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러시아 피아니즘을 밝혀줄 새로운 초신성의 등장
[공연리뷰] 러시아 피아니즘을 밝혀줄 새로운 초신성의 등장
  • 더프리뷰
  • 승인 2024.01.12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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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렉산더 말로페예프의 라흐마니노프 서거 150주년 기념연주회

[더프리뷰=서울] 박제성 음악 칼럼니스트 = 커다란 이슈를 생산하지도 않으면서 소리소문 없이 전세계 콘서트 홀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수많은 젊은 러시아 피아니스트들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연주자로 알렉산더 말로페예프를 꼽을 수 있을 것 같다. 갓 스무살이 넘은 그는 워낙 어릴 때부터 신동으로 각광을 받으며 일찍부터 프로페셔널한 콘서트 피아니스트로 활동해왔는데, 금발의 잘 생긴 외모까지 더해져 더욱 주목을 받았던 것이 사실. 코로나 시기 이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수상이 불발된 이후 콩쿠르에 연연하지 않고 피아니스트로서 본연의 임무를 묵묵하게 실행해나가고 있는 그는 음악적인 해석과 피아노 음향에 있어서 비르투오소로서의 한계를 뛰어넘고자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 나가고 있다.

이러한 그가 몇 해 전부터 한국에 등장하며 러시아 피아니즘의 새로운 트렌드를 선보이고 있는데, 2023년 말 라흐마니노프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내한공연을 가졌다. 이번에는 아벨 콰르텟과의 실내악 연주까지 기획되어 그의 음악세계를 폭넓게 관찰할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2022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1번>과 <3번>, 러시아 작곡가들 중심의 리사이틀을 열었던 것과 연속성을 갖는 만큼 더욱 의미심장했다.

우선 12월 26일 인천아트센터 콘서트 홀에서 최영선이 지휘하는 밀레니엄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랩소디>와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연주했다. 앞서 들었던 공연이 워낙 큰 임팩트를 주었기에 기대가 컸었는데, 말로페예프의 경이로운 테크닉과 독보적인 통찰력이 번득이며 작품 세부를 X레이처럼 투영시키며 숨겨진 내선율들의 다채로움과 이에 새로운 힘을 얻게 된 주선율의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저 유명한 18변주에서 극한의 아름다움을 경험할 수 있었던 파가니니 랩소디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력이 받쳐주지 못해 조금 아쉬웠지만, 그래도 자칫 상투적으로 들릴 수 있는 2번 협주곡에서는 이 작품이 이렇게까지 해석되고 연주될 수 있는지를 새로이 알게 되었을 정도의 신선함이 전달되었다.

구부정한 상체와 고이 접힌 하체, 심하게 각이 진 손목과 손가락 위치를 구사하는 말로페예프. 그의 진가는 섬세하디 섬세한 1악장 첫 도입부부터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매트한 질감과 크리스탈 같은 음색을 동시에 구사하는 그는 매 순간 색다른 뉘앙스와 놀라운 핑거링을 선보이며 작품을 독창적으로 발전시켜 나갔는데, 통상적인 낭만성과는 거리가 먼 정서를 담아낸 2악장을 거쳐 말로페예프의 장기인 압도적인 쾌속질주가 숨을 막히게 한 마지막 3악장까지, 테크닉을 위한 테크닉과 연주를 위한 연주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오로지 피아노 그 자체의 미공개된 가능성들과 말로페예프의 독보적인 해석력만이 남게 되었다. 이제 다음 내한 때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4번>을 꼭 연주해주어 라흐마니노프 협주곡 사이클을 완성하기를 기대해 본다. 한편 라쉬코프스키의 <3번 협주곡>은 피아노 문제로 올바른 감상이 힘들었는데, 홀 차원에서 피아노 점검과 조율에 더욱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한다.

공연 포스터 (사진제공 = 밀레니엄 심포니 오케스트라)
공연 포스터 (사진제공=밀레니엄 심포니 오케스트라)

이틀 뒤인 28일에는 서울 예술의전당 IBK 홀에서 피아노 5중주 공연이 열렸다. 아벨 콰르텟과 함께 브람스의 <Op.34>와 슈만의 ,Op.44>를 연주한 것으로서, 피아노가 수반된 실내악 공연의 정석을 보는 듯 커다란 만족감이 충만했던 그러한 연주회였다. 무엇보다도 독일 레퍼토리를 대하는 말로페예프의 솜씨를 알게 되어 몹시 흡족했는데, 자신의 스타일과 작품 및 현악과의 균형을 절묘하게 맞추어내는 동시에, 적시적때에 피아노의 음향과 캐릭터를 드러내는 모습으로부터 서울에서 접할 수 있었던 여느 실내악 피아니스트와는 전혀 다른 감흥을 전달받을 수 있었다. 실로 신선한 해석으로서, 적어도 국내에서 실연으로 접한 이 두 개의 피아노 5중주 가운데 최고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가만히 듣노라니 말로페예프의 실내악 실력은 엄청난 건반 테크닉 숙련도에서 기인한 것은 맞지만, 상당 부분은 미세한 포인트에서 이루어지는 놀라운 페달링 테크닉에서 비롯하는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댐퍼 페달을 많이 사용하는 편인데 간간히 서스테인 페달로 음량을 조절하여 울림이 특징적인 사운드를 만드는 모습이 아주 인상적이었고, 주요 리듬을 강조할 때 소프트 페달을 음표처럼 도트방식으로 사용해 음이 튀지 않으면서도 부드럽게 도드라지는 음향을 만들어냈다. 아주 특징적인 말로페예프의 사운드 컨트롤의 비법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던 기회로서, 건반과 손가락 지문쪽 밀착력을 높이는 타건방식 또한 러시아 작품 외에 이런 독일 레퍼토리에서 음표의 정밀도와 프레이징의 선명도, 화성의 밀도가 높아져 음악적 설득력이 높다는 점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공연 포스터 (사진제공 = 밀레니움)
공연 포스터 (사진제공=밀레니엄 심포니 오케스트라)

다만 앞으로 말로페예프의 실력을 어느 정도 맞추어줄 수 있는 오케스트라나 음악가들이 페어링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스크래치가 간 LP 위로 카트리지가 일정하게 튀는 듯한 관객의 기나긴 기침이나 어린이들의 시끌벅적함, 눈치란 없이 악장마다 삐져나오는 박수 등등이 음악김상을 쉼 없이 방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로페예프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캐롤 편곡 버전 앙코르나 메인 프로그램보다 훨씬 좋았던 슈만 악장 앙코르에서 최선의 기량을 보여주었다. 2024년 5월에 다시 한 번 내한공연을 갖는다고 하는데 벌써부터 그와의 행복한 시간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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