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무용 다시보기-1] 신무용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신무용 다시보기-1] 신무용의 현재적 의미는 무엇일까
  • 김영희 무용평론가
  • 승인 2023.05.07 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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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 올들어 신무용의 산 역사 두 분이 작고하셨다. 김문숙, 김백봉 선생. 1950년대부터 신무용을 일구고 가꾼 무용가들이 이제는 많이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그럼에도 신무용의 무용가들과 작품들은 20세기 중반 한국춤의 역사에 남아있다. 현재 무용계는 늘 새로운 주제를 탐색하고, 이 시대에 새로운 의미망을 던지며 창작의 수많은 시도를 하고 있다. 신무용도 1930년대 이래 많은 작품들을 무대에 올렸으며, 그중 수십년의 세월을 이겨낸 작품들이 있다. 우리가 막연히 '신무용'이라고 불러온 이 장르를 이제는 역사적, 현재적 맥락에서 되짚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이번 연재는 소장 무용학자들을 중심으로 좀 더 객관화된 안목과 21세기의 비젼으로 다루게 될 것이다. 그들의 안목과 진단을 통해 우리 무용계가 오늘 이후 새로운 춤의 영감을 길어올릴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 편집자.

1.

[더프리뷰=서울] 김영희 전통춤이론가 = ‘신무용’ 하면 <부채춤> <장고춤> <화관무> 등 색조가 다채롭고 무대 구도도 다양한, 화사하고 낭만적인 춤들이 떠오른다. 또한 1926년에 경성에서 모던댄스를 처음 공연한 일본의 신무용가 이시이 바쿠와, 그에게 수학한 최승희의 작품 <그들은 태양을 찾는다> <광상곡> <인도인의 연가>, 조택원의 <작렬하는 사색> <포엠> <프레파레이션> 등 초창기 모던댄스 작품들, 오리엔탈리즘이 반영된 인도풍이나 스페인풍의 춤들, 그리고 배구자의 레뷰댄스(Revue dance)와 <아리랑> 등 조선춤을 개작한 춤들도 신무용으로 불리었다.

대개 전자의 신무용을 ‘협의의 신무용’으로, 후자의 신무용을 ‘광의의 신무용’으로 구분하고 있다. 즉 협의의 신무용은 1933년 무렵부터 최승희, 조택원에 의해 모던댄스의 기법을 토대로 전통춤들을 재구성해 양식화한 소품들을 말한다. 이 신무용 작품들은 1930년대 후반 최승희의 세계일주 공연과 조택원의 유럽 체류 이후 확실한 정체성을 갖게 되었으며, 신무용이 퇴조한 1970년대 이후에도 김진걸, 황무봉, 은방초, 김문숙, 송범, 배정혜 등 신무용 세대 무용가들에 의해 추어졌다. 이 작품들 중 우수한 작품을 대한무용협회가 '명작무'로 선정하고 있다.

한편 광의의 신무용은 이시이 바쿠의 1926년 조선 공연을 기점으로 전개된 서양춤과 서양춤의 영향을 받았거나 조선춤을 각색한 춤들을 말한다. 모던댄스 뿐만이 아니라 발레, 레뷰댄스, 교육무용, 인도풍/스페인풍의 캐릭터댄스와 1980년대까지 신무용가들이 제작한 길고 짧은 무용극들도 포함된다. 1976년에 열린 신무용 50주년 기념 공연에서 당시 사단법인 한국무용협회 이사장이었던 임성남은 신무용 반세기를 돌아보며 “금년은 서구문화의 첨병인 신무용(新舞踊)이 우리나라에 첫발을 디딘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1926년 일본인 이시이 바쿠가 신무용이란 이름과 더불어 새로운 무용을 경성공회당에서 하게 되자...”(‘신무용 50주년 기념대공연’ 팸플릿)라고 했다. 사실 이전에 이미 학교무용, 사교춤(social dance), 서양 민속춤(folk dance) 등이 들어와 추어졌지만,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신무용의 기점으로 설정했던 것이다. 1970년대까지 무용계의 무용사 인식에는 근대(近代)의 개념이 아직 도입되지 않은 상황에서 1920-1970년대의 다양한 무용활동들을 묶어서 신무용으로 통칭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신무용이 근대춤과 동일 개념이라 할 수는 없다. 이 기간 전개된 전통춤의 흐름과 활동들을 포함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무용(新舞踊)이 1970년대까지 무용계 전체를 풍미했고, 신무용이란 용어가 무용계 전반에 걸쳐 사용되었지만, 현재는 한국춤에서 특정한 스타일을 보여주는 작품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그렇게 변한 이유는 20세기 한국춤의 역사적 흐름에서 찾을 수 있다. 새로운 장르의 춤이 등장하거나, 그래서 기존 장르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분명해지거나 희박해지거나, 또는 문화예술계의 사조에 따라 신무용의 영역과 위상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2.

신무용이란 용어는 일본에서 20세기 초에 창안되었다. 1904년 쓰보우치 쇼요(坪內逍遙)가 『신악극론』에서 ‘무용(舞踊)’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후, 일본에서 일본 전통춤을 개조한 춤이나 서양에서 도입한 모던댄스 등을 신무용이라 칭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조선에도 이 용어가 수입되었다. 후지마 시즈에(藤間靜枝)가 부산에서 신무용을 공연한다 했는데(『경성일보』 1925. 10. 29), 그녀는 일본 전통춤을 개조한 신무용을 춘 대표적인 무용가였다. 이듬해 3월에는 이시이 바쿠의 경성 공연을 기사화하며 ‘심각한 신무용에 매혹되다, 이시이 남매의 공연 성황리에 춤을 추다’(『경성일보』 1926. 3. 24) 라 했다. 독일의 마리 비그만(Mary Wigman)으로부터 영향받은 그의 모던댄스와 그 외 서양의 춤들을 신무용이라 칭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시이 바쿠를 따라 동경에서 모던댄스를 사사하고 있는 최승희의 근황을 소개하며 "조선이 낳은 어여쁜 신무용가(新舞踊家)로 멀리 현해탄을 건너 동경의 스테이지에서 그 이름을 날리는 최승희 양은 … "(『매일신보』 1926. 12. 29)이라 했다. 최승희를 신무용가로 언급했으니, 신무용 용어가 본격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조택원도 이시이 바쿠를 사사했고, 최승희와 조택원이 초창기에 발표한 작품들은 마리 비그만의 표현주의 모던댄스 뿐만이 아니라 달크로즈의 리드믹, 이사도라 던컨의 뉴 댄스, 이국취향의 스페인춤, 인도춤도 추어졌었다.

이후 신무용은 여러 춤들을 포괄하며 사용되었다. 조선극장의 기획공연에서 레뷰를 개량하여 신무용을 선보인다 했으며(『조선일보』 1929. 10. 29), 배구자의 <아리랑> <물깃는 처녀>를 조선풍조의 신무용으로 소개했다(『조선일보』 1929. 12. 1). 또한 조선일보사가 본사 사옥 낙성식 후 대강당에서 행한 공연에서 관현악, 째즈밴드 유행가, 테너 독창, 신무용, 승무, 촌극, 레뷰 등으로 독자를 위안한다고 했다.(『조선일보』 1935. 7. 2) 신무용은 서양춤 뿐만이 아니라 조선춤을 개작한 춤도 포함했으며, 다양한 공연예술물 중의 하나로 연행되었던 것이다.

최승희의 신무용 (『매일신보』 1931. 2. 6)
<작렬하는 사색> (『매일신보』 1934. 1. 27)
최승희의 <스패니쉬 댄스> (『조선일보』 1930. 10. 17)
조택원의 <헝가리아 광상곡> (『조선일보』 1932. 3, 25)

그런데 1933년 최승희는 일본에서 <에헤라 노아라>를, 조택원은 귀국 후 1935년 2회 발표회에서 <승무의 인상>(후에 <가사호접>으로 제목을 수정함)을 발표한 후 새로운 작품 양식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전통춤들에서 여러 모티브를 가져와 모던댄스 기법으로 안무하는 데 주력했고, 1930년대 말 최승희의 3년에 걸친 세계일주 공연과 조택원의 1년간의 유럽 체재와 공연을 통해 확고해졌다. “조선이 가진 폭이 넓고 고요한 움직임을 가미한다면 우리는 세계에 자랑할 새로운 우리 무용을 낳게 되리라고 믿습니다.”(『동아일보』 1938. 11. 18)라는 조택원의 피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창작된 최승희와 조택원의 신무용 작품들은 <장고춤> <무당춤> <초립동> <천하대장군> <신로심불노> <화랑의 춤> <아리랑 선율> <조선풍의 듀엣> <보현보살> <춘향조곡> <소고춤> 등이었으며, 조택원의 <부여회상곡>도 신무용으로 소개했다(『조선신문』 1941. 5. 17). 협의의 신무용에 해당되는 작품들이며, 서양춤과의 차별성이 분명해졌던 것이다. 이중에는 다음 세대 무용가들에 의해 이어지면서 현재까지 추어지고 향유되는 작품들도 있다.

최승희의 <무당춤>

 

조택원의 <춘향조곡> (연낙재 소장)
최승희의 <초립동>
조택원의 <소고춤> (연낙재 소장)

3.

일제강점기 후반에 서양춤과 조선춤을 개작한 춤까지 포괄하는 광의의 신무용은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다만 최승희가 월북을 했고, 조택원은 도미 후 귀국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신무용 2세대인 장추화, 김막인, 한동인, 이인범, 송범, 진수방, 김민자, 이석예, 김미화, 조용자 등이 최승희, 조택원의 작품들을 모방하거나 혹은 미약하게 창작활동을 이어갔다.

그런 가운데 신무용의 여러 갈래들 중 우선 발레가 전문화되기 시작했다. 해방 후 한동인, 이인범의 발레가 있었지만, 일본 하토리 시마다 발레양성소를 수료하고 <백조의 호수> 주역으로 공연까지 경험한 임성남이 1954년에 귀국했고, 임성남발레단을 창단하여 발레를 전문 영역으로 다지기 시작했다. 발레의 기법이나 양식이 고유했기 때문에 다른 춤에 비해 영역화가 빨랐을 것이다.

1962년에 창단된 국립무용단(단장 임성남, 부단장 송범)도 당시의 무용 장르들을 모두 포함하고 있었으며 무용가들은 장르를 넘나들며 출연했다. 송범이 안무한 <영은 살아있다>에 대해 공연평론가 박용구는 ‘한무, 모던댄스, 모던발레, 클래식발레, 오리엔탈댄스 등의 기법으로 뒤범벅된 안무’였다고 평했다. 뒤집어보면 각 장르의 춤에 있어서 전문성이 아직 확보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수 있다. 그런데 미국 마사 그레엄류의 현대무용을 수학한 육완순이 1963년 귀국한 후, 대학을 통해 교육과 공연 활동을 하면서 모던댄스 즉 현대무용을 확산시키며 독자적인 활동에 진입했다. 이렇게 발레와 현대무용이 전문화된 이후에, 발레를 추었지만 스페인춤도 종종 공연했던 주리와 조광이 1970년대에 스페인춤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국제 문화교류가 활발해지며 외국의 민족무용들이 국내에 직접 소개되기 시작했고, 발레와 현대무용의 독자화 역시 이들에게 자극이 되었던 것이다. 광의의 신무용 안에 포함되어 있던 이국취향의 춤들도 캐릭터가 분명해진 것이다.

발레, 현대무용, 스페인춤이 각각의 길로 접어들자 신무용에는 최승희‧조택원에 의해 양식화된 협의의 신무용만 남게 되었다. 마침 1970년대에 전통에 대한 재인식과 함께 전통춤이 위상을 되찾기 시작했고, 배정혜 김매자를 필두로 1970년대 후반에 한국춤에서 창작춤이 발흥하면서 전통춤이나 한국창작춤과는 다른 차별적인 양식으로서 최승희와 조택원이 양식화한 신무용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춤의 기법이나 주제의식이 달랐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창작춤이 무용계의 화두로 부각되면서 신무용은 크게 위축되었다. 국립무용단이 신무용 기법으로 1980년대까지 무용극들을 발표했으며, 신무용가들은 지난 시대의 춤을 회고하는 무대에서 간간이 공연했을 뿐이다.

4.

신무용 작품들이 과거의 춤으로 위치지어지고, 이 춤을 돌아보지 않게 된 것은 현대사회의 시대 흐름을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초립동> <부채춤> <장고춤> <무당춤> <처녀총각> <화관무> <봄처녀> <장검무> <산조춤> <사랑가> 등을 떠올리면 화사하고 명랑하며 낭만적이며 감성적이기도 하다. 또한 전통시대의 춤이나 스토리를 소재로 만들어졌기에 목가적 풍경이 그려진다. 여성무용수였던 최승희의 특성이 반영되어 여성미가 강조된 춤들도 있다. 이러한 신무용의 양식이 산업화, 도시화되고 있던 현대사회의 실상과 인간군상에 접근하지 못했고, 시대감각과 주제의식이 결여된 채 그대로 추어졌던 것이다. 꾸준히 창작된 크고 작은 무용극들도 거의 전설이나 역사 속 사건이나 설화를 작품화했었다.

김백봉의 <부채춤>

 

조용자의 <장고춤>
송범과 김문숙의 <사랑가> (ⓒ정범태)
김진걸의 <산조춤>

하지만 193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무용계를 풍미했던 신무용이었기에 고유한 예술적 성취를 20세기 중후반 우리 무용의 역사에 남겼음은 분명하다. 신무용은 고유한 기법을 남겼으니, 현대무용의 몸체를 기본으로 하여 상하체를 반듯하게 세우고, 시선을 높이고 가슴을 열며 팔 다리를 길게 뻗는다. 호흡의 중심은 하단전이 아닌 흉부에 있으며, 다양한 포즈들은 춤의 전개에서 중요한 포인트이다. 이는 전통춤과는 다른 기법인 것이다. 또한 관객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해외에 선보인 한국춤의 주요 레퍼토리이기도 했다. 그 시대에 꽃피웠던 신무용의 무용사적 의미와 미의식을 돌아보고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 전통춤을 기반으로 재구성되고 있는 신전통춤이 있다. 이 또한 시대 흐름에 따라 새롭게 등장한 춤의 조류이다. 외형으로는 신전통춤과 신무용이 유사한 듯하지만 태생이 다르고 춤의 기법이 다른 춤이다. 이를 비교해보는 것도 21세기 초반 현재의 흥미로운 관무(觀舞) 포인트가 될 것이다. 신무용의 주요 레퍼토리들을 새삼스럽게 들여다보며, 창작 배경이나 각각의 예술적 특징, 또 가능하다면 레퍼토리 이면의 이야기도 탐색해볼 수 있을 것이다. 신무용은 전통시대 이후에 지난(至難)했던 20세기를 통과하며 즐겼던 춤의 장면들이며, 그 잔영이 지금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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