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리뷰] 2023 창작산실 무용부문 총평 - 공연예술로서의 완성도를 높인 무대
[공연리뷰] 2023 창작산실 무용부문 총평 - 공연예술로서의 완성도를 높인 무대
  • 김명현 칼럼니스트
  • 승인 2024.03.15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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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목 안무 'YARAS' ⓒ옥상훈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더프리뷰=서울] 김명현 무용평론가 =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관하는 2023 창작산실 올해의 신작 6편이 무대에 올랐다. 지난해의 경향이 기술과 예술의 융합이라는 거대 담론 속에서 비교적 젊은 예술가들의 도전적 태도를 엿볼 수 있는 것이었다면 올해의 신작은 창작자들의 연령대가 올라가며 안무가 개개인의 예술세계를 드러내는 작가주의적 성향이 짙게 드리운다. 그런 만큼 작품의 개성이 강했고, 완성도가 높았다.

우선 여섯 작품의 공통적인 면을 보자면 지난 10여 년간 한국의 무용생태계에 큰 흐름을 이뤘던 스트릿댄스와 스포츠, 서커스 물결의 퇴조가 두드러진다. 힙합 문화가 주류 문화로 부상하며 스트릿댄스가 무용의 어휘로서 적극 수용된 것은 전세계적인 현상이다. 타장르로부터 움직임 어휘를 발견하려는 수용적 태도는 발레 동작의 정형성으로부터 벗어나 안무가만의 고유한 어휘를 만들어내고자 했던 모던댄스 시기를 거쳐, 일상의 움직임을 수용하며 장르의 전통과 관습을 전복하고자 했던 포스트모던댄스 시기 이후에 등장한 컨템퍼러리댄스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올해의 신작이 최근의 경향을 가장 앞서 반영하는, 반영해야 할 무대라는 점에서 타장르로부터의 수용이나 융합을 적극 내세운 작업이 없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최진한 안무 'A Dark Room' ⓒ옥상훈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올해의 창작자들은 모두 중진이라고 할 만큼 창작역량을 인정받아 온 이들이다. 그런 만큼 이미 자신들만의 예술관이나 창작방식, 움직임 어휘가 어느 정도 정립되어 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도전정신을 가지고 타장르로부터 움직임을 발견해 내는 것보다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일이 주요 과제였던 듯하다. 자신들에게 이미 익숙한 언어들을 변주하면서 각 장면을 연출하는 데 힘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무용 장르에서 가장 중시되는 움직임 어휘의 고안보다는 요소들을 하나의 작품으로 조율하는 데 필요한 연출과 퍼포먼스에 역량을 집중한 것이 눈에 띈다.

허성임 안무 '토끼는 어디에 있나요' ⓒ옥상훈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연출 면에서 시각성이 두드러진다. 채도 높은 조명, 현란한 그래픽, 화려한 의상, 극장 전체를 스크린화하거나 체험 공간으로 만든다. 공간 연출이나 비주얼 효과를 강조하며 장면을 지배하는 시노그래피가 앞으로 나온다. 이런 시각적 연출은 움직임 구성에도 영향을 미쳤다. 동작들은 전반적으로 강한 조형성을 보이고, 양적으로 풍성하며, 난도가 높다. 디자인 개념이 도입된 연출 장면에 어울리는 멋진 포즈와 중독성 있는 반복, 하나의 요소에 집착한 움직임 변주가 무대를 가득 채운다. 몸성, 신체성, 춤성 등 무용의 본질 요소로서 논의되던 움직임을 통한 표현이란 중심 명제는 희미하다. 인간 내면의 깊은 층위를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어휘였던 몸짓이 임팩트 강한 시각적 사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안영준 안무 '애니멀' ⓒ옥상훈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이는 물론 창작산실만의 경향이 아니다. 올해 처음 등장한 현상도 아니다. 최근 2-3년간의 무용 무대에서 대형화한 스펙터클이 눈에 띄게 증가해 온 일면이다. 추측건대, 디지털 문명이 가져온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비주얼 문화가 일상에 파고든 영향이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동류의 인간보다 기계와의 소통이 늘어나며 정보습득과 관계맺기에 있어 시각에의 의존이 높아진 측면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가장 지원금이 많은 창작산실 무대이기에 이런 대형화, 스펙터클화는 레퍼토리 확보라는 창작산실의 지향점에 부합한 결과라 생각된다. 문제는 이것이 시각은 물론 청각, 촉각, 다중감각을 자극하는 실험들이 활발했던 포스트 씨어터 운동의 경향에서 한걸음 물러서고 있다는 것이다. 올해만의 현상일 수도 있겠으나 2024 창작산실의 행보에 벌써부터 우려와 기대가 함께한다.

개별 작품들의 완성도는 예년을 웃돌았다. 작가주의적 성향의 작품들이 저마다의 스타일과 미장센, 퍼포먼스로 웰메이드 작품의 면모를 갖추었다.

정훈목의 YARAS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정훈목의 'YARAS' ⓒ옥상훈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가장 큰 화제작은 정훈목 안무가의 <YARAS>(1월 27-28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이다. 관객들 사이에 극심한 호불호를 불러일으켰다. 기술진보가 가져올 인류의 미래를 낙관하지 않는 정훈목의 <YARAS>는 야라라는 가상의 부족을 등장시켜 현재와 미래를 뒤섞고, 원시성과 문명성을 뒤섞어 인류문명의 본성을 그리는데, 이들의 세계는 어느 것 하나 명확하지 않은 정신병리적 디스토피아다. 의미의 선명함을 지향하지 않는 정훈목은 미지의 크리처, 전신 타투, 화려한 의상, 불쾌한 소리, 로봇 생물을 등장시키고 괴기스러움과 빼어난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미장센을 전면에 내세운다.

야라족은 유령처럼 보이다가도 유럽 귀족들처럼 보이고, 야생의 원시부족 같기도 하며, 로봇 개와 로봇 새를 만들었을 정도로 나름의 문명을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인간적 외관을 가졌으면서도 기괴한 소리를 낸다. 이렇게 원시성과 문명성을 섞고, 인류종과 비인류종을 섞고, 가상공간과 현실공간을 섞어 원인도, 증상도, 방향도, 목적도, 결과도 명확하지 않은 카오스의 역사를 그린다. 하나의 의미로 수렴되지 않는 불확정성을 의도한 연출은 오랜 유럽생활에서 획득한 차별화되는 감각을 드러낸다. 그러나 의미적으로도, 감각적으로도 선명하지 않다. 여기서 호불호가 발생한다. 누군가는 독보적이라 할만큼 새로운 비주얼과 연출 감각으로 가득한 무대 자체를 높이 평가하고, 누군가는 의미적으로도 감각적으로도 수렴되지 않는 무대를 불쾌해한다. 따라서 이 작품에 대한 평가나 이 작품이 무용계에 미칠 영향은 좀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야 한다. 그러나 당분간 정훈목을 주목해야 하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정형일 안무 'The Line of Obsession' ⓒ옥상훈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정형일 안무가의 <The Line of Obsession>(2월 17-18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은 발레 무용수들이 추구하는 완벽에의 강박과 집착의 세계를 발레 그 자체를 상징하는 백조의 호수와 추상미술의 선구자 몬드리안을 불러들여 펼친다. 몬드리안의 회화를 보는 듯한 수직과 수평의 선을 교차시킨 거대 조형물을 설치하고, 빨, 노, 파, 초 등 몬드리안이 사랑했던 색을 이용하여 공간을 기하학적으로 연출한다. 발레의 정형적, 관습적 움직임을 버리고 무용수들의 뛰어난 신체와 유연성을 이용하여 선이 강조되는 움직임들로 가득 채운 장면들이 선명한 색조의 무대와 함께 화려하다. 점프와 회전 없이 오직 선을 만들어 내는 움직임으로 꽉꽉 채우고, 복잡한 스텝 시퀀스를 반복하며 몰입도를 높이는 등 안무가의 스타일을 보여주면서 시각적 세련됨으로 관객 접근성을 높였다. 근래에 본 창작발레 중 빼어난 작품이었다.

정형일 안무 'The Line of Obsession' ⓒ옥상훈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그러나 동작의 양적 공세는 ‘강박’에 가닿지 않는다. 비슷한 템포(tempo)와 템퍼(temper)를 가진 동작과 장면들의 변화가 밀도를 높이며 정서적 새로움으로 환기되지 않기 때문이다. 시를 읽으려고 책을 펼쳤는데 시어(詩語)보다 멋들어진 필체의 캘리그래피만 보이는 격이다. 가장 아쉬운 점은 추상미술의 거장 몬드리안의 세계가 작품과 교차하지 못한 점이다. 몬드리안은 회화의 개별 요소들을 가장 본질적인 선과 색으로 환원시켜 새로운 회화를 창조한 추상미술의 선구자다. 이런 몬드리안을 발레에 적용할 때, 몬드리안의 환원주의적 방법론이 발레에는 어떻게 적용될까를 기대하게 된다. 몬드리안을 그저 시각적 상징으로만 사용한다면(안무가가 선호하는 선적 움직임을 위해) ‘선에의 강박’을 표현하기 위해 굳이 몬드리안을 빌려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최진한 안무 'A Dark Room' ⓒ옥상훈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최진한 안무가의 <A Dark Room>(2월 2-4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은 불안이 일상인 현대인들의 개인 공간을 그들의 내면세계가 표출되는 하나의 우주로 설정하여 초현실주의적 그래픽 아트로 가득 채우고, 반복, 변주되는 포즈 위주의 움직임으로 불안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정신병리적 행동을 연출한 작품이다. 그동안 개미, 토끼굴, 돼지왕 등 익숙한 텍스트에 등장하는 이종(異種)존재들에 비유하여 우울한 현대인의 자화상을 연출했었다면, 이번 작품에서 안무가는 스타일리시한 공간 및 움직임 연출로 내면의 우울한 정서를 가볍게 풍경화한다. 블랙박스 극장에 삼면을 메운 화이트 월은 공간의 폐쇄성을 연출하고,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쓴 알록달록한 전신보디수트는 강한 개별성을 가졌으면서도 익명화한 개개인을 나타낸다. 그리고 포즈, 포즈, 포즈로 이어지는 움직임과 스텝&턴의 변주로 리드미컬하게 흐르는 움직임은 불연속성의 시공간과 고립, 갈 곳 모르고 방황하는 소외된 존재를 그린다. 카세트 테이프와 별똥별, 조각난 석고상, 고흐의 의자, 브라운관 TV, 화려한 꽃병, 좌초한 선박, 비행선 등 빈티지 감성의 팝아트적 그래픽과 만화경을 보고 있는 듯한 그래픽 아트는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었고, 각 장면의 변화를 반영하는 사운드는 작품의 흐름을 조용히 보조했다. 마지막 장면에서 안무가가 머리부터 긴 천을 두르고 유령처럼 등장하며 미동도 없이 서있었던 장면은 오히려 처절한 절규처럼 느껴졌다. 에필로그 장면에서 에나멜 소재의 화이트 수트로 한껏 멋을 내고 등장한 사람들이 오히려 더 몰개성하게 보인 것도 컬러풀한 내면을 덮어버리는 무채색의 외면으로 해석되었고, 팝아트적인 비주얼이 즐거움을 주면서도 우울이 전염병처럼 번진 현대사회의 한 단면을 날카롭게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동어반복을 계속하는 움직임과 장면연출에서 주제적 깊이나 다이내믹이 부족하다고 지적할 수도 있겠으나 키네틱 아트적인 퍼포먼스였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허성임 안무 '토끼는 어디에 있나요' ⓒ옥상훈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허프로젝트 허성임 안무가의 <토끼는 어디에 있나요>(3월 1-2일,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는 그녀 특유의 최소한의 요소들을 변주하며 장면을 연결하고 확장시키는 에너지 넘치는 작품이다. 반짝이 의상을 입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하나의 동작을 반복하는 시그니처 요소들에 종이 박스 옷을 입은 토끼와 검은 그림자 놀이를 더하여 동화적으로 연출했다. 손전등으로 비추는 어두운 무대에서 인간의 어두운 욕망과 두려움, 그리고 순수를 갈망하는 이중성이 만들어 내는 진한 외로움의 랩소디다. 전작들에 비해 더 어두운 세계를 다루면서 동화적인 접근으로 이중적인 성격을 가진다. 이런 이중적 성격은 끝내 만나지 못하는 두 세계만큼이나 장면들 사이에 이어지기 힘든 어떤 틈을 만들고 의미는 탈구된다. 움직임은 전작들에 비해 내용과의 개연성이 약하고, 수행성보다 유희성이 두드러지며 발화는 힘을 잃는다. 그림자 놀이와 어쿠스틱 기타 사운드, 육성으로 부르는 노래의 감성적인 표현은 어두운 욕망과 순수라는 상반된 두 세계를 효과적으로 연결하지 못한다. 45분 정도의 작품인데도 짓다 만 매듭처럼 헐겁다.

안영준 안무 '애니멀' ⓒ옥상훈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PCPC 안영준 안무가의 <애니멀>(1월 17-18일,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폭력을 인간 내면의 동물적 욕망에서 원인을 찾는 작품이다. 안무에 디자인 개념을 도입하여 꼬리, 폭력, 축제라는 세 키워드를 중심으로 작품을 전개한다. 무대 뒤편에 둥그런 정글짐을 두고 권력의 사다리를 오르내리는 인간을 표현한다. 권력의 맛을 본 인간들에게는 꼬리가 생겨난다. 허리에는 줄을 묶어 인간과 동물의 공통점인 꼬리를 표현한다. 이 꼬리는 나중에 폭력의 도구로 사용된다. 디자인 개념을 도입한 초반의 움직임은 꽤 신선했다. 그러나 작품이 전개될수록 클리셰적 재현이 가득하다. 무용수들의 퍼포먼스는 뛰어나지만 식상한 주제에 단조로운 내러티브, 상투적 표현은 매력이 없다. 폭력의 표층이 아니라, 폭력이 발생하는 조건과 메커니즘에 대해 더 사유했어야 한다.

차수정 안무 '반가: 만인의 사유지' ⓒ옥상훈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순헌무용단 차수정 안무가의 <반가: 만인의 사유지>(3월 1-3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는 반가사유상을 문화재로서가 아니라 사유와 성찰을 잃어버린 현대인에게 반성을 자극하는 상징적 실체로서 제시한 아이디어가 신선했다. 이머시브 공연을 표방한 작품은 반가상이 선정에 든 상태를 이미지로 형상화하여 5개의 전시 공간을 만들고, 관객이 이동하면서 관람하도록 했다. 로비에서 제의적 퍼포먼스가 끝나면 관객은 무대의 가로선을 분할하여 만든 장면들을 지났다. 모래와 작은 돌, 바닷물결 동영상, 발목이 잠길 정도의 수조, 꽃과 욕조 등을 배치했고 무용수들은 그 앞에서 불보살들의 원력을 나타내는 무드라를 차용한 손 움직임이 눈에 띄는 동작들을 보여주었다. 관객들은 자유롭게 사진을 찍으며 관람할 수 있었다. 마지막은 객석에서 20여 분 정도의 퍼포먼스를 관람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각하는 몸과 현대의 존재방식에 대해 성찰의 시간을 갖기를 바랐던 안무가의 의도와 달리 관객은 ‘몰입’의 체험을 전혀 하지 못했다. 관객 체험에 대한 정교한 설계와 장치가 없는 전시관람 형식의 공연은 무모했다. 관람객의 수는 너무 많아서 성찰과 관조의 시간을 갖지 못했고, 관람해야 할 대상과의 거리는 턱없이 좁았다. 이동의 자율성이 결여된 확정된 관람 순서에 따라 이동했는데 장면들간의 콘셉트도 연결성도 보이지 않았다. 극장을 떠난 장소에서 그 장소성을 체험하는 공연이 아닌, 극장 내부에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는 형식으로 이머시브 공연을 만들 때에는 관객 체험의 목표가 분명해야 하고, 관객이 작품과의 관계맺기에 스스로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더 정교한 설계와 장치가 필요하다.

차수정 안무 '반가: 만인의 사유지' ⓒ옥상훈 (사진제공=한국문화예술위원회)

마지막 무대에서 보여준 깨달음이란 사건을 형상화한 다이내믹한 춤추기의 무대는 인상적이었다. 사실 사유, 즉 생각한다는 행위는 겉으로 보기에는 정적이나 매우 큰 에너지를 요구하는 동적인 행위다. 바다가 고요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매우 거칠고 사나운 것처럼 사유도 그와 유사한 양태를 가졌다. 그런 사유의 속성을 움직임으로 형상화하는 다이내믹을 보여주는 일반 무용공연의 형식이 더 어울렸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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