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리뷰] Dance Reflections New York edition, 두 번째 이야기
[축제리뷰] Dance Reflections New York edition, 두 번째 이야기
  • 하영신 무용평론가
  • 승인 2024.02.18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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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 클리프 아펠이 2023 뉴욕에서 세공한 주옥같은 작품들

[더프리뷰=뉴욕] 하영신 무용평론가 = 소위 ‘럭셔리’ 혹은 ‘하이엔드’ 브랜드들은 유럽 장인 가계(家系)의 역사를 지니고 있고, 그 시간의 누층에는 예술에의 애호, 예술가와의 친교가 켜켜이 깃들어있다. 에르메스나 루이 뷔통 등 여타 브랜드들이 시각예술을 선호해왔다면 반 클리프 아펠(Van Cleef & Arpels)이 대를 이어 애정해온 장르는 무용이었다. 뉴욕시티발레단을 창단하고 이끈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의 1967년 초연작 〈Jewels〉와의 교류를 기점으로 무용예술 작가들과 지속적인 동반관계를 맺어온 반 클리프 아펠은 2020년 본격적인 후원 프로젝트 '댄스 리플렉션 Dance Reflections(이하 DR)'을 출범시켰다. ‘창작(creation)’ ‘전승(transmission)’ ‘교육(education)’이라는 기치를 세우고 레퍼토리의 전승과 재해석, 신작 발굴, 작가와 단체 지원, 무용축제 후원 및 주관 등 다각도의 실천으로 구성된 DR의 가동은 전격적이고 전 세계적이다. 2022년 런던 에디션, 2023년 봄의 홍콩 에디션에 이은 세 번째 축전이었던 뉴욕 에디션을 통해 DR는 2023년 10월 19일부터 12월 14일까지 근 두 달간 뉴욕 공연예술계에 주옥같은 작품 열두 편을 새겨 넣었다.

 

동시대 공연예술 작품들의 실험성과 완성도를 보좌하고 있는 DR 에디션을 관통해보고 싶은 의욕에 뉴욕에 체류했다. FTA에서 본 <L’étang>과 제23회 SPAF를 통해 보았던 라시드 우람단의 <익스트림 바디 Corps Extrêmes>를 제외한 나머지 열편의 작품을 관람했다. DR의 기획력은 가히 놀라웠다. 작품과 현지 극장의 정체성에 부합하는 최적의 무대로 완성된 작품들. DR의 작가들은 미국 모더니즘의 영광을 다시 썼고(루신다 차일즈의 작품들, 로이 풀러(Loïe Fuller)의 작업을 재해석한 <Bombyx Mori>), 집단창작 그리고 ‘창작(creation)’과 ‘큐레이션(curation)’ 사이 동시대 창작 동향의 복잡한 함수관계를 깊숙이 탐색했고((LA)HORDE의 작업들), 브랜드의 계층적 위상으로서는 의외의 선택이라 할 수 있는 정치적 의제도 회피하지 않았고(<Mailles>), 미국 대중문화 전통의 정서적 심부였던 소위 록(rock) 스피릿을 멋지게 불러내었고(<TakeMeHome>, 디미트리 샹블라스와 소닉 유스(Sonic Youth) 킴 고든(Kim Gordon)의 협업), 무용예술 작품으로써는 활용도가 거의 불가능했던 행사 및 전시 공간 파크애비뉴아모리(Park Avenue Armory)로부터 춤의 원천성인 제의의 순간을 채굴하여 뉴욕 랜드마크에 새로운 역사를 기입했다. 그 다각적이고 함의 깊었던 장면과 이름들을 복기한다.

Boris Charmatz ‘Somnole’ © Lorenza Daverio
Boris Charmatz ‘Somnole’ © Lorenza Daverio

<Somnole>

choreography and performance by Boris Charmatz/10월 28-29일, NYU Skirball

미국 무용예술계의 역사적 아방가르드 운동이 1960년대 ‘포스트모던댄스'였다면 이에 필적할만한 프랑스의 전위적 움직임으로는 1990년대에 촉발된 ‘농당스(non-danse)’(이 범주의 작가들은 평단의 총칭을 수용하진 않지만)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미국의 전위가 춤작품의 관행을 분쇄하기 위해 ‘움직임 그 자체(movement)’에만 천착하였다면 농당스 계열 작가들의 탈구 전략은 춤을 다시 기술(記述)하고 춤공연을 기존의 총체성과는 다른 상태로 재조립하는 것이었다. 컨셉추얼한 안무와 렉처·연극·설치미술·영상미디어 등 타장르·타매체와의 결합. ‘작가주의 혹은 자필성’ ‘융복합’ ‘다학제’로 특징지어지곤 하는 동시대 컨템퍼러리댄스로의 계열화에는 농당스의 친족성이 더 가깝다고 볼 수 있겠다. 보리스 샤르마츠는 제롬 벨(Jérôme Bel), 자비에 르 루아(Xavier Le Roy) 등과 더불어 농당스의 대표적 인물로 꼽히는 작가다.

의상과 오브제의 활용, 춤의 동선과 공간 조성 등 시지각 요소에 강점을 보인다는 점에서 컨템퍼러리댄스에 연계하지만 농당스 작가들의 안무는 종종 언어 그 자체의 직역이거나 시각예술 언어로의 환원이었다. 보리스 샤르마츠의 경우 특히 시각예술과의 친연성이 깊다. 초창기 대표 안무작인 <Aatt enen tionon>(1996)은 오픈된 3단 플랫폼 구조물에서 세 명의 무용수가 상호작용 없이 자발적인 움직임을 연행하는 작품이다. 좌대에 놓인 조각물 마냥 사방이 개방된 공간에 놓인 무용수들과 그 주위를 배회하며 자신의 시선을 결정할 수 있는 관객들. 보리스 샤르마츠의 작품들은 관객의 능동적 참여가 허용된다는 점에서 연행자와 관객의 공동현전(co-presence)을 유발하는 수행성(performative)의 미학으로 해명이 되곤 하는데 필자는 이에 좀 다른 사견을 갖고 있다. ‘주의’ ‘관심’을 의미하는 단어 ‘attention’으로부터의 언어유희인 제목은 얼마나 의미심장한가. 이 작품에서 연행자와 관객의 주된 경험은 시각에 의존한다. 정면을 강제하는 프로시니엄 무대에서 해방된 공간으로 나아온 샤르마츠의 이행은 평면회화로부터 삼차원 공간으로 나아온 조형예술의 이념에 개연한다. 그 춤의 경험은 여전히 시각적 의존도가 높아 보인다(발췌된 동영상 자료로만 볼 수 있었기에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환경의 작품들의 경험에서 비롯하건대 개방형 공연의 경우 그 경험은 촉각적· 정동적 사태라기보다는 시각적 관람인 경우가 많았다).

Boris Charmatz ‘Aatt enen tionon’ © Marcus Lieberenz
Boris Charmatz ‘Aatt enen tionon’ © Marcus Lieberenz

실제로 그는 자신의 작업을 '미술관의 춤(musée de la danse, 직역하면 '춤의 미술관'이지만 경계를 지우는 샤르마츠의 작업은 결국 춤으로 귀속한다는 관점에서 의도적으로 오역한다)’이라 자칭하였다. 2008년에 초연된 <Flip Book>은 머스 커닝햄(Merce Cunningham) 컴퍼니의 역사를 기념하여 발간된 「Cunningham Fifty Years」(1997) 속 자료들을 모티브로 한 작품인데, 단숨에 차르륵 쓸어넘기는 방식으로 이미지들의 활동성을 구하는 플립북의 원리에 착안하여 커닝햄 춤을 현전시켰다. 2009년 렌(Renne) 소재 국립무용센터(Centre Chorégraphique National de Rennes et de Bretagne) 예술감독으로 부임하면서는 기관의 이름을 아예 ‘춤 미술관(Musée de la Danse)’으로 개칭하기도. <플립북>을 위시하여 <expo zéro>(2009), <20 danseurs pour le XXe siècle 20세기를 위한 스무 명의 무용수>(2012) 등 ‘작품이 없는 전시 프로젝트’라는 작업관이 구현된 작품들은 뉴욕 현대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 MoMA), 런던의 테이트 모던(Tate Modern) 등 세계 유수 미술관들에 의해 애호되었다. 무용수들이 미술관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춤을 진행하고 관객은 미술관 관람 방식대로 작품을 경험하는 진행방식은 이후 타작가들의 작품과 미술관들이 진행하는 자체 무용 프로그램에서도 자주 목격되곤 하였다.

Boris Charmatz ‘Flip Book’ © César Vayssié
Boris Charmatz ‘Flip Book’ © César Vayssié
Boris Charmatz ‘20 danseurs pour le XXe siècle’ © Joe Humphrys
Boris Charmatz ‘20 danseurs pour le XXe siècle’ © Joe Humphrys

물론 보리스 샤르마츠의 ‘musée de la danse’ 개념은 ‘musée(museum)’라는 단어가 그러하듯 시각적 구성물로서의 미술관적 기능 뿐 아니라 몸에 잠재된 기억으로서의 역사를 불러일으키는 아카이브로써 박물관의 역할을 수행하기는 하지만, 정동의 역학에 충실한 최근의 춤 경향과 비교해보자면 그 시절 그의 농당스는 동시대 컨템퍼러리댄스와 어떤 경계를 갖고 있기는 한 것이다. 시각~촉각, 관람~정동, 경험~체험 간 스펙트럼에서 전자에 가까운. 그런 판단을 하고 있던 터라 2022년에 그가 피나 바우쉬 무용단(Tanztheater Wuppertal Pina Bausch)의 예술감독으로 선임되었을 때 의아해할 수밖에 없었다. 피나 바우쉬 못지않게 동시대의 춤 씬에서 그 족적이 뚜렷한 작가이긴 하지만 바우쉬의 작품 경향을 기준으로 보자면 샤르마츠 춤의 성향은 어쨌든 해체적이지 않은가.

의식과 신체의 분리불가능성으로서의 몸. 일원론적 몸으로 몸성(corporeality)을 구가하는 춤의 작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춤으로써 존재의 어떤 상태나 사태를 표지(標識)하는, 대표적으로 피나 바우쉬의 작업 성향. 다른 하나는 춤으로써 존재함에 관한 어떤 명제를 기술하는, 농당스의 작업을 포함하여 일군의 컨셉추얼한 작업들. 춤작가들과의 대화에서 일원론적 몸은 작가의 지향에 따라 '사유(사고)하는 몸' '몸의 사유(사고)' 등의 차이를 갖는 표현으로 등장한다. 접근방식에 따라 몸들은 물질에 가까운 것 혹은 이념에 가까운 것으로 특이점을 갖기 마련인 것이다. 물질에 가까울 때 몸은 시선적 거리를 갖는, 대상화의 대상이 되고 이념에 가까운 몸은 촉각적, 정동적 관계의 가능성을 지닌다.

물론 이 두 지형 간의 경계는 모호하지만 그리고 ‘일원론적' 몸의 작업이라면 두 순간들을 모두 함유하지만, 어쨌든 그 경과로부터 총합지어지는 인상이 있기는 한 것이다. 대체로 촉각될 때 정동될 때 몸성의 역량이 발휘된 경우고, 그럴 때 미술작품의 (전형적) 경험과는 다른 춤의 고유한 체험이 된다. 몸이 다른 매체에 비견될 때, 예를 들면 ‘움직이는 조각상’ ‘음악의 가시화’ 등으로 표현되는 춤은 유일한 생명적 매체로서의 춤의 특질 일부를 소실한 셈일 수도 있다. 그 틈으로부터 ‘춤’ ‘몸’에 대한 사유는 작동을 시작하기도 하지만, 사유와 생명의 역능은 맞물려 사람 그리고 작품의 전체를 이루기는 하지만, 어쨌든 사유의 기제와 내역은 ‘춤-몸(들)’이 단박에 온전히 알아지고 충분히 감각되는 무아지경의 몰입, 춤의 원천적 기제와 내역과는 다른 것이다. ‘해체적’이든 ‘컨셉추얼’이든 혹은 ‘농당스’든 실험적 계열의 춤들은 대체로 알아차리는 지적 재미는 있어도 관통하거나 사로잡히는 몰입의 기적은 행사하진 못했다, 필자 개인의 관객으로서의 역사에선.

2023년 가을, 드디어 지적 호기심의 대상이었던 보리스 샤르마츠의 춤을 온전히 경험할 기회를 만난다(게다가 그의 춤관이 완연히 드러날 독무를!). 라오르드에 의하여 용적이 넓고 깊어진, 그 기억이 여직 감응의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NYU스커볼 무대에 그는 희미하게 들어섰다. 암흑 속, 연약한 휘파람 소리, 아주 천천히 밝혀지는 조명. 양손을 머리 위로 든 보리스 샤르마츠가 상수 쪽에서 하수 쪽으로 무대 복판을 가로질러가도록 나는 그가 나를 향해 있는지 등을 지고 있는지 식별할 수 없었다. 마침내 분명해졌을 때 그는 스트라이프, 체크, 도트 무늬 등이 그려져, 그리하여 채도(彩度)차를 갖는 푸른색 직사각 원단들이 배치를 이룬 무릎 기장의 스커트를 걸친 ‘맨몸'이었다. 그랬다. 나의 기대는 맨몸적 춤이었다. 보리스 샤르마츠의 존재, 그의 존재론적 사태로서의 춤관, 그 부연 없는 중핵을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

Boris Charmatz ‘Somnole’ © Marc Damage
Boris Charmatz ‘Somnole’ © Marc Damage

춤의 흔적임이 분명한 크고 작은 근육들의 춤-몸은 예상처럼 쉽게 항진된 생명력으로서의 춤적 순간을 펼치진 않았다. 엎드렸다가, 양반다리 자세로 앉아 한 다리만 뻗어두었다가, 두 다리를 접어 안아 뒤로 기대었다가, 모로 고쳐 앉았다가, 양손과 두 발로 땅을 짚은 채 엉덩이를 높이 세워 ㅅ자를 만들었다가, 일어섰다가, 발꿈치를 들어보았다가, 왼손을 귀에 가져다댔다가, 무너져 주저앉았다가, 앉은 채로 두 다리를 벌려두었다가, 사타구니 사이에 양손을 가져가댔다가, 다시 엎드려 누웠다가, 느닷없이 양손으로 짚어 일어났다가, 같은 발 같은 손을 들고 한 발로 버티다가… 연유와 맥락 없이 그저 연쇄하는 동작을 수행하며 그는 계속 휘파람을 불었다.

나는 점점 그 춤추고 싶을 근육들이 안타까워졌다. 차츰 동작의 리듬과 반경에 강도가 더해지면서 결국엔 충족적인 춤의 순간들이 휘몰아치겠지? 그러나 나의 조바심과는 달리 그는 종종 무너져내렸다. 질주가 시작되는가 하면 기었고, 점프를 할 만한가 하면 누웠다. 아주 가끔 셰네턴(chaînes turns: 양발의 빠른 축 이동으로 연속하는 일련의 회전동작) 같은 춤의 오래된 기교가 실행되었지만 그저 그러고 사라질 뿐 춤의 동작구가 구축되진 않았다. 간혹, 춤이 되지 못한 그 행위들은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그 역시 홀연 중단되어 정지의 순간을 분출하는. 고대하는 춤의 순간들은 좀처럼 오지 않는 이 작품.

Boris Charmatz ‘Somnole’ © Marc Damage
Boris Charmatz ‘Somnole’ © Marc Damage

그렇게 자신의 특질적 몸성은 전격적으로 발휘하지는 않으면서 그는 내내 휘파람을 불었다. 바흐(Johann Sebastian Bach), 비발디(Antonio Vivaldi) 등의 클래식으로부터 엔니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이나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의 재즈,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 등의 올드팝이 두서없이 창발했다. 연주곡들의 분위기가 정서적 흐름을 연출하는 것도 아니고 'My way'나 'Summer Time' 등등의 가사가 서사로 엮이는 것도 아니었다. 익히 알고 있는 듯했던 멜로디들은 그의 우발적인 발췌와 음악적 기량 발현을 목적으로 제어할 의사가 전혀 없는, 행위와 결착되느라 불안정한 상태의 호흡으로 인해 낯설거나 새롭고 불완전했다.

나는 문득 보리스 샤르마츠의 휘파람과 행위가 그의 존재적 사태 그리고 그의 지향을 고지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휘파람, 성문화되지 않은 음악 아니 그보다 원천적 호흡, 즉흥적이고 불연속적인 동작, 성문화되지 않은 춤 아니 그보다 원천적 행위일반. 그는 미확정성 세계의 명백한 잠재적 있음과 분출의 가능성을 증빙해내고 있지 않은가. 의미연관체계로 결정지어지지 않아도 그 탈구적 연쇄 혹은 심지어 어떤 여백은 지금, 여기, 보리스 샤르마츠란 생명의 지속을, 그 속의 충동과 쉼을, 그 맥동의 고유한 주행을 표지하고 있었다. 의미화로든 정동의 기제로든 충족적이지 않은 춤의 장면들은 휘발되기 십상이건만, 나는 이 샤르마츠의 세계에서 불투명하거나 미약한 것들의 존재함/사라짐을 알아차린다. 그 사태들은 그 때도 지금도 애매모호하게 ‘있(었)다'.

시간을 두고 제법 궁리를 했어도 나는 이 작품의 프랑스어 제목 ‘Somnole’의 정확한 번역을 설정하지 못하겠다. 사전상 ‘반수(半睡) 상태에 빠져있다' ‘(재능 등이) 발휘되지 않는다'의 뜻을 지닌 자동사 ‘somnoler’의 1인칭과 3인칭 변형격. 반수면 상태는 깨어 있음인가, 잠들어 있음인가. 가름할 수 없는 상태, 그러나 ‘빠져 있는' 명확한 사태. 무언가가 발휘되지 않음 역시 아직 발현되지 않은 어떤 잠재성이 꿈틀거리고 있는 가능적 상태. 샤르마츠는 노래라기엔 애매한 휘파람을 ‘불고' 춤이라기엔 모호한 동작들을 ‘추며' 이질적인 면들이 연접하여 한 폭의 스커트를 이룬 그의 의상처럼 어쨌든 공속(共屬)하고 내속(內屬)하는 자신의 일면(一面)들의 낱낱과 불규칙한 흐름을 펼쳤다. 그 낱낱들은 나에게도 있고 나의 흐름 역시 기원하는 바와는 달리 일관적이지 못하니, 나는 꼭 오늘 그의 춤 전체, 그의 스커트를 닮지 않았는가. 이건가 저건가 아는가 모르는가 유달리 나부끼며 늘상 멀미중인 박약한 나로서는 애매모호함이, 불투명함이 ‘있음'의 한 방식이라는 그의 이 느슨한 주장에 위로를 느낄밖에.

그러자(나의 감응 가능성이 열리자) 그의 행위들은 명석판명한 전체가 된다. 뒤꿈치만 찍는데 발볼로만 디디는데 연동하는 온몸 전체가 감각된다. 비로소 그는 양손으로 가슴팍을, 뺨을, 뒷목을, 허벅지를, 사타구니를, 머리를 마구 두드린다. 손가락이 트릴(trill)하고 발가락이 탭(tap)하는 사지말단까지 작열하는 한바탕의 춤을 추어보이는 그. 그는 나를 내가 그리도 고대하던 자가발전적인 몰입의 춤 지경으로 인도한다.

(그 이행 역시 단박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간에 그는 관객석으로 내려와서 ‘Autumn Leaves' 휘파람에 맞춰 앞 열 관객들과 블루스를 추다, 영화 <La Boom>의 주제가 ‘Reality’를 불며 양팔 가득 스스로를 부둥켜안은 반편의 블루스로 영화사의 그 익숙한 장면을 해체하고는, 또 슬쩍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 Le Nozze di Figaro>의 유명한 아리아 '사랑의 괴로움을 아는가? Voi Che Sepete'로 멜로디를 옮겨놓고 소심히 지휘를 한다. 스물스물 객석에서도 휘파람들이 불어오고 그는 무대 위 정중앙에서 아예 이 상황을 연주한다. 기승전결 진행의 클리셰도 절단하고, 관객의 호응도를 삽입함으로써 예술과 유희의 경계도 흩트리지만, 무엇보다도 이 유희적 장면들은 이어지는 다음의 장면에 대조적 효과를 창출한다.)

중독성 있는 멜로디와 당돌한 가사로 세계 팝계를 뒤흔들었던 빌리 아일리시(Billie Eilish)의 ‘Bad Guy’를 빠른 속도로 불어제끼며, 그는 드디어 자기몰입적인 충동의 춤을 추어올린다. 그때 외려 차가운 온도의 조명은 양쪽 견갑골과 갈빗대들의 위치변동, 그 사이에서 꿈틀대는 근육들을 적나라하게 양각한다. 굉장한 시각성과 운동감이 활화산처럼 폭발한다. 이 작품의 방점은 결단코 몸성이다.

Boris Charmatz ‘Somnole’ © Marc Damage
Boris Charmatz ‘Somnole’ © Marc Damage

그러나 고양된 순간은 생의 찰나일 뿐. 호루라기 소리가 난입하고 그는 황급히 내달린다. (대)타자에 의해 통제되거나 스스로에 의해 자중되거나, 쫓음과 쫓김의 이중적 구조로 얽힌 질주 끝에 그는 결국 쓰러진다. 휘슬 소리는 거친 호흡, 기침, 앓는 소리로 잦아든다. 누운 채 사지를 저어 무대 중앙으로 기어나온 그는 구부러진 등과 벌려진 다리인 채로 간신히 앉아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며 휘슬을 만들던 입술 위의 손을 다른 한 손으로 붙들어 막는다. 모로 쓰러지는 보리스 샤르마츠. 더 낮아지고 한결 더 느려진, 들릴 듯 말 듯 나직한, 배음(背音)처럼 누운, 휘파람보다 미약한 그러나 분명한 음성.

이제 나는 그를, 나를, 모든 삶을 알 것도 같다. 이 중첩하는 춤의 시퀀스들은 시간, 삶의 압축본이었고 그것은 피지컬(physical)하게, 신체적이고 물리적으로 드러났다. 내가 체험하지 못한 무수한 그의 해체적 현장에서 이토록 명백한 춤의 순간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다시 몸을 연주한다. 손바닥을, 목젖을, 두 뺨을, 가슴팍을 두드리니 부위마다 새소리, 이름 모를 작은 새의 희미한, 부엉이의 두터운, 자연의 소리들이 재생된다. 이제 그의 휘파람은 헨델(Georg Friedrich Händel)의 오페라 <리날도 Rinaldo>의 아리아 '나를 울게 하소서 Lascia Ch’io Pianga'다. 쟁투, 사랑, 자유. 모든 삶의 공약수를 말한 그가 퇴장한다. 그를 비추던 서치라이트 조명, 관객석으로 천천히 회전한다.

‘The Rite of Spring’ © Maarten Vanden Abeele
‘The Rite of Spring’ © Maarten Vanden Abeele

<The Rite of Spring/common ground[s]>

<The Rite of Spring> choreography by Pina Bausch · performance by École des Sables

<common ground[s]> co-choreography and performance by Germaine Acogny, Malou Airaudo

11월 29일–12월 14일, Park Avenue Armory

DR의 대장정은 우리시대의 제의, 피나 바우쉬의 <봄의 제전 The Rite of Spring>으로 마무리되었다. 장장 보름여에 걸쳐 대규모 플랫폼 파크애비뉴아모리(Park Avenue Armory)에서 치러진 제의는 이 격동의 도시조차 깊숙이 지르밟았다. “나는 무엇이 그들을 움직이게 만드는가에 관심이 있다." 그 유명한 피나 바우쉬의 춤관, 이 작품을 만들면서도 그녀는 무용수들에게 “죽을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춤추겠는가?”를 묻고 또 물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기어이 죽음 직전의, 그리고 죽음 목전의 그 탱천하는 생의 충동들을 끄집어낸 이 1975년의 원작은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음악에의 다른 도전은 물론이거니와 연행은 매 번의 일회적 사태라는 공연예술의 진실조차도 무력하게 만들며 좀처럼 다른 버전은 용인하지 않는 그런 완전무결한 명작의 반열에 올랐다. 다른 각도의 해석, 다른 강도의 감응, 이 작품에 더 이상의 여지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번 DR의 공연은 새로운 에디션 번호를 각인한다.

우선 춤공연으로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었던 공간의 규모와 성질부터 이야기해야겠다. 파크애비뉴아모리는 1880년에 병기고로 완공된 건물. 무기 보관과 군사 훈련이라는 목적에 걸맞게 엄청난 박력으로 세워진 이 건물의 용도는 이제 프로시니엄 극장과 화이트큐브 갤러리들이 품을 수 없는 새로운 형질의 작품들을 위한 용처로 거듭났다고 한다. 흡사 대형 실내경기장에 육박하는 이 거대한 공간은 유독 춤작품을 애호하는 필자를 우려하게 만들었다. 아트서커스나 판타스마고리아(fantasmagoria: 초현실적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환영상(幻影像))로 점철하는 신종의 전시와 콘서트에나 적합한 용적이 아닌가. 제아무리 시종 충혈하는 피나 바우쉬의 <봄의 제전>이라 한들 특별한 기구와 장치의 보조 없이 이 방대한 공간을 휘몰아칠 수 있을까? 저 멀리에 있는 무대와 아득한 천고, 세계 만국어를 말하고 있는 엄청난 인파, 도대체 얼마만큼의 기세여야 작품 본연의 압도적 감응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인지, 관람을 앞둔 심경이 꽤나 조마조마했었다. 기승하는 스펙터클의 시대에서 춤장르만큼은 실재의 거소(居所)여야 할 텐데.

공연은 더블빌로 진행되었다. 이 광활한 공간을 여는 첫 번째 작품은 더구나 단촐한 2인무, 가능한가?…. 역시 사람, 춤-몸, 춤은 온전한 소통, 사랑의 기적을 행한다. 팔순을 바라보는 그녀들, 아프리카 현대무용의 어머니로 알려져 있는 제르멘 아코니(Germaine Acogny)와 탄츠테아터 부퍼탈(Tanztheater Wuppertal)에 헌신해온 말로우 아이라우도(Malou Airaudo)의 나직하고 온화한 관계성의 춤은 30여 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인생이라는 대서사를 함축시킨다. 노을빛 조명은 일출에서 일몰 간을 여행시키고, 작은 나무의자와 몇 개의 크고 작은 돌은 문명과 자연 사이를 여행시킨다. 나란히 함께 잡은 나무 막대기를 밀고 당기는 일만으로도, 한 번의 포옹만으로도, 한 번의 마주섬만으로도 인생역정의 고락을 펼치는, 동반의 모든 관계가능성을 품은 원숙한 춤-몸(들)은 ‘공통점[들]’ 몇 항만으로 모든 생들을 위무한다. 원초적 충동이 총 발현되는 피나 바우쉬 작품까지의 시간을 모조리 겪어내고 나면, 단출한 검은 드레스 차림의 그녀들이 세계의 제사장을 닮았음을 떠올리게 된다. 작품 말미에 제사장들은 막대기를 수직으로 세워 ‘공동의 대지[들]’을 두드렸다. 자연을 깨우고 제의의 시간을 펼치겠다는 듯이.

‘common ground[s]’ © Maarten Vanden Abeele
‘common ground[s]’ © Maarten Vanden Abeele
‘common ground[s]’ © Maarten Vanden Abeele
‘common ground[s]’ © Maarten Vanden Abeele

<봄의 제전>이 개시되기 전 30분간의 인터미션에는 열댓 명의 스태프들이 쿵쾅 대형 컨테이너들을 넘어뜨리고 쏟아져 나온 이탄(泥炭, peat)을 펼쳐 제전의 바닥을 다지는 작업이 공개적으로 거행되었는데, 그 자체로 주목을 붙드는 한 편의 공연물과도 같았다. 그 과정의 공개는 파크애비뉴아모리라는, 몸-춤으로 장악하기엔 너무 광대한 시공간을 메워보기 위한 간단한 묘수 이상의 일이었다. 자연에 마찰하는 인간, 무용수들의 발과 충돌하며 튕겨지는 흙, 무용수들의 몸과 옷자락에 들러붙는 흙은 여느 때보다 잘 감각되었다. 시지각적 확증의 과정은 자연의 존재와 운동감을 더욱이 실감케 하였고 그 생동하는 감각과 더불어 춤의 중량감이 배가, 작품의 감응은 마치 실체적 제의인양 강화되었다.

제의에 관한 특별한 서사를 두르지 않은 원작. 익명적 죽음 그 미지가 불러일으키는 공포와 두려움의 역동, 외려 감각되는 생의 역능, 그 감응의 내역이야말로 이 작품의 본질이 아니던가.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았던 감응의 강화는 역시 무엇보다도 몸-춤으로부터 온다. 피나 바우쉬 파운데이션(Pina Bausch Foundation, 독일)은 에꼴 데 사블(École des Sables, 세네갈, 제르멘 아코니가 설립한 무용학교), 새들러스 웰스(Sadler's Wells, 영국, 제작극장)와의 협업으로 새로운 버전을 창출하기로 결심했고, 아프리카 전역 국가들로부터 모여든 서른 여 명의 춤-몸은 아코니 휘하 생과 죽음에 관한 감수성의 또 다른 지층에서 발굴된 몸-춤을 창발해내었다. 유럽 그리고 발레의 역사 밖을 횡단해온 춤-몸들은 첨예한 도시문명에 의해 정제되지 않은 자연에 결착된 날 것 그대로의 불안, 분노, 절망을 분출해내었다. 기존 연행의 강렬함과는 다른 강밀도(剛密度)의 버전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The Rite of Spring’ © Maarten Vanden Abeele
‘The Rite of Spring’ © Maarten Vanden Abeele
‘The Rite of Spring’ © Maarten Vanden Abeele
‘The Rite of Spring’ © Maarten Vanden Abeele

그 초과적 몸-춤을 위하여 DR는 파크애비뉴아모리를 선택한 것이리라. 이탄이 덮인 사각무대 저 먼 바깥으로부터 내달려오는 춤-몸들의 맹렬한 질주, 2번 플리에(second plié : 턴아웃 자세로 무릎을 구부려 앉는, 발레의 다섯 포지션 중 하나)보다 깊숙하고 묵직한 디딤, 원통함과 생존에의 호소가 범벅된 간절한 가슴팍 두드리기. 거침없이 시연하는, 자연에 대하여 실체적인 안간힘의 역사를 내재한 춤-몸들에게는 과연 에누리 없이 재단된 프로시니엄 무대보다 광활한 공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생경한 공간, 생경한 춤-몸의 총체적 결합으로 명작의 막강한 새 버전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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