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리뷰] Dance Reflections New York edition, 첫 번째 이야기
[축제리뷰] Dance Reflections New York edition, 첫 번째 이야기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4.02.17 0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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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 클리프 아펠이 2023 뉴욕에서 세공한 주옥같은 작품들

[더프리뷰=뉴욕] 하영신 무용평론가 = 소위 럭셔리혹은 하이엔드브랜드들은 유럽 장인 가계(家系)의 역사를 지니고 있고, 그 시간의 누층에는 예술에의 애호, 예술가와의 친교가 켜켜이 깃들어있다. 에르메스나 루이 뷔통 등 여타 브랜드들이 시각예술을 선호해왔다면 반 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이 대를 이어 애정해온 장르는 무용이었다. 뉴욕시티발레단을 창단하고 이끈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1967년 초연작 Jewels〉와의 교류를 기점으로 무용예술 작가들과 지속적인 동반관계를 맺어온 반 클리프 아펠은 2020년 본격적인 후원 프로젝트 '댄스 리플렉션 Dance Reflections(이하 DR)'을 출범시켰다. ‘창작(creation)’ ‘전승(transmission)’ ‘교육(education)’이라는 기치를 세우고 레퍼토리의 전승과 재해석, 신작 발굴, 작가와 단체 지원, 무용축제 후원 및 주관 등 다각도의 실천으로 구성된 DR의 가동은 전격적이고 전 세계적이다. 2022년 런던 에디션, 2023년 봄의 홍콩 에디션에 이은 세 번째 축전이었던 뉴욕 에디션을 통해 DR는 2023년 1019일부터 1214일까지 근 두 달간 뉴욕 공연예술계에 주옥같은 작품 열두 편을 새겨 넣었다.

필자가 무용계와 반 클리프 아펠이라는 브랜드의 연관을 실감하게 된 것은 지난해 봄 몬트리올 공연예술축제 Festival TransAmérique(FTA)에서 본 지젤 비엔(Gisèle Vienne)<L’étang> 으로부터였다(이 작품은 이번 뉴욕 에디션에도 포함, 1021일에서 23일까지 뉴욕라이브아트(New York Live Arts) 무대에서 관객들과 만났다. <더프리뷰> 2023년 7월 12일자에 게재된 몬트리올의 공연예술축전 Festival TransAmérique, 그 첫 번째 이야기편에 리뷰한 바, 본 지면에서는 상세한 소개를 생략한다). 2010년 서울국제공연예술제(Seoul Performing Arts Festival, SPAF) 무대에서 보았던 안무 데뷔작 <쇼윈도 Showroomdummies>(2001년 초연, 2009년 개작)에서 인상 깊었던, 인공물(마네킹)과의 병치를 통해 더욱 극명히 부각됐던 몸성(corporeality)의 춤으로부터 이제는 완연히 다학제(multidisciplinary) 작업 특히 연극 쪽 친연성으로 기울어진 다소 섭섭한 작가이긴 하지만, 그녀의 신작 <L’étang>은 동시대 감수성으로 팽팽히 당겨 아우른 문학성·연극성·춤성·시각성·음악성으로 현재적 삶의 양상과 질감을 통렬하게 직조해낸 수작이었다.

그 실험성과 완성도를 전적으로 보좌한 반 클리프 아펠의 프로젝트 DR를 추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루신다 차일즈(Lucinda Childs, 미국뱅자맹 밀피에(Benjamin Millepied, 프랑스보리스 샤르마츠(Boris Charmatz, 프랑스안 테레사 드 케에르스매커(Anne Teresa De Keersmaker, 벨기에) 등 묵직한 이름들을 위시하여 메종의 본국인 프랑스(Christian Rizzo· Dimitri Chamblas· Dorothée Munyaneza· Emmanuelle Huynh· François Chaignaud· (LA)HORDE· Nina Santes· Noé Soulier· Ola Maciejewska· Pierre Pontvianne· Rachid Ouramdane· Soa Ratsifandrihana· Tatiana Julien 등의 작가군과 그리고 Dominique Bagouet의 레퍼토리)는 물론 그리스(Katerina Andreou)· 미국(Pam TanowitzRauf Yasit “RubberLegz”)· 스페인(Marcos Morau)· 알바니아(Brigel Gjoka)· 오스트레일리아(Adam Linder)· 이탈리아(Alessandro SciarroniSilvia Gribaudi)· 캐나다(Robert Binet)· 쿠바(Judith Sánchez Ruíz) 등 다국적·다층위적으로 안무가들을 포집해왔고 게다가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 미국) 등 공연예술 연출가의 작업 후원은 물론 세계 유수의 극장들과 댄스 페스티벌과의 협업 관계망을 구축하고 있으니. 마치 1984년 국립무용센터(Centre Chorégraphique National, CCN)의 발족으로 전통과 전쟁으로 인해 빚어진 지체를 일거에 돌파해낸 그 저력을 다시금 발휘할 작정인가 싶은, 대대적인 기세로 느껴졌다.

DR의 에디션을 관통해보고 싶은 의욕에 뉴욕에 체류했다. FTA에서 본 <L’étang>과 제23SPAF를 통해 보았던 라시드 우람단의 <익스트림 바디 Corps Extrêmes>를 제외한 나머지 열편의 작품을 관람했다. DR의 기획력은 가히 놀라웠다. 작품과 현지 극장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최적의 무대로 완성된 작품들. DR의 작가들은 미국 모더니즘의 영광을 다시 썼고(루신다 차일즈의 작품들, 로이 풀러(Loïe Fuller)의 작업을 재해석한 <Bombyx Mori>), 집단창작 그리고 창작(creation)’큐레이션(curation)’ 사이 동시대 창작 동향의 복잡한 함수관계를 깊숙이 탐색했고((LA)HORDE의 작업들), 브랜드의 계층적 위상으로서는 의외의 선택이라 할 수 있는 정치적 의제도 회피하지 않았고(<Mailles>), 미국 대중문화 전통의 정서적 심부였던 소위 록(rock) 스피릿을 멋지게 불러내었고(<TakeMeHome>, 디미트리 샹블라스와 소닉 유스(Sonic Youth) 킴 고든(Kim Gordon)의 협업), 무용예술 작품으로써는 활용이 거의 불가능했던 행사 및 전시공간 파크애비뉴아모리(Park Avenue Armory)로부터 춤의 원천성인 제의의 순간을 채굴하여 뉴욕 랜드마크에 새로운 역사를 기입했다. 그 다각적이고 함의 깊었던 장면과 이름들을 복기한다.

 

​​Lucinda Childs ‘Dance’ © Agathe Poupeney
​​Lucinda Childs ‘Dance’ © Agathe Poupeney

<Dance>

choreography by Lucinda Childs · performance by Lyon Opera Ballet/1019-21, New York City Center

DR 뉴욕 에디션의 개막작은 뉴욕시티센터(New York City Center)에서 펼쳐진 루신다 차일즈의 <Dance>(1979)였다. 그 선정은 꽤나 의미심장해 보였다. 1943년 뉴욕시 주도로 건립된 맨해튼 최고(最古)의 기념비적 공연예술센터인 뉴욕시티센터(미드타운에 위치한 뉴욕시티센터는 1960년대에 이르러 뉴욕시립 오페라단과 발레단이 링컨센터로 이전하기 전까지 각 분야 시립 공연예술단체의 둥지였고 이후에도 앨빈 에일리(Alvin Ailey). 폴 테일러(Paul Taylor),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 등 미국 무용예술을 견인한 주요 작가들의 단체가 상주했던 역사적인 극장이다.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시어터는 지난해 가을 시즌도 이곳에서 치렀다)는 지난 해 내내 건립 80주년을 기리고 있었고, 루신다 차일즈로 말할 것 같으면 1960년대 뉴욕 무용예술 씬에 아방가르드 열풍을 불러일으킨 동인그룹 저드슨 댄스시어터(Judson Dance Theatre)의 일원으로 춤이력을 시작한 작가.

그러나 뉴욕 포스트모던댄스 작가란 키워드로 한정하기에는 공연예술 연출가 로버트 윌슨(<해변의 아인슈타인 Einstein on the Beach> 1976),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Gehry)(<Available Light>, 1983) 등과의 협업으로 이어지는 루신다 차일즈의 예술행보는 광폭이다. 이본 레이너(Yvonne Rainer)거부선언으로부터 촉발되고 굳어진 저드슨 혁명의 미니멀리즘적(그러므로 모더니즘적) 기조를 뚫고 나아가 비로소 포스트모더니즘의 융복합형 생성미학을 선취한 그녀를 그 미학관과 명칭이 부교합하는 포스트모던댄스 그룹의 일원으로 여기는 것은 여전히 유효한 판단일까. 자국 평론계에 의해 자칭된 미국의 포스트모던댄스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실질적 계열인 컨템퍼러리댄스의 미학관을 반작용의 관계로 파악한다면(포스트모던댄스의 또 다른 키워드인 즉흥이 컨템퍼러리댄스 계열의 작가들의 춤을 창출시키는 주요 메소드라는 점에서 두 범주를 연계선상에서 파악하는 견해도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필자는 즉흥 세션 그 자체를 작품 혹은 공연 그 자체라 주창했던 포스트모던댄스 그룹의 실천과 즉흥으로부터 창발된 춤을 편집·배치하여 작품세계 내 주요 내역으로 삼는 컨템퍼러리댄스 작가들의 실천을 부작위(不作爲)와 작위(作爲)의 대립적 구도에서 파악하는 것이 춤미학의 현재적 동향을 섬세히 파악하기에 더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 이행은 양차대전으로 인한 유럽의 휴지기로 말미암아 팽배할 수 있었던 미국식 전위가 유럽 전통 종합예술론으로 복귀한 문화적 헤게모니의 이동으로 읽어낼 수도 있는 바.

개인적 경험치에서 루신다 차일즈란 이름은 박제된 이름이었다. 트와일라 사프(Twyla Tharp)나 트리샤 브라운(Trisha Brown) 등 비슷한 이력으로부터 나아온 다른 작가들의 공연은 국내외 무대를 통해 간간이 접해올 수 있었던 것에 비해, 루신다 춤의 경험은 획기적 오페라' 혹은 뮤직시어터등의 새로운 수사(修辭)를 획득한(그러나 어떤 한정으로도 충족이 불가능한) 시대의 문제작 <해변의 아인슈타인>에 삽입된, 작품의 부분값으로서의 장면이 전부. 기타 부분 발췌된 동영상 자료들의 확인으로써도 루신다의 춤은 여전히 미니멀리즘의 계통상으로 확인됐었다. 명백한 발레적 앙셴망(enchaînement), 이 기하학적 동작과 동선의 반복과 집적은 그 설계에 복잡성을 부가한다 한들, 제아무리 다른 장르들의 보필을 받는다 한들, 다른 매체들과 융복합하며 강렬하고 강력한 운동 에너지를 창출해내는 동시대 춤들의 역학에 필적할 수 있을까?

​Lucinda Childs ‘Dance’ © Agathe Poupeney
​Lucinda Childs ‘Dance’ © Agathe Poupeney

2023년에 관람하는 1979년작 <댄스>에서 확인되는 루신다 차일즈의 안무적 특성은 여전히 미니멀리즘에 개연한다. 협업하는 작가들, 음악의 필립 글래스(Philip Glass)와 미술의 솔 르윗(Sol LeWitt) 역시 해당 분야 미니멀리즘 역사의 대표적 작가들이다. 이 특이점이 명증한 이름들의 구조적 결합이라면 예측이 가능하지 않은가. 그러나 역시 예술의 감응은 현장에서의 발생적 사태. 개시되는 시점으로부터 한동안 작품은 예상대로 간명하다. 필립 글래스의 음악은 멜로디 서사로부터 탈구된 파편적 프레이징의 끊임없는 루핑(looping), 그 음악의 특유한 물리력에 결착하여 루신다의 춤도 글리사드(glissade, slide step을 가리키는 발레용어)와 작은 점프와 단순한 회전의 구성으로 명확한 단위를 이룬다.

그 결합에 가세하는 솔 르윗의 영상도 격자(grid) 이미지다. 후대 무용작품들(대표적으로 프랑스 춤작가 무라드 메르주키(Mourad Merzouki)<Pixel>(2014))에서 이미 시공간의 계측적 적시 이상 무용수들의 몸에 대응하며 파문(波紋)하고 융기하고 함몰하며 가상의 공간을 출몰시키는 직접적인 운동-이미지로 변모해온 격자 이미지건만 후반부 개작의 대목(2016년에 마리-엘렌 르부아(Marie-Hélène Rebois)에 의해 촬영된 리옹 오페라 발레의 공연 장면과 무대 위 실황을 중첩시키는)이 시공간을 혼재시키며 가상과 현실의 이중적 구조로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존재적 사태들, 정감 혹은 정서의 극적인 증폭을 야기하기 전부터도 그의 영상은 이미 놀라운 효과를 창출한다. 솔 르윗의 원본 영상은 비록 아직은 상하좌우의 수직적 분할 구도로 운동하지만 시간과 공간을 분기(分岐)하며 새로운 장소성을 출현시키고 있으니, 굳이 1979년이라는 시점을 감안할 필요 없이 충분한 동시대적 감각으로 감수되는 그 사태는 놀라울 따름이었다.

Lucinda Childs ‘Dance’ © Agathe Poupeney
Lucinda Childs ‘Dance’ © Agathe Poupeney

두 명, 두 커플, 네 커플로 최초의 모티프에 사소한 변형을 첨가해가며 좌우횡단, 대각선, (), ()으로 증폭하는 모듈(module)형 구성만으로도 에너지의 누계가 상당. 발레의 동작구가 그 기본의 집적만으로도 이렇게나 소진적인 정동(情動, affect)을 창출할 수 있는 장르였나 싶은 것이 과거춤의 유산에 새삼 경외심을 갖게 만드는 이 작품. 막후에 화장실, 엘리베이터, 로비에서 관객들은 약속이나 한 듯 “exquisite”란 형용사를 말했다. 현재에도 통각되는 이 정교함강렬함은 당대에는 얼마나 강력한 새로움이었을까. 회오리치는 현재의 첨점, 춤의 원천적 위력을 채굴하는 작업(본질의 축출이라는 모더니즘의 강령 하에서 만들어진 이 작품의 제목이 ‘Movement’가 아니라 ‘Dance’라는 것은 얼마나 의미심장한가)은 새로움을 독려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임을 새삼 경각케 해주는 관람이었다.

현재를 견인하는 모더니즘의 방점으로 루신다 차일즈와 필립 글래스를 꼽은 DR은 11월 28일부터 12월 10일까지 조이스시어터(The Joyce Theater)에서 롱런한 <Dancing with Glass—The Piano Etudes>를 통해 다시 한 번 그 이름들을 기념하였다. 필립 글래스 음악세계의 더할 나위없는 해석자라는 평판을 얻은 마키 나메카와(Maki Namekawa)의 피아노 연주에 맞춰 루신다 차일즈를 위시한 다섯 명의 안무가(Chanon Judson, Justin Peck, Leonardo Sandoval, Bobbi Jene Smith & Or Schraiber)가 발레로부터 모던댄스와 탭댄스 등 춤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구가했다.

(LA)HORDE ‘Room With A View’ © Cyril Moreau
(LA)HORDE ‘Room With A View’ © Cyril Moreau

<Room With A View>

direction and choreography by (LA)HORDE · performed by Ballet National de Marseille/1020-21, NYU Skirball

발레계의 모더니스트 롤랑 프티(Roland Petit)에 의해 1972년 설립된 마르세유 국립발레단(Ballet National de Marseille. 1981년 국립단체로 승격, 1984년 국립안무센터에 편입).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핑크 플로이드의 라이브에 더불어 진행한 파격적인 창단작 <Pink Floyd Ballet>로 표방한 혁신에의 추구 의지는 프레데릭 플라망(Frédéric Flamand), 에미오 그레코와 피터 스콜튼(Emio Greco & Pieter C. Scholten, 공동예술감독) 등 단체를 도맡았던 실험적 성향의 작가들에 의해 단체의 정체성으로 응결되었고, 그 기치는 2019년 예술감독집단 라오르드((LA)HORDE)에게 인계되었다.

프랑스어 ‘horde’의 사전적 의미는 유목민’ ‘(부랑자·폭도 따위의) 무리’. 시각예술가 마린 브뤼티(Marine Brutti), 영상작가 조나단 드브루어(Jonathan Debrouwer), 무용가 아르튀르 아렐(Arthur Harel)2013년에 결성한 예술공동체 라오르드는 정관사 여성형 ‘la’에 괄호를 쳐두었다시피 춤과 공연의 내재된 관행을 해체하고, 예술장르 뿐 아니라 패션·영화·대중음악 등 다방면의 문화 기호체계를 섭렵, 예술세계와 생활세계 그리고 근자에 더욱 그 영역이 공고해지고 있는 가상세계 간을 넘나들며 동시대 삶의 입체적 지평을 횡단 중이다. 2020년에 초연된 <Room With A View>는 라오르드의 개방형 지향이 총망라된 BNM 부임작.

(LA)HORDE ©Benjamin Malapris 왼쪽부터 마린 브뤼티, 조나단 드브루어, 아르투르 아렐.
(LA)HORDE ©Benjamin 'Malapris' 왼쪽부터 마린 브뤼티, 조나단 드브루어, 아르튀르 아렐.

일렉트로닉 뮤지션 론(Rone, 본명 Erwan Castex)과의 협업작이기도 한 <Room With A View>는 레이브(rave) 파티의 한 장면으로부터 출발한다. 하우스에 입장하면 나중에 필요하다면이란 안내와 더불어 소음방지 귀마개를 받는다. 쿵쿵쿵쿵, 심박을 부추기는 음악이 이미 하우스 전체를 두드리고 있지만 아직 귀마개를 낄 정도는 아니다. 무대 업스테이지는 하얀색 암벽, 그 상층부 동굴에선 등을 진 론이 디제잉 테이블에서 음악을 믹싱하고 있고 그 옆에서 한 여자 무용수가 비트에 맞춰 분절적이면서도 과몰입적인 춤을 추고 있다. 이미 충혈적인 음악과 춤의 강도, 쉽사리 관객들에게 전이되는 연행자들의 무아지경, 마치 컨셉추얼한 클럽에 들어선 것 마냥 즉각적으로 트랜스적 사태에 포박된다. 공연예술의 목표가 지극한 소통, 정동, 그리고 마침내의 해방적 국면으로의 성취라면 이 도치(倒置)적 상황은 어떻게 전개될 수 있을 것인가? 번쩍번쩍, 번개를 닮은 백색의 고휘도(高辉度) 스트로브사이키 조명은 붕괴, 파국을 암시하는 것이리라.

상층부 동굴 아래 암벽에는 기어오를 수 있는 단차로 보행이 가능한 길이 놓여 있다. 키스하려는 남자, 뿌리치는 여자, 애걸하는 그, 그런 그를 발로 걷어차는 그녀. 옥신각신하는 커플이 동굴로 올라오면 객석 조명이 페이드아웃되면서 본격적으로 공연이 개시된다. 한 사람, 두 사람, 이내 동굴은 북적북적 꽉 찬다. 열여섯 국적 스물다섯 무용수의 하우스라는 마르세유 국립 발레단. 과연 저마다의 차림과 춤새가 다채롭고 강렬하다. 실랑이 중이던 커플은 어느새 동굴 위 암벽의 상단부에 올라가 있다. 여자가 쓰러진 남자를 밟고 서면 굉장한 박력의 굉음이 귀청을 관통한다. 동시에 동굴 안에서도 누군가 쓰러진다. 모두에게 들려 나가면 음악이 애절해지고 무대 상수 천장 서까래로부터 수직으로 모래가 떨어져 내린다. 환경의 파괴, 사회의 붕괴, 관계의 와해. 간간히 위치를 바꿔 느닷없이 쏟아져 내리는 모래 눈물.

암벽 상층부 평지, 정면의 지면, 암벽 측면 쪽으로부터의 깊숙한 지면, 혹은 여전히 암벽의 간신한 공간, 여기저기로 흩어진 무용수들. 담배를 태우고, 방황하고, 다투고, 사랑하고전쟁의 와중에도 새 생명이 태어나듯 그 어떤 무참한 시절에도 유지되는 삶. 외래적이든 내재적이든 임박해오는 파국의 조짐들을 잘도 견디며 살아내고 있는 동시대 관객들에게 라오르드는 파국을, 파경 속 삶을 언도한다. 손바닥으로 가리기엔 하늘이 이미 너무 낮다. 요인이 무엇이든, 자연재해든 문명적 모순의 누적분이든 산적한 위기의 임계치가 터지면 간신히 지탱되어온 물리적, 심리적 인위(人爲)는 순식간 한꺼번에 속절없이 무너져내리고 죽지 않았다면 우리는 마르세유의 무용수들이 현전시키는 쟁투적 상황을 살아내게 될 터.

(LA)HORDE ‘Room With A View’ © Cyril Moreau
(LA)HORDE ‘Room With A View’ © Cyril Moreau

라오르드가 설계한 폐허의 용적은 다면적이고 깊다. 그 세계에서 춤은 폭력의 양상으로 치닫는다. 거칠어진 세계의 물질, 그에 창발하는 심리를 구가하는 론의 음악은 귀마개를 만지작거리게 한다. 무용지물일 것이다, 귀를 막아본들 전신을 두드리는 파동의 물리력은 어쩔 것인가. 위해한 세계, 무엇보다도 위력이 지배하는 세계, 그 속의 삶을 적시하는 춤. ,,,, 오오, 우우, ,,다다. 의미화와 소통에 실패하는 스타카토의 발화들, 광폭해진 행위와 관계로서의 춤의 무차별적 교차. 달아오르는 세계, 마침내 와르르 나머지 암벽도 무너져내린다.

하얀 앞치마를 두르고 방독면을 쓴 네 사람이 돌무더기를 치운다. 발전기 돌아가는 소리, 빗질 소리, 이윽고 대지는 평편해진다. 사람들은 주섬주섬 벗어던진 옷가지를, 놓쳤던 정신을 챙겨 입는다. 정돈이 완료되면 지상에 다시 론이 디제잉 콘솔을 몰고 등장. 누군가 다시 도입부의 자기몰입적인 춤을 추기 시작하고 둘러섰던 사람들도 가세한다. 격렬해지는 춤사위. 역사는 스스로의 기둥을 휘감으며 전진한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질질 끌고 가고 누군가는 그 뒤를 쫓는, 되풀이되는 불행의 장면들, 라오르드가 연출한 그 속도는 몹시 느리다. 역사로부터의 교훈이 있다면 무지에의 각성이 아닐까, 그 각성을 요청하는 라오르드.

결말부는 연대, 각성과 해방에의 촉구다. 한 명씩 무리의 어깨를 딛고 올라서 몸을 던지면 받아내는 무용수들, 이어지는 대형의 원형무, 세상의 힘없는 자(동양인 여성 무용수)가 목말 태워지며 무대 안 세계는 화해와 연대를 이뤘다. 시민혁명과 68혁명의 나라 프랑스. 지식인, 노조 등 내부 단위의 각성과 결속을 공동체 전체의 해방으로 성취해 본 역사적 경험이 있는 나라. 연대를 이룬 무리, 라오르드들은 이제 함께 싸울 것을 요청한다. 객석 상단으로부터 서치라이트가 무대를 겨냥하면 무리는 행렬을 이어 돌을 던지고 한 팔을 뻗어 힘차게 구호를 외치고는, 양손으로 스스로의 가슴을 치고 아주 또렷한 시선으로 관객을 응시하며 동참을 구한다. 정치, 경제, 사회, 환경, 세상의 어느 구석이 평화와 안정을 장담할 수 있던가. 객석의 나도 그들의 박자에 맞춰 가슴팍 두드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다.

(LA)HORDE ‘Room With A View’ © Aude Arago
(LA)HORDE ‘Room With A View’ © Aude Arago

 

(LA)HORDE ‘Room With A View’ © Jerome Lobato
(LA)HORDE ‘Room With A View’ © Jerome Lobato

일렬횡대로 선 무리들의 허밍. 관객석의 불이 먼저 켜지고 무엇을 언제까지 기다리고만 있을 거냐는 메시지를 던지며 한 명씩 퇴장하는 가운데 점차로 어두워지는 무대, 그렇게 엔딩. 지난 봄 시즌, 바로 여기, 대학 부설극장 NYU스커볼에서 관람했던 발레 드 로렌(Ballet de Lorraine)<Cela Nous Concerne Tous>(<더프리뷰> 2023년 5월 25일 ‘완벽한 더블빌의 밤- 발레 드 로렌' 참조)의 장면들이 재생된다. 2023년 무용예술계 봄 시즌과 가을 시즌, 개인적으로 가장 뭉클했던 작품들이 혁명을 말했다. 과연 지금은 변혁의 필요충분조건 시절이라고, 나는 깊이 동의한다. 미감이든, 사유든 어쨌든 예술이란 인류의 변화하는 위상을 구하는 작업이 아니던가.

DR 뉴욕 에디션에서 라오르드와 마르세유 국립발레단은 두 번의 무대를 펼쳤다. 1025일과 26, 같은 장소 NYU스커볼에서 펼친 두 번째 무대 <An Evening With (LA)HORDE)>에서 라오르드는 자신들의 단편 <Til Tok Jazz><Whether Is Sweet>을 비롯하여 단체의 레퍼토리인 루신다 차일즈의 <Tempo Vicino><Concerto>, 그리고 라생드라 닌자(Lasseindra Ninja><Mood>를 큐레이션하였다. 스타일이 전혀 다른 세 작가의 작품들을 너끈히 연행해내는 BNM의 수용력은 놀라웠지만, <Dance> <Room With A View>라는 작가적 가능성이 총망라된 수작들을 관람한 직후라 그 단초격의 단편들은 좀 싱겁게 느껴졌다.

Lasseindra Ninja ‘Mood’ © Théo Giacometti
Lasseindra Ninja ‘Mood’ © Théo Giacometti

이 날의 연행에서 놀라웠던 지점은 라생드라 닌자와 BNM의 매칭이었다. 광택감 빛나는 핑크 코스튬과 망사 스타킹과 부츠 차림에 유니콘 뿔이 달린 모자를 쓰고 포니테일 머리채를 휘두르며 자넷 잭슨(Janet Jackson)‘Throb’에 맞춰 라생드라 닌자 안무의 키워드인 ‘LGBTQ(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 퀴어 혹은 questioning(아직 혼돈중의) person의 약자. 남성/여성의 이분법에 대항하는 젠더의식의 신표기법)’‘vogueing(혹은 vogue dance: 1980년대 후반 1960년대 할렘의 볼룸 스타일을 전유하여 양산된 스트리트댄스의 한 양식)’을 저렇게나 잘 소화해내는 발레단이라니! 이제 프랑스에서 발레는 역사적으로 재단된 한 양식으로의 한정을 넘어 애초의 라틴어 어원 ‘ballo’ ‘ballare’로부터의 어의 춤추다, 뛰어다니다란 포괄적 의미를 온전히 실현해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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