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사형수에서 대기업 사장까지 - 정하룡 회고록 '나의 20세기' 출간
[신간] 사형수에서 대기업 사장까지 - 정하룡 회고록 '나의 20세기' 출간
  • 조일하 기자
  • 승인 2024.03.01 11: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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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격동의 20세기를 회고하는 원로 지식인의 시각
정하룡의 나의 20세기 (사진제공=학민사)
정하룡의 '나의 20세기' 표지 (사진제공=학민사)

[더프리뷰=서울] 조일하 기자 = 프랑스 국가박사에서 동백림사건의 사형수가 되기까지, 그리고 다시 대기업의 사장이 되기까지.

최근 학민사에서 출간된 정하룡의 <나의 20세기>는 단순한 개인 회고록이 아니다. 이 책은 한국 현대사의 고비마다 과거, 현재, 미래의 연관 속에서 저자가 느끼고 사색한 내용을 정리해 큰 줄기를 구성하면서, 그 사이사이에 자신의 일상사와 신변잡기를 끼워 넣어 스토리텔링을 이어가는 자기성찰적 기록이다.

올해 91세인 저자는 '숨 쉬고 있는 이 시점’에서 과거의 자신이 살았던 역사를 다시 관조해 보고 싶어 어렵사리 글쓰기를 시작했다고 토로한다. 미래의 기본은 과거사에 기록되어 있고, 따라서 역사 속에는 의미와 상징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책은 사고체계가 다를 수밖에 없는 자식세대, 손자세대, 즉 지금의 한국을 짊어지고 있는 청장년들에게 남기는 ‘기억의 전달’이라고 말한다.

유년시절을 식민종주국 일본에서 보낸 저자는 곧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이 혼란은 따돌림(이지메)과 차별을 당하거나 극복하는 과정에서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착근된 중층인격으로 구조화되었고, 구체적으로는 그의 내면에 조선인이라는 자각과 함께 일본화된, 모순된 모습으로 자리 잡았다.

일제 말기 미군의 도쿄 공습이 일상화되자 저자는 가족과 함께 서울로 귀환했다. 그러나 총독부는 ‘내선일체’라는 허울 아래 창씨개명, 일본어 강제사용, 자원·식량 수탈, 징용·징병, 종군위안부 강제 송출, 각급 학교의 군국화 교육 등 가혹한 식민정책을 폈다. 소년 정하룡도 총독부가 바라던 그러한 이중적 ‘황국소년’ 교육에 맥없이 던져진 것이다.

해방과 함께 한반도는 상충하는 이데올로기의 두 국가가 탄생하는 냉전구조의 전진기지가 되었고, 곧 이러한 상황을 전복하려는 시도로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군인은 물론 수많은 남북 시민의 이유 없는 죽음을 낳았다. ‘휴전’이라는 엉거주춤한 형태로 전쟁이 끝났지만, 한반도의 모든 생명체는 육체와 정신의 궁핍과 허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당대 지식인들의 풍조였던 카뮈의 니힐리즘에 대학생 정하룡이 빠지기 시작한 것은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니힐리즘은 현상의 해결을 회피하거나 미룰 뿐이었고, 더하여 집권 이승만 정부는 극단적 반공 이데올로기로 온 사회를 옥죄었다. 도피일까, 무지개를 찾아서일까? 저자는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졸업을 1년 앞두고 숨 막히는 이승만 독재와 니힐리즘에 기댄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다.

당시 유럽은 2차대전의 상처를 치유하고 다시 인간을 중심에 세우는 휴머니즘이 만개해 있었다. 냉전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종언을 고하고 있었고,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이 모든 것에 앞서 강조되는 실존주의가 풍미하고 있었다. 그 전면에 장-폴 사르트르가 우뚝 서 있었고, 저자도 실존주의를 자기사고의 중심으로 삼았다.

저자는 프랑스 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 프랑스 혁명의 요체인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을 배웠고 관용의 문화를 체득했다. 이렇게 쌓인 그의 인문학적 소양은 사고는 유연하게, 그러나 행동은 과감하도록 인도했다. 그리고 사고에서 실천으로 이행해야 하는 이 ‘앙가주망(engagement)’은 저자와 어울린 재불 유학생들의 공유가치로 착근했다.

파리정치대학(시앙스포)의 뒤베르제 교수는 저자의 학문적 방향과 논문 주제를 잡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뒤베르제 교수의 권유와 지도로 김일성의 리더십을 분석하여 석사논문을, 이승만 정권의 정당체제를 주제로 박사논문을 썼다. 시앙스포 시절 깊이 교유한 프랑스인 교수와 동창들은 후일 저자가 동백림(동베를린)사건으로 구속되었을 때 큰 도움이 되었다. 저자는 이를 유럽 68혁명의 영향이라고 보았다.

회고록에 등장하는, 1950년대 후반의 프랑스 유학생들은 대부분 유복한 가정의 서울대 출신이었다. 그들은 분단 하에서 가난에 찌든 조국의 현실에 애잔함을 넘어 어떻게든 이를 구조적으로 해결하는 데 역할을 하려고 했다. 선택받은 엘리트의 성찰적 사고였다. 고민과 모색을 교환하고 토론하는 모임이 만들어지고 중립주의, 사민주의의 개념을 포괄하는 ‘중도주의’에 의견이 모아졌다.

중도주의는 남한의 후진성 탈피, 실질적 자유와 형식적 자유 사이의 모순적 현실을 타파하기 위한 토론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당시 남북의 극단적 이데올로기 대립과 이질화는 민족공동체의 평화공존을 위한 합리적 사고조차 범죄시하는 상황이었다. 공산주의와 반공산주의의 극단 사이에 '중립, 중간, 중도'가 설 자리는 없었다, 어떻게든 이를 돌파해보자고 한 것이 동베를린 주재 북한대사관과 평양 방문이었다.

1967년 6월, 중앙정보부는 프랑스와 독일에 유학하고 귀국했거나 현지에 남아 활동 중인 200여 명을 간첩 혐의로 구속, 재판에 넘겼다. 저자도 당시 경희대 교수로 재직 중 구속돼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중앙정보부가 그 관련자 다수를 프랑스와 독일에서 납치해왔기 때문에 영토 주권을 유린당한 양국 정부와 시민사회의 강력한 항의로 박정희 정권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정하룡에 대해서도 프랑스 정부와 언론, 시민사회의 항의와 탄원, 석방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실존주의의 거성 장-폴 사르트르, 시몬 드 보부아르, 노벨문학상 수상자 프랑수아 모리악, 유명 작가/영화인 마르그리트 뒤라스, 세계적인 사회학자 모리스 뒤베르제, 에드가르 포르  전 총리, 레몽 바르 등 프랑스를 대표하는 지성과 정치인들이 이 대열에 참여했다.

프랑스 지성들의 항의운동으로 저자는 사형에서 감형되어 무기수로, 15년 장기수로 3년 반의 감옥생활을 하고는 1970년 말 대통령 특사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석방 후 그의 삶은 학자로서의 꿈을 박탈당하고, 경세가로서의 포부와 구상이 좌절된 반쪽짜리 생활인의 삶이었으니, 그 후 여벌의 삶은 그의 파란만장한 일생에서 에피소드에 불과할 뿐이었다.

젊은 날의 자아실현을 향한 고난의 행군이건, 그 패배와 좌절 이후 얻은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건, 이 회고록은 한 편의 유장한 로드무비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혈기방장했던 젊은 날의 모든 사고와 행동을 91세 노년의 회상과 슬기로 찬찬히 풀어낸 저자는, 이 로드무비의 주인공이자 조연이고, 연출자이다. 로드무비는 이렇게 엔딩 크레딧으로 막을 내린다.

“역사의 의미는 미래에서 결정되지만, 역사의 정신은 ‘과거’도 아니고 ‘미래’도 아 니고, 바로, 절대적으로 ‘지금’입니다. 내일을 위해 지금 무엇을 할까? 그것이 ‘지 금’이라는 시대의 의미이고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정하룡의 '나의 20세기'

프롤로그

인간이 겪는 재앙 중에서도 전쟁은 가장 참혹합니다. 거기서는 살육이라는 압도적인 폭력이 모든 것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20세기는 ‘전쟁의 세기’였습니다. 두 차례 세계대전을 비롯해 크고 작은 전쟁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가속화한 기술발전이 전쟁을 공업화했고,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 가공의 대량살상 무기가 개발되었습니다.

20세기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요인이 있습니다. 혁명입니다. 마르크스-엥겔스가 창안한 계급투쟁이론이 20세기 벽두부터 연이어 레닌과 마우쩌둥(毛澤東)에 의해 현실화합니다. 이데올로기는 빠르게 전 세계로 전파됐고, 이에 따라 전쟁도 이념화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끝은 또 하나의 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동서 냉전구도는 한반도에 이념충돌의 미니 세계대전을 몰고 왔습니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는 ‘전쟁은 정치(외교)의 연장’이라고 했지만, 한국전쟁은 ‘이데올로기의 연장’이기도 합니다.

70년이 지나도 나의 뇌리에 점착되어 사라지지 않는 두 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하나는 융단폭격으로 면도질 당한 평양의 끝없는 폐허 속에 전봇대 하나 외로이 서 있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한 마을 사람들끼리 서로 학살한 처참한 시신들이 수도 없이 얽혀 있는 광경입니다. 첫 번째는 철저한 대량파괴, 두 번째는 끔찍한 동족상잔을 상징합니다. 바로 한국전쟁입니다.

사실, 우리 세대는 엄청난 역사적 사건에 의해 구조화된 어린 시절을 살았습니다. 전쟁과 피난살이는 우리들의 무대배경이고 생활의 틀이었습니다. 세계가 직접 관련된 이 참사들이 우리 세대가 갖는 기억의 실질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우리들의 기억’이라고 하였습니다. 당시 우리 젊은이들은 (남북 할 것 없이) 거의 같은 경험을 갖고 살았습니다. 참혹한 파괴와 살상, 끝없는 괴로움과 슬픔, 절망과 방황… 그러면서도 실낱같은 통일에의 염원…

우리는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상처를 평생 가슴과 머리에 얹고 살았습니다. 나는 이 트라우마를 안고 프랑스로 떠났고, 이 트라우마 때문에 금단의 묘약을 찾아보려고 평양에까지 갔었습니다.

제2차 대전 후의 프랑스에서는 마르크시즘과 실존주의가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마르크스의 예언이 시대성을 잃었다 / 아니다’가 논란의 중심이었습니다. 계급투쟁에서 부르주아지는 멸망하고 혁명의 주류인 프롤레타리아가 지상낙원을 건설한다는 역사결정론은 이제 빗나갔다는 논리와, 아니다! 계급투쟁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끝나지 않고 있다, 종국에는 자본주의가 망한다는 주장이 서로 맞서고 있었습니다.

내가 본 서구자본주의 사회는 망하기는커녕 오히려 번창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의 노동자들은 자동차, 냉장고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오히려 소련을 위시한 공산권에서는 심각한 물자난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역사가와 정치학자들이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설파하기 시작하던 때입니다.

1956년에는 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보고서>가 터져 나왔습니다. 최고 권력자의 무제한의 개인 권력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전형으로 공식화됐던 시절, 아무리 스탈린 사후 10년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이건 대단한 폭탄선언이었습니다.

서유럽의 수많은 공산당원이 탈당했고, 헝가리와 폴란드에서는 모스크바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공산주의에 심정적으로 동조하던 프랑스 인텔리들의 동요도 심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파장은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세계 최빈국 출신이었던 나는, 우리나라의 비참한 곤궁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모델이 가장 효과적이고 적합하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현대화’가 시급한데, 이를 위해서는 자유보다 평등을, 자유방임의 시장논리보다 계획경제가, 복수정당제도보다는 국가의 강력한 통제권력이 더 절실하다고 믿었습니다.

다만 이런 선택은 임시적이고 과도기적이어야 하며, 어느 정도 경제성장을 이룩한 다음에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곧 사회민주주의입니다.

1960년대 초, 서유럽의 많은 한국 유학생들이 동베를린의 북한사람들과 접촉한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통일문제를 토론한다고 했습니다. 친구의 권유에 따라 나도 그 문을 두드렸습니다. 의학발전을 위해 무덤을 파서 시체를 해부했던 옛 선각자들에 비유한다면 너무 지나친 변명일까요? 처벌에 대한 공포심도 있었지만, 진실 탐구의 욕구가 더 간절했습니다.

이 책은 엄밀히 말해서 나 개인의 비망록이나 회고록이 아닙니다. 내가 살았던 시대에 일어났던 일들을 곱씹어보려는 시도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체계적으로 서술하지도 못했습니다. 때로는 개개의 내용이 서로 모순될 수도 있습니다.

젊은 시절, 어쩌다 보니 한반도의 역사 흐름 속에 몸을 내던져 살았습니다. 남과 북의 중간지대를 지켜보려는 꿈같은 시도도 해 봤습니다. 그러다가 사형선고까지 받았습니다.

이 책은, 그러나 내가 살았던 한반도의 역사적 팩트나 나 개인이 살았던 경험들과 그러한 사실들 때문에 겪어야 했던 회의, 고민, 사색, 그리고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나의 정신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 내면의 성장기록이라고 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이데올로기는 사라졌습니다. ‘악’이나 ‘죄’에 대한 보편적, 그리고 정치적 가치판단도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한반도의 현실은 70년 전의 모습 그대로 제자리에 머물러 있습니다. 미래의 문을 열기가 그렇게도 어렵습니다.

그래도 나는 낙관합니다. 역사를 여러 도막으로 나눠보면 그 하나하나는 어둡고 괴로운 암흑시대일지라도, 역사를 거시적으로 하나의 큰 묶음으로 보면, 그 흐름은 항상 더 나은 세상으로 향하는 몸부림입니다. 끝내는 진보라는 여신이 웃고 기다립니다.

통일 내셔널리즘이 언제쯤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을까요? 그리 먼 훗날은 아닐 겁니다. 다만, 영광의 월계관을 쓰는 사람들은 나의 세대가 아니겠지요. 그때는 우리 세대에게 과해졌던 고단하고 험했던 ‘막일’이 이미 끝나 있을 테니깐요.

정하룡의 '나의 20세기'

지은이 정하룡

1933년 강원도 강릉 출생

경기중고등학교 졸업(48회)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회학과 입학(4년 중퇴)

파리정치대학(Institut d’Etudes Politiqus, 시앙스포) 졸업

파리대학교 정치학박사(Doctorat d’Etat)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사형 선고를 받고 3년 6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석방

(주)대한항공 회장 비서실장, 유럽·중동본부장 역임

(주)한국항공 대표이사 사장 역임

프랑스 정부의 국가공훈 훈장(Ordre National du Mérite : Officier) 및 레지옹 도뇌르 훈장(Légion d’Honneur : Officier) 수훈

은퇴 후 그림에 몰두, 3회 개인전 개최(서울 1회, 미국 2회)

현재 전라북도 고창에서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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