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용 다시보기-8] 한국 여성무용의 꽃 '부채춤'
[신무용 다시보기-8] 한국 여성무용의 꽃 '부채춤'
  • 황희정 무용이론가
  • 승인 2023.06.25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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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란꽃 부채로 만든 물결 무늬 (사진제공= 국립무용단)
모란꽃 부채로 만든 물결 무늬 (사진제공= 국립중앙극장 공연예술박물관)

[더프리뷰=서울] 황희정 무용이론가 = 한국무용 중 가장 인기있는 레퍼토리라고 하면 단연 <부채춤>이 떠오른다. 부채춤은 양손에 부채를 들고 추는 화려한 여성 무용으로, 독무와 군무 모두 인기 만점의 작품이다. 여러 안무가들의 다양한 부채춤이 있으며 국립‧시립을 비롯한 많은 민간단체들도 고유의 부채춤을 보유하고 있다. 1950년대부터 친선예술사절단, 문화사절단, 민속예술단 등 국위선양을 위한 세계 순회공연에 부채춤이 단골 작품으로 빠지지 않으면서 민속무용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다. 2014년에는 이북5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전통무용으로 분류해야 하는지에 대한 혼란을 주기도 했지만, 부채춤은 근대에 창작된 ‘신무용’이다.

접이식 부채는 멋스러운 우리 고유의 생활소품이기에 이를 들고 추는 무용은 과거에도 종종 있었으나, 대부분 한 손에 들고 추는 편부채였다. 재료는 합죽선 살에 종이를 붙여 부채면을 만들고 매‧난‧국‧죽 따위의 동양화를 그린 형태였다. 크기는 여성 부채의 경우 펼쳤을 때 부채 끝이 팔꿈치의 반 정도 오는 것이 선호되었다. 굿거리춤, 소고춤과 같이 가락이나 소도구의 이름을 무용 제목으로 붙이는 전통무용의 특성상 ‘부채춤’이라는 이름이 있을 법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아 부채가 주인공이었던 적은 없었던 듯싶다.

그렇다면 지금과 같은 큼지막한 크기의 쌍부채는 언제 누가 고안하였고 그걸 들고 추는 부채춤은 언제 시작되었을까?

쌍부채의 시작과 뽕할머니 부채춤

공식적인 부채춤의 초연은 1954년 서울시공관에서 열린 김백봉 개인 발표회에서였지만, 최근 연구에서 일제 강점기 권번에 쌍부채를 들고 추는 춤이 존재했었다는 장금도 선생의 증언이 있었다. 장금도 선생은 군산 소화권번 출신으로 재학시절 선배들의 쌍부채춤을 보았고 뒤이어 본인도 익히게 되었다. 그런데 이 부채춤은 독무가 아니라 2, 4, 6, 8명씩의 쌍으로 대무하는 형식의 부채춤이었다. 굿거리, 자진모리 음악에 맞춰 검무처럼 부채를 바닥에 놓았다 희롱하며 들고 추는 것으로 2015년에 복원되었다. 복원된 공연을 보면 합죽선에 동양화를 그려 넣은 전통 부채를 사용했다. 하규일이 궁중무고를 응용하여 사고무를 만들었듯이, 궁중검무에서 검을 부채로 대체하여 응용한 것으로 보인다. 공연기록이 없으므로 공식 초연으로 인정받지는 못하겠지만 이미 권번에서 쌍부채춤을 추었었다는 점은 의미 있는 발견이라 할 수 있다.

김백봉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월북한 최승희 문하에서 수학하며 쌍부채의 아이디어를 제시했으나 여러 정황상 실현하지는 못하였고, 1948년 최승희의 딸인 안성희가 추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최승희가 직접 추는 군무 부채춤도 등장하였고 유튜브에 그 영상이 공개되어 있다. 아이디어를 뺏긴 김백봉 선생은 월남 후 자신의 부채춤을 준비하였다. 공식 초연 2년 전인 1952년에 <소녀를 위한 소녀들의 부채춤>이라는 부제로 습작 부채춤을 발표한 바 있다. 독무 부채춤과 주역을 강조하는 군무 부채춤은 최승희부터 시작되었지만, <김백봉부채춤>은 공개된 최승희 군무 부채춤과 비교했을 때 움직임 구성과 성질이 현격히 다르다. 음악은 <창부타령>을 바탕으로 굿거리-자진모리-굿거리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김백봉부채춤>은 이전 부채춤과는 다른 독창적인 부채춤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고구려 복식의 초기 김백봉부채춤사진제공: 김백봉춤연구회
고구려 복식의 초기 김백봉 부채춤 (사진제공=김백봉춤연구회)
족두리에 삼불선 부채를 든 김백봉사진제공: 김백봉춤연구회
족두리에 삼불선 부채를 든 김백봉
(사진제공=김백봉춤연구회)

초기에 김백봉은 삼불선 부채를 사용하였다. 세 개의 불상이 그려진 것으로 무당이 춤을 출 때 흔히 쓰는 그림이다. 그림과 같이 족두리를 쓰고 저고리를 허리에서 동여매는 고구려 복식을 하였다. 첫 공연 이후 반응은 그리 열광적이지 않았으나 미국 국무부 공보원의 주목을 받으면서 문화원조를 받게 되었고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지며 유명세를 누리게 되었다.

서구인에게는 한국적이고 한국인에게는 서구적인 부채춤은 국위선양을 위한 각종 해외 공연에서 최승희와 비견될만한 찬사를 받았다. 그러던 중 1958년 홍콩 공연에서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던 중국 언론과 지식인들이 복식의 유사성을 들며 필시 중국에서 전해진 무용일 것이라는 주장을 하였고, 이에 대한 오해를 없애고자 1964년 캄보디아 공연에서 지금과 같은 당의 복식으로 바꾸었다. 1968년에는 부채 그림을 모란꽃으로 대체하였다. 딸이자 김백봉춤연구회 이사장인 안나경은 “1968년 멕시코 올림픽을 준비하며 바뀐 것 같은데, 정확한 시기는 어머니께서 기억을 못 하셨다. 무궁화를 그리려 계획했지만 샘플을 보고 마음에 안 들어하셨다. 고민하던 중 집 마당에 심어놓은 모란꽃을 보고 그려봤더니 마음에 쏙 들었다고 하셨다.”라고 모란꽃으로 바뀐 배경을 설명하였다. 현재도 모란꽃이 세 개 그려진 부채는 가장 많이 쓰이고 끝에 깃털을 달기도, 혹은 안 달기도 한다.

부채춤이 인기를 끌면서 <김백봉부채춤>과는 별개로 다른 안무가들의 여러 부채춤이 등장하였지만, <김백봉부채춤>은 빠르고 다양한 동작 구성과 세밀한 연결동작으로 가장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러면서 끝자를 재미있게 발음한 ‘뽕할머니 부채춤’이라는 친근한 별명을 얻게 되었다. 언제부터 뽕할머니 부채춤으로 불렸는지는 모르겠으나 필자가 들은 1990년대에 이미 그 별명이 상당히 퍼져 있었다.

나비‧꽃‧파도의 군무

독무로 시작한 초기 부채춤은 1950년대 후반 여학교와 민간단체에 군무로 빠르게 보급되었다. 여러 가지 모양을 만드는 부채춤 군무는 소규모에서 대규모로 점차 무원을 늘려가며 모양도 다양해졌다. 현재 부채춤은 나비‧꽃‧파도 등의 모양을 만드는 군무가 인상적이다. 이러한 성질의 군무는 1960년대 중반부터 기록을 발견할 수 있다. 1964년 박미봉무용단의 <신기루>에서 양손에 부채를 들고 꽃을 만드는 장면을 연출하였고, 1963년부터 군무 부채춤을 추기 시작한 리틀엔젤스예술단도 1965년에 꽃 모양을 만들었다. <김백봉부채춤>의 군무는 1968년 멕시코올림픽 때 나비‧파도‧꽃 등을 만드는 군무를 처음 선보였다.

꽃을 만들고 있는 리틀엔젤스예술단사진출처: 위키피디아
꽃을 만들고 있는 리틀엔젤스예술단 (사진제공=위키피디아)
인도 월드캠프 개막식에 등장한 부채춤 파도사진출처: IYF 홈페이지
인도 월드캠프 개막식에 등장한 부채춤 파도군무 (사진제공=IYF 홈페이지)

부채춤의 군무는 매스게임과 고전발레 군무를 연상시킨다. 매스게임은 인간을 개성 있는 존재가 아닌 하나의 픽셀로 보고 단체로 여러 모양을 만드는 집단 군무이다. 글자부터 여러 형상까지 모든 것이 가능하며 대규모일수록 만들 수 있는 종류가 다양하다. 집단주의‧권위주의를 강조하는 문화에서 시각적 홍보효과를 위해 사용하였다. 우리나라는 이미 고려시대 당악정재인 <왕모대가무>에서 무원 55명이 ‘군왕만세(君王萬歲)’ 또는 ‘천하태평(天下太平)’이라는 글자를 매스게임처럼 만들었던 적이 있다. 현대에는 한국전쟁 이후 1990년대 초까지도 대규모 행사나 학교 운동회에서 성행했다. 부채춤의 군무는 무원들이 픽셀처럼 여러 모양을 만든다는 점에서 이러한 성향에 꼭 맞으며 군사정권의 흐름과도 맥을 같이한다.

나비처럼 얼굴 옆에 부채를 받쳐 든 무용수와 군무 (사진제공=국립무용단)
나비처럼 얼굴 옆에 부채를 받쳐 든 무용수와 군무 (사진제공=국립중앙극장 공연예술박물관)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부채춤은 매스게임보다는 고전발레의 군무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부채춤에 ‘주역’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통무용은 주역과 군무의 개념이 느슨하다. 궁중정재의 경우, 가운데 주로 서는 무원이 있기는 하지만 군무와 같은 동작을 하기에 확연히 두드러지지 않고 민속무용 또한 집단적 성격, 혹은 기방에서 발달한 개인무 성향이 대부분이다. 주역과 군무로 나뉘고 군무가 주역을 받쳐주는 역할을 하는 위계적인 질서는 고전발레에서 볼 수 있다. 이때 군무의 역할은 주역을 돋보이게 하는 역할 외에 기하학적 도형이나 통일된 움직임을 질서 있게 보여주는 것이다. 부채춤은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부채춤이 고전발레의 형식을 의도적으로 차용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김백봉부채춤의 경우 독무가 시작이었고 이후 군무를 배경 삼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러한 구도가 형성되었다. 그런 구성으로 인해 부채춤은 독무로도, 군무로도 골고루 많이 추어지고 있다.

근대 여성무용

부채춤은 ‘여성무용’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전통춤은 남녀의 구별이 모호하였다. 궁중정재의 경우 같은 안무를 여성이 추기도 남성이 추기도 하였고, 민속 독무인 살풀이춤이나 승무 역시 성별을 가리지 않는다. 무성(無性)에서 여성 춤이 분화되기 시작한 것은 신무용부터라 볼 수 있다. 최승희의 무당춤, 보살춤, 장고춤 등은 영락없는 여성무용이다. 동작 자체도 여성적일뿐더러 남성이 추지 않는다.

부채춤 역시 마찬가지이다. 부채춤에서 연상되는 표현은 ‘하늘하늘’ ‘나긋나긋’ ‘향기로운’ ‘활짝 웃는’이 아닐까? 꽃같이 아름다운 여인들이 꽃같이 예쁜 한복을 입고, 부채꽃을 만드는 몽환적인 군무는 동양의 신비로운 오리엔탈리즘을 한껏 머금고 있다. 머리에는 족두리를 써 청초한 젊은 여인을 상징한다. 당의 아래 입은 치마는 빠르게 돌 때 항아리처럼 퍼지다 돌연 앉을 때는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며 무용수를 감싼다. 그 안에 들어앉은 무용수는 마치 연꽃 속에서 피어난 선녀와 같다. 팔꿈치까지 오는 커다란 부채는 상대적으로 여성의 얼굴을 작고 연약해 보이게 하는 시각적 대비효과도 갖는다. 가슴을 한껏 열고 하늘로 솟구칠 듯 가볍게 움직이며 부채를 너풀거리는 부채춤은 여성무용의 꽃이라 할 수 있다.

부채춤이 신무용으로서 특별한 이유는 이전과는 구별되는 발달된 기법, 혹은 발레적 기법을 구사한 영향에 있다 할 수 있다. 첫 번째 특징은 부채를 거꾸로 펴는 기술이다. 부채를 바깥에서 안쪽으로 펴는 것이 자연스러운 순서이지만 팔꿈치를 구부렸다 순간적으로 펴면서 그 관성으로 부채를 펴서 마치 부채가 안쪽에서 바깥으로 펴지는 것 같이 보인다. 관객을 향해 태연하게 웃으며 이렇게 부채를 펴는 동작은 마치 마술처럼 부채가 저절로 펴지는 것 같은 착시효과를 준다. 두 번째는 부챗살이 팔꿈치에 붙어 다닌다는 점이다. 물론 순간순간 떨어지기는 하지만 많은 시간 부챗살이 팔꿈치에 붙은 듯 하나 되어 움직이는 기술은 부채춤이 신비해 보이는 또 다른 요소이다. 세 번째 특징은 포즈로 연결된 움직임이다. 우리의 전통무용은 끊김 없이 곡선으로 흐르는 연결이 특징이고 초기 현대무용 역시 동작의 과정을 보여주는데, 부채춤은 마치 발레처럼 포즈로 연결되는 성향이 있다. 부채를 펴며 포즈를 취했다 다음 동작으로 연결되거나, 군무로 일정한 모양을 만드는 부분이 대표적이다. 그렇기에 사진으로 포착하기 좋은 장면이 많이 나오는 작품이다. 네 번째 특징은 2차원적 움직임이다. 잔걸음으로 좌우로 이동하면서도 부채를 양팔에 활짝 펴고 정면을 응시하는 것은 전적으로 관객에게 정면을 최대한 보여주려는 기법이다. 마치 3차원 동작을 2차원적으로 펼쳐놓는 듯한 기법이다.

부채를 양옆으로 활짝 핀 안병주 보유자사진출처: 대한민국예술원 홈페이지
부채를 양옆으로 활짝 핀 안병주 보유자 (사진제공=대한민국예술원 홈페이지)

부채춤은 의상과 음악으로 인해 전통적인 춤처럼 보이지만 그 면면을 분석해보면 이렇듯 여성 무용으로 뚜렷한 근대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재외교포, 국내 이주 외국인이 한국무용을 배울 때 부채춤은 언제나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부채춤이 반세기 이상 여러 방향으로 번식하며 퍼질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서구적 특징이 지금은 한국적 특징이 되었다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공연예술비평활성화 사업의 지원을 받아 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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