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랭보와 브리튼이 만들어낸 환각 속으로, 보스트리지가 안내합니다
[공연리뷰] 랭보와 브리튼이 만들어낸 환각 속으로, 보스트리지가 안내합니다
  •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4.01.17 07: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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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14일 '일뤼미나시옹' 연주 (사진제공=힉엣눙크! 뮤직 페스티벌)
2023년 11월 14일 '일뤼미나시옹' 연주 (사진제공=힉엣눙크! 뮤직 페스티벌)

[더프리뷰=서울]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세종 솔로이스츠의 힉엣눙크! 뮤직 페스티벌이 지난해 11월 9일부터 22일까지 열렸다. ‘Here and Now’라는 뜻의 ‘힉엣눙크’. 2017년부터 이어온 이 축제의 올해 음악감독은 이안 보스트리지였다.

11월 9일 거암아트홀에서 ‘음악, 인문학으로의 초대’라는 주제로 열린 이안 보스트리지의 인문학 강의로 페스티벌은 시작되었다. 케임브리지 철학 석사, 옥스퍼드 역사학 박사인 보스트리지의 학자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을 터. 이어서 11월 14일 이안 보스트리지와의 <일뤼미나시옹> 연주, 11월 15일 베이비 콘서트(코스모스 아트홀), 11월 16일 장한경 바이올린 리사이틀(JCC 아트센터), 11월 17일 찾아가는 음악회(서울 금양초등학교), 11월 19일 스티븐 뱅크스의 색소폰 리사이틀(예술의전당)로 막을 내렸다.

내가 본 공연은 11월 1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렸던 세종 솔로이스츠와 이안 보스트리지의 연주 <일뤼미나시옹>이다.

세종 솔로이스츠 (사진제공=힉엣눙크! 뮤직 페스티벌)

이날 1부 무대는 세종 솔로이스츠가 주인공이었다. 프랭크 브리지의 <왈츠 인터메조>, 앤드루 노만의 <바이올린 8중주를 위한 그란 투리스모>, 그리고 하이든의 <교향곡 45번 '작별'>이다. 프랭크 브리지는 벤자민 브리튼을 발굴한 스승이고 앤드루 노만은 1979년생 미국의 작곡가다. 경쾌하고 아름다운 화음을 들려준 <왈츠 인터메조>, 현악기들의 질주와도 같은 <그란 투리스모>에 이어 사랑스럽고 위트 있는 하이든의 <작별 교향곡> – 단원들이 하나 둘씩 퇴장하는 엔딩까지 들을 수 있었다. 세종 솔로이스츠의 음악은 아름답고 짜릿했다. 현악의 풍성하고 예민함을 오가는 스릴을 십분 만끽했다.

2부에서는 이안 보스트리지가 <일뤼미나시옹>을 불렀다. 벤자민 브리튼의 연가곡 <LES ILLUMINATIONS(일뤼미나시옹)>. 아르튀르 랭보의 1886년작 <산문시집>에 입힌 곡들로, 시집의 제목은 랭보의 연인 베를렌이 지어주었다고. 작곡자 벤자민 브리튼도 동성 연인이 있었다. 바로 테너 피터 피어스. <일뤼미나시옹>은 1940년 피터 피어스에 의해 초연되었다.

현악 오케스트라로 작곡된 곡이기 때문에 1곡 ‘팡파레’부터 금관을 현이 표현한다. 랭보의 미스테리한 문장 ‘나만이 이 야만적 퍼레이드의 열쇠를 가지고 있다’(J’ai seul la clef de cette sauvage parade)가 아름다우면서도 긴장감을 조성하는 음악 속으로 청중을 휩쓸어 갔다. ‘도시들’까지 이어진 현악의 현란한 주법들, 보스트리지의 팽팽하고 밀도 있는 소리는 시인 랭보가 느낀 기묘한 두려움을 객석으로 전이시켰다. 보스트리지와 세종 솔로이스츠는 3곡 ‘문장과 고대 양식’에서 아득한 환각 속으로 침잠했다가 4곡 ‘제왕’에서는 유머러스한 핑퐁식 대화를 소화해냈다. 이안 보스트리지의 노래는 공간의 여백을 충만하게 채웠다. 별다른 움직임 없이 뻣뻣하게 노래하는 것 같아 보여도, 그는 손끝부터 다리의 움직임까지 섬세히 연기하고 있었다. 4곡 ‘제왕’을 부를 때 처음에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등을 젖힌 채 거만하게 노래하다가 '여왕으로 만들어주고 싶어요'를 부르면서는 손을 빼어 간절한 포즈를 취했다.

 2023년 11월 14일 세종 솔로이스츠 연주 (사진제공=힉엣눙크! 뮤직 페스티벌)

랭보의 시와 브리튼의 음악은 초현실적인 아우라를 만들어냈다. 보스트리지의 노래는 그 초현실적 세계를 깊이 탐구한 끝에 빚어진 진주 같았다.

9개의 연가곡이 끝나고 연주자들과 객석 모두 여운을 느끼고 있을 때 객석 한구석에서 누군가 크게 떠드는 소리가 났다. 그래서인지 이안 보스트리지는 더욱 오랫동안 눈을 감고 몸을 반듯이 세운 채로 서 있었다. 청중도 더욱 여운에 집중했다. 한참 후 그가 눈을 뜨자 박수가 터져나왔다.

힉엣눙크! 포스터 (사진제공=힉엣눙크! 뮤직 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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