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무용협회 한국본부(CID-UNESCO) 정읍지부 '정읍검무 학술세미나 & 시연회'
국제무용협회 한국본부(CID-UNESCO) 정읍지부 '정읍검무 학술세미나 & 시연회'
  • 조일하 기자
  • 승인 2024.03.13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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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검기무 학술세미나 - 지역문화 콘텐츠 활성화 방안 중심 (사진제공=CID 한국본부 정읍지부)

[더프리뷰=서울] 조일하 기자 = 유네스코 산하 국제무용협회 한국본부(CID-UNESCO) 정읍지부 김춘희 지부장이 복원한 정읍검무가 3월 14일(목요일) 오후 4시 서울 광진구 소재 (사)한국사회문화예술진흥원에서 열리는 <제1회 정읍검기무 학술세미나 - 지역문화 콘텐츠 활성화 방안 중심>에서 시연된다. 

그동안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던 정읍검무는 김춘희 정읍지부장의 오랜 노력으로 복원돼 지난 2023년 10월 14일 정읍시 주최, (사)노령역사문화연구원 주관으로 열린 학술대회에서 처음 시연됐으며 이어 10월 18일 서울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개최된 '2023 대한민국 여기검대제전'에서 첫 공식 복원무대를 가졌었다. 

정읍검기무 (사진제공=CID 한국본부 정읍지부)

정읍검무는 풍류방인 정읍 진산동 영모재(국가문화유산 213호)에서 추어졌던 교방검기무이다. 정읍 진산동에 있는 영모재는 조선 후기 정읍의 관기와 재인을 길러내던 교방이자 예기조합 및 정읍권번으로 활용되던 풍류방으로, 조선 말기 정읍예기조합 소속 기생들과 일제강점기 정읍권번 소속 기생들의 기예능을 심사하는 장소였다. 그러다가 1885년 의식음악을 관장하는 정읍현의 호장 출신 광산김씨 김평창(본명 김상태)이 이곳을 매입했다. 

본격적인 검무를 추기 직전 치마 끝을 묶었는데, 이는 신윤복의 그림 <쌍검대무>에서도 볼 수 있다. 또한 정읍검무는 옛부터 각 읍마다 있었던 소도지역의 특성이 있어 무속적인 무구 사용의 춤사위와 장단을 지니므로, 호탕함과 진취성이 보이는 동시에 교방의 풍류적인 여성미가 드러나는 특징을 지닌다.

조선후기에 검무는 최고의 인기 예술작품이었기에 징을 쳐서 검무가 곧 등장함을 알리고, 시작 후에는 삼현육각의 반주로 검무를 추었다. 흥미로운 것은 정읍 풍류방의 김상태가 모든 춤이 시작되기 전에 엽전을 주변에 뿌려놓고나서  공연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는 부지런히 허리를 굽혀 움직여야 엽전을 가질 수 있도록 해서 성실히 살 것을 주문하는 한편, 풍성한 잔치 속에 풍류를 서민들에게도 즐기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전해진다. 

한국 전통무용은 부족국가 시대로까지 그 연원이 거슬러 올라갈 만큼 장구한 역사가 있다. 하지만 과거의 전통춤 기록을 엿볼 수 있는 자료는 흔치 않다. 정읍 검무(劍舞)를 담은 『무보(舞譜)』는 본래 남무(男舞) 춤사위를 기록한 고부(현재의 전라북도 부안군) 출신 천재 국악인 석암(石菴) 정경태(鄭坰兌, 1916-2003, 본명 정영옥)가 남긴 『국악보』에 자세한 기록이 수록돼 있다. 

정읍검무를 시연하는 김춘희 (사진제공=CID 한국본부 정읍지부)

오늘날 고창지역 대부분의 역사와 문화가 고창 읍치의 호장(戶長)인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 1812-1884)의 생애사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정읍지역 대부분의 역사와 문화는 정읍지역 읍치(邑治)에 살던 호장 김상태(金相泰, 1853-1943, 일명 김평창)로 시작돼 그의 장남 김기동(金箕東, 1885-1958)의 정읍예기조합(1926), 차남 김기남(金箕南, 1889-1950)의 풍류방 아양정(峨洋亭)의 역사로 연결되어 있다. 

김상태는 고려시대부터 전래해 근대기인 1908년까지 이어지던 정읍지역 성황제(城隍祭)를 주관하던 호장이었다. 따라서 그는 과거 정읍지역 무속인들의 집성촌인 정읍시 입암면의 접지·등천·신면리 입구의 상교동 진산마을에 풍류방을 마련하고(1885) 무속인 후예들을 데려와 그의 풍류방에서 재인·악공으로 길러내 성황제와 관의 의식음악을 이끌어 갔다. 

이러한 재인·악공 인프라를 물려받은 김기동과 김기남은 한동안 각각 ‘정읍예기조합’과 풍류방 ‘아양정’을 운영했지만, 이후 정읍예기조합은 1928년 역시 고부와 정읍의 향리 출신이던 은희상(1892?-1960?)과 박홍규(1899-1957)에게 넘겨졌고, 김기남의 풍류방은 한국전쟁 당시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정읍검무 (사진제공=CID 한국본부 정읍지부)

석암 정경태는 1930년 주산보통학교를 졸업, 1931년 오성현(吳聖鉉)‧김춘경(金春景)에게 시조창을 배우고, 1934년 임재희(林在熙)에게서 가사(歌詞)를, 1936년 전계문(全桂文)에게 가곡여창(歌曲女唱), 1939년 이병성(李炳星)에게 가곡남창과 12가사를 배웠으며, 1950년 임석윤(林錫潤)에게서 현금회상(玄琴會相)을, 김용근(金容根)에게서 현금가곡을 전수받았다. 

이후 1944년 당시 은희상과 박홍규가 운영하던 신태인 권번 소속의 김소란(金笑蘭, 본명 옥진(玉眞)을 찾아간 정경태(鄭坰兌)에게 김소란이 남무(男舞)를 지도했고, 정경태는 그렇게 배운 10여 분짜리 남무를 무보로 기록해 자신의 저서 『국악보(國樂譜)』(1955) 부록에 삽입했다. 

따라서 석암 정경태의 『무보(舞譜)』에 등장하는 춤가락(검무, 승무, 한량무, 입춤, 굿거리, 살풀이춤) 등은 모두 석암 정경태의 남무(男舞)에서 비롯된 것이며, CID-UNESCO 한국본부 정읍지부 김춘희 지부장 역시 이를 바탕으로 정읍검무를 복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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