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부산시립무용단 ‘디딤&STEP’ - 김미란의 'WE-路'
[공연리뷰] 부산시립무용단 ‘디딤&STEP’ - 김미란의 'WE-路'
  • 최찬열 무용평론가
  • 승인 2023.12.30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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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정 불가능성을 담은 춤

[더프리뷰=부산] 최찬열 무용평론가 = 2023년 부산시립무용단 안무가 육성프로젝트 ‘디딤&STEP’ 무대는 단원 김미란이 도맡아 꾸렸다. 큰 무용경연대회에서 의미 있는 상을 받는 등 근래 그녀가 펼친 활약상이 남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옴니버스 형식의 이 공연 <WE-路>(12월 8-9일, 부산문화회관 중극장)는 총 5개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그녀의 지난 주요작들이 이날 무대에 다시 오른 셈이다. 이 중에서 네 작품, 즉 <꽃을 꺾어 본 적 있습니까?> <선물> <벙어리 춘앵> <넋전>이 2부에서 재연되었는데, 각각의 작품에 출연한 주인공들은 김미란을 대신해 그녀의 과거 작품 속 주요 장면들을 열연해 보이고, 마지막에는 김미란과 함께 모두 무대에 등장해 각자가 들고 췄던 오브제와 수의 등을 독 안에 담는다. 김미란의 과거 전체가 한곳에 모이는 흥미로운 엔딩 씬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공연에서는 1부 무대에 오른 <중中독: 독 안의 여자>가 관객들의 주목을 받았는데, 이것은 아마도 이 작품이 올해 창무국제공연예술제의 ‘창무프라이즈’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디딤&STEP "WE-路"@양동민(FOTOBEE)
디딤&STEP 'WE-路' (c)양동민(FOTOBEE)

뒤쪽에 길고 너른 흰 천들이 걸려 있는 무대 중앙에 제법 큰 독이 엎어져 있고, 그 위에 남성 춤꾼 한 명(최의옥)이 서 있다. 탈을 쓰고 얼굴을 가린 그가 독 위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고, 무대 왼쪽 뒤에는 악사(박지영)가 앉아 뭔가를 긁는 듯한 둔탁한 소리를 낸다. 무대 바닥으로 내려온 춤꾼이 독에 한 손을 걸치고 비스듬히 앉았다가 일어난 후, 그 뒤에서 등을 보인 채 서서 탈을 벗는다. 삼면이 얼굴 형상을 한 탈이다. 그런데 그는 또 다른 탈을 쓰고 있다. 인간이라면 모두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을 법한 다중인격적인 모습을 나타내 보이는 듯하다. 혹은 이랬다저랬다 하며 수시로 얼굴상을 바꾸는 변덕스러운 여성상을 나타내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는 그 탈을 무대 오른쪽 앞에 건다. 그리고 독으로 다가가 엎어진 독을 바로 세워 돌리면 그 안에 검은 의상을 입은 여성(김미란)이 웅크린 채 누워 있다. 폐쇄된 공간, 즉 독 안에 갇혀 자포자기한 모양새이다. 그러다 남성 춤꾼이 독을 빙빙 돌리면 여인은 그곳에서 벗어나고자 한 손을 저 멀리 쭉 내밀어 보다가 다시 독 안에 널브러진다. 그러면 남성 춤꾼이 그런 그녀를 멀리서 지긋이 지켜본다. 이를테면 독 안과 그 주변은 남성이 지배하는 세계이고, 그곳에서 무력하게 거주하는 그녀는 바깥세상을 동경하는 듯하지만, 그곳을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그렇게 강해 보이지는 않는다.

디딤&STEP "WE-路"@양동민(FOTOBEE)
디딤&STEP 'WE-路' (c)양동민(FOTOBEE)

그 때문인지 다음 장면에서는 악사가 그런 그녀를 다그치는 역할을 맡는다. 그렇지만 여성 악사의 독려는 요란하기보다 흔들림 없이 침착하고 평온하다. 독 안에서 일어난 그녀가 독 바깥에 앉은 남성의 어깨를 한 발로 지그시 밟다가 독 가장자리에 올라서서 먼 곳을 바라보다가 다시 독 안으로 잠겨 들면, 남성은 그 독을 슬금슬금 돌린다. 그녀를 어르고 달래는 것이리라. 그런 그녀의 모습이 비록 즐겁거나 안락해 보이지는 않지만 편하게는 보인다. 그러다 그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방황하듯이 독 안에서 빙빙 돌기 시작하면 악사가 무대 가장자리를 천천히 돌아가며 피리를 불기 시작한다. 남성 중심의 강고한 세상이 깨지거나 갈라 터지는 것 같은 파열음처럼 들린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잠재한 자유의지를 부추기고 일깨우는 것 같은 그 소리에 고무된 듯, 그녀는 굴러서 독 밖으로 나와 두 팔을 휘저으며 엉금엉금 기어서 피리를 부는 여인과 마주한다. 그리고 독에 걸터앉은 남성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다.

말하자면 독과 그 주변 세상은 타성에 젖은 갑갑하고 답답한 삶의 장소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거기는 편안함과 안락함이 보장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그녀는 그런 편안함을 쉬이 떨쳐내지 못한 채 그곳에 안주하는 것이다. 곧 독은 삶의 독(毒)인 셈이다. 그렇다면 공연 제목 <중中독: 독 안의 여자>에서 ‘독’은 장독이면서 독(毒)이라는 말이다. 곧 전자일 때 ‘중독’은 독의 한가운데, 여성이 거주하는 장소를 뜻하고, 후자일 때 그것은 타성에 젖은 여성적 삶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이 공연에서 타성은 남성 중심의 세계를 공고히 하는 구심력으로 작용하고, 그와 반대로 피리 소리는 이 세계를 허무는 원심력으로 작용하는 듯하다. 그리고 김미란은 두 힘 사이에서, 곧 피리 부는 여성 악사와 남성 사이에서 괴로운 듯 몸부림치다가 이내 남성의 세계로 돌아가 버리고 악사는 제 갈 길로 뚜벅뚜벅 가버린다. 요컨대 나아가려는 태도나 마음가짐이 부족하여 활동적이지 못한 여성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중中독>은 안일함에 중독된 여성적 삶을 반성하는 공연으로 보인다.

디딤&STEP "WE-路"@양동민(FOTOBEE)
디딤&STEP 'WE-路' (c)양동민(FOTOBEE)

이어지는 장면에서는 구심력과 원심력의 맞버팀이 극대화된다. 즉 무대 가장자리로 이동하며 부는 악사의 피리 소리가 여인을 바깥세상으로 강하게 견인하고자 하지만, 여인은 중심 세계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독 주변에서 남성과 듀엣 춤을 이어간다. 독 주위를 돌다가 그 안에 들어가고, 다시 나오고, 또 독 가장자리에 올라서서 남성에게 의지한 채 빙빙 돌다가 남성의 어깨에 올라타는 등 그와의 춤을 지속한다. 그리고 그와 대조적으로 악사는 무대 왼쪽 뒤에 우뚝 서서 여인을 부추기듯 피리를 불다가 재차 무대 가장자리를 돌아서 뒤쪽에 선 채 더 힘차게 피리를 불어댄다. 두 힘이 맞버티는 형국이 한동안 펼쳐지는 것이다. 그리고 둘 사이에서, 즉 두 세계 사이에서 그녀는 춤추다 쓰러지고 두 팔을 거칠게 흔드는 등 갈등하고 방황한다. 복잡하고 알쏭달쏭한 그녀의 내면 심리가 미묘하게 나타나 보인다. 인간 삶의 고유성은 수동적인 영향 받음에서 전적으로 벗어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리라. 기실 이는 결단코 불가능할 것이다. 여러 얼굴상을 가진 탈이 상징하듯, 요동치는 여성의 내면 심리를 한국적 정서가 물씬 풍기는 오브제와 음악, 무대장치로 구축한 명징한 미장센에 담아 차분하면서도 담담하게 전하는 대목이다.

디딤&STEP "WE-路"@양동민(FOTOBEE)
디딤&STEP 'WE-路' (c)양동민(FOTOBEE)

방황과 갈등의 몸부림은 계속해서 이어진다. 무기력하게 몸을 가누지도 못하고 기대는 그녀를 남성 춤꾼이 받아안고 다독이듯 어루만지다가 홀로 서게끔 세워보지만 그녀는 자기 힘으로 서지 못하고 허우적거린다. 그러다 악사가 다시 무대 가장자리를 돌기 시작하면 힘들게 그를 따라가 보기도 하지만 여의찮은 듯 다시 허우적거린다. 그러다 겨우 일어나 터벅터벅 악사 뒤를 따르면 남성 춤꾼이 끼어들어 갈 길을 막아 세운다. 그러면 악사는 제자리에 서서 또다시 피리를 강하게 불어대며 그녀의 자유의지를 강하게 추동하지만, 그 소리에 대응하듯 남성 춤꾼은 그녀를 무동 태우고 둘은 넘실넘실 흥겹게 춤을 춘다. 남성의 어깨에 올라탄 그녀는 그런 놀이를 은근히 즐기는 듯하다. 그녀는 안락함과 편안함을 누리는 데 익숙해진 몸을 가진 존재자인 것이다. 그러다 그녀는 어떤 힘에 끌려 들어가듯 다시 독 안으로 홀라당 들어가고, 남성 춤꾼은 기쁜 듯 그 주위에서 활발하게 움직인다. 그렇지만 이는 완전한 회귀가 아니라 어중간한 지대에 머무는 것으로 보인다. 하기야 완전하게 자유스러운 공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기에 적당하게 혼탁한 곳에서 제 식대로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도 새로운 삶의 윤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그녀가 또다시 독 안에서 일어나 두 팔을 격정적으로 휘저으며 격렬하게 몸부림치면서 공연은 끝이 난다.

디딤&STEP "WE-路"@양동민(FOTOBEE)
디딤&STEP 'WE-路' (c)양동민(FOTOBEE)

<중中독>에서 무대는 두 부분, 곧 두 세상으로 구획되어 있다. 독과 그 주변 공간은 남성이 지배하는 세상이고, 그것을 벗어난 지역, 곧 악사가 서 있거나 돌면서 이동하는 무대 가장자리는 자유의 공간으로 보인다. 그리고 김미란은 그 두 공간 사이에서 시종일관 방황하다가 급기야는 다시 독 안의 세상으로 회귀하지만, 이내 다시 갈등하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반복될 것임을 암시하는 춤을 춘다. 말하자면 김미란이 추는 독 안에서의 마지막 몸부림은 이항 대립하는 두 세계 중에서 어느 하나를 배타적으로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 둘 사이, 곧 ‘중간 세계’에 거주하려는 의지가 발현되는 춤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춤은 이도 아니고 저도 아닌 ‘결정 불가능성’을 담은 춤일 것이다. 요컨대 김미란은 바람직한 여성 삶의 길을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게, 둘 중 이것도 저것도 아니지만 동시에 둘 다를 어느 정도 포함하고 있는 ‘중도(中道)’에서 찾고자 함일 것이다.

그런데 이번 공연 <중中독>에서 실행자로서 공연에 직접 참여하며 김미란을 다른 삶으로 인도하고 견인하는 매개자 혹은 안내자 역할을 하는 여성 악사의 역할이 매우 인상적이다. 단정하게 의상을 차려입고 시종일관 들뜨지 않고 잔잔하게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이 마치 모든 어머니를 대리하는 인물로 보이는데, 공연 내내 표출된 주저함과 망설임의 정서가 지극히 수동적인 무기력이 아니라, 포용과 관용의 여성적 넉넉함으로 보이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최찬열 무용평론가
최찬열 무용평론가
altai21@hanmail.net
한국춤 전공 후 모스크바대 인류학 석사,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인류학 박사과정 및 미학 박사학위 취득. 지금은 몸의 예술과 인문학에 기반한 통섭적 문화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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