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무정형의 찰흙이 빚어내는 비틀거리는 현대인의 정형화된 욕망
[공연리뷰] 무정형의 찰흙이 빚어내는 비틀거리는 현대인의 정형화된 욕망
  • 나수진 무용이론가
  • 승인 2024.02.12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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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정미의 '움큼'

[더프리뷰=서울] 나수진 무용평론가 =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허무한 인생을 논할 때 흔히 언급하는 빛바랜 격언이다. 안무가 한정미는 이 케케묵은 진리에 저항이라도 하듯이 손에 찰흙을 한 움큼 그러쥐었다. 또 중심을 잡으려는 듯 찰흙 덩어리 위에 발을 딛고 서서 비틀거렸다. 이로써 큰 것을 바라지 않아도 평생 갈망에 사로잡혀 살 수밖에 없고 비틀거릴 수밖에 없는 인간 실존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댄스PRO젝트 점·선·면 감독이자 안무가인 한정미는 2년 동안 ‘찰흙’(clay)이라는 소재를 연구했다. 이 프로젝트가 2023 예술창작활동지원사업에 선정되면서 댄스PRO젝트 점·선·면의 <움큼>이 지난해 12월 10일 서강대 메리홀 대극장에 올랐다. 이번 작품은 특별히 조형되지 않은 찰흙의 물성을 오브제로 활용함으로써 현대춤의 동시대적 경향성을 다시 한번 환기시켰다. 찰흙의 물성과 상호작용하는 무용수들의 에너지는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파고들 것처럼 기세등등한 동시에 순수했다. 특히 찰흙의 질척한 물성과 무용수들의 거침없는 움직임은 동물적 본성과 이성, 자아와 타아, 질서와 혼돈이 뒤섞이거나 대치함으로써 균형이 깨진 불안하고 불쾌한 상황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한정미 '움큼' ⓒ손관중
한정미 '움큼' ⓒ손관중

공연이 시작되자 흐린 불빛 아래 네 개의 검은 실루엣이 드러난다. 이들은 일정한 대형을 이룬 채 무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같은 곳을 응시하며 걷기도 하고 손을 바닥에 댄 채로 다리를 치켜들거나 엎드려 네발 동물처럼 기어다니기도 한다. 이윽고 무대가 밝아지면서 두 무용수의 붉은 상의와 하늘색 상의가 보색 대비를 이루며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들은 어느 순간, 마치 숨이 차서 헐떡거리는 동물처럼 엎드려 등과 어깨를 위아래로 빠르게 움직인다. 그러다가 갑자기 몸의 균형을 잃은 듯 절도 있던 동작과 대형이 흐트러지고, 이때부터 무용수들은 동물적인 움직임으로 무대를 채워나가기 시작한다.

무대를 비추는 노란색 조명 가운데 새빨간 옷을 입은 무용수가 무대 위에 홀로 남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가 나무 그루터기처럼 생긴 원통 모양의 찰흙 덩어리와 벌이는 움직임은 욕망에 대한 인간의 착각을 드러낸다. 무용수는 찰흙 덩어리를 껴안고 너무나 소중한 듯 어루만지는가 하면, 그 위에 앉았다가 뒤로 넘어지기도 하고 배를 대고 엎드렸다가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한다. 또 기계체조를 하듯이 두 팔로 올라서는 기예를 선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찰흙과 씨름하는 무용수는 균형을 추구하지만 결국에는 비틀거리거나 넘어지고 만다. 또한 끊임없이 찰흙 덩어리를 욕망하지만 소유하지 못한다. 욕망에 대해 균형감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거만함, 욕망을 소유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여지없이 흔들리고 좌초된다. 찰흙을 다리에 발랐다가 찰흙 일부를 떼어낸 뒤 뒷걸음질 치던 무용수는 결국 무대 중앙에서 넘어진다. 그럼에도 그는 다시금 찰흙 덩어리를 향해 나아간다.

완벽한 균형을 이룬 것도, 손에 무엇을 움켜쥔 것도 아니지만 무용수가 찰흙 덩어리 위에 버텨 서고자 기울인 노력은 헛되지 않다. 그가 온몸을 움직이는 동안 찰흙 역시 그를 지탱함으로써 표면 곳곳에 흔적이 남기 때문이다. 한낱 손바닥 자국일지라도 찰흙에 새겨진 자국은 바로 생명력의 흔적이다. 이 흔적은 ‘어쩌면 완벽한 균형을 이룬 순간이 아닌, 균형을 잡고자 비틀거리며 몸부림치는 지난한 일생이 바로 진짜 삶’이라는 통찰을 안겨준다. 찰흙 겉면에 새겨진 이 생명력은 공연의 흐름에 따라 무대 전체로 뻗어나간다. 마치 죽은 나무 밑동처럼 보이는 찰흙 덩이가 살아 숨 쉬며 무대 전체로 뿌리를 뻗어나가듯이 무용수들의 에너지 가득한 움직임이 이어진다.

한정미 '움큼' ⓒ손관중
한정미 '움큼' ⓒ손관중

찰흙 더미와의 한바탕 씨름 뒤에 이어지는 군무는 특히 집단과 개인, 개인과 개인 사이의 관계 문제를 신랄하게 그려낸다. 조명이 흰색으로 바뀌면서 다섯 명의 무용수가 마치 지옥에서 올라오는 괴귀처럼 그로테스크한 모습으로 기어 나와 무대 곳곳을 누빈다. 앞서 일정한 대형을 갖추어 똑같이 움직일 때와는 대조적으로 팔과 다리로 바닥을 기어다니며 통제되지 않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독립적으로 움직이던 무용수들은 어느 시점부터 하나둘 엉키기 시작한다. 그들 중 하나가 무대 중앙에 쓰러지자, 그 위로 한 명 한 명 연이어 누우면서 한 무더기의 사람 탑이 만들어진다. 탑의 맨 아래에 있던 무용수들이 차례로 하나둘 빠져나와 다시 위쪽에 엎드리며 점점 더 높은 탑을 쌓아가지만 결국 탑은 무너져 내린다. 마치 신의 경지에 이르기를 꿈꾸며 쌓아 올린 바벨탑이 무너진 듯이, 무용수들이 쌓아 올린 탑도 허물어지고 오직 허무함이 무대를 채운다. 동시에 붕괴의 잔재, 곧 사람 한 무더기는 도예가가 물레를 돌리기 전에 둥글게 쌓아 올려둔 찰흙처럼 평온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한편으로는 그 모습이 마음껏 뛰놀다가 지쳐 잠든 한 무리의 아이들처럼 순진무구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평화는 오래 가지 않는다. 짧은 낮잠에서 깬 아이들처럼 무용수들은 기운을 회복한 듯 이전보다 더 격렬하게 움직인다. 마치 물레가 돌아가는 순간부터 찰흙이 구상된 모습으로 거침없이 바뀌어 가듯이 개인과 무리는 자아상과 이상향이라는 지향점을 향해 힘차게 나아간다.

한정미 '움큼' ⓒ손관중
한정미 '움큼' ⓒ손관중
한정미 '움큼' ⓒ손관중
한정미 '움큼' ⓒ손관중

이러한 도약을 알리듯 톤이 날카로운 음악이 무대에 울려 퍼지고, 쓰러져 있던 무용수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킨다. 이들은 마치 찰흙 조각이 한데 섞여 구체적인 형태로 빚어지듯이 정제된 움직임으로 하나의 구조를 만들어 나간다. 건물을 세우듯 서로의 몸 위로 올라서거나 절도 있는 대형을 이룬다. 무용수들이 한 명의 무용수에게 계속 달려들어 몸을 만지거나 붙잡고 늘어지는 동작조차 찰흙 덩이를 늘이고 매만져 구체적인 형태를 만드는 과정의 은유적 표현으로 비췬다. 뒤이어 무대 위에는 서로 엉켜서 관계의 갈등을 겪는 듯한 군상(群像)이 연출된다. 무용수들은 무리 중 한 명을 코너에 몰아넣고 윽박지르는 듯한 제스처를 보인다. 무리는 피해 달아나는 그를 계속 쫓아다니며 다양한 갈등을 빚는다. 그러다가 다시 각 잡힌 움직임으로 하나의 구조를 만들어 내고, 이러한 다이내믹한 동선을 작품 후반부까지 계속 되풀이한다. 이는 출구 없는 감옥, 곧 타인이라는 지옥 속에서 끝없이 출구를 더듬어 찾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처럼 욕망하고 흔들리며 갈등하는 사이, 찰흙은 인간의 형체로 빚어져 간다. 마치 조물주가 흙으로 사람을 빚은 뒤 숨을 불어넣는 순간의 에너지를 소환하듯이 거친 숨소리가 음악이 끊긴 고요한 무대를 가득 채운다. 숨소리는 가장 원초적인 리듬일 터, 네 명의 무용수는 이에 맞춰 한 몸이 된 듯 군무를 춘다. 이로써 숨소리가 표상하는 동물적 존재의 생존 본능을 이성으로 통제하며 타인과 조화를 이룬, 집단의 완벽한 합일이 구현된다.

이후로 무대는 마치 새로운 막이 열린 것처럼 완전히 다른 구성으로 전개된다. 이전까지는 해체와 직조의 움직임이 반복적으로 교차하며 자아형성 과정을 구현했다면 이후로는 상극의 두 움직임이 동시에 무대를 채운다. 특히 작품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장면에서는 주요 메타포인 찰흙이 한 번 더 등장해 주제의식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동그랗게 뭉친 무수한 찰흙 덩이가 무대로 쏟아져 들어오면 무용수들은 찰흙 덩어리를 주워들었다가 다시 무대 위로 던지기를 반복한다. 찰싹거리는 거센 소리와 함께 바닥에 내쳐져 뭉개진 찰흙 덩이는 둥근 형태를 완전히 잃어버린다. 무용수들은 그 외에도 찰흙으로 뭔가를 빚기도 하고 서로 레슬링을 하듯, 춤을 추듯 다양한 몸동작으로 무대를 휘젓는다. 기도하는 듯한 몸짓을 한 뒤 찰흙을 자신이나 타인의 등에 얹기도 하고 조금씩 떼어서 바닥에 버렸다가 줍기도 한다. 얼마간 리드미컬한 움직임을 보인 뒤에는 찰흙을 바닥에 내던지며 무대 바닥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다. 어떤 이는 여러 개로 흩어져 있는 찰흙 덩이를 뭉쳐 큰 덩어리로 만든 뒤 이를 밟고 올라서서 짓이기기도 한다.

한정미 '움큼' ⓒ손관중
한정미 '움큼' ⓒ손관중

무대 초반에 등장한 찰흙 더미에서 뻗어 나온 에너지는 해체와 직조를 반복하며 발산됐지만, 막상 무용수들이 마지막 순간에 찰흙을 내던지고 형태를 뭉개버리는 장면을 보는 순간 관객은 새삼 깨닫게 된다.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모든 에너지는 프랙털(fractal) 같은 ‘질서’가 아니라 무질서로 수렴되고 있으며, 이는 다시 무작위적인 방향으로 뻗어나가며 분화된다는 것을 말이다. 이처럼 <움큼>에서 찰흙은 정답을 알려주기 위한 메타포가 아닌 열린 가능성과 결론을 제시하는 암시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안무가가 보기에 개인의 자아상과 사회의 이상향을 빚어 만드는 방식은 획일적이기보다는 사회 구성원의 수만큼 다양하다. 심지어 <움큼>은 내동댕이쳐진 무형의 찰흙에도 분명한 에너지와 생명력, 잠재력이 담겨 있는 만큼 어떤 상태의 인간이든 파괴와 죽음이 아닌 생성과 변화의 존재로 바라봐야 함을 강조하는 듯하다. 이러한 사색에 잠길 무렵 무대는 어두워지고 무용수들의 헐떡거리는 거친 숨소리만 남는다. 그 숨소리가 귓전에 울릴수록 인간의 근원은 뭉개진 흙이며, 순진무구하고 무한한 잠재력을 품은 원초적인 존재라는 사실이 날카롭게 인식을 파고든다.

인간은 생존과 실존을 위해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갈망하고 이로 인해 타인과 갈등할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인간의 욕망은 언제나 균형을 넘어 불완전한 상태로 나아가도록 유도하지만, 인간은 자기 욕망에 의해 불균형이 야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욕망에 여전히 전착하면서도 균형을 되찾기 위해 애를 쓴다. 가장 손쉬운 해결은 욕망을 놓는 것이지만, 쉽게 놓을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욕망이 아니다. 따라서 인간은 기괴하게 비틀거리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더구나 문명과 기술이 고도로 발달할수록 인간은 더 많이 욕망하게 되고, 이로써 날마다 더욱 빈천한 존재로 전락하는 아이러니 속에 놓인다. <움큼>은 실제로 손에 쥘 수 있는 찰흙이라는 소재를 움직임 안에 장치해 신기루를 향한 갈망, 끊임없는 관계의 갈등처럼 뜻대로 되지만은 않는 실존 문제를 시각화했다. 찰흙은 너무 쉽게 뭉개지지만, 아직 아무것도 아닌 동시에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양면성을 지닌다. 무용예술이 끝없이 성찰하는 우리의 삶 또한 뜻대로 빚어지지 않거나 뭉개지는 일이 다반사다. 다만 어루만지고 다독일수록 원하는 모양이 되어가는 찰흙처럼 인간의 삶 또한 의지를 품고 행동하는 만큼 달라지는 양면성을 품고 있다. 관객이 찰흙으로 엉망이 된 무대를 바라보면서도 마지막에 희망에 찬 박수갈채와 환호를 보내는 이유는 욕망에 대한 속 시원한 폭로에서 느끼는 양가감정 때문이리라.

안무가가 2년 동안 골몰한 찰흙은 무대 위 오브제로서 관객을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로 이끄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또한 작품 속 움직임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주제를 향해 곧장 나아갔다. 심미성과는 거리가 먼 실험적 특성이 다분함에도 <움큼>은 사색뿐 아니라 감상까지 가능한 예술적 감성 또한 놓지 않았다. 이러한 점에서 세간에 알려진 대로 전통춤의 원형을 컨템퍼러리의 시선으로 고찰하고 무용예술의 공공성과 사회적 책임을 고민해 온 안무가의 사명감이 엿보였다. 안타깝게도 창작무용이 보편성과 대중성을 획득하기 위해 현대적인 외형에 치중한 결과 구태의연한 작법 공식에 스스로 갇혀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한 요즘이다. 이러한 흐름에 대항하듯 부정형의 오브제이자 민족 원형의 이미지를 지닌 흙과 인간의 호흡, 리듬이 탁월한 전통음악 등을 활용해 인간심리를 깊이 있게 파고든 구상은 안무가 내면의 독자적인 색채와 모양을 충분히 짐작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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