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절망 속에서 부르는 노래에 신은 응답한다
[공연리뷰] 절망 속에서 부르는 노래에 신은 응답한다
  •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승인 2024.01.19 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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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오페라단 '나부코'
국립오페라단 '나부코'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더프리뷰=서울] 한혜원 음악칼럼니스트 = 국립오페라단의 2023년은 오페라 <나부코>로 마무리되었다. 지난해 11월 30일부터 12월 3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올려진 <나부코>는 2021년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된 <나부코>의 연출가 스테파노 포다의 프러덕션이었다. 스테파노 포다는 이전에도 <안드레아 셰니에>나 <보리스 고두노프> 등으로 국립오페라단과 여러 번 호흡을 맞춘 바 있다.

<나부코>는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 통일운동)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가라, 내 마음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로 시작되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통일을 염원하는 이탈리아인들의 노래로 불렸고, 베르디의 장례식에서도 모두의 합창으로 불렸다. 이탈리아인들이 베르디를 예술가로서뿐 아니라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하게 만든 작품이 바로 <나부코>인 것이다.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 것으로 내 위어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

이 말이 아직도 나 왕의 입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소리가 내려 이르되 느부갓네살 왕아 네게 말하노니 나라의 왕위가 네게서 떠났느니라

네가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면서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내서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알기까지 이르리라 하더라

바로 그 때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털과 같이 자랐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었더라 (다니엘 5장 30-33절)

 

국립오페라단 '나부코'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나부코는 성경에 나오는 실존인물,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네부카드제나르 2세)을 지칭한다. 네부카드제나르 대왕은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수많은 유대인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 바빌론의 문, 마르두크 지구라트, 바빌론의 공중정원 같은 거대한 건축물도 그의 작품이다.

<나부코>는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를 오페라화했다. 유대 왕 시드기야의 두 눈을 뽑을 정도로 폭군이었던 왕이 감히 신이 되고자 하다가 진짜 신의 벌을 받아 7년 동안 짐승처럼 떠돌게 되고, 회개하고 신을 받아들이자 다시 왕이 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양준모의 나부코는 그의 전작 맥베드보다 순한 느낌이었다. 주연급 성악가들은 아무래도 강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데, 이 캐릭터들을 차별화하는 것도 큰 과제다. 절대적 지배자가 거만하게 “내가 신이다!”라고 외치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져 짐승 같은 신세가 되는데, 그 초라하고 비참한 상황에서 양준모는 너무 당당하고 위엄 있었다.

소프라노 임세경은 질투와 야욕의 화신 아비가엘레 그 자체였다. 2막 1장 ‘운명의 편지를 내가 발견했구나!’에서 ‘나 또한 마음을 기쁨에 열어둔 적이 있었네’로 이어지는 카발레타와 카바티나에서, 아버지 나부코에게 이용당했음을 알게 된 아비가엘레의 분노와 고통이 배어나왔다. 드라마티코와 콜로라투라를 아우르는 깊이와 기교의 극치는 단연코 임세경만의 역량이다. 연출자는 아비가엘레의 마음 속 소녀를 등장시켜 그녀의 상처에 관객도 공감하게 만들었다.

국립오페라단 '나부코' (사진제공=국립오페라단)

스테파노 포다는 3막 2장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에서 유프라테스 강가 대신 수많은 소녀상이 내려오는 파격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이때 ‘한’이라는 글자가 내려온다. 일제강점기를 겪은 한국인의 정서와 히브리 민족을 결합시키려는 장치다. 2017년 아르노 베르나르는 베로나 페스티벌에서 유대인들 대신 밀라노 시민들을, 바벨론 대신 오스트리아를 등장시켜 큰 호응과 공감을 얻었다고 한다. 스테파노 포다 역시 같은 연출적 시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위너 오페라합창단이 부른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구슬프고 아름다웠다. 처형을 앞둔 절망 가운데서도 고향을 그리며 신께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는 합창이 울려퍼질 때, 신은 응답한다.

최고의 권력자 나부코도, 아비가엘레도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을 겪으며 무너지고 참회하기에 이른다.

소녀들과 소녀상의 등장은 고난 중에도 존엄을 지킨 민족에게 관객들로 하여금 경의를 표하게 했다. 그러나 ‘한’이라는 글자 하나로 그 정서를 표현하기란 무리였다. ‘한’이라는 정서는 차마 그 글자가 상징하기도, 글자에 다 담을 수도 없지 않을까. 시각적 무대를 지향하는 외국인 연출자의 의도가 너무 쉽게 보이니, 여운은 얕아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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