시에 파괴적인 충동이라는 사실이 암암리에 드러나는 춤으로 보인다.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곧바로 사랑과 죽음, 확장과 소멸이라는 두 가지 충동 앞에 내던져진 것이다.

공연 <켜>는 기존의 한국춤 공연과 달리 ‘이야기’ 혹은 ‘서사’를 담고 있지 않다. 대신에 이야기 혹은 서사의 차원에 머물러서는 보이지 않는 다른 실재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 준다. 그것은 서사적 의미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사건들의 무리, 억압된 무의식 세계이며, 공연은 알맞게 구축된 미장센을 통해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지칠 줄 모르는 쾌락 원리가 지배하고, 무한대의 만족감을 요구하며, 뜨거운 열망으로 가득한 정신 저 밑바닥에 존재하는 심연의 세계는 우리가 이성이나 지성을 통해 파악하거나 포착할 수 없기에, 안무가 백진주는 이러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단지 감각밖에 할 수 없는 몸짓으로만 펼쳐 보인다. 요컨대 세련된 감성을 장착하고 있는 백진주가 야심 차게 내놓은 <켜>는 상징적인 몸짓과 오브제, 그리고 세 가지 이미지, 즉 영상 이미지와 그림자, 그리고 무대 바닥에 투사되는 프로젝션 매핑(Projection Mapping)이 조화롭게 엮인 장면 구성을 통해 시청각적 효과를 극대화하면서, 의식의 지층을 탐험하는 새롭고도 낯선 몸짓 감각을 내보이는 공연이다.

최찬열 무용평론가
최찬열 무용평론가
altai21@hanmail.net
한국춤 전공 후 모스크바대 인류학 석사,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인류학 박사과정 및 미학 박사학위 취득. 지금은 몸의 예술과 인문학에 기반한 통섭적 문화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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