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키워드로 다시 읽는 춤공연-8] 우보만리 '노동(勞動)'
[철학 키워드로 다시 읽는 춤공연-8] 우보만리 '노동(勞動)'
  • 최찬열 무용평론가
  • 승인 2024.02.11 12: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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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속하고 메마른 자본의 세상에 맞서는 창조적 춤 실천

[더프리뷰=서울] 최찬열 무용평론가 =정치도 문화도 아니고 오로지 경제야말로 인간 삶을 방향 짓는 결정적 요인이라는 사실을 갈파한 이는 철학자 마르크스이다. 또한 주지하듯이 그의 철학에서 경제는 사회의 토대, 이른바 하부구조로 불리는데, 그것은 경제 문제가 표면적인 사회 상황, 즉 상부구조에 가려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는 이런 경제가 자본과 노동(Work), 이 둘이 서로 버티며 대항하는 관계를 통해 작동한다고 보았다. 즉 우리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밑바탕은 돈과 일이 얽히고설킨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다. SIDance 2022(제25회 서울세계무용축제) 무대에 오른 우보만리의 <노동>(9월 22-23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은 사회의 하부구조를 이루는 중요한 한 요소인 이런 노동 혹은 일을 주제화한 공연이다. 그러니까 이 공연에서 안무가 조인호는 자본과 노동의 배타적인 이항대립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이 둘 중의 하나, 곧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인 노동 그 자체를 여러모로 뜯어보고 천착한다.

우보만리 "노동(勞動)"ⓒ강경민
우보만리 '노동(勞動)' ⓒ강경민

아침이 밝아 오는 듯한 밝고 경쾌한 음향이 울려 퍼지면 춤꾼들이 무대로 몰려 들어온다. 서로 엇갈려 바쁜 걸음으로 무대 여기저기로 오가는 그들의 모습이 출근길을 재촉하는 노동자나 샐러리맨 같아 보인다. 그들은 반갑게 인사하듯 손을 맞잡거나 상대에게 기대고, 또 키보드를 두드리는 듯한 부드러운 손놀림을 구사하고, 제자리에서 열심히 뜀박질하기도 한다. 그러다 잠시 한숨을 돌리듯 두 손으로 허벅지를 툭툭 치면서 터벅터벅 걷던 이가 홀로 춤추기 시작하면, 다른 춤꾼들이 연이어 합세하여 그와 함께 잽싸면서도 날렵한 군무를 이어간다. 팔과 손목을 활용한 섬세한 손동작과 몸통을 날쌔고 재빠르게 돌리는 회전 동작, 그리고 상체를 굽실굽실하며 바닥을 사뿐사뿐 밟는 발동작 등이 어우러진 유려한 몸놀림과 끊어질 듯 말 듯 이어지는 민첩한 그들의 춤이 숙련된 노동자들의 노련한 노동 몸짓처럼 자유롭고 편안해 보인다. 바쁘게 흘러가는 노동의 하루를 묘사하는 춤과 안무가 무척 인상적인 첫 장면이다.

우보만리 "노동(勞動)"ⓒ김주빈
우보만리 '노동(勞動)' ⓒ김주빈

움직임의 리듬과 톤이 매끈하면서 차분하고, 동작과 동작의 이음과 붙임이 야무지고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춤은 과하거나 튀지 않으면서 거침없이 미끈하고 아름답게 전개된다. 일에 몰두하는 이들의 몸짓처럼 신중해 보이면서도 경쾌하고 명랑한 춤이다. 노동하는 사람들의 고유한 존재감을 발현하면서 서로 조화하고 정을 나누는 듯한 따뜻함과 포근함이 느껴진다. 소비와 향락을 좇고, 물질적인 풍요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며, 인간의 노동력을 계산이 가능한 에너지원으로만 취급하며 무자비하게 착취하는 자본과 권력에 저항하며 노동의 소중함과 가치를 환기하는 춤으로 보인다. 일상적인 노동의 몸짓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이를 춤으로 되살려내는 안무가의 탐구력과 응용력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우보만리 "노동(勞動)"ⓒ강경민
우보만리 '노동(勞動)' ⓒ강경민

마치 한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듯, 잠시 어두워졌던 조명이 서서히 밝아 오면, 노동자처럼 작업복 차림을 한 여섯 명의 춤꾼이 함께 얽혀 선 채 이리저리 이동하며 군무를 이어간다. 몸통을 리드미컬하게 출렁이며 두 팔을 부드럽게 나풀거리는 유려한 춤이다. 피리 소리가 도드라져 들리는 음악에 조응하며 끊어질 듯 이어지는 춤은 온종일 계속되는 기나긴 노동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러다 그들이 무대 중앙에 잠시 모이면, 한 춤꾼이 풀썩 쓰러지고, 나머지 춤꾼들은 그를 둔 채 무심히 제 갈 길을 가듯 터벅터벅 걸어가더니, 각자 흩어져 서서 지친 듯 상체를 요리조리 흔들고 두 팔을 흐느적거린다. 조금 후 쓰러진 춤꾼이 일어나 작은 보폭을 잇달아 떼며 아주아주 느리게 무대 뒤쪽으로 걸어가면 다른 춤꾼 한 명도 그를 따른다. 그 순간 구슬픈 구음이 흘러나오고, 둘은 시나브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마치 삶의 경계를 넘어 저세상으로 건너가듯,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점차 잠기는 둘은 힘겹고 고달픈 노동에 치여 죽음에 이른 이들처럼 보이고, 무대에 남은 다른 이들의 느리고 나약한 춤은 과잉 노동에 시달린 사람들의 무기력한 행동거지처럼 보인다. 허무감과 슬픔의 정서가 진하게 밴 듯한 그들의 춤은 밝은 전망을 기약할 수 없는 사회를 암시하는 듯하고, 또 그와 대조적으로 죽음으로 향하는 느리면서 숙연한 걸음걸이는 역설적으로 노동의 숭고함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다 무대 중앙 뒤쪽 출입구 문이 열리면, 통로 중간에 새하얀 소복을 입은 여인의 모습이 드러난다. 죽은 이의 아내이거나 그의 어머니 혹은 어머니의 어머니일 것이다. 이를테면 험난하고 굴곡진 노동의 역사를 온몸으로 증언하는 상징적 인물이다. 나지막하게 저음으로 깔린 구음에 맞춰, 제자리에 선 채 몸통을 천천히 양옆으로 틀었다가 서서히 회전하고, 부근을 살피다가 먼 곳과 허공을 번갈아 응시하며 두 팔을 느리게 움직이는 그녀는, 또한 힘들고 고단한 노동의 역사를 견뎌내며 이 땅의 삶을 풍요롭게 일군 여성상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할 것이다. 요컨대 지난 시절 우리의 어머니나 여성들의 일상적 일과 노동은 그 무엇과 비견할 수 없이 값질 뿐만 아니라, 우리네 삶을 지탱하고 지속할 수 있게 하는 힘이었다. 곧 반복되는 일상의 노동이 우리를 살게 하는 힘이었고, 그런 노동의 참가치를 정갈하면서 단아한 자태가 돋보이는 여인의 조용하고 다소곳한 움직임을 통해 일깨우는 단순하지만 의미심장한 춤이다.

우보만리 "노동(勞動)"ⓒ강경민
우보만리 '노동(勞動)' ⓒ강경민
우보만리 "노동(勞動)"ⓒ김주빈
우보만리 '노동(勞動)' ⓒ김주빈

이어서 펼쳐지는, 느리면서도 구슬픈 창부타령을 배경음으로 한 듀엣 춤이 전하는 메시지는 강렬하다. 그들의 듀엣 춤이 기존의 춤 공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통념적인 사랑의 춤이 아니기에 더 그렇다. 곧 여성 춤꾼의 몸은 뻣뻣하고 단단하며, 목각인형처럼 움직이는 그런 그녀를 남자 춤꾼이 짐짝을 나르거나 메듯 들어서 여기저기로 옮기다가, 무덤덤하게 높이 치켜올리고, 그러다가 무거운 짐처럼 등에 걸친 채 질질 끌며 힘겹게 걸어간다. 말하자면 여성은 노동의 산물인 대형 인형이나 마네킹처럼 보이고, 그런 그녀와 남성 춤꾼은 듀엣 춤을 펼치고, 그러다 기계처럼 움직이던 그녀를 용도가 다한 소모품처럼 버리는 것이다. 늘 시간에 쫓겨 여가를 즐길 시간도 없고, 무엇보다도 사랑을 나눌 만한 물질적이거나 정신적인 여유조차 없는 지경에 처한 노동자의 메마르고 바쁜 일상적 삶을 암묵적으로 드러내는 춤이다. 이른바 현대사회는 과학기술의 시대로 불린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의 발전과 진보라는 화려한 겉모습 이면에는, 그들의 노동력이 한갓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에너지원으로만 취급받으면서 기계처럼 일하는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흐르고 있다. 사람들이 그 어느 시대보다 더 많은 소비 물자를 갖게 되었지만, 그 대가로 노동하고 소비하는 경제 동물 혹은 단순한 노동 기계가 되고 말았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또한 이들의 춤은 그러한 사회상을 애달파하는 듯한 애틋한 정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우보만리 "노동(勞動)"ⓒ김주빈
우보만리 '노동(勞動)' ⓒ김주빈

무대 중앙 뒤쪽에서 네 명의 춤꾼이 천천히 걸어서 앞으로 나온다. 무대 전면으로 나와 선 그들은 손으로 무언가를 조립하는 듯한 획일화된 동작을 일사불란하게 구사한다. 기계처럼 움직이는 그들의 동작은 무미건조한 노동의 동작 같다. 아장걸음으로 무대 여기저기로 다니며 팔동작 위주의 도식적인 동작을 한동안 이어가던 그들이 점점 속도를 높이며 빠르게 움직이다가, 다리와 몸통을 급하게 숙였다가 꺾는 등 기계가 작동하는 듯한 움직임을 이어간다. 그러다 갑자기 빠른 장구 소리가 울려 퍼지면 세 명의 남성 춤꾼이 다급하게 등장해 뭔가를 캐는 듯한 격렬한 노동 동작을 하고, 그중 한 명이 무대 중앙에 서서 쉴 사이 없이 바쁘게 움직인다. 노동하는 몸이 기계처럼 변해가는 모습을 묘사하는 춤이다. 그러다 그는 무대 중앙에 지쳐 쓰러져 자빠진다. 그러면 다른 춤꾼 한 명이 등장해 그의 곁으로 다가가 마치 바람 빠진 풍선에 공기를 채우듯 입바람을 불어넣는다. 그러면 그의 몸통이 잠시 부풀었다가 다시 꺼진다. 그리고 다른 이들이 차례로 다가와 재차 바람을 불어넣으면 그는 서서히 일어난다. 이윽고 일어선 그는 사람 모양을 한 채 길거리에서 나풀거리는 대형 광고용 비닐 인형처럼 두 팔을 허우적거리다가 다시 쓰러지고 만다. 과잉 노동에 착취당하는 노동자의 모습을 비닐 인형에 비유해 은근슬쩍 비판하는 은유적인 퍼포먼스이다. 노동하는 몸의 처지가 기껏 해 보아야 겨우 바람에 비틀거리는 비닐 인형과 매한가지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우보만리 "노동(勞動)"ⓒ김주빈
우보만리 '노동(勞動)' ⓒ김주빈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의 밑바탕에서 작동하는 ‘노동’과 ‘노동력’ 뿐만 아니라 이로부터의 ‘착취’라는 메커니즘도 발견했다. 곧 노동자는 자신이 제공한 노동력에 상응하는 임금을 받긴 받는데, 이 임금은 생활에 필요한 정도의 금액일 뿐이고, 결과적으로는 자기 임금에 상응하는 것 이상으로 생산하게 되어 그 여분의 이익, 이른바 ‘잉여가치’를 사용자 혹은 자본가에게 삥땅 뜯긴다는 것이다. 여기서 핵심은 노동자의 노동‘력’, 곧 힘의 존재이다. 그러니까 노동력은 신체와 두뇌의 힘인데, 이런 힘이 자본의 착취 메커니즘에 의해 억눌리고 관리, 통제될 뿐만 아니라 착취당한다는 사실이다. 이때 노동하는 몸은 자본과 권력에 포획당하고 식민화되면서 자신의 능동적이면서도 본래적인 힘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당하는 쪽과 사람을 부리는 쪽, 곧 흙수저와 금수저로 나뉘는 것은 결국 어떤 처지에서 태어나고 자라느냐는 우연성에 달려 있고, 또 모든 인간에게는 본래 제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잠재적 힘이 있는 것이라면, 노동자는 지극히 우연적인 처지의 차이로 인해 자신의 노동‘력’을 착취당하는 것이다. 요컨대 노동자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나 아나키하고 야생적인 힘이 애초에 있는데, 자본과 권력의 작동 메커니즘 안에서 이를 억압 당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이런 마르크스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보이게 되는 것은, 노동자가 자신의 본래 힘을 되찾아 능동적으로 바꾸고 더 자율화하는 노동해방의 운동일 것이다.

그에 반해 자본과 권력은 모든 노동을 언제든지 적재적소에 즉각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가용 에너지로 만들기 위해서 진력한다. 그다음 장면은 이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풀썩 쓰러진 비닐 인형 같은 이에게로 한 춤꾼이 다가와 공기 주입기로 세차게 바람을 불어넣는 동작을 하면, 꼿꼿하게 일어난 그는 마치 작동 스위치가 올라간 기계처럼 다시 운동하기 시작한다. 재차 피식 꺼지기도 하고, 주저앉기도 하지만, 맥 빠진 노동자에게 생기를 불어넣듯 누군가 바람을 불어넣으면 그는 다시 운동하기 시작한다. 노동은 멈추지 않고 지속되는 것이다. 허리를 숙인 그가 깊은숨을 내쉬며 발로 바닥을 힘차게 밟으며 심기일전 다시 운동하기 시작하면, 다른 춤꾼들도 하나둘 그와 보조를 맞추며 똑같은 동작으로 운동하기 시작한다. 몸통을 숙인 채 출렁거리다가 휙휙 돌리고, 두 팔을 흔들고 발을 구르다가 갑자기 뛰어오르는 등 점점 빠르고 격하게 운동을 계속한다. 어떤 식으로든 노동의 역사는 이어진다는 말이리라.

노동은 자본주의의 가능 근거이면서, 동시에 불가능성의 근거이다. 곧 자본주의는 근본적으로 노동의 착취를 통해 성립하고 유지되지만, 반대로 노동자들의 전면적인 파업은 자본주의를 붕괴시킨다. 노동이 자본주의의 유사-초월론적인 조건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노동은 삶의 가능 조건이자 불가능성의 조건이다. 곧 우리는 노동을 통해 얻는 대가로 안정적인 삶을 영위하지만, 노동이 없는 실직 상태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도 한다. 결국 노동은 자본주의와 우리 삶의 (불)가능성의 조건인 셈이다. 그러기에 춤꾼들의 노동 몸짓이 일견 지쳐 보이고 애처롭게 보이다가도, 이와 대조적으로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우보만리 "노동(勞動)"ⓒ강경민
우보만리 '노동(勞動)' ⓒ강경민

마지막까지 한 명의 춤꾼(조인호)이 쉼 없이 운동한다. 힘들고 고된 노동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염원의 몸짓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가쁜 숨을 몰아쉬고 헉헉거리면서도 한없이 지속할 것만 같은 그의 몸짓에는 노동의 지속 가능성과 삶에 대한 낙관주의가 짙게 묻어 있다. 또 그 몸짓이 순수하게 노동을 긍정하는 듯하기에 무척 온화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이를테면 우보만리의 <노동>은 노동 행위를 묘사하는 살가운 춤을 통해 사랑과 정, 유대감과 공동체감을 공유하는 춤판이다. 안무가 조인호는 노동의 몸짓을 통해 잊힌 노동의 가치를 상기시키고, 이러한 기반 위에서 평화롭고 조화로운 삶을 건립하자고 말하는 것이다. 오직 맨몸 하나로 아무런 소품이나 장치 하나 없이, 노동자처럼 작업복 하나 달랑 입은 몸뚱이로 한 시간 남짓 춤을 추는 춤꾼들의 춤이 경건해 보이는 이유이다. 요컨대 <노동>은 착취 없는 노동과 어우러진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회복하자고 제안하면서, 자본과 권력이 조장한 야속하고 메마른 세상에 잠재적인 몸의 힘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창조적 춤 실천으로 맞서는 젊은 춤꾼의 우직함과 진지함이 돋보이는 공연이다.

최찬열 무용평론가
최찬열 무용평론가
altai21@hanmail.net
한국춤 전공 후 모스크바대 인류학 석사, 러시아과학아카데미 인류학 박사과정 및 미학 박사학위 취득. 지금은 몸의 예술과 인문학에 기반한 통섭적 문화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다른기사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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